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80)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2-09 13:34 조회1,884회 댓글1건관련링크
본문
75. 장갑송 아저씨의 피난 이야기
1955년 후생주택에 우리보다 조금 늦게 이사 온 장갑송(張甲松)이란 분이 있었다. 이 분은 거제도 피난 시절에 우리 집과 친하게 지냈고 거제도에서 아버지가 양양에서 내려온 아들을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영에서 나가 살다가 온 가족을 데리고 거제도 우리 집에 찾아와 나를 보고 며칠 묵어 간 이다. 키가 크며 안경을 끼었고 곱슬머리였는데 항상 호탕하게 웃어 모든 이들이 다 좋아하는 멋진 아저씨였다. 또 아저씨는 약주 마시기를 아주 즐겨했다.
아저씨는 함경북도 성진이 고향인데 장씨 가문의 3대 독자였고 선대부터 가세가 넉넉하여 대부호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 지역에서는 지체가 있는 집안의 장손이다. 함북에서 가장 입학하기가 어렵다는 나남의 북 경성고보를 나왔고 사회봉사 활동을 많이 했다. 해방이 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김일성 치하에서 이 댁도 모든 토지는 몰수를 당했다. 그리고 가진 자의 집안이라고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아저씨 부부의 가족은 부모와 딸이 넷이 있었는데 갑자기 배급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초라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간을 이렇게 구박을 당하고 집안에서 일하는 머슴들과 소작인들이 큰 목소리를 내면서 베풀어준 은혜도 아랑곳하지 않고 외면했다. 공산주의를 내세운 김일성 패거리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느라고 그들이 오히려 주인을 구박하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서 설쳐대니 갑자기 어이없게 뒤바뀐 세상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댁은 대대로 인근에 많은 덕을 베풀어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한 집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우상화 작업엔 이 댁이 덕 베푼 은혜들이 오히려 눈엣가시가 되어 이유를 불문하고 감시와 핍박의 제1호 대상이 되었다. 부자이고 학식을 많이 갖춘 것 또한 그들이 아저씨 집안을 핍박한 큰 이유였다. 이북 도처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니 모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고 삶의 의욕을 잃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잘 살려면 김일성 무리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무고한 이웃을 그들과 같이 난도질하듯이 밀고하고 뒤엎고, 공산주의자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만 되는데 정신 똑바로 박힌 순박한 국민들이 갑자기 그런 행위가 나올 수 없지 않은가? 다만 공산주의자들에게 세뇌당하고 또 억울하다고 스스로 생각했거나 게을러 남의 잘되는 것만 보면 비위가 상하고 긁어내릴 놀부 심보 같은 자들만 체면 불구하고 나대는 것이었으리라. 보통 사람의 처세로는 배워 보지도 못한 새로운 인간상으로 갑자기 살라 하니 보통 심장으로는 그 짓을 절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산치하에서는 이렇게 비정하고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짓거리로 김일성 우상화작업이 시작되었다. 하루아침에 사람의 관계가 훌러덩 뒤바뀐 것이다. 공산주의 분배 소유의 개념을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한답시고 우격다짐으로 잘 사는 사람들의 재산이나, 저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사람들의 재산을 인민재판이란 엉터리 방식으로 설치면서 우격다짐으로 빼앗았다. 빼앗긴 사람들은 이북 사회에서 하루아침에 적응 못하는 무능력자로 전락케 하였던 것이다.
이북에 들어온 공산주의란 게 이렇게 엉터리였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것이었다. 매일 저녁 동네에서 자아비판 회의를 했고 나 정도의 어린아이들도 모두 모여 새로운 사회질서 흉내를 내기도 했다.
나도 6ㆍ25가 나기 전 1949년 겨울에 고향에서 동네에 또래와 공산당 앞잡이 집안의 형들이 개울말로 모이라고 하여 갔더니 형들이 어른들 흉내를 내면서 어린아이들은 뜻도 모르는 자아비판을 하라 했다. 자아비판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 방식을 몰라 쭈뼛쭈뼛 하니 그들은 나에게 “나는 반동분자 아들이다”라고 외치라 했다.
두 차례나 소리치니 다음엔 나에게 시렁 위에 얹어둔 잘 익은 호박을 내려 머리 위에 올려놓고 구석에 벌을 서고 있으라고 해서 무거운 호박을 머리에 이고 찔찔 울고 서 있던 생각도 난다.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의 지목을 받았으니 나는 소위 저들이 말하는 ‘반동분자의 새끼’라는 것이다.
6ㆍ25 때 남조선을 해방시키러 나간다고 큰 소리 쳤던 인민군들이 패잔병이 되어 내륙의 우리 마을 뒤쪽으로 쫓겨서 북쪽으로 도망들을 치니 억눌렸던 사람들이 얼마나 생기가 났었겠는가? 얼마 있지 않아 국군이 만주 벌판에서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 때문에 한 20여 일 해상으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진격한다고 하면서 남자들만 모두 피하라고 하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산가족의 비극이 더욱 더 심하게 이루어진 동기가 되었었다. 대부분 아내와 어린 자식들은 집을 지키는 노인들 품에 남겨두고 먼 산골에서 쏘아대는 포격소리를 들으면서 장정들을 중심으로 허둥지둥 보따리를 싸들고 대책 없이 피했다.
장갑송 아저씨의 부인 되는 신동룡 아주머니는 회령 보흥(普興) 여학교를 나오고 소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가 해방을 맞은 그 동네 일대에서 소문난 재원이었다. 아저씨가 성진에서 먼저 흥남부두로 이웃 청년들과 내려가다가 주변을 보니 모두 온 가족들을 끌고 함께 가는 광경에 놀라 일행을 벗어나 다시 성진 쪽으로 치달아 왔다.
아주머니는 어릴 때부터 장갑송 아저씨 댁에서 은혜를 입고 살았던 조덕송 아저씨의 보호와 도움으로 아주머니는 어린 딸 명숙이만 데리고 위로 있는 세 딸 성옥, 성진, 성숙이는 집에 남은 할아버지(당시 46세)와 할머니(당시 48세)께 남겨 두면서 잠시 뒤에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을 하고 피난길을 떠났다.
성진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남행열차 안의 터져나갈 정도로 많이 탄 피난민들 사이에 화물칸에서 간신히 매달려 올라타고 어린 명숙이는 조덕송 아저씨의 양팔 위에서 떠받혀서 희생적인 보호 아래 퇴저라는 곳으로 내려가서 머물렀다. 다시 어린 명숙이를 조덕송 아저씨가 업고 눈보라가 몹시 치는 길을 50여리나 걸어서 흥남부두로 가다가 아주머니는 남편 장갑송 아저씨와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서 부두에서 배를 타려고 3일을 초조히 기다렸다 하였다.
12월이 다 지나갈 혹한기 무렵 살을 에는 모진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부둣가에서 함경남북도 주민 수만 명이 몰려들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겠다고 하는 아우성 속에서 하늘의 도우심인가 군함 수송선도 아닌 미국 상선에서 피난민 실으라는 소식이 있자 너도 나도 이제는 살았다 하면서 물건을 실어 끌어 올리는 그물에 쌀자루 포개듯 많은 사람들이 차곡차곡 배에 실렸다 한다. 갑자기 몰려든 군중 속에서 잠깐 사이에 서로의 손을 놓쳐 가족을 여기저기서 불러대느라고 아우성이었다고 하였다.
흥남부두에서 서로 먼저 배에 타겠다고 발버둥치는 피난민들의 아우성은 역사적으로 가장 비참하면서도 가장 희망찬 자유에로의 행진이었던 것이다.
벌써 인민군들이 흥남부두를 향해 포격을 가하여 흥남 항구 도시 시내 이곳저곳에 포탄이 터지고 아수라장인 지경이었다 하였다. 상선을 탈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먼 바다에 나아가 머물러 있다가 사흘 뒤엔 다시 고향으로 갈 줄 기대한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인민군과 중공군의 포격이 심하고 또 위세가 대단했다. 이제는 내 동네 가기는 글렀다 하고 그래서 부평초처럼 먼 바다에 잠시 머무르기는커녕 배가 쉬지 않고 밤낮으로 남쪽을 항해하여 도착한 곳이 부산이라 하였다.
아저씨 가족은 다시 거제도로 통영으로 그리고 부산 영도 청학동으로 객지를 헤매 옮겨 다니면서도 고향에 남은 부모님과 딸 셋 때문에 평소 명랑한 아저씨가 눈물을 흘릴 때면 나의 부모를 비롯하여 온 가족이 안쓰러워서 같이 손을 붙들고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우리 국군이 어서 북으로 진격하여 다시 이북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앞서 1953년 7월 28일에 휴전이 조인되니 그 이후 피난민들은 한 가닥 희망마저 다 날아가서 골목마다 저자 거리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고 이리비척 저리비척 하는 모습이 비일비재하였다. 피난민들의 판잣집 집집마다 짜증내는 소리와 울음소리와 한탄소리가 끊이지를 않았었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서 이북에 두고 온 부모 자식을 그리다가 시퍼런 바닷물로 뛰어들어 아까운 자기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도 비일비재하였던 때가 휴전조약 조인 이후였다고 한다. 장갑송 아저씨는 영도 청학동 바닷가에 두 딸 명숙, 경숙이를 데리고 가끔 나가서 가지고 온 술병을 갯바위 위에 놓고 한잔 들고 바다를 내다보고 또 한잔 들고 바다를 내다보면서 명숙에게,
“얘야! 이북에 있는 네 언니들 이름이 무어지?”
“성옥이, 성진이, 성숙이지?”
하고 슬프게 말하곤 했다. 지금은 세상 떠난 그리운 아버지를 회상하는 59세 된 남쪽의 그 집 형제자매 중 맏이인 명숙이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땐 같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 아저씨는 슬하에 딸 경숙이와 아들 철이와 호 이렇게 셋을 더 두고 큰 무역회사 책임 간부로 활동하면서 지냈다. 배에서 사용하는 물품들을 세탁할 일이 생기면 인근 세탁업소에 맡기지 않고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일거리를 주어 우리 온 가족은 여러 차례 배에서 나오는 빨래거리 일을 열심히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긴 커튼에 풀을 먹여 침대 이불 호청 세탁물의 양귀 끝을 잡고 어머니와 나 또는 할머니와 내가 멀찍이 떨어져 앉아 호청을 대각선으로 세차게 잡아당기면서 세탁한 커튼이 바르게 늘어나도록 했었다.
내가 신혼 초 춘천에서 이불 호청을 풀 먹여 길게 늘어뜨리고 멀찍이 떨어져서 호청 양귀를 대각선으로 해서 야무지게 잡아당기는 것을 아주 익숙하게 잘하는 것을 본 아내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의아해 하면서 너무 우스워서 잡아당기던 이불 호청을 놓친 일도 있었는데 내가 호청을 잘 잡아당기던 연유를 말해 주고는 둘이서 또 한바탕 웃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 댁 신동룡 아주머니는 지금도 나의 어머니와 절친한 친구이다. 학교시절이나 지금이나 항상 여류 활동가라고 할 정도로 생활력이 뚜렷하였다. 보흥 여고보를 나온 뒤 소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데도 열과 성을 다한 분이었다. 6․25때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씨와 초등학교 동창이라고도 했다.
일찍이 12세 되실 때 회령에서, 독일에서 함경남도 원산 옆 덕원에 설립한 베네딕토(분도) 수도회에서 파견된 힐라리오 수사 신부(그 뒤 힐라리오 수사 신부는 6ㆍ25가 나고 그해 10월 8일에 원산 형무소에서 김일성 일당에게 총살당했다. 1ㆍ4 후퇴 뒤 덕원에서 내려온 피난민의 증언이다)가 있는 천주교회에 다녔는데 사제관엘 처음 갔을 때 까만 건포도와 빵 굽는 기계가 참으로 잊혀지지 않는 추억거리였다 하면서 그 해에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학생 때 보흥여학교의 선생님 한분으로부터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민족 각성운동에 감화를 받아서 졸업 후에 그 지역에서 우리의 글을 모르는 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이웃으로 하여금 일제로부터 자주적으로 일어서는 정신을 지역사회에 심은 훌륭한 여성 선각자였다.
그런데 김일성 우상화 시절 소작인들과 집안일 마름일 하는 자들의 배 아파하는 모함을 받아 일찌감치 대지주라 낙인찍어 놓고 또 공부한 계급이라고 따돌림을 받아 모든 것은 몰수당하고 알거지 신세로 그들의 감시대상 1호인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선각자들을 제거시키면서 그들만의 사회를 건설한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여 재산이 많고 열심히 공부하여 학업성적이 좋아지는 것이 도대체 무슨 죄가 된다는 말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에 김일성이 부리던 완장부대를 지금쯤은 모두 다 잘 살게 해 주어야 되는 것이 정당한 공식일 터이다. 그런데 그 완장부대는 일찌감치 다 이용해 먹고 종처럼 부리는 신분으로 전락시키고 노동당 당원들만 특수 귀족계급으로 행세하고 부를 누리고 있으니 정권을 잡으려 하는 자들의 속성은 세계 도처에서 항상 이러한 것 같다.
해방 후 김일성이 그렇게 권력을 잡으려고 겉으로는 친일파 없앤다는 명분으로 저들의 정적이 될 만한 대상들을 깡그리 숙청한 것이 민족을 위한 길이였고 민족을 살리는 행위였단 말인지. 이러한 이북의 공산주의가 지금도 이북 주민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인데 과연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제도란 말인지?
그래서 지금의 이북 동포들이 저렇게 깡통 차고 중국으로 탈출해 가면서 행복해 하고, 광대노릇만 해 가면서 김일성 대원수 만세! 김정일 장군님 만세를 소리 높여 아직도 외쳐대고 있게 되어야만 그들의 인도주의가 빛나게 되는 건지 도대체 알지도 못하겠다. 인민군의 이북주민 집단학살
댓글목록
正道님의 댓글
正道 작성일민족의 원흉.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중에 "지주"~"국군"~"경찰" ~"공무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어제까지 이웃이던 "빨간 완장" 찬 놈들에 의해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인민재판"에 부쳐 져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