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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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2-23 21:56 조회1,846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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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학창시절 나의 애국심
1958년 봄 나의 아버지는 부전동의 혜화여자 중고등학교에 교감으로 취임하고 나도 좌천동에 있는 금성고등학교 주간으로 전학을 갔다. 그 뒤에 선생을 한두 번 뵌 적이 있었으나 청학동의 후생주택을 반납하고 서면 당감동 셋집으로 이사하고 혜화여고 사택에 살고, 교통부 꼭대기 범냇골로 이사하여 비로소 우리 소유 판잣집을 가진 이후엔 한 번도 만나 뵙지를 못하였다.
내가 1965년 5월 제대하던 해 2월에 병기학교 아래 27직접지원중대에서 군대 말년 생활을 보낼 때 선생을 못 잊어 군복을 입은 채로 영도 조선소 앞 선생 집을 찾았으나 주택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인근에 물어보았으나 선생이 이사 간 곳을 이웃에서 다들 알지 못한다 하였다. 성의 있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진 선생을 생각하니 세상에 뒤엉킨 지난 시절이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그 이후엔 선생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안타깝기만 하다.
1958년 이후 나는 학교에서 학생간부로 뽑혔다. 특히 고3 때는 대대장이라는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에 국가 경축일엔 시가행진도 아주 많아서 학교마다 맨 앞에 교기 태극기를 든 기수가 앞서고 그 뒤에 밴드부가 우렁차게 행진곡을 연주하면서 해당학교 대열 앞에 발맞추어 먼저 나가면 그 다음에 대대장인 내가 목에 흰줄을 꿴 호루라기를 걸고 어깨와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왼쪽 팔엔 대대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우리학교 학생들 앞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내디디며 소리 높여 구령을 붙이고 나갔다. 이때마다 나는 한찬식 선생의 나라 사랑하는 가르침을 항상 머리에 떠올렸고 6ㆍ25 전쟁 때 내가 본 우리 국군 북진 대열이 군악대 차량을 앞세우고 진군할 때의 기상을 떠올렸다.
또한 전방 우리 마을 신병 전투 훈련소에서 당장 내일 전투장으로 투입될 훈련병들이 완전무장한 상태로 우로 어깨총 하고 행군할 때 소리 높여 부르던 군인 아저씨들의 군가소리가 귀에 생생하여 우리학교 학생들 앞에서 구령 부치던 나는 구덕운동장에서부터 시청 앞까지 행진 시에 다리가 아프거나 조금도 지루한 줄 모르면서 당당히 걸어갔다. 전쟁터에 나가면서 군인 아저씨들의 부르는 군가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조국의 앞날은 양양하도다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아저씨들의 진군은 보무도 당당했지만 어린 나의 마음에 심어진 그때 사연은 눈물 나오는 우리 국군의 나라사랑 의지인 것이다. 그렇게 군가를 부르던 아저씨들이 그 이튿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어른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여라.!" 하면서 동네사람들과 어서 빨리 남쪽으로 피난 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뒷산너머 넘은들 바로 전장터에 투입되어 부상당하거나 장렬하게 전사해 후방으로 후송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 군인 아저씨들이 지금도 말없이 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된 자격으로 그 씩씩한 아저씨들의 돌격의 순간을 생각하면 어찌 눈물이 나오지 않으랴!
나는 6․25 동란이 지난 몇 년 후에 군인도 아닌 학생 때였지만 6․25 전투장 한가운데서 아저씨들이 생생하게 나라 지키는 모습을 직접 보고 들었기에 나도 아저씨들처럼 나라 사랑하는 기상이 남아 청년이 될 때까지 그렇게 컸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상징 태극기의 휘날림 뒤에 따라 나가면서 조국과 명예 그리고 위풍당당의 의지를 보람 있게 내세우겠다고 마음속으로 불태웠었다.
국립 현충원! 대한민국 우리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애국 영령을 모신 국립 현충원에는 군인역할이 무언지, 국방의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나의 국가와 애국이 무언지도 모르는 매국노 같은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방자하게 얼씬거리며 함부로 드나드는 그런 장소가 절대 아니기에 그런 사람들은 현충원에 입장시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도 가진다. 이는 6․25 참전자들 모두와 애국 혼이 불타는 우리 국군들에게 커다란 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1957년 말에 빼놓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아미동 판잣집이 갑자기 철거된 뒤 엉성하게 세워진 텐트 안에서 원고가 빗물에 적셔지면서까지 잉크펜촉으로 원고를 쓴《국난사개관(國難史槪觀)》이 <범조사(凡潮社)> 간행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내 아버지가 6ㆍ25 이후 월남한 뒤 쓴 최초의 역사책이다.
그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국역 완역본《삼국사기》(선진문화사), 《고려사》등도 완역본을 내었고 이후 한학자로서 고등학교 한문 검인정 교과서를 직접 써서 그 책으로 서울 보성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국학자로서 명가의 가훈 등 많은 책을 저술, 출간하여서 후학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아버지는 이후에도 국립도서관에 가서도 한문서인 고전 중 번역하기가 어려운 책들만 골라서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번역하는 학문적 열성을 평생 동안 가졌다.
학자들이 나의 아버지에게 한학을 문의하고 때로는 배우러 왔을 정도니 아버지의 학문적 깊이를 새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여담이지만 나는 자식 된 도리로 6ㆍ25 뒤 아버지를 다시 만난 후부터 아버지가 기록하고 아버지의 글씨가 담겨진 종이나 원고지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지금껏 소중하게 보관해 오고 있다. (계속)
댓글목록
正道님의 댓글
正道 작성일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조국의 앞날은 양양하도다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그 분들의 애국魂 내 살아.
기리고자 가슴에 담슴니다..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 http://www.gayo114.com/p.asp?c=12485274389 ← 클릭하시오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
제목: 아내의 노래
가수: 沈 蓮玉
앨범: 옛노래 스페셜 No.93 - 손영옥,심연옥,오정심 외
가사: hahahoho님제공
1.님께서 가신 길은 빛나는 길이옵기에, 이 몸은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었소. 떠나시는 님의 뜻은
등불이 되어, 바람 불고 비 오는 어두운 밤길에도, 홀로 가는 이 가슴엔 즐거움이 넘칩니다
2.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 손수건 손에 들고 마음껏 흔들었소. 가신 뒤에 제 갈 곳도
님의 길이오. 눈보라가 날리는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처럼 님의 행복 빛나소서
ㅡ ㅡ ㅡ 동란 기간 중이던 1952년도 발행. 兪 湖(유 호) 作詞 / 孫 牧人(손 목인) 作曲 ㅡ ㅡ ㅡ
★ 학도 호국단 대대장을 하셨었군요! ^*^ /// Excellent! Sir, viice middle school master! Over! /// ^*^
음악이 않 들리면 comment 주세유! ,,.
正道님의 댓글
正道 작성일메리.크리스마스~~`☆___☆ Merry Christmas 즐거운 성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