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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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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13 03:45 조회1,9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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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한 많은 내 할머니의 애환(哀歡)

 한 달 만에 다시 병환이 완쾌된 할머니는 점차로 밖의 출입도 종전과 같았다. 병환이 나았다지만 그런데 또 들이닥친 손녀딸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깊은 상심에 젖어 어머니와 온 가족들과 함께 슬픔 안에서 버티며 지냈다. 나의 할머니의 모든 생애는 이때까지의 이 땅 모든 어머니들의 애환이라 생각한다.

할머니는 구룡령 아래 미천골 부근의 ‘양양군 서면 서림리 황이’라는 곳에서 평창 이씨 가문의 맏딸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70리 떨어진 강현 면 복골에 사는 마마로 박박 얽은 나의 할아버지와 혼인했는데 남설악 산골의 삶은 그대로 강현의 농촌으로 이어져 찢어질 듯이 가난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착하고 부지런하게 노력하면 모든 것은 해결된다는 생활신조 속에 4대가 사는 집의 며느리가 되어 우리 가문에 그 강인한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지금까지도 항상 4대가 북적거리고 산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품에 안고 항상,

“너의 할아버지는 박박 얽었고 일자무식이었지만 심성이 착하고 행실이 곧고 부지런하며 농사짓는 데 동네에서 가장 치밀하고 신의와 형제 일가 친척간의 우애가 남다른 분이었다.”

라고 얘기해 주었다. 일제시대 때 할아버지는 강현 면 정암리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신작로를 닦을 때에도 제일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한 해엔 작은댁 어린 아재가 부엌 아궁이 앞에서 솔 검불을 가지고 장난하다가 불이 아궁이 밖의 솔 검불로 옮아 붙는 바람에 온 집이 다 타고 어린 아재까지 생명을 잃는 큰 슬픔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실의에 찬 동생을 달래느라고 그 해 겨울 내내 함경도에 가서 이듬해 봄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을 해 후하게 받은 품삯을 모아 두었다가 그 돈 모두를 동생의 새 집 짓는 몫으로 주기도 했다.

할머니는 농사를 지으면서 7남매를 출산했으나 6남매를 홍역 등 유행병으로 잃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에 기르기에도 남달리 뛰어나서 고을 일대에서도 항상 으뜸이었는데 한 해는 양양군 누에고치 품평회 심사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제출한 누에고치가 상등(上等)으로 뽑혔는데, 군에서 상품을 준다고 인적사항을 적어내라고 했다. 글을 모르는 할아버지는 글 잘하는 동년배의 집안 친척 조카 되는 아저씨에게 부탁했는데 아저씨 집은 가세가 부유해서 집안 모두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할아버지 이름을 써 넣을 자리에 그 아저씨가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아 정작 상을 탈 때엔 누에고치를 잘 키우지 못해 등급에도 오르지 못한 그 아저씨가 상을 타는 일이 발생했다. 상등 상품은 자명종시계, 한란계(온도계), 그리고 뽕나무 전지가위였다. 당시엔 어마어마한 상품이었다. 요새 말로 하면 남의 이름을 도용해 자기가 타먹는 문서 위조를 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안이 벙벙하여서 분해 하는 할머니를 위로하면서 “다 무식한 탓이니 어찌 하겠나”라고 한탄했다.

공부는 많이 할수록 모든 사람에게 더 많이 봉사하라고 배웠을 터인데 공부 좀 했다고 그것도 친척 아저씨인 내 할아버지의 몫을 가로챈 것이다. 동네 사람들도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 집 위세에 눌려 모두 함구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 때 일곱 살이었는데 그 집에 들를 때마다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어머니 저기 있는 자명종 시계와 한란계는 우리 것이니 가져가요!”

하고 울며 몇 년간 떼를 썼다. 나의 할머니는 무식이 억울하여 속으로 울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되돌아오곤 했다. 할아버지 상품을 가로채 대신 타간 아저씨가 미안했는지 나중에 뽕나무 전지가위만 할아버지 몫이라고 어물거리며 줘서 할아버지는 뒷말 날까 하여 거절 못하고 마지못해 그 가위만 받아 왔다. 지금으로부터 84년 전 일이다.

할머니는 그 가위를 보거나 사용할 때마다 가위에 얽힌 이야기를 반드시 나에게 해주었다. 할머니는 피난통에도 그 가위를 항상 지녔고 나중에 부산에 나온 뒤 서울로 이사할 1961년까지 보관했다. 하잘 것 없는 뽕나무 가위 하나지만 할머니가 대포에서 가마니를 짜다가 숯불 가스에 중독되어 일찍 돌아간 남편을 어떻게 그리워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는 원예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도와 항상 그 가위를 자주 사용했다. 나는 그 가위를 쥘 때마다 가위 속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렸다.

“두고 보자! 공부 못한 일자무식의 할아버지를 모욕 준 그 못된 집구석! 나는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무슨 한풀이를 대단히 할 것도 아닌데, 그저 쓴웃음만 나온다.

할머니의 병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 이후엔 평생 아무렇지도 않았다. 또 하나의 태풍은 이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어려운 피난살이, 굶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하는 그 시절에 할머니에 대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성은 지금도 우리 자식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어머니의 삯바느질 솜씨는 온 동네에 소문이 났는데 바느질삯으로 과자나 쌀이나 과일 등 맛있는 것을 푸짐하게 가지고 오면 할머니보다 우리가 먼저 기웃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우선 할머니의 의중이 어떠한지 여쭈어 보고 할머니가 허락하면 그 후에야 우리 몫으로 돌아오곤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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