김대중은 수령님의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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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토스 작성일10-12-26 17:26 조회1,88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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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은 수령님의 戰士
다음 글은 지난 2005년 월간조선 1월호에 기고된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의 충격적 고백”이라는 기사에서 발췌한 일부 내용이다. 그 중에 “김대중은 수령님의 전사”라는 구절을 여기에 옮겨 보았다. 이런 내용을 읽고서도 김대중을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공헌한 정치인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대한민국을 적화시키겠다고 날뛰는 김정일 집단에 동조하는 반 대한민국 세력임을 자인하는 것이고, 특히 전라도인들은 자신들이 신처럼 받드는 김대중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사실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는 일에 간접적으로 협조했었다는 자괴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김대중은 수령님의 전사’라는 북한 김정일 집단의 호칭에도 불구하고 그가 감히 대한민국의 호국영령과 순국선열들이 고이 잠든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고작 죽은 김대중이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미를 축소하려는 사람들은, 반역자 김대중을 국립묘지에 묻자고 떠들었던 민주당 패거리들과 이에 굴복한 이명박 정부가 합심하여 대한민국의 혼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렸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가 국립묘지로부터 추방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정체성 회복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이하 통전부 요원의 폭로 기사 중 발췌문)
“김대중은 수령님의 전사”
金正日이 비준한 2000년 6월15일 남북頂上회담 일정에 대한 통전부의 계획서에는 역사적 의미로 볼 때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첫 부분이 백지화 되어 있었다. 그것은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과 나란히 순안 비행장에서부터 숙소까지 평양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나가게 되어 있는 연도 환영행사였다.
金日成 사후 공개행사를 극력 피하는 金正日이라 신변보호 차원에서 삭제한 공백인 줄로만 알았던 준비 성원들은 행사 당일에 마치 사전 약속이라도 있은 듯 金正日의 리무진에 단독으로 오르는 金大中의 행동을 보고서야 계획서 공백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어느 한 술자리에서 임동욱은 취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번 남북 頂上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벌써 첫 만남에 있었다』
그 후에는 더 무게 있는 말들이 통전부 간부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수령님은 확실히 천리혜안의 예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金大中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미리 다 아셨을까』
頂上회담 후 몇 개월 지나서부터는 김용순, 임동욱, 안경호 같은 거물급들이 노골적으로 金大中을 「수령님의 戰士(전사)」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제일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敵國의 괴수를 「수령님의 戰士」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金大中,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아니면 북한 독재자의 충복인가. 金大中의 이름은 이미 그가 한국의 민주투사로 인정받던 1970년대에 통전부의 문건에 올라 있었다. 북한이 인물 흡수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된 계기는 1960년 4·19 혁명이었다. 金日成은 그때 통일의 호기를 놓쳤다고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4·19 혁명이 붉은혁명으로 승화되지 못한 요인은 그것을 주도할 만한 적색인물과 그 중심의 지하당이 없었기 때문이니 하루빨리 한국 내에 혁명정당을 구축할 것에 대한 과업을 주었다.
북한은 급기야 「통일혁명당」을 결성하고 마치 그것이 한국 내에 실존하는 지하당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미국·일본·유럽∇南亞에까지 그 지부를 설치하고 요란하게 선전했다. 밖에서부터 만들어진 이 유령조직을 안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통혁당」의 이름으로 출간된 각종 격문들과 인쇄물들을 한국에 살포하거나 침투시키는 것은 물론, 인물포섭과 지하당 결성에 총력을 다했다.
『金大中은 쌀을 달라면 쌀을 주고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다』
이를 위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돌격대로 내세웠다. 1950년대에 조직된 이 협의회라는 것은 조소앙, 안재홍과 같은 납북자들과 월북자들로 이루어진 순수한 이남 출신 집단이다. 이 협의회는 한국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함께 편지발송, 방송심리전 등 온갖 수단을 통해 한국에 남아 있는 인맥을 최대한 동원하여 對南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主업무로 삼았다. 지금은 「재북평화통일촉진위원회」로 격상시켜 그 명맥을 잇는 것과 동시에 북한의 위상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對南공작의 제1과제를 反정부 의식이 강한 인물 흡수와 지하당 구축, 左派단체 확산으로 정한 통전부는 1970년대에는 민주투사로 자처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에게 金日成의 친서와 공작비도 보낼 만큼 혁혁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지금도 통전부 기밀실에는 朴正熙(박정희)의 유신독재 반대를 부르짖으며 金大中이 일본에서 맹활약하던 당시 그 흡수공작에 적지 않게 공헌한 조총련 산하 비밀요원들에 대한 활동내용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朴正熙가 암살된 후 金大中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정국조종 전술案도 보관되어 있다. 1974년 8월15일 陸英修 여사 암살사건은 바로 이 전술案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작전이었다.
남북 頂上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 金正日은 『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 상대라 생각지 말고 무조건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하고 지시했다.
이렇게 이용 가치 있는 인물들을 하나둘 점거하고 1970년대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일어서는 운동권에도 「통혁당」 지하가 심어지자 여기에 힘입어 金日成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 통일방안」을 주동적으로 제기하고 朴正熙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다.
1999년 1월1일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에서 북한은 「안기부는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안기부를 해체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통일을 바라는가 분열을 바라는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고 전에 없는 어감으로 강조했다.
이어 통전부內 각 연락소들을 발동하여 일대 섬멸전을 벌이듯 안기부 공격 전략을 펼치도록 했는데 실지 그때 이미 내부에서는 안기부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정답이 나와 있었다. 아니 훨씬 그 전일지도 모른다.
(이상 기사 중 발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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