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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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22 05:31 조회2,027회 댓글6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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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자갈치 시장과 청구중학교
부산 자갈치 부두에 내린 우리는 리어카 한대에다 배에서 내린 간단한 이삿짐을 옮겨 싣고 리어카 끄는 아저씨를 앞세웠다. 손에 손에 보따리를 든 우리 모두는 아버지를 따라 걸어서 한국전력회사를 지나 토성동을 거쳐 아미동 산 중턱에 있는 판잣집으로 올라갔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병설 중학교와 담을 하나 사이로 두고 건너다보이는 바로 남쪽 비탈 언덕배기에 있는 판잣집으로 올라갔다. 6평 정도 되는 새로 지은 아주 작은 방 두 칸의 집이었다. 초장동과 아미동의 경계지역이었는데 나무도 없는 산비탈에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집장사가 남의 땅에 불법으로 지어 피난민들에게 싸구려로 분양한 집이었다.
거제도에서 아버지가 급히 부산에 나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임시방편으로 장만한 집이 불법으로 지어 싸구려로 파는 무허가 판잣집이었던 것이다. 당시 전쟁 통엔 삶의 기준이 단순한 윤리 도덕 관습에만 의지했지 나라가 세운 법조문 등은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모르거나 정확한 준거에 의하여 지켜지지도 않을 뿐더러 정상적으로 이어지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우선 살고 봐야 하니까 피난민들은 모두 그랬었다고 볼 수 있다.
부산 도처의 산비탈의 판자촌은 모두가 무허가로 지어졌고 집장사들이 단속을 피하여 낮에는 조용하다가 밤이면 후닥닥 툭탁 소리가 난다 싶어 이튿날 아침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면 어제까지 못 보던 집들이 하룻밤 사이에 여기저기에 몇 채씩 생겨나곤 하였었다. 그날부터 우리 가족은 부산 사람이 되었다.
처음 배에서 첫발을 내디디자마자 엄청난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자갈치 뒤편 바다와 송도 쪽으로 나가는 남항동 축항이 있는 그 안에 엄청난 배들이 꽉 들어차 있었고 오가는 배도 아주 다양했다. 사람들이 사느라고 외쳐대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복잡한 큰길 한복판으로 커다란 전차가 땡땡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연 부산은 우리나라의 대도시였다. 엄청난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피난민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살았으니 그때의 사회상이 어떠하였겠는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집안에서 짐을 풀고 그날 밤 창문을 열고 부산 시가지를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야경이 화려했다. 이튿날 아침 촌뜨기인 내가 처음 보는 대도시 부산의 광경은 어마어마했다. 시가지뿐만 아니라 산꼭대기 전체가 온통 다양한 건물로 꽉 차 있는데 건너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산 쪽(보수산), 우남공원(용두산), 영도다리 너머 멀리 오른쪽 위로 고갈산 중턱 영선동 일대 왼쪽으로,
임시정부 청사가 들어서 있던 경상남도 도청 옆 이승만 대통령이 있던 부민동 대통령 관저, 병설 중학교 바로 왼쪽으로 조금 가면 보이는 높다란 굴뚝의 아미동 화장터, 저 멀리 서대신동, 동대신동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영도다리 왼쪽으로 시청 옆 제5육군병원 건물, 당시 부산에서 제일 높은 건물 너머로 부산항과 그 너머로 적기, 신선대 쪽 오륙도 부근까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물론 이런 지명은 부산에 살면서 차차 안 이름들이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부산 한가운데 우남공원(용두산 공원) 쪽으로 빠져나가면 바로 남포동까지 두 줄 건물로 기다랗게 이어지는 전시 때 가장 유명한 국제시장, 그리고 광복동 남포동 미문화원이 있는 대청동 동광동 거리 등이 시내 한복판에 있는 부산의 중심인데 손 안에 잡힐 듯이 다 보였다.
우리가족은 이웃들과 인사를 했다. 모두가 피난민이었고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경상남도 하동 창원 산청 사람들도 있었다. 전국에서 온 피난민들이 다 모였으니 사투리도 가지각색이고 각자 풍기는 성품과 관습 그리고 기질도 아주 다양하였다. 그 어려운 삶 속에 서로가 내놓는 이야깃거리도 다양하였다.
나는 바로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가 새로 근무하게 될 보수산 공원 오른쪽 언덕에 있는 피난민 학교 청구중ㆍ고등학교로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버지가 아미동 바로 아래에 있는 토성국민학교나 보수산 아래에 있는 보수국민학교에 데리고 가지 않고 아버지가 근무하게 될 청구중학교로 간 것이다. 교무실에서 간단한 수속이 끝나고 나는 갑자기 국민학교 6학년이 아니라 중학교 1학년 교실에 덜커덕 앉아 있게 된 것이다.
그날 6월부터 나는 국민학교 6학년생이 아니고 1년 2개월을 건너뛰어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예고도 사전 준비도 없이 바로 중학생이 되어서 한편으로는 중학생 모자도 쓰고 그럴 듯하게 보이기에 약간 우쭐대려는 심리도 있었지만 그때부터 나는 아주 심각한 고민과 당황 속에 그해 겨울방학 지날 때까지 몸살을 앓았다. 매일같이 나는 학교 생각만 하면 무엇에 쫓기는 듯 모든 것이 부족한 듯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평소 친구들처럼은 하는 공부인데 갑자기 공부에 대하여 그렇게 몸살을 앓아 보다니……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어린 나로서는 갑자기 일시적으로 6ㆍ25 전쟁만큼이나 감당 못할 큰 일이 생긴 것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다 이해된다는 아버지의 소싯적 생각만 하고 나의 능력을 살피지 않은 것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재직하는 학교의 교사이면 자녀의 등록금이 면제된다는 그때 상황으로 따지면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진다. 부산 시가지 전경
또 한 가지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엘 매일같이 나를 데리고 다닐 수가 있어서 혼란한 세태 속에서 보호할 수 있겠다는 동기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전쟁 뒤의 가난이라고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본다면 천재도 아닌 내가 크게 흔들린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주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계속)
댓글목록
피안님의 댓글
피안 작성일
그때의 부산의 곳곳을 묘사하신데는 꼭 흑백 도큐멘터리를 보는것 같습니다.
이제는 아미동 부산대학교도 다른데로 옮겨지고 광복동, 남포동의 거리와 상점들도
현대식으로 변모되어 부산전체가 변했지요,
집안일로 일년에 한번씩 부산에 갈때마다 느끼는것은 변함없는 인심과 프랑스 빠리 못지않은
멋진 젊은 남녀들이 많아 놀라곤하지요.
주먹한방님의 댓글
주먹한방 작성일잘 보고 있습니다.
기린아님의 댓글
기린아 작성일
부산에 대한 묘사! 동부신시가지(센텀시티일대)만 자주 갔었던 저에게는 신선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방금 화곡 김찬수님께서 제가 황장엽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데에 대한 충고 주신 댓글을 읽게되었습니다.
(제 글이 뒤에 있다보니 댓글이 달린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못읽을 뻔 하였네요. 휴~)
그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조갑제씨도 잘못알고 있는게 좀 있구나 생각도 해보게 되었구요.
진중한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찬수님의 댓글
김찬수 작성일기린아님 님의 의기를 높이 보게 되는 저 입니다. 정진하시기를 삼가 바라오며. 감사합니다.
금강인님의 댓글
금강인 작성일
조갑제씨는 자신이 쓴 글을 이제와서 뒤집으려니 겸연쩍어서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는 듯.
언론인은 오로지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데 조갑제씨는 5C8에 관한한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 한참 부족합니다.
김찬수님의 댓글
김찬수 작성일금강인님 그렇습니다. 님이 지적하신 사람은 지금 톨파구를 찾느라고 정신이 없는듯 합니다. 혹세무민의 대표적 글쟁이들과 연설쟁이들이 지금 꼴갑을 떨고 있습니다. 조갑제와 김동길이 그 대표자 격이지요. 그들은 13년 한동안 황장엽을 몹시 싸고 돌았지요. 그러나 지금 그들은 스스로 침몰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사유의 향방을 제 마음대로 탕랑취물 하듯 온당치 않게 인위적으로 바꾸려 하였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근거로 또 6.25의 경험을 내세워 벌써 부터 김영삼을 비롯하여 그들을 지적하여 잘못된 부분을 시정하라고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이런 종자들도 김대중 노무현 망가지는것 처럼 때가 도래했기에 앞으로 처단해 버려야 할 대상들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멸망시키려드는 무리들과 부화뇌동하여 그들이 머무를 마당과 나아가는 앞길을 미리 쓸어댔으니 이제 모든 것을 알아챈 우리국민들 앞에서 간교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올바른 사유의 흐름을 눈치챘으면 아무말 말고 빨리 피신해서 이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 현명할 것입니다. 한강물이 표면적으론 흐르지 않는것 같지만 그 내부는 무서운 힘으로 흘러 대해로 빠집니다. 우리 국민들이 아무것도 모르는것 같지만 그들은 그들의 힘을 너무 과신했고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국민들을 그들말만 듣고 믿고 행동하는 줄로 착각하며 싸그리 무지몽매한 부류로 무시했습니다. 김대중 꼴처럼 역사 뒤집기를 삽시간에 하려 든 것입니다. 리영희 강만길 강정구등 학자같지 않는 학자들 등....! 국민들의 무서운 정의의 힘이 한강물처럼 이제 무섭게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감히 한강물을 역류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빛을 손바닥으로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드시 그 누가 대한민국이 지나온 역사와 나아가서 도도히 흐를 우주의 역사를 막겠습니까? 지나간 역사는 신도 다시 고치지 못하는 것이거늘! 그들은 무엄하게도 한 시대를 그들 임의대로 집권하려고 난동을 부린 것입니다. 그 누구가 있어 말하지 안흐는것 같은 시대의 바른 흐름 이것을 막겠습니까? 시대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바꾸고자 그들의 언어적 유희와 간교함을 무기로 무엄하게 국민들의 눈을 너무 가리려 했습니다. 그들앞엔 창피함만이 남을 것입니다. 제 느낌에 대해 금강인님께서 저를 이해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