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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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15 05:21 조회1,914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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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가고파
거제도의 바닷가 마을이나 뒷산에 가면 내 고향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아름다운 꽃나무가 많았다. 겨울에도 내 고향처럼 춥지를 않았고 눈이 내리는 것을 거의 보지를 못하였다. 양양 속초 등 영동 해안 중부지방엔 음력설 가까이서부터 보름 넘기까지 함박눈이 참으로 많이도 온다. 1951년 1ㆍ4 후퇴 뒤에 우리 고향에 엄청나게 많은 눈이 왔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거제도에도 안 오던 눈이 너무나 많이 와서 원주민들이 말하기를 “피난민들이 이북에서 폭설까지 몰아 가지고 왔다”고 했다. 나의 고향은 그맘때가 되면 눈이 하도 많이 와서 어떤 때는 밤낮 3일씩 눈이 내려 마을 사람들이 대포 항 바닷가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줄기차게 내리는 눈에 홀려 멀미도 나고 또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가다가 구렁텅이에 빠진 인명사고가 난 일도 있다고 어른들이 말하였다.
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먹을 것이 없는 산짐승들이 마을로 일시에 무리지어 몰려 내려올 때도 있었다 하였다. 어떤 때는 동네끼리 서로 연락도 되지 않고 이웃집과 가래나 삽으로 쌓인 눈을 치우고 이동 참호 같은 기다란 길을 내야만 이웃끼리 서로 다닐 수가 있었는데 그 곳 남쪽지방은 참으로 기후가 많이도 달랐다.
겨울인데도 얼지 않고 잎이 반짝반짝 윤이 나고 추울 때 꽃이 피는데 동백꽃이라 했다. 나는 그 동백의 홑겹으로 된 동백꽃을 참으로 좋아하였다. 봄이 지나면 우리학교 운동장 끝엔 치자나무로 울타리를 했는데 치자 꽃이 필 때면 하얀 꽃의 향기가 너무 좋아 친구들 모두는 가까이 가서 자주 그 냄새를 맡았다.
학급엔 한 교실에 형과 아우가 같은 학년인 경우도 있었고 한 학급인데도 나이 차이가 아주 많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형들에게도 한 학년이라고 반말 짓거리를 하였고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터놓고 철없이 지냈다. 형이나 누나를 한 학급에 둔 아이들은 형과 누나가 항상 동생을 지켜 주기 때문에 제일 안전하였다. 선생이 나와서 산수 문제를 풀라 했는데 동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형이 풀지를 못하여 절절매며 얼굴이 벌겋게 될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어떤 애를 장난꾸러기들 몇이 골탕을 먹였는데 그 친구가 형에게 일러 놀린 아이들이 모두 학교 뒤 으슥한 곳으로 불려가서 주먹으로 얻어맞고 아주 혼쭐이 난 때도 있었다. 또 한 번은 매 맞은 아이의 누나가 교실 안에서 때린 아이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을 쳐 이유를 안 담임선생이 때린 개구쟁이를 교실 앞 구석에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하루 종일 손들고 서 있게도 하였다. 난리 통이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우리들은 가끔 마을 극장에도 갔었다. 그 극장에는 흑백 무성 영화만 상영하였다. 영화 상영을 하면 남자 변사가 직접 해설하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육성으로 영화를 엮어 가는데 아주 멋이 있었다. 출연 배우 남녀노소의 목소리를 혼자 다 흉내를 내는 것이다. 여자의 목소리나 아이들의 목소리를 낼 때엔 어울리지도 않았으나 아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내가 젊은 시절 직장 회식 자리에서 그 변사의 능숙한 목소리를 한참 흉내 내어 좌중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던 일도 있었다. 그 변사는 연초 면에서 인기가 있는 유명인사 중 한 사람일 정도였다. 우리들은 변사가 거리를 지나가거나 변사가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가에서 쪽대로 고기를 잡는 모습을 볼 때면 아주 훌륭하고 높은 분을 존경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했다.
우리 반에는 김영희 라는 여자애가 인기가 있었다. 고생스럽게 가난 끼가 가득한 피난민답지 않게 얼굴이 귀티가 나고 뽀얗게 예뻤었는데 미군부대에서 나온 국방색으로 된 우리 모두가 부러워한 아주 좋은 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 아이가 입어서인지 아주 돋보였다. 그래서 그 아이의 별명이 ‘사지즈봉(서지즈봉)’이라 하였다. 천이 사지(?)로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사지즈봉은 노래를 잘 불렀다. 특히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은 시조이고 김동진 선생이 곡을 붙인 우리 민족의 가곡「가고파」를 너무도 아름답게 아주 잘 불렀다.
그 애가 부르는 노래는 온 교실에 울렸고 교실 밖 교정으로도 넓게 저 멀리로 울려 퍼졌다. 이 노래만 불렀다 하면 어린 우리들이지만 교실 안은 너무도 조용했다. 우리들이 마구 뛰어 놀았던 북녘의 그리운 고향의 동산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 어느덧 우리들도 따라 불렀다. 이 곡이 단연 최고의 노래였고 김영희는 우리 반 최고의 가수였다. 피난시절 학교뿐만 아니고 거제도 전체에서 랭킹 1위 곡이 바로 우리 가곡「가고파」였다. 내가 결혼 초기에 가고파 이야기와 그 예쁜 사지 즈봉에 대하여 아내에게 열심히 열을 내어 그 때의 일을 말하였는데, 내 아내는 시큰둥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계속)
댓글목록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저희 반에도 저와 7살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친구녀석이 있었지요!!!
저야 워낙 학교를 일찍 들어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몇년전 동기회라고 모였었는 데....
어떤 동창 기집애가 "우리 동창 중에 1956년생이 있느냐" 고 일갈해서 얼굴이 붉어진 적이 있었지요
제가 1956년생 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