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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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20 07:05 조회2,1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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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양양군 남대천 하류
(1). 38선 넘나드는 고닲은 피난길.
인민군과의 대치상태는 소금재 고개 너머 넘은들 벌판에 설치한 철조망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설악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쌍천 물과 넓은 벌판이 전장이 되었다. 밤낮으로 군인들의 외치는 소리이고 주민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이런 가운데 군인 아저씨들이 시간만 나면 조금 전에 겪었던 전투 무용담을 재미있다는 식으로 너털웃음 웃고 익살을 떨어가면서 이야기를 하다니…….
1951년 4월 하순 도문 쪽에 주둔한 인민군과 강현 우리 동네에 주둔한 국군과 대판 싸움이 일어난다는 말이 자주 오갔다. 이번에 국군이 밀리면 우리가 마을에 머물러 있다가는 인민군에게 다 죽는다고 하였다. 우리 마을과 인근 마을 여기저기에서 이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국군이 오래 주둔한 가운데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대들어 정성으로 국군에게 밥을 해먹이고 편의를 제공하면서 따뜻하게 대접해 주었기 때문이란다. 또다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피난 보따리를 싸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대대적으로 피난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1ㆍ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가지 못한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 인민위원장 사건 때문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마을마다 너무 참혹한 보복을 당했기에 다시 그들이 들어오면 이제는 모두 죽는다고 공산당들의 악질적인 모습을 피해 개미새끼 하나 없이 모두 모두 남쪽으로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이제 피난가면 영영 집에 돌아오지를 못할 것이라 하면서 장정들도 지고 가기 어려운 무거운 피난 짐 보따리를 쌌다. 동네 한 아저씨가 할머니더러,
“아주머니! 이렇게 무거운 것을 어떻게 지고 가려고 그러시우?”
하고 말하면서 짐을 줄이라고 얘기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나도 조그마한 배낭에 보리쌀 몇 되 옷가지 몇 점 정도를 넣었다. 이때 남쪽으로 피난가지 않은 집들은 동네마다 두서너 집 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먼젓번에 공산주의 이북 간부들과 이북으로 뒤따라간 친인척들이라 했다. 조상대대로 한 마을에서 평화스럽게 오손도손 같이 재미있게 살다가 어느집은 남쪽으로 어느집은 북쪽으로 갈라지는 이 비운속에 마을 마을의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슬프게도 무참하게 산산조각 깨지고 말았다. 사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들을 슬프게만 하고 무섭게 다가와야만 하는 것인가.
5월 초 강현 일대에는 모든 농촌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 마을 사람들이 떠난 빈 집 고을엔 국군만 진지를 구축하고 쳐 내려오는 적군을 계속 막고 있었다. 아저씨들은 우리를 지키려고 싸움터에 남아 있고 우리들은 살기 위해 남쪽나라 강릉 쪽으로 보따리를 들고 이고 지고 떠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도 이별이라고 군인 아저씨들은 집을 떠나는 우리 마을 사람들 손을 붙잡고 엉엉 울면서 이별하는 모습도 보였다. 적군을 물리치고 대한민국 우리나라를 지키겠다고 의연히 집을 떠나올 때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 부모 가족들과의 이별 모습을 생각해서 그러하였으리라. 잠시 동안이지만 헤어진 그 이후 그 아저씨들은 며칠 뒤 벌어졌다는 무섭게 치열한 전투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도 우리는 모두 다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저씨들이 밤잠을 자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전방을 적으로부터 처절하게 지키며 버텨 놓았기 때문에 나나 동네 사람들이 살아서 옛날이야기를 하고 이제껏 사는 것이다. 아저씨들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 미안하기가 짝이 없다. 나라 구하겠다고 적군과 마주보면서 생명을 걸고 싸워 이긴 그 덕택에 우리 국민들과 국가는 무사했던 것이다. 참으로 국군들의 훌륭한 나라 위한 몸 바침에 감사와 송구한 마음 가득하다.
우리들은 군인 아저씨들과 이별하고 일제시대 1919년 3월 중순 어느 날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강현 사람들과 같이 모여 일본 놈들에게 대들어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라고 힘차게 불렀다던 물치에서 정암리 큰 길을 택하여 왼쪽으로는 무심한 동해 바다의 일렁이는 파도가 백사장에 밀려 오르며 부딪치는 모양을 낙산사 뒷산 쪽 후진(뒷나루, 지금의 설악 해수욕장)까지
피난민의 남대천 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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