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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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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2-14 06:01 조회1,91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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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오신혜 선생님

1956년 5월 중학교 3학년인 나는 학교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특히 국어시간만 되면 집에 가서 조사해온 과제물을 발표해 가면서 선생님과 대화하느라고 신바람이 났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 국어를 담당하던 분은 오신혜(吳信惠) 선생님이었다. 개신교 신자이고 늘 한복을 입고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다녔다. 교과서와 지도서 그리고 출석부를 오른쪽 가슴에 꼭 안고 우리 교실로 오는데 걸음걸이가 조용하고 항상 발끝 앞에서 좀 떨어 곳을 내려다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용한 모습이었다.

개구쟁이들은 오신혜 선생이 교실로 다가오면 문 앞에서 저 멀리에서 오는 선생을 향해 “오시네! 오시네!” 하면서 선생을 놀렸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갈 때는 선생의 뒤에다 대고 또 큰 소리로 “가시네! 가시네!” 하면서 개구지게 외쳐대었다. 선생의 성함이 오신혜 이기에 우리는 발음 나는 대로 ‘오시네’ ‘오시네’ 하였던 것이다. 또 수업마치고 갈 때는 오시네의 반대어로 ‘가시네 가시네’ 하고…….

선생은 1930년대 말에 이미 문단에 등단해 소문난 여류 시조 시인이었고 수업시간에 우리 학생들을 자상하게 잘 지도하여 주었다. 특히 나와 상일이 우리 둘을 따로 불러 시조를 열심히 써보라고 하였다.

다음 글은 2004년 12월 성탄절 가까운 날에 피난시절의 오신혜 선생을 못 잊어 쓴 글이다.

 

그리워 뵙고 싶은 오신혜 선생님

선생님은 191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신 분이십니다. 함경도 영생여고를 졸업하셨고, 이화여전 문과를 중퇴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뵙게 된 건 6ㆍ25 동란 뒤 혼란스럽고 배고프고 가난한 피난시절 부산에서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는 부산시 보수산 서쪽 중턱의 청구중학교였는데 그때 선생님은 우리 학교의 국어선생님이셨습니다.

우리학교는 서울의 무학여고가 부산으로 피난하여 임시로 자리 잡았던 곳인데 수복 후 무학여고가 서울로 올라가고 남은 그 자리에 문교부에 인가도 받지 않은 사립학교가 문을 열어서 다녔던 학교였습니다. 교사는 양철지붕이었고, 얇은 나무판자로 막은 교실 벽은 그저 강한 바람이나 막을 정도라고나 할까요. 교실은 흙바닥에 낮게 말뚝 몇 개 박아 두꺼운 판자 올려놓아 못을 박으면 의자요, 그 앞에 좀 긴 말뚝 몇 개 박고 두꺼운 판자 깔면 책상이 고작인 그런 학교였습니다. 수업 중 한 학생이 급하게 용변 볼 일이 있어 나갈라치면 교실 중앙 쪽의 학생들 네다섯 명도 덩달아 일어나서 길을 내 주어야만 했습니다.

한 학급의 인원수도 일정하지가 않아 30명이 될 때도 있고 40명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한 학년이 1개 학급으로 여중, 여고, 남중, 남고하여 12개 학급이었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작은 학교이지만 당시는 산비탈 드문드문한 공간에 학생들이 마구 설쳐서 제법 왁자지껄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1955년도엔 제일 송도에 있는 피난민 학교인 함남 중학교 학생들과 합쳐져서 2개 학급으로 편성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들이 계시는 교무실도 꽤나 멀어 ‘땡 땡 땡’ 하고 시작종을 친 뒤 한참 있어야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셨습니다.

1956년 어느 봄날 3학년 국어 시간이었습니다. 교과서 내용에서 ‘아카시아’라는 시를 공부할 때인데 오신혜 선생님께서 이 시에 대한 배경 설명을 하시던 중 갑자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눈물 흘리시는 정도가 대단 하셨습니다. 안경 안으로 눈물을 조금씩 닦으시던 선생님께서 시간이 좀 지나니까 아예 안경을 벗고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멀뚱멀뚱 앉아 있던 개구쟁이들인 우리도 여러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좀 뒤에 앉은 덜렁대는 친구들은 킥킥대고 웃기도 하고, 선생님이 우시는 표정은 처음 보는 장면이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어색해 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저는 처음엔 왜 슬픈지 영문도 모르고 옆에 있는 친구와 마주보며 같이 저절로 눈물이 나서 손잔등으로 눈물을 몰래 훔치며 선생님을 쳐다보았습니다.

한참 지난 뒤에야 마음을 진정하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내가 여러분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니 참으로 미안합니다!” 하시면서 눈물을 흘린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어린 시절 입학하기도 어려운 명문학교에 시험을 치셨는데 떡하니 합격하셔서 어른들께서 너무 좋아하였는데, 특히 선생님 어머니께서 좋아했다고 하였습니다. 귀여운 딸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딸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뵙고 싶어 했던 5월 말 즈음인가 어느 날 학교를 개방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학부모들이 깨끗한 옷을 차려 입고 내방할 때인데, 여학생 급우들은 2층 교실에서 자기들 어머니 아버지가 이제나 저제나 어디쯤 오는지 창 밖을 흘끔흘끔 내다보느라 평소의 공부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이 울리자 부모님들께서 오시는 교문 밖으로 모두들 와 하며 달려 나가며 마중하는데 마침 학교 교정에 한창 핀 아카시아나무 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통에 그 향기가 교정 안팎 전체를 가득 채웠다고 하였습니다. 기뻐하시며 들어오시는 어머니와 손을 잡고 학교 이곳저곳을 안내하시던 그 때가 떠올라 그만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통일되기 전엔 다시 못 뵐 그리운 어머님 얼굴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난다 하며 감정에 북받쳐 아까보다 더 어깨까지 들먹이며 눈물 흘리시고 띄엄띄엄 흐느끼며 말씀하셨습니다.

“얼른 통일이 되어서 여러분들도 북에 두고 온 보고 싶은 분들을 하루 빨리 만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더 열심히 공부합시다.”라고 말씀하니 대부분 피난민 자녀들인 교실 안은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일가친척, 친구들, 즐겁게 뛰놀던 고향 뒷동산 생각들이 났던지 갑자기 아까보다 더 숙연해졌습니다. 모두 눈만 껌벅거리다가 한 친구가 소리 내어 훌쩍거리니 이 친구 울고, 저 친구 우는 바람에 분위기가 고조되어 교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어 킥킥대던 개구쟁이 녀석들까지도 아예 엉엉 소리 내어 콧물까지 흘려가며 울던 모습들이 생각납니다.

이제 저는 선생님께 편지를 올립니다. 뵙고 싶은 선생님! 그때 저희들은 선생님의 가르치심을 명심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잘하고 있습니다. 몇몇 친구들은 선생님을 본받고자 학교 교사가 되었고 또 교감, 교장도 하였고 교육장을 한 친구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저희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지요. 한번은 수업 중 뒷좌석의 친구들이 갑자기 싸움이 나서 서로가 주먹질을 하였는데 놀라신 선생님이 교단 위에서 “어머! 어머!” 하시고 쩔쩔매며 양손을 앞으로 올리고는 이쪽 보시고 저쪽 보시며 “어서 말려요! 어서 말려요!”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마침내 급우들이 말려 싸움이 그치자 선생님께서는 직접 달려가서 손수건으로 학생이 흘린 코피를 닦아 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선생님이 수업하시러 저 멀리서 교실로 오실 땐 철부지 제 친구들이 숨어서 큰 소리로 선생님 함자를 빗대어 ‘오시네! 오시네!’ 하고 짓궂게 놀려 드렸고, 수업 마치시고 오솔길 따라 교무실로 멀찌감치 내려가실 땐 선생님 뒤편에 대고 ‘가시네! 가시네!’ 하며 소리 지르고는 좋아라고 뺑소니치던 저희들을 나무라지도 않고 끔찍이도 사랑하시던 선생님, 저와 친구 상일의 어깨를 토닥여 주시며 시조를 매일 쓰는 습관을 가져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시던 선생님!

개구쟁이 한 친구가 출석 호명할 땐 뒷좌석에서 크게 네! 하고 대답하곤, 수업 중 뒷문으로 몰래 밖으로 빠져나가 교실 위쪽 운동장에서 우리가 공부하는 양철지붕에 돌멩이를 마구 던져 ‘꽈당 당’ 하는 소리가 요란할 때 한참 놀라셨다가,

“이게 무슨 소리예요?”

하시자 엉뚱한 급우 녀석이,

“아마 비가 오려고 천둥이 치는가 봅니다”

하자, 저희들은 “와!” 하고 소리 내어 웃었고, 선생님께선 창 밖으로 화창하고 맑은 하늘을 고개를 들어 천천히 내다보시며,

“그래요?”

하고 조용히 말씀하시면서 내색을 하지 않고 수업을 진행하셨던 생각도 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1939년에 문장(文章)지에서「수양버들」이라는 시조로 추천을 받으셨고, 1940년 시조「진달래꽃」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하셨지요. 지금도 선생님의 시조를 읽을 땐 마음이 소년처럼 되고 사물을 아름답게 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1966년 동아일보에 실린「김치찌개」라는 시조를 읽었습니다.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형상을 ‘복(福)을 복(福)을’하고 묘사하신 것을 보고는, 한복을 곱게 입으시고, 동그스름하신 얼굴에 머리를 곱게 빗으신 선생님, 오른팔로 교과서와 출석부를 가슴에 안으시고 고개를 약간 숙이시고 항상 상념에 잠겨 계시는 듯한 모습이 떠올라 뵙고 싶은 생각이 제 가슴에 가득했었습니다.

1967년엔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 다닐 때인데 충무로 입구 일본서적 취급점 문향서점 안에서 책을 고르시다가 그 옆에 서 있는 저를 알아보시고 “어머나! 찬수 학생!” 하시면서 제 이름도 잊지 않으시고 반가이 저를 부르셨을 땐 반갑고 감사한 마음에 밤잠을 설칠 정도로 감격했었습니다. 며칠 후 선생님이 계시는 후암동에 가서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 동안의 말씀을 많이도 듣고 또 저도 선생님에게 저의 지난 이야기도 많이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연락이 뚝 끊어져 이제 저는 제자 구실도 못하고 이렇게 선생님! 선생님!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기만 합니다. 이제 선생님께서 계신 곳을 안다면 불원천리하고 달려갈 터인데 답답하기만 합니다. 내년엔 94세가 되실 선생님! 이제 저도 선생님 앞에서 부끄럽게도 온통 흰 머리인 제자가 되었지만 앞으로도 선생님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운 선생님, 뵙고 싶습니다.

즐거운 성탄 맞으시길 바라며 선생님께서 평안하시길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3년 1월 4일 김찬수 올림

 

전후 엉성한 피난학교에서 있었던 사제지간의 추억담이다. 선생은 청구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도 부산에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다. 선생은 대청동에 있는 관북교회(關北敎會) 내에 살았는데 선생의 남동생 오건(그 이후 오늘의 서울 한양대학교가 설립되기까지 그 대학에서 큰 책임을 맡으신 분) 교감선생과 남편 되는 유재권 선생 등 일가친척 모두가 개신교를 믿는 진실한 가정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선생은 문장(文章)지의 추천 시조 작가이며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내용을 가진 시조 작에 정진하였다.

1939년 문장지에 추천된 선생의「수양버들」이란 시조와 1940년 동아일보에 당선된 두 편의 시조 즉,「진달래」와「이슬」을 우리들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주어 공책에 놓치지 않고 적어두었다. 특히《한국 기독교 문학선집》1권에 실린「주님을 찾아」를 읽을 땐 선생의 깊은 그리스도 신앙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양버들

 

머리를 땅에 닿게 허리 굽힌 수양버들

겸손(謙遜)한 어느 분의 아름다운 넋이드뇨

저절로 남을 높이어 몸 굽히고 싶노라

사시(四時)로 머리 숙여 묵도(默禱)하는 수양버들

실수(失手)를 참회(懺悔)하는 어진이의 넋이드뇨

저절로 온갖 잘못을 뉘우치게 되노라

저로서 저를 높여 잘난 체 뽐내는 이

어둠과 슬픔 주는 죄 많은 이들이여

한나절 수양(垂楊) 아래서 묵상(默想)하여 보시라

 

 

 

주님을 찾아

 

님 찾아 가는 길에 가시도 많사오나

내 숱한 허물을 그 가시로 찔러내며

생명의 문을 향하여 좁은 길을 가노라

어두운 비탈길에 비바람은 무삼 일고

믿음의 작은 등불 깜박깜박 꺼지노라

두어라 몇 번이라도 다시 켜서 들리라

지지리 흙탕길에 때 묻은 이 옷자락

눈물로 적시고 그 보혈로 씻으면서

거룩한 빛이 빛나는 님을 찾아가노라

 

선생은 함경남도 단천에서 개신교를 믿는 집안에 태어났다. 소싯적부터 개신교의 신앙 분위기가 좋아 인근 모두가 열심이었는데 해방이 되고 갑자기 교회의 문을 닫도록 한 김일성 우상화 통치 이후 신앙의 자유를 잃고 억눌려 있었다. 국군의 진격 이후 종교인들은 다시 밝은 세상을 만나 기뻐하는 것도 잠시, 1ㆍ4 후퇴 때 신앙을 지키고자 신자들은 모두 배 편, 기차 편, 도보로 가족 모두를 이끌고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대한민국 품안으로 남하하게 되었다. 낯선 객지 부산 등에서 통일의 날만 기다리고 그리는 이북에 잔류한 가족을 그리다가 한숨으로 이제껏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김일성 공산 사회주의는 우리 민족에게 몸서리쳐지고 무서운 사상이었던 것이다. 일제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가진 한국의 국민들은 전국 곳곳에서 신앙을 굳건히 지켰는데 김일성 우상화 통치엔 모두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계속)

댓글목록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자기가 존경하면서 기억하는 스승을 지닌다는 것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며, 행복이라하겠죠. ,,.
저도 비록, 짧은 군부 생활이었지만, 우수하고도 존경할만한 교관님들이 있읍디다요. ,,.

비록 같은 또래였지만, 제가 대위 때, 육군정보학교 戰鬪 序列班{전투 서열반, Order Battle}에 1976년도 경 3개월 보수교육을 가니 '고 태우' 소령 {ROTC # 5기생, 제주도, 서울대 졸업} : OB 교관!

 또, 육군보병학교 간부후보생 피교육 시절 讀圖法{Map Reading, 독도법} 교관 '한 시우' 대위님{갑종 # 157기, 중령 예편, 경북 영천 거주};
1974년도 대위 때, 고등군사반 전술학처 특수학과 '공중 기동 작전' 교관 소령 '박 길동'{갑종*};
1979년도 소령 때, 육군종합행정학교 '編成 軍需班(편성 군수반)' 보수 교육 시 '수리 부속품 대장' 교관님{소령, 갑종}; ,,.

또, 1967년도 간부후보생 시절에 육군보병학교 학생연대 체육과 소속의 '목봉 체조' 교관 '조 무웅' 대위님{갑종, 전남 광주 출신, 월남전에서 중대장으로 오셨는데, 후임 소대장에게 소대 인수 인계하고, 부중대장을 하면서, 귀국 말년에, 약 1달간 모심. 저를 보고 '1년 연장해서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귀국,,. 죄스런 맘과 비겁했었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도,,.}; ,,.

그리고 1966년도 충남 논산 연무대 ㅡ  '간부후보생 전담 훈련 중대 ㅡ 육군제2훈련소 제25훈련연대 제1대대 제1중대 중대장 '차 운홍' 대위님{현지 임관 출신, 2년전 서울 구 육본 전쟁 기념관에서 동기생 모임 시 제가 모셨었음, 월남에서 저희 대대 民事課長(S-5)로 邂逅(해후)!}! 그리고 區隊長 '권 혁택' 중위님{갑종 출신}!; ,,. +++++++++++++++ 평생 못 잊을 분들입니다. ,,. ++++++ 곁들여 말한다면, 훈련소 전반기.후반기를 모두 거친 후 막 바로 전남 광주 육군보병학교로 열차를 타고 이동하여 송정리에서 내려 차량 이동하는데, 그 때 우리 훈련병 간부후보생들을 인수하여 본격적인 간부후보생 교육을 시키기 시작하던, 육군보병학교 학생연대 소속의 훈육관(訓育官)님들! ㅡ ㅡ ㅡ '정 선교'대위님{육사* 16기?}, 제1구대장 '신 순채'중위님{갑종}, 제2구대장 '김 만복' 중위님{육사# 21기?}. 제3구대장 '배 문한' 중위님{육사 * 20기? 임관 후 이적 지까지 한 번도 뵙지 못함}, 제4구대장 '최 돈걸' 중위님(육사 * 21기?}. 추후 교대되어지신 중대장 훈윤관 대위 '배 의두'님{갑종, 전남 광주 출신}, ,,.
사명감과 열정으로 피교육자 교육에 임하셨던 분들로 기억! ,,.  평생 잊지 못하죠! ,,.
++++++++++++ '김 찬수' 교감님! 제가 춘천중앙도서관에서 위 '내가 겪은 6.25' 책자의 겉 표지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봤던 건 아마 제 착오역던 것 같읍니다. 교감으로 적힌 걸,,. 서강대 수학과 졸업, 고교 수학 교사하셧던데,,. 고려대 대학원 경영학과도 수료하시고,,. ^*^
+++++++++ '김 찬수'님의 옛 스승 존경하시는 맘을 가짐은 오늘날 누구에게나 모범이겠지요. '지'박사님께서도 '나의 산책 세계'에서 선생님을 기억하시는 글이 있었지만 역시 같군요. !! ,,. 존경합니다. ^^*
그럼,,. 餘 不備 禮, 悤悤.

正道님의 댓글

正道 작성일

글 읽어 내려가다 보니 국민학교시절(초등학교) 선생님에게 오늘은 전화라도 한통 해 드려야 겠습니다..항상 부족한 삶.이다보니 선생님에게 넘 무관심했던것은 아닌지. 자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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