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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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16 04:57 조회1,909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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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고현 미군부대 위문활동
많은 피난민 친구들이 연초 초등학교 앞 벌판에 있는 개신교 중앙교회를 다녔다. 크리스마스 전에 우리들은 노래도 연습하고 연극연습도 했는데 이 합창곡과 연극을 가지고 고현 포로수용소 미군부대에 가서 외국인 장병들 앞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그때 부른 노래 중 우리 애국가를 먼저 부르고「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우리말과 영어가사로 불렀다. 또「성조기여 영원 하라」라는 미국국가도 영어로 불렀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사실에 놀란다. 그때 어설프게 부른 우리들의 영어 노래였지만 미국 국가가 무대 위 우리들 입에서 합창으로 흘러나오자 갑자기 좌석에 자유롭게 앉았던 미군들이 구두 소리를 땅바닥에 뚜루룩 하고 내면서 무섭게도 빠른 속도로 모두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로 꼿꼿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들의 장엄한 국기 국가 사랑에 어떤 때는 우리나라 현 세태를 생각하고 부끄러워할 때가 있다.
미국 국가가 끝나자 그들은 조용히 앉았다. 후에 내가 군복무 시 전방 보병사단에서 미 8군으로 차출되어 18개월간 평택 K-6 에서 근무하며 대민 상담을 할 때 대민 담당 장교들의 통역병 역할을 한동안 하였던 때가 있었다. 2년간 미군들과 침식을 같이 하면서 생활을 했는데 그 때에도 그들의 기강은 어렸을 때 본 그대로였다.
서울 미 8군에 출장 왔을 때이다. 그때 8군 영내에서 국기 게양식 때나 국기 하기식 때는 펑 하는 신호음의 포소리가 난 뒤 트럼펫 나팔소리가 울리면 동작을 멈추고 어디에서든지 차렷 자세를 취한다. 영내를 지나던 차도 멈추고 차안의 병사들이 밖으로 나와 차렷 자세를 취하고 국기 있는 곳을 향하여 거수경례를 하는 것이다. 트럼펫 소리가 다 끝나면 차도 사람도 그 때서야 다시 움직였다. 참으로 국가 충성의 장면이 멋스러웠다. 물론 세계적으로 씩씩하고 용감하기로 소문난 그때의 우리 국군의 기강과 정신도 대단했다.
6․25동란 이후 10년이 더 지난 1963년 가을 나는 미 8군에서 모범 사병(Soldier of the month)으로 뽑혀 나에 관한 프로필이 기사화되어 미 8군 신문에 소개된 적도 있었다. 그때 우리 대대 파견대장이 권완동 소령인데 우리들에게 훌륭한 말을 한 것이 특히 기억난다. 그가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지금 관직 없는 외교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군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외국인에게 비쳐지는데 대한민국의 남아로서 긍지를 가지고 활동하고 외국인에게 얕잡히지 말라. 그들은 제군들의 행동을 보고 대한민국 국민을 평가한다. 이것이 곧 나라 사랑이다!”
라고 하였다.
4병기대대 전 장병을 대상으로 미 8군 연병장에서 중거리 달리기 대회가 있었다. 나는 내 뒤를 끝까지 따라붙는 미군 흑인 PFC 양거(Younger)를 제치면서 이를 악물고 ‘한국 군인인 내가 너희들에게 처질 수 없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서 간발의 차이로 일등을 한 일이 있다.
열심히 응원을 하던 많은 우리 한국군 장병과 미군 전우들에게 박수를 받고 칭찬을 받았다. 거품을 물고 악착같이 뒤따라 왔던 양거(Younger) 일병도 악수를 청하면서 쌩긋이 웃고 나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축하의 몸짓을 해주던 생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전방에서 보병 훈련을 무섭게도 받아 그 때는 고생스러웠지만 따지고 보면 그 훈련 덕이라 생각했다. 그 이후 한 번도 미군 병사들과 장교들에게 책을 잡혀 본 일이 없고 오히려 내가 그들을 지적하여 잔소리를 할 때가 많았었다.
미군들은 개인적으로는 자유롭고 생활이 느슨하고 군기가 빠진 것 같으면서도 또 일면에는 인종차별 문제로 밉기까지 한 그들이었지만 군기를 지키고 상급자의 명령을 듣고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누가 보던 안 보던 철두철미했다. 이런 점은 우리 가 본받아야 될 그들의 장점 중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포로수용소 미군 사령부 장병 앞에 가서 부른 영어 노래들을 기억한다. 연극에서 나는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 역할을 했다. 복장은 머리 꼭대기가 아주 긴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색 양복에 스틱을 지닌 모습이었는데 무대 위에 올라간 나는 구경하는 이상하게 생긴 코가 큰 사람들이 많이도 웅성거려서 그만 대사를 까먹어 “밥 먹여 주란 말이냐?”라고 큰 소리로 해야 될 대사를 “밥 먹어 주란 말이냐?”라고 했다고 연극을 지도한 교회 사무장 아저씨가 연극이 끝나고 내가 내려오자마자 다짜고짜로 구둣발 끝으로 나의 왼쪽 정강이를 걷어차며 나무라는 바람에 너무 아파 위문 분위기고 뭐고 기쁘기는커녕 까지고 부어오른 정강이 만지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생각이 난다.
그 이후 한동안 연극소리만 나면 나는 어디서든지 옛날의 그때가 생각나 습관적으로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때가 있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도 사무장을 생각하면 “그때 미군들은 우리의 말도 모를 터인데 그냥 넘어가고 말 일이지…….” 하면서 씁쓸히 웃고 그 때의 실수를 생각했다.
내가 교사 시절엔 아이들의 실수를 그 자리에서 야단치기보다 조용히 따로 불러 전후관계를 말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도록 일러주었는데 그 연극 때의 실수 덕분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스럽다 할까? 나중에 가고파의 김영희 라는 친구애가 많은 미군들이 예쁘고 노래를 잘한다며 많이 준 사탕 과자 초콜릿 껌 등 남몰래 나에게 초콜릿 한 개를 웃으며 집어준 것 때문에 나는 넋을 잃고 사지즈봉 만 쳐다보았는데 지금까지도 그 일을 기억을 하고 있다.
궁색이 가득 든 피난시절이었지만 한편으로 아름다운 소년 시절이기도 하다. 66년에 중앙극장 명동 입구 건너편 교회에서 초등학교 피난시절의 친구 박영천이 결혼을 했었다. 결혼식 피로연 때 많이 모인 함경도 친구들과 대화할 때 19살에 일찍 결혼했다는 영희도 왔었다. 아이가 둘이 있다고 하였다.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학교엘 다닐 때였다. 반가운 마음에 지나가는 말로 고현 미군부대 위문활동을 갔을 때 영희가 나에게 초콜릿을 남몰래 준 이야기를 했는데 한참 기억을 더듬더니 그 교회에서 위문을 간 것은 기억나는데 초콜릿을 너에게 준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했다.
기억이 날 턱이 없는 것을 바보스럽게도 내가 물어 본 것이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너무 단순한가 보다.(계속)
댓글목록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단순한게 좋을 때도 있습니다!!!
제 친구(벌써 고인이 됐지만...)
한 놈이 저의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떡을 얻어 먹은 걸 자랑삼아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 데....
저는 단 한번도 기억을 못 했었던 적이 많았었지요.
언젠가 한번 시골엘 가면 그 녀석 산소에라도 찾아가서
넋두리를 조금만 늘어 놓고 싶지만.....
시간이 여의치 못해서 아직도 차일피일 미루는 나도
참으로 못난 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