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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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27 20:48 조회2,058회 댓글5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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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부산 대화재
한 여름에 우리 가족은 모두 감천 바닷가에 있는 섬 쪽 앞으로 해수욕을 갔다. 부산 임시청사 경상남도 도청 옆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시절 있던 관저 옆을 지나 서대신동의 언덕을 넘어 길고도 긴 뙤약볕 길을 걸어 내려가면 있는 곳이다. 그 감천 앞바다는 해류의 간만의 차가 심하여 물이 들어오면 앞의 동산이 섬이 되고 물이 나가면 사람들이 걸어다녔던 걸로 기억이 된다. 그 후에 화력발전소가 생기는 바람에 섬이 폭파되어 없어졌다고 하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이후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하여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우리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나와 여동생들을 위해 물놀이를 갔다. 나는 어려서부터 물가에서 자랐기에 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그 날은 감천 바닷가에서 할머니와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아주 신나게 헤엄치며 놀았다.
그 해 초겨울에 우남공원(용두산) 판자촌에서 불이 났다. 그냥 한두 집이 타는 불이 아니라 산에 덮인 판자촌 전체가 일시에 타는 불이었다. 밤 10시경에 났는데 온 부산 시내가 대낮같이 밝았다.
무섭고 두려운 저 불! 그리고 시내 한복판에서 아우성 소리가 부산 시내를 울리는 모습에 나는 1ㆍ4 후퇴 시 민병대 아저씨들이 동네마다 몰려다니며 촌에 있는 초가집이란 초가집은 작전상 후퇴라는 명목으로 모두 불을 질러 강현과 양양 일대가 온통 불바다가 되었던 때가 떠올라 두렵기만 하였다. 불은 밤새도록 탔었고 그곳에 살던 피난민들은 모두 기진맥진하였다. 새벽이 되니 천지가 다 지친 듯 고요했다.
용두산 남쪽으로 빼곡히 들어선 판잣집이 반 이상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 얼마 있지 않아 용두산 북쪽에서부터 또 한 차례 불이 나 용두산에 있던 판잣집들은 모두 타서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피난민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다른 곳에 가서 피난민 설움 겪으면서 눈칫밥 먹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누가 일부러 불을 놓았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고 당시의 분위기는 아주 흉흉하였다. 이런 불이 그 해 겨울에 부산 도처에서 일어났다.
어른들은 부산의 부(釜)자가 불 부자, 가마솥 부자여서 그렇다고 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잇달아 불이 났다. 저 유명한 국제시장의 두 차례나 큰 불이었다. 우남공원(용두산 공원) 불에 못지않은 처참한 불이었다. 밤새도록 타는데 새벽녘엔 사람소리도 지쳐서인지 조용하고 불만 계속 타올랐다. 정말로 몸서리쳐지는 끔찍한 불이었다. 그 이후에 부산 본역의 대화재와 영주동 산꼭대기 판자촌 대화재 신선대 쪽으로 나가는 적기(아카사키)의 그 어마어마한 판자촌 대화재는 피난민들의 슬픔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62. 이별의 부산 정거장
6ㆍ25 동란 통에 전쟁 치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피난민들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피난민의 살림은 살림이 아닌가! 목숨 하나 달랑 가지고 자유 찾아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피난 온 모습이 이렇게 처참하였다. 이들을 위한 특별한 구호활동 같은 것이나 캠페인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는 그런 시절이었다. 서울 수복 이후 휴전협정이 된 뒤에 점차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부산 본역 광장은 보따리를 싸들고 나온 사람들로 매일같이 붐볐다.
멀쩡히 이웃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향집으로 이사 간다는 친구들이 늘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사 간 집엔 그 다음날 어디서 왔는지 먼저 살던 사람들의 말씨와는 아주 다른 엉뚱한 사투리의 사람들과 친구들이 또 새로 생겨났다. 오가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줄을 이었다. 판자촌 이웃이라고 그동안 서로 이웃간에 정이 들어 살았는데 헤어질 땐 다시 만나자고 하면서 눈물을 짓고 엉엉 울기도 하였다.
이때에 저 유명한 가수 남인수의「이별의 부산 정거장」노래가 그 피난민의 애환을 말해 준다. 우리들은 그때 멋도 모르고 책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다니면서 그 노래를 신나게 불러댔다. 참으로 철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서울 가는 십이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이 노래가 단순한 노래가 아닌데 그 이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 가면서 젓가락 장단 박자 맞추어 2절까지 신나게 상다리 두드리며 흥을 돋우어 불러댔으니 전쟁의 뒤안길은 그렇게 슬프게 가려지고 노랫가락에 실려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갈 뿐인가?(계속)
댓글목록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http://www.gayo114.com/p.asp?c=8542465230
제목: 이별의 부산정거장{남 인수} , 언제까지나{나 애심} , 그대생각,아네모네 탄식{송 민도}, 마음의 사랑,백마야 우지마라{명 국환}, 이별의 인천항{박 경원}, 아메리카 차이나타운{백 설희}, 페르샤왕자{허 민 / 안 다성}, 홍콩아가씨{금 사향}
가수: 여러가수
앨범: (196?) 대서정 한국레코드가요사 제 8집
가사: 제공된 가사가 없습니다.[가사입력]
기린아님의 댓글
기린아 작성일
김찬수님의 6.25 연재글을 보게되면, 신문에 있는 연재만화,연재소설 같은 느낌을 받게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탁월한 기억력이!
그 어렸던 때에 일기쓰는 습관이 있으셨을리도 만무하고, 20대인 저보다 기억력이 뛰어나십니다!
6.25를 겪어보지 못한 저로서는 관련 책을 사서 읽기도 뭣하고,(그 시간에 정보전달 받기 위한 비문학 책을 한권이라도 더 읽어야 하니까요..) 한국사에 큰 관심이 없다 할지라도, 최소한 현재의 남북관계를 보기 위해선, 사회 돌아가는 것을 보기 위해선, 해방 이후의 근현대사 만큼은 관심을 가져야 할 터!
화곡 김찬수님의 글을 흘낏흘낏보며 그 당시의 상황을 실감합니다.
6.25 겪어보지도 못한 놈들이 박대통령 욕하는 것 보면, 賊反荷杖도 유분수란 생각도 들기도 하구요!
누구 덕에 가난한 시절을 한번도 겪지 않았는데! 내가 좌익일 때도 가난의 먹구름을 걷어낸 박대통령 폄하하진 않았었는데...
김찬수님의 짜임새 있는 연재 글을 보며 저는 이것을 책으로 내어도 괜찮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화곡 김찬수님 덕분에 제가 역사공부, 과거체험, 하게되어 감사드리며, 계속 연재를 기대하겠습니다.^
김찬수님의 댓글
김찬수 작성일기린아님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연재중인 "내가 겪은 6.25"의 맨처음 1회의 제 글을 읽어보시면 모든 의문이 풀리실 것입니다. 맨 아래 "글쓴이" 클릭하시고 "whagok22341" 이름 쓰시고 검색클릭 하시면 연재 제 1회의 글이 나옵니다. 처음 등록은 "김찬수"가 아니라 "whagok22341" 로 글쓰기를 시작 하였습니다.
正道님의 댓글
正道 작성일이별의 부산정거장~~`가슴 찡 합니다~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http://www.gayo114.com/p.asp?c=6780452928
제목: 경상도 아가씨 / 가수: 박재홍
앨범: (1969) 노래따라 삼천리 제2집 其 2 / 가사: kbg1948님제공
손 로원 작사, 이 재호 작곡
40階段 層層臺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避亂살이 悽凉스러 同情하는 板子집에 慶尙道 아가씨가 哀悽러워 묻는구나
그래도 對答없이 슬피 우는 以北 故鄕. 언제 가려나
故鄕 길이 틀 때까지, 國際 市場 距里에, 담배장사 하더래도 살아보세요
情이 들면 釜山港도 내가 살던 情든 山川. 慶尙度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뼈에 맺힌 내 故場이 以北 故鄕. 언제 가려나
影島 다리 欄竿 우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故鄕 얘기 들려주세요
복사꽃이 피던 날 밤, 옷 소매를 부여잡던 慶尙道 아가씨가 서러워서 우는구나.
그래도 잊지 못할 가고 싶은 以北 故鄕. 언제 가려나
* 對話 臺辭 : 사 미자, 고 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