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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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1-05 04:37 조회1,98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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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재회를 약속한 할머니와의 이별
나의 이야기는 다시 양양 고향으로 돌아온다. 권상사 아저씨에게서 아버지가 보내준 물건 보따리를 벙커에서 받아 들고 다시 지프차를 타고 집에 오니 할머니는 그 때까지 집 앞에서 서성이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나는 할머니를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와락 달려들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계셔요! 동생들도 잘 있대요!”
그 때부터 할머니와 나는 너무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할머니 환갑 때 못해드린 옷이라면서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보낸 한복 한 벌과 상하 내의 한 벌, 그리고 내 내의가 있었다. 할머니는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다간 ‘만세! 만세!’ 하면서 동네사람들이 옆에 있거나 말거나 그저 또 연실 춤을 추었다. 할머니는 그 한복과 내의를 가슴에 꼭 껴안고 내가 읽어 드리는 편지 내용을 귀 기울여 들었다. 할머니는 그 이후에 거제도에 내려가서 부모님을 만날 때까지 한복은 한번도 입지 않고 소중히 보관하고 지니고만 다녔다.
‘찬수 받아 보아라!’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편지는 그 이후 수도 없이 할머니에게 읽어 드렸다.
“또 한번 읽어라!”
“다시 한 번만 들어 보자!”
글씨를 모르는 할머니는 아버지 생각만 나면 편지를 읽으라 하여서 얼마 뒤에는 나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아예 보지 않고도 모두 줄줄 외웠다. 한밤중에도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려다가
“참! 편지 한번 읽고 자자”
하면 어유(魚油) 등잔불을 켜지도 않고 깜깜한 방에 할머니 곁에 누워서
“찬수 받아 보아라!……”
이렇게 줄줄 외워서 편지 내용을 들려 드렸다.
그 이튿날부터 할머니는 일가친척과 마을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 받느라 희색이 만면하였고, 내복을 자랑하느라고 들고 다녔다. 먼데 떨어진 집에 가서도 할머니는 아버지가 보내온 옷을 내놓고는 이웃이 물어보지를 않는데도 “이 옷이……” 하면서 자랑하였다. 나도 기가 살아 가슴을 펴고 어깨를 재고 다녔다.
가끔 동네에서 친구들이 너희 부모는 이북에 갔으니까 빨갱이가 되었을 거라고 했을 땐 기가 팍 죽었고 부모가 없다고 얕잡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도 제 풀에 기가 죽어 매우 슬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대한민국에 내려가셔서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라 하였으니 어깨를 재면서 우쭐거리고 다닐 만도 했다. 세상에 좋은 일이 많다지만 그때처럼 좋았을까…….
권상사는 곧 부대가 부산으로 이동할 때 너를 데리고 가려하니 나 보고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앞서 우리의 소식을 알려고 거제도에서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전방 전투지에 온 김상사라는 군인이 사병을 통하여 왔다 간 일이 있었을 때는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따라 가겠느냐 했을 때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친필을 확인한 뒤에 할머니도 권상사를 따라가는 것을 허락했다.
“언제 전쟁이 또 터져 죽게 될지 모르니 너는 먼저 군인들을 따라 아버지한테 가라”
하고 단호히 말하였다. 당시에 나의 고향은 전쟁터였기 때문에 후방에서 민간인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도 없었고 통신도 끊긴 상태였다. 군인들끼리의 연락망 이외엔 소식불통인 지역이었다. 군부대가 가는 전투함 대열에 민간인, 그것도 여자들은 절대로 군인 배를 탈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손자, 태어나서 그때까지 조금도 떨어지게 하지 않은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군인들에게 맡겨 이 아이의 손목을 저 애비 손에 반드시 넘겨 달라고 군인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할머니와 헤어지기 전날 저녁 할머니는 이별이 막연하게 불안하다는 것만 느끼고 잠자리에 든 나를 당신의 앙상한 가슴에다 꼭 껴안아 주면서 잠도 자지 않고 계속 나의 머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할머니의 결심은 무서웠던 것이다. 앞으로 전쟁이 또 이렇게 계속되면 이 아이를 제 애비 품에 넘기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에 단호해진 것이다.
1951년 9월 중순이 지나 나는 강릉 피난 때 지고 다니던 하얀 무명천으로 된 배낭에 할머니와 내가 넘은들에서 농사지은 찰벼를 찧어 소두 다섯 되가 넘는 찹쌀을 넣었다. 권상사 아저씨가 보내 준 어른 군복 바지와 소매를 둘둘 말아 걷어붙여 입고 검정 고무신에, 눈앞으로 흘러 내려와 앞을 가리는 군모까지 쓴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지프차 뒷좌석에 올랐다. 가을걷이가 완전히 끝난 다음 세월이 좀더 안정되면 민간 차편으로 거제도로 내려온다는 할머니와 헤어져 사령부로 들어갔다.
할머니와 잠시 떨어지는 나는 그날 소리 내어 울었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누나들이 눈물을 흘리고, 친구들은 손을 흔들며 전송해 주었다. 나는 달리는 지프차 위에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며 할머니를 부르면서 울었다. 12살 어린 내가 태어날 때부터 그때까지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는, 내 생명과도 같으며 사랑 그 자체인 할머니와 갑자기 생이별을 하는 슬픔을 겪게 된 것이다.
그 단단한 마음을 가진 할머니도 눈물을 흘렸다. 무서운 전쟁터에 할머니만 남고 나만 떠난다는 두려운 생각이 왈칵 엄습해 왔고 여기서 또 전쟁이 나면 영영 이별하는 것 같아 나의 울음소리는 더욱 애절하게 커졌다. 급기야는 차에서 다시 내려 할머니에게 가겠다고 지프차 안에서 나대며 울었는데 앞에 탄 권상사 아저씨는 가만히 있는데 뒷자리 내 옆에 있는 얼굴이 우락부락하고 시커멓게 생긴 헌병 군인 아저씨가 참다 참다,
“조금 있다가 할머니는 다시 만날 텐데 아버지 어머니 만나러 가는 게 싫으냐?”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핀잔을 주는 바람에 그제야 나는 조금 진정이 되고, 또 주눅이 들어 나대지를 못했다.
우리가 탄 지프차는 물치 장거리를 지나 쌍천 하류다리, 대포, 청초호를 거쳐 지금의 청호동 건너편 속초항에 도착했다. 휴전된 이후의 이야기이지만 지금의 청호동은 두고 온 북녘 고향에 가고픈 한 많은 피난민들의 동네로 변했고, 아직도 이북 5도민이 억척스레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살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속초항 안에서 ‘끌배’(양쪽에 연결한 줄을 당겨서 이동하는 뗏목 같은 배)만 오고가는 한가한 갯마을 동네였다.
청초호는 내 아버지의 소년시절 추억이 담겨진 호수이기도 하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서 이루어진 석호인데 아버지가 일제시대 소학교 3학년 때 교실에서 공부하는 도중 급우 한 아이가 늦게 등교하여 교실문을 열었다. 담임선생님이 왜 늦게 오느냐고 물으니까 늦게 온 그 학생이 쭈뼛쭈뼛하고 말을 못하자 다시 엄하게 다그쳤다.
그제야 지각한 친구가 베적삼 양쪽 주머니에서 거북이 새끼를 여러 마리 꺼내면서 하는 말이 학교 오는데 청초 호숫가 모래사장에 거북이 새끼가 놀아 거기에 팔려 학교 가는 것도 잠시 잊고 그걸 잡느라고 등교시간 늦었다는 것이었다. 말하는 동안에 꺼내 놓은 거북이 새끼 여러 마리가 교실 바닥으로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 바람에 모든 급우들이 공부하는 것을 다 잊고 거북이 새끼 몰이하느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아버지는 생존 시 가끔 나와 고향 여행길에서 청초호 근처만 오면 청초호 거북이 새끼에 얽힌 유년시절의 유쾌했던 추억을 얘기 하곤 했다.
훗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김부식의《삼국사기》를 국문으로 완역하고, 당신의 저서인 고등학교 한문2 검인정 교과서로 제자들을 가르친 한학자였으니 학문에 대한 소신과 열정이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대포 소학교에서 12살 5학년때 가세 빈곤으로 학업을 중퇴 하였다. 평생 아버지 학력은 소학교 5학년 중퇴가 전부 다이다. 그러나 6살부터 7살까지 2년동안 서당 실력으로 훗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김부식의《삼국사기》를 국문으로 완역하고, 당신의 저서인 고등학교 한문2 검인정 교과서로 제자들을 가르친 한학자였으니 학문에 대한 소신과 열정이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학구열이 대단해서 국립도서관 서고에서 세상에 한번도 빛을 보지 못한 많은 한문 고전 서책을 발굴 복사해 이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세상에 내 놓았다. 38책 64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저서와 역서를 세상에 내 놓았던 것이다. 84년 2월 서울 혜화동 보성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식 이후에 성북동 우리집에 "설악정사" 라는 이름으로 한문서당을 열어 우리나라 각대학의 한학교수들을 대상으로 1987년 5월 6일 세상 떠날 때 까지 고등 한학을 강술 하였다. 12살 소학교 5학년 중퇴후 주경야독하여 독학으로 각종 고시에 합격하였고 고등학교 교사 경력이 전부인 아버지가 국내 전국 유수의 석박사 교수들을 상대로 서당 훈장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당대에 제일의 국내 석학들과 교류하여 대한민국 우리나라 학계에서 아버지는 자타가 공인했던 일세의 자리매김 된 한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이런 면으로 보면 학력이란 하나의 제도적인 틀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학이라도 노력하는 집념의 결과에 그 결실이 크게 맺어진다라고 짐작해 본다.
할머니는 그 해 12월 25일 오전 11시 우리 가족과 거제도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 고향을 떠날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한나절씩이나 털썩 앉아서 내가 떠난 동해 푸른 바다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고 한다.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을 베틀 방에 모아 놓고 매일 한 번씩 만져 보면서 손주가 보고 싶은 외로운 마음을 달랬다고 했다. 나는 꼬마 군인 행색으로 속초항에 정박한 3000톤 급 LST 전함에 올랐다.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를 군인들은 ‘아가리 배’라고 불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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