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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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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28 05:57 조회1,907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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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아미동 판자촌

 한 겨울이 되니 따뜻하다던 부산도 몹시 추웠다. 바닷바람은 왜 그렇게도 몰아붙이는지 살을 에는 듯하였다. 유담프(양철로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물을 담는 흡사 수통을 확대해 쭈그려 놓은 것 같은 물통 기구)에 물을 펄펄 끓여 두터운 천이나 담요로 싸서 잠을 잘 때에 발밑에 놓고 자야 잠이 올 정도로 전쟁 이후 피난민 생활의 겨울은 춥기만 하였다. 토성국민학교 쪽으로 내려가서 구공 연탄을 사오는 것은 나의 담당이었다. 나는 기운이 세어서 오른쪽 어깨에 빨래판을 얹고 처음에는 미숙하였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나무판대기 빨래판 위에 구공탄 12장까지 석 줄로 얹고 거뜬히 아미동 언덕길을 올라올 정도였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연탄 지는 습관은 아주 몸에 배어 그 이후에 수없이도 많이 한 이사 때마다 나는 무거운 짐을 한쪽 어께에 올려놓고 짐을 나르는 데 큰 몫을 하였다. 짐을 꾸리는 데에도 전문가 못지않은 선수이다. 그래서인지 이삿짐 꾸리는 것은 이제껏 나를 평생 따라다니는 영원한 일거리 친구처럼 되었다.

전쟁 뒤에는 이상한 모습도 많았다. 경남중학교 아래 한전 울타리 쪽으로 내려가면 거지들이 수두룩하니 노숙을 하기도 하고 그곳에 움막을 치고 사는 사람도 많았는데 대부분 아편쟁이들이었다. 그곳에는 한두 사람이 아니고 대낮인데도 수두룩하게 늘어져 하늘만 쳐다보고 멍청하니 있는 모습들을 많이도 보았다. 놀라운 것은 그 무리 속에서 나의 고향 먼 친척 아주머니 한 분도 보았던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크게 다쳐 병원에 가서 진통제를 자주 맞은 것이 습관이 되어 아편중독이 되었다고 내 할머니에게 말하는데 그 표정이 아주 불안해 보였고 처량하게 울 때는 아주 불쌍했다. 그 해 겨울 이후론 나보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갔는지 아주머니 가족 전체가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참으로 안쓰러웠다.

우리 집 왼쪽으로 부산사범 병설중학교 담을 끼고 한참 언덕을 올라가면 꼭대기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일제 때에 마련된 곳이라 하였다. 해골이 노지에 나뒹굴어 여기저기서 발에 밟히고 채이고 하여 우리들은 처음엔 무서웠으나 나중엔 그곳이 장소가 넓어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다. 생명이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장소가 되었다.

동네 친구 정상기는 축구공 가지고 놀 듯 이 널려 있는 해골들을 발로 차고 몰고 다녔으니 얼마나 우리들이 철부지였던가? 그 공동묘지 아래 개신교 교회가 하나 들어섰는데 부흥회가 열릴 때면 밤낮으로 신도들이 울고불고 하면서 어두운 얼굴로 우리 마을 앞을 오르내리면서 연신 “할렐루야! 할렐루야!”라고 독백하면서 찬송가도 불러댔다. 어떤 때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도 무척 많이 왔다 갔다 하였는데 나는 이 장면 하나 하나도 전쟁의 슬픔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해 겨울에 나의 아버지는 우리나라의 역사책 내용 중 국난극복사의 효시라 할 수 있는《국난사개관(國難史槪觀)》이란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직장에 다녀오면 밤낮으로 원고를 썼다. 그땐 만년필이 보물같이 귀하고 볼펜이 없는 시절이어서 잉크병에 펜촉을 찍어 글을 썼는데 우리들도 학교에서 연필을 사용했지만 잉크병을 가지고 다니면서 펜촉을 잉크에 찍어 글씨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경남중학교 앞 전차가 다니는 큰길을 마주보고 위치한 토성국민학교 운동장에서는 주일날 가끔 권투시합이 있었다. 그 당시 우리들에게는 최고 인기 운동경기였다. 아니 당시 욕구불만이 가득한 어른들에게도 그러하였다. 권투시합 광고가 부산 시내 여기저기 담벼락에 나붙여졌는데 그 권투선수들의 멋진 폼 잡은 인쇄물만 보아도 우리들은 신바람이 났었다. 중량급에는 송방영과 강세철 선수가 아주 소문이 났었고 경량급으로는 이일호, 백용수 선수가 우리들의 영웅들이었다. 가끔 덩치가 큰 흑인선수도 등장하였는데 재빠른 우리나라 선수에게 배를 몹시 얻어맞고 절절매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백용수 선수는 남포극장에 근무하였다 하는데 당시 부산에서 최고의 인기 권투선수였다. 부산의 체면을 지키는 그런 입장에 있는 운동선수였다. 어려운 시절이라 우리들은 입장료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나와 친구들은 동네 형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학교 뒷담으로 몰래 돌아가서 감시원의 눈을 피해 다람쥐처럼 튀어 잽싸게 담을 넘어가 슬슬 사람 많은 곳 링 앞에 다가가서 쪼그리고 앉아 관람하였다.

몇 번의 일이지만 권투시합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몰래 담을 넘는 것에 대해 크게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못된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곤 그 이튿날 학교에 가서 권투시합을 본 이야기를 친구들 앞에서 신나게 떠들어댔다.

1954년 겨울 이야기가 이어진다.

가을이 지나 늦겨울까지 우리 집 식구들은 남녘이라 춥지도 않다는 부산에서 참으로 춥게 지냈다. 거기다 연이어 일어나는 대화재와 부산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연탄가스 누출로 일가족 모두가 생명을 잃어가는 현상이 비일비재했다. 우리 집 가족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 차례의 무서운 가스 중독으로 다 늘어져 생사의 갈림길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겨울을 지나는데 그 겨울은 참으로 길게도 느껴졌다.

부산 중심 시가지 토성 초등학교 자리

지금은 수도자인 둘째 여동생은 가스에 완전 녹초가 되어 온몸이 뼈도 없는 엿가락처럼 흐느적거렸고 창문을 열고 모두 부엌문으로 엉금엉금 기어나가 차가운 문 밖 땅바닥에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때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바깥바람을 쏘이면서 ‘아! 참으로 공기가 시원하고 신선하구나!’ 하는 느낌을 이제껏 잊지를 못한다. 또 나는 그 이후 지금까지 그렇게 무섭게 일어난 큰 불들은 보지를 못하였다.

피난민의 처지에서 보면 사상의 갈등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됐었고 또한 용기를 내야 되었다.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말초신경을 매일같이 건드리는 숱하게도 많은 초조함과 공포 속에서 참으로 길게도 버텨왔던 시기였다.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정다운 고향 그리운 사람들을 삽시간에 모두 애간장 끓이며 이별하고 와 얼마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던 소박한 행복의 꿈은 점점 멀어져 어처구니없는 객지생활 삶의 현장에서 밤낮으로 아우성치면서 살아야 했다. 바라지도 않은 이 원수 같은 화마는 애처롭기만 한 피난민들을 비켜가지도 않았다.

매일같이 슬픈 사고 소식이었다. 배가 고파 쓰레기통에 버려진 복어알이 먹음직하다 하여 온 가족이 끓여먹고 몰살을 한 신문기사도 더욱 슬픔을 자아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서 생의 의욕을 잃고 자살했다는 소식도 파다하게 퍼졌다. 1955년 초봄이 오는 시기에 계절적으로 2, 3월의 부산 바닷바람은 세기도 하였다. 살을 에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손바닥보다 얇은 판잣집 벽을 뚫고 낯선 곳을 찾아 살아 보려는 사람들을 온통 서럽게만 하였다.

누가 국민들을 잘 살게 해준다며 무슨 주장을 하는가. 누가 정의를 위한다면서 백성들을 이 고생 시키며 큰 소리들을 내는가. 정치가들은 사람이 소중하고 귀하고 존엄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기는 알고 있는가.

“전쟁이 난 것은 정치가들 책임이 아니니 전쟁터엔 국민들 너희들이나 나가서 국가를 위하여 죽든지 살든지 마음대로 하고 닥쳐온 고생들은 알아서 해결하라. 지금 우리는 그때를 당해보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다.”

이것이 우리나라 위정자들 자세의 본질이 전혀 아닐진대. 참으로 우리 국민들은 정치가들의 방향과 소신 없이 나대는 것에 그저 착잡하기만 할 뿐이다.

4월 개학하고 큰 여동생과 새로 입학한 둘째 여동생은 나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매일 걸어서 시내 건너편 청구 중학교와 보수 초등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학교의 재정 상태가 넉넉하지 않아 박봉인 데다 그마저 봉급을 제때에 받아오지 못하였다. 삯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이 때부터 가끔 지나가는 말로 하도 고생스러우니까 나에게 말했다.

“너는 이담에 커서 선생질은 절대 하지 말거라!”

하고. 얼마나 전쟁에 시달리고 가족을 이끌기에 힘이 들었으면 교직생활을 보람으로 여기고 저술활동으로 글만 쓰는 아버지 앞에서 나에게 저렇게 말하였을까…….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내가 후일 아버지 뒤를 이어 교직에 평생을 봉직하였으니……. 온 가족의 생계가 어머니의 삯바느질의 일거리가 많이 들어오느냐 어떠냐에 달려 있었다. 이때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바느질도 하기 힘이 든 때였으나 바느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계속)

댓글목록

기린아님의 댓글

기린아 작성일

whagok22341로 검색을 하였는데, 내가 겪은 6.25 1탄은 없습니다...

2탄부터는 쭉 있는데 말이죠. 삭제된 것 같습니다..

김찬수님의 댓글

김찬수 댓글의 댓글 작성일

기린아님 글쓴이를 "김찬수"로 하여 확인하시면 거기에 옮겨져 있네요. 이거 무슨 조화인지....!

正道님의 댓글

正道 작성일

"화곡" 김찬수선생님이 올려주시는 내가 겪은 6.25 가 전쟁을 모르는 전후세대에게 많이 읽혀져 민족혼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오늘 수고하셨읍니다요! ///
<img src=http://www.gayo114.com/image/musicbox/albumimg/16/17716>

제목: 내일이면 늦으리/ 孫 露源 作詞 / 羅 花郞 作曲  / 가수: 송민도
앨범: (1957) 조민우(타향의 밤은 깊어) / 송민도(내일이면 늦으리) / 가사: jaan50님제공

http://www.gayo114.com/p.asp?c=13385650944
1.
오늘 밤 薔薇꽃이 시들기 전에, 첫 사랑 門을 열고 불러 주어요.
그대의 가슴 깊이, 나 혼자만이 스며드는 그 秘密을 속삭여주오.
來日이면 늦으리. 來日이면 늦으리.

2.
오늘 밤 푸른 별이 꺼지기 전에, 첫 사랑 불길 타는 마음도 주어요.
그대의 타는 純情, 나 혼자만이 가져보는 그 열쇠를 나에게 주오.
來日이면 늦으리. 來日이면 늦으리.

ㅡ ㅡ ㅡ 적절한 일정을 선택, 아주 효과적으로 하셨읍니다. ,,. ㅡ ㅡ ㅡ

소양강 소양2교 북쪽 건너 편 4거리 '두 미르 회관{두 미르 레스 텔}'앞! ,,. ///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저도 충북에서 가장 산골짜기로 알려진 곳에서 살았더랬습니다
지금부터 12~3년전 불당골이라는 곳이 저희 고향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 있었지요
그곳에서 공수부대원들 몇명이서 죽어간 사건이 있었던 곳의 소재지가 제 고향입니다
민주지산 바로 밑에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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