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45)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04 07:19 조회2,022회 댓글1건관련링크
본문
34. 포로수용소 폭동과 연초중학교 개교
다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야기이다. 포로수용소의 분위기는 흉흉하여 포로 막사마다 꼭대기엔 어떻게 만들었는지 인공기가 매일 나부끼고 지독한 포로들은 손톱들을 일부러 길게 길러 흉기처럼 만들어 흉측스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깡통을 비워 그 껍데기로 칼과 무기 등 각종의 흉기를 만들고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계속 일어났으며 유엔군과 민간 교관들 그리고 반공사상을 가진 포로들이 자주 피해를 당하였다.
연일 긴장된 분위기에서 하루는 두만강 옆 만주 훈춘으로 건너가기 전 우리나라 최북단 마을에서 일본인들에게 구박 받다가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과 속초 위 오호중학교 때의 제자 쌍둥이 형제, 그리고 우리 집안 문중의 경수, 건수(건수 형은 인공 때 아버지가 양양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을 때 집안 일가친척과 형제들을 대동하고 극구 변호한 종순 아저씨의 큰 아들이다) 두 형들이 다가와서 아버지에게 조용히 일러주기를 앞으로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나니까 교육관직을 그만두고 피하라고 하였다. 나의 아버지도 일등급 제거 대상이라 하였다.
이때의 사실을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악한 끝은 없으나 착한 끝은 있는 법이다”
이 말은 그 이후에도 우리 집안의 교훈 중 하나이다.
나의 아버지는 포로수용소 교관으로 근무하는 한편 연초 면에 개설하려는 연초중학교 설립문제로 골몰할 때였다. 그 전해(1951년) 12월 중순부터 포로수용소 내에서 인민군 군가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매일 “스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 원수 만세” 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중학교 개설을 위하여 포로수용소 교관 임무를 그만뒀고 바로 이튿날 12월 15일 연초 중학교가 개교하였다. 1952년 1월 초 아버지 어머니와 두 여동생은 중학교 사택에서 살았다
두만강 옆에서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았던 그 인민군 형은 아주 새빨간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몇 번 전향하라고 권했으나 자기는 이북 부모가 있는 고향으로 간다고 하며 요지부동이었다 하였다. 아버지는 그 형의 폭동에 관한 진실된 귀띔의 말을 듣고 그 길로 유엔사 사령부로 가서 대대적인 폭동 계획이 있으니 철저히 대비하라 하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미군들이 이 말을 소홀히 했다. 1․4 후퇴 뒤 인민군 퇴각시 양민학살한 현장
극렬한 인민군 포로가 길게 기른 손톱으로 반공포로의 눈알을 산 채로 파냈다는 끔찍스런 이야기라든지, 나무창으로 반공포로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 살해했다든지 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만 온 거제도 일대에 퍼졌다. 6월 중순이 되어 어머니가 학교 앞길에서 서쪽 연사리 쪽으로 50미터쯤 떨어진 곳 오른쪽 돌담 아래(나도 그 해 수용소 폭동이 난 지 7개월 뒤 1952년 12월 이후부터 이곳에서 아주 조금씩 나오는 생수를 오래 오래 기다려 물을 받곤 하였다)
옥포 고개 산비탈에다가 가매장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물을 받는 우물 가 큰길로 당시 폭동 시 희생된 시체가 저녁 으슥할 때 3, 4대씩 며칠간 지나갔다고 하였고 그때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하였다 했다. 이 슬프고 끔찍함이란….(계속)
댓글목록
피안님의 댓글
피안 작성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살육의폭동과 5.18광주폭동때 일어난 살육의 참상이
많이 닮아 보입니다.
오늘글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