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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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2-01 04:45 조회1,96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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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영도 청학동 후생주택 27호
5월 중순 우리 집은 또 이삿짐 보따리를 싸가지고 영도구 청학동에 임대 주택으로 지은 후생주택 27호로 이사를 하였다. 그 당시엔 철거민에게 정부에서 무슨 보상비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아미동 철거민들은 그렇게 대책 없이 보따리를 싸들고 모두 쫓겨나 부산 전역 이웃 구석으로 6․25 피난길보다 더 처량한 모습을 지닌 채 뿔뿔이 흩어졌다. 할머니와 갓난 남동생을 안은 어머니는 얼굴이 퉁퉁 부은 가운데 두 여동생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먼저 떠나고 아버지와 나는 이삿짐 리어카를 뒤따라 걸어서 갔다.
남포동과 자갈치시장 사이의 길을 거쳐 영도다리를 건너 봉래동을 지나 조선소 그리고 코스코 석유 탱크 있는 회사 앞을 거쳐 청학동 천막촌 너머 먼 길로 후생주택에 도착하여 우리 집은 그렇게 해서 동쪽으로 오륙도를 바라다보는 위치에서 청학동 생활을 시작하였다.
리어카를 뒤따라 뒤에서 밀면서 아버지가 마련한 새 집으로 갈 때 영도다리 넘어 왼쪽 봉래동 바닷길을 돌아 나가면서 나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찬수야! 아미동 임시 판잣집은 우리가 집장사에게 돈을 주고 산 집이지만 무단으로 집 지어서 팔고 하는 사람에게 산 집이란다. 따져 보자면 법을 어기고 1년간 지낸 집이었다. 앞으로 그러한 일이 다시는 없어야지! 그 동안 그 사범 병설중학교 측이 참으로 고맙게도 우리에게 자리를 빌려 주었구나!’
하였다. 청학동 버스 종점에서 고갈산 쪽으로 비스듬한 경사 길을 한참 올라와 후생주택 맨 끝쪽 못 미처 로터리에서 왼편으로 틀어 돌계단을 내려와서 우리는 청학동 후생주택 27호에 짐을 풀었다.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왼쪽으로 23호, 24호, 25호 그리고 25호 오른쪽 옆으로 26호 그 위가 27호 우리 집 위쪽이 28호였다. 여섯 집이 후생주택 거대단지와 동떨어져 아늑히 모여 있어서 윗동네 사람들이 우리 동네 여섯 집을 가리켜 별장 마을이라 하였다.
새로 이사 온 집은 좁은 부엌 하나에 안방 하나 건너 마루방 하나 이렇게 된 9평 규모의 집이었다. 요새로 치면 일곱 식구가 살기엔 좁은 집이었지만 나는 우리가 오래 살 수 있는 새 집이었기에 너무도 좋았다. 그렇게 좋은 집은 피난 도중 그때까지 처음이었다. 더더구나 집 앞에 서서 동쪽을 향하여 바라다보면 아래에 이 지역 사람들이 부르는 ‘넓섬 바위’가 있는 해군 신호 대 저 건너편 너머로 시원한 푸른 바다가 눈앞에 광활히 전개되고 바로 마주보이는 좀 떨어진 신선대에서 오른쪽으로 띄엄띄엄 늘어진 작은 돌섬이 선명히 보였다. 처음엔 무슨 섬인지 이름도 몰랐으나 그 섬이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조에도 있을 만큼 유명한 오륙도라 하였다. 청학동 후생주택 27호가 있던 장소
이삿짐을 푸는 둥 마는 둥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나지막한 뒷동산으로 갔다. 그리고 집 뒤 공터를 이용할 구상을 항시 나와 의논하였다. 자그마한 바윗돌이 험하게 쌓이다시피 한 뒷동산은 그 다음날부터 틈이 나는 대로 아버지와 나의 황무지 개간 일터가 되었다. 돌담 울타리를 만들고 왼쪽 너머엔 고갈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계곡물이 흐르고 내 집을 가꾸면서 일한다는 것이 너무나 신나고 재미가 있었다.
집 뒤로 40미터 넘게 떨어진 곳에 묘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 묘소 앞 오솔길 앞까지를 경계로 하여 아버지와 나는 본격적으로 돌담 울타리를 쌓기 시작하였다. 주변에 널려 있는 바윗돌이 울타리 쌓는 데 좋은 재료가 되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동안에 내 허리 위까지 올라오는 꾸불꾸불한 길이가 30미터 정도 되는 돌담장이 나타나 우리 집의 경계는 정하여졌다.
돌담 안으로 잔돌들은 모두 다 치우고 땅속에 있는 돌까지 거의 파내고 보니 2단 정도의 밭이 생겼고 밭 위 높은 곳은 그대로 야산으로 두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여러 가지 씨앗을 구하여 밭에 뿌리고 야산엔 온통 코스모스 씨를 뿌려 가꾸었다. 고구마도 많이 심었는데 이때에 고구마 넝쿨도 꽃이 핀다는 사실도 알았다.
집 앞 마당은 동네 사람들이 공유하는 길인데 우리 집 앞쪽으로 타원형의 화단을 만들어 꽃씨란 꽃씨는 닥치는 대로 구해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뿌렸다. 내 일생 온갖 꽃을 좋아하고 지금도 꽃밭 가꾸기를 좋아하는 습관은 온전히 아버지가 몸소 나와 동행하면서 가르쳐 준 가정교육의 결과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집 남쪽 바깥벽에는 널찍한 광을 지었다. 아버지는 구상만 하고 톱질 못질 등은 내가 다 하였다. 아버지는 망치만 들었다 하면 못대가리를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급하신 마음에 당신 엄지손가락부터 먼저 내리 때려서 멍이 퍼렇게 들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나는 양양 간성 인제 일대에서 절만 짓는 대목인 외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연장을 가지고 나무를 다루는 일은 참으로 재미있고 지루해 하지 않았다. 개집과 잡동사니 넣어두는 커다란 광을 짓는데도 그럴 듯하게 지었다. 아버지께서 거제도에서 에쓰를 판 뒤 나를 달래느라고 부산 나가면 진돗개를 사 준다고 한 그 진돗개는 우리 형편에 너무 비싸서 구하지 못하고 똥개 잡종 암캐를 하나 구하여 키웠다. 거제도 연초에서 헤어진 내 친구 명견 에쓰가 또 생각이 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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