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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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21 07:33 조회1,8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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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명견 에쓰와의 이별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아는 사람을 통하여 부산에서 살 집을 마련했으니 6월에 이사한다 하며 짐을 꾸리라고 했다. 부산으로 나갔다가 그때는 아직도 전쟁터의 한가운데인 고향이 안정되면 재빨리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 할머니를 기쁘시게 해드리자는 말이었다. 학급친구들에게도 부산으로 나간다고 이별을 고했다. 나는 지금도 만나는 거제도 친구들이 있다. 그들과는 6ㆍ25때 모진 피난생활을 같이하면서 가슴속에 간직한 서로 통하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다. 함경도 아바이 모임이다.
사투리 억양이 어떻게나 억센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나서 떠들면 다방에 있는 다른 손님들이 귀를 막아야 될 지경이다. 만나면 고생스럽던 일들이 재미있는 듯한 추억 속의 얘기로 변한다. 학급 친구들에게도 부산으로 나간다고 이별을 고하였다.
아버지는 평생 사명감을 가지고 일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어떤 직책이나 자신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엔 항상 초연하였다. 그런 때문인지 할머니 말 한마디를 듣고 따르는 데도 단호했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뒤 1985년 9월21일 토요일 오후 3시 30분 내 형제들은 아버지의 출판기념회를 열어 드렸다. 그간 아버지의 학술, 고전, 저서가 무려 38책 64권이었다. 전국에서 피난시절 연초 중학교를 나온 남녀 제자들이 많이들 참석했고 2차로 밤늦게까지 우리 집 뒤뜰에서 지난 이야기를 했다. 이별의 눈물을 흘렸던 그때 일들을 상기하면서 사제지간에 오래간만에 다시 다정히 눈물을 흘리던 광경을 보았다.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이사하기 며칠 전 아버지는 나의 든든한 친구 사랑하는 에쓰를 처리하자고 하였다. 가슴이 철렁하였다. 개는 배에 태울 수 없어 부산으로 데려갈 수 없다고 했다. 그때부터 난 엄청난 고민이 생겼다. 후에 안 일이지만 개백정에게 팔기로 약속을 하였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사 가기 7일 전 에쓰가 홀연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수소문해 봐도 어디를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에쓰는 주인 말에 눈치를 챈 것이다.
우리 집이 부산으로 떠나는 날 이른 새벽 어디를 갔는지 모르던 에쓰가 집에 나타났다. 오랫동안 굶어 기운이 다 빠져 나에게 꼬리를 치는데 힘이 없었다. 개백정 영감이 왔을 때 에쓰는 그 영감을 보고 어깨의 갈기를 세우면서 공격 자세를 취하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영리한 에쓰는 벌써 알았던 것이다. 동네 아저씨들과 선생들이,
“찬수야! 에쓰가 너의 말을 잘 들으니 네가 이끌어 개백정 할아버지께 넘겨 드려라!”
하고 나를 설득시켰다. 나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절대 그렇게 못하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에쓰를 붙들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왜 부산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되냐고 하면서 난리를 쳤다. 그리고 개백정 말고 다른 사람에게 잘 키우라고 주면 안 되느냐고 외쳤다. 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이임 인사를 하는 아버지가 뻘겋게 된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부산 나가면 이보다 더 좋은 진돗개를 사줄 테다. 그러니 어서 개백정에게 넘기자”
하고 나를 달래면서 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 말이 끝나자 부둥켜안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던 에쓰를 개백정 철조망 수레 안으로 데리고 갔다. 에쓰는 반항하지 않고 목을 느리고 순순히 걸었다. 그때 에쓰도 울고 있었다. 연초 면 연사리 벌판과 MP 다리까지 뚝방 길을 달리며 위용을 떨치던 명견의 위세는 어디로 가고 눈자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별을 각오한 듯이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우리 속으로 들어간 에쓰가 한번 끼잉 하였고 뒷 철문이 닫혔는데 들어가면서 나를 흘끔 뒤돌아보는 에쓰의 눈초리가 나를 몹시 원망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에쓰와 같이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 그때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미안하다. ‘나를 믿고 집으로 다시 왔는데 개백정에게 넘기다니!’ 에쓰는 그렇게 생각했겠지…… 나는 비정하게 에쓰와 헤어진 일을 떨쳐 버릴 수가 없고 지금까지도 이별한 순간만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아프다.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때 그냥 풀어놓아 벌판으로 도망가게 내버려 둘걸……’ 두고두고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나에게 충성하는 너를 의리를 지키지도 못하고 보호도 못했다니…… 우리 속으로 에쓰를 들여보내 놓고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할머니가 이때의 슬픈 사실을 두고두고 말하기를,
“전교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울지, 아범 울지 선생님들과 학부형들과 이웃동네 사람들이 이별을 슬퍼하여 여기저기서 울지, 찬수는 개 끌려가 죽는다고 대성통곡을 하지, 그야말로 학교 전체가 울음바다였다”
라고 했다.
이때의 또 다른 헤어짐은 그렇게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아버지의 결단력은 대단했다. 일전 한 푼 없는 우리 집의 이삿짐은 옷 몇 가지와 재봉틀 하나 양재기 그릇 수저가 전부였다. 앞날을 예상 못하는 피난민의 객지에서의 이동인 것이다.
이산가족이었던 우리 집 여섯 식구는 저 처참한 전쟁 속의 풍비박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다시 거제도에서 합쳐졌다.
한 많은 슬픔의 사연, 고난의 사연, 숱하게도 많은 고마움의 일들을 거제도 여기저기에 모두 남겨두고 장승포 항에서 부산행 목선 여객선을 타고 거제도를 떠났다.
거제도! 전란 속에서 평화를 실천하며 몸살을 앓은 장한 거제도!
네가 따뜻이 보듬어 주었기에 우리가 대한민국 자유에 편히 안길 수 있었고 너 없었으면 우리 가족은 만나지도 못했다! 고마운 거제도야! 네 고마움 잊지 않고 지금 떠나지만 내 기필코 다시 너를 찾아오리!
1954년 6월 초 장승포 항 앞바다 바닷물은 떠나는 뱃전을 때리고, 바다 위를 나는 흰 갈매기들이 전쟁의 무서움과 피난민의 애환을 알기나 하는지 그저 자유롭고 평화롭게 우리 가족 머리위로 배회하고 있었다. 배 밑창 객실에 들어간 나는 그래도 허전하여 멍하니 앉아 에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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