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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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2-21 10:19 조회1,83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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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막내 여동생 선옥이의 출생
나는 그 때 신문배달을 하면서 첫 봉급을 탄 것으로는 할머니와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양말을 사드린 생각이 나고 내 몫으론 두툼한 비닐로 만든 비옷 하나와 유진(柳津)이라는 이가 지은《영어구문론(英語構文論)》이란 책을 샀는데 다 낡아 누르스름한 그 책은 지금도 내 책장에 꽂혀 있다.
영어구문론이란 책을 보면 나는 당시의 할머니 생각이 또 난다. 할머니가 새벽 3시만 되면 나를 깨우던 생각이 난다. 지쳐서 늘어진 손자 발목을 잡고 흔들면서 나갈 시간이 되었다고 어서 일어나 준비하라고 깨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순순히 대번에 벌떡 일어난 적이 거의 없다. 더 자고 싶어 신경질을 내고 엎드리고…… 할머니는 새벽에 나를 깨울 때 잘못한 것 없으면서 매일 새벽 손자에게 신경질만 받았다.
신문배달은 어른이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고 내가 고집을 피워가면서 우기고 세상 공부를 하겠다고 대든 일이었는데 새벽 나는 단 한 번에 벌떡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렇게 의지가 약한 짓만 내어 보이면서 어른들에게 믿음직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해 음력 3월에 우리 집에 또 한 번의 경사가 났다. 사랑하는 막내 여동생 선옥이가 건강하게 태어난 것이다. 피난생활 중 가장 안정이 되어가는 시기에 태어난 셈이다. 부산시 영도구 청학동 후생주택 27호 9평 되는 집에서…… 이로써 우리 가족은 여덟 식구가 되었다.
나와는 열여섯 살 차이로 막내의 큰 아들이 대학에 다니다 지금 군복무를 다 마치고 복학하여 면학중인데도 우리 아버지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때문인지 지금은 큰 오빠인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여 나에게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부려가면서 대하는 것 같다. 막내니까 그렇겠지!
내 일생 중 사춘기가 넘어가려는 아름다운 꿈 많은 시기에 여동생 선옥이가 피난의 고생스러운 삶 속이지만 항도 부산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6․25의 폐해가 무언지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난 것이다. 온 가족과 이웃들이 동생의 출생을 기뻐도 하였고 많은 축하도 해 주었다. 바다경치가 아름답고 집 주위 동산에 온갖 꽃을 가꾸어 놓은 곳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선옥이는 글을 잘 쓰고 특히 시를 잘 짓는다.
85. 한찬식 선생님
야간 고등학교 1학년 때 잊을 수 없는 또 한분의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깊숙이 심어준 한찬식(韓讚植) 국어선생이다.
한찬식 선생은 얼굴색이 검붉고 곱슬머리이고 얼굴이 아주 둥근 형이었으며 키가 작지만 다부진 분이다. 여러 차례 국어선생님이 자주 바뀌던 어느 날 국어시간에 한찬식 선생이 우리 교실에 들어왔다. 첫 분위기가 좀 서먹서먹한 표정으로 교단에 섰는데 선생은 교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우리들에게 조용히 그리고 직접 자신의 소개를 존댓말로 하였다. 억센 함경도 사투리를 썼는데 목소리는 나직하였다.
1ㆍ4 후퇴 시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고 다른 고등학교에서 있다가 전근하였다 하면서 교실 안의 25명 정도 남녀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반갑습니다” 하였다. 선생의 첫 수업이 끝나자마자 대뜸 선생 별명이 학생들 입에서 튀어나왔다. ‘다마내기(양파) 선생님!’ 얼굴이 너무 동그래서 붙여 드린 선생의 애칭이면서 구분 수단의 암호가 정해진 것이다.
학교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은 야간수업이 끝난 다음 희망하는 학생들 몇을 데리고 별도로 글짓기를 지도해 주었다. 학생들이 지어온 시를 손수 교정도 해 주었고 또 내용의 앞뒤를 다시 정리해 주었다. 밤늦은 이때의 사제지간의 대화는 너무도 순수하였다.
나는 새벽부터 나가 신문배달을 하고 야간학교 수업이 끝나면 일주일에 한 번씩 글짓기 모임을 늦게까지 하고 부지런히 통금이 되기 전 귀가하는 이런 식으로 지냈다. 선생님은 자진하여 그 옛날에 지금으로 말하면 특활지도를 한 셈이다.
얼마 있다가 우리들은 ‘강(江)’이란 주제로 시를 써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그 때 내가 제출한 시의 내용이 모두 생각이 나지 는 않지만 그 내용 중 ‘깊은 강물’을 묘사하는 단어로 ‘물심으로 젖어든다’란 표현을 하였는데 내가 써 놓긴 하였지만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선생은 내가 지은 시를 천천히 낭송하더니만,
“이 시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쓴 시 같아요.”
그리고
“물심이란 말은 찬수 학생이 만들어낸 새로운 말 같아요.”
하면서 엉성한 나의 시를 아주 소중하게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지도해 주는 것이었다.
선생은 글짓기 지도를 통하여 한 학생 한 학생의 개성을 다 인정하고 어린 우리들의 인격을 대접해 주었다. 선생 댁은 영도 조선소 앞이었는데 나의 집으로 가는 길목 중간에 살았다. 선생과 나는 가끔 같이 걸어서 귀가한 적도 있다.
어느 날, 선생은 나를 불렀다.
“찬수야! 오늘 집에 갈 때 같이 가자”
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친구 상일이와 함께 선생을 따라갔는데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도중 남포동 골목으로 들어서더니만 어느 다방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당시엔 학생들이 다방 출입을 못하는 것이 관례라서 우리는 멈칫거리다가 선생을 따라 올라갔다. 그 다방은 시화전 행사장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당시는 문인들이 작품 발표 같은 것을 할 때는 다방을 빌려서 행사장으로 이용하였다. 선생은 나와 상일이를 시화전에 데리고 간 것이다. 그 해 남포동 다방에서 두 번 광복동 다방에서 한 번 이렇게 세 번을 간 기억이 난다.
한번은 선생이 지은 시도 액자에 걸려 있었는데 나는 유심히 읽었다. 선생은 작품들 앞에서 좀 떨어진 곳에 팔짱을 끼고 서서 작품을 감상했는데 나는 으레 시화전에 들어오면 선생 같은 자세로 작품을 감상해야 되는 줄 알고 같이 팔짱을 끼고 의미도 잘 모를 시를 읽으면서 괜히 고개를 끄덕대며 뭘 좀 안다는 듯이 어색한 몸짓으로 흉내를 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나는 선생 집엘 들렀다. 학교에 같이 가자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생 슬하에는 1남 3녀가 있는데 맨 위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부인은 선생보다 키가 크고 어린 내가 뵙기로도 아주 미인이며 좀 쌀쌀한 표정이었다.
맏아들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서 어른들이 읽어도 어려운 문학 책도 거의 다 읽었다고 하였는데 한 가지 탈은 친구 만나러 나가지도 않고 방안에 들어앉아 책만 읽고 내가 갔을 때에는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고 고집하여 걱정이 많이 된다고 하였다.
선생은 마루에 앉은 나에게 선생이 지은 시「와(蛙 : 개구리)」를 낭독해 주었다.
해방 전에 학교 선생을 하였고 김일성 치하에서 모든 것을 다 몰수당하고 온갖 학대를 받다가 1ㆍ4후퇴 때 집을 지키는 부모를 고향에 남겨 두고 LST 수송선에 가족과 함께 몸을 싣고 부산에 내려왔는데 월급도 몇 달씩이나 나오지 않는 피난민 야간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그리운 부모와 고향 그리고 친지들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통일이 오려나 하는 암담한 심정을 읊은 그런 시로 기억된다.
시의 제목이「와(蛙)」인데 뛰려 하니 지쳐 뛰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엎드려 초점 잃은 흐리멍덩한 눈망울만 뒤룩대는 그런 신세! 선생은 어린 나의 앞에서 시를 낭송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면서 나의 손을 잡고 흐느꼈다. 나도 눈물이 났다.
이「와(蛙)」라는 시에 대한 추억은 6ㆍ25와 함께 나에게서는 없어질 수 없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생님은 이 시를 당시 유명한 문학지《현대문학(現代文學)》에 세 번째 추천을 받기 위하여 보낼 시라고 하였다. 당시엔 현대문학지에 세 번 추천받으면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된다고 했다.
어느 날, 수업이 시작될 때 평소와 다른 상기된 표정으로 교단에 선 선생님은 현대문학지에서 세 번째 추천을 받았다 하였다. 우리는 모두 박수를 치면서 선생이 사회적으로 문단에서 인정받는 시인이 됨을 축하하며 기뻐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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