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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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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16 06:03 조회2,21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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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전쟁 유행병 장티푸스

 3월쯤 되어 우리 동네에 역질이 돌았었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전쟁 통 한가운데 들었던 동해안 전체에 역질이 돌았다. 장티푸스가 온 것이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소리 없는 죽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감염된 환자들은 고열 때문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정신을 잃어 대부분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은 회복된 다음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누구누구 집 아이가 죽었다. 누구 집 아저씨와 누구 집 할머니가 돌아갔다…….

매일같이 슬픈 얘기만 들려 왔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전쟁 뒤에 찾아오는 괴질에 죽어가고 있었다. 전쟁은 이렇게 또 다른 아픔을 낳았던 것이다.

얼마 후 나도 장티푸스에 걸렸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데 나는 금방 인사불성이 되었다. 한 열흘도 넘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전혀 몰랐다. 방공호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친척이고 뭐고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유행병 앞에서는 인정사정도 없는 것이다. 할머니와 나는 방공호에서 쫓겨났다. 할머니는 축 늘어진 나를 업고 길가에 있는 우리 집은 위험하여 내려가지 못하고 방공호 아래 있는 큰 쉴집 대청마루 밑에서 자리했다.

이 집은 그때 큰아들 민태 형과 형수가 극렬한 공산주의자로 월북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나에게 친절하던 그 형이 우리 집 전담 감시자였다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월북한 민태 형이 결혼할 때가 생각난다. 늦은 봄쯤이었는데 그 집 화단에 온갖 꽃이 피어 참 아름다웠다. 특히 노란 꽃이 키가 큰 여러 대궁에서 무더기로 깨끗이 피었는데 멋있어서 가끔 유심히 쳐다보던 생각이 난다. 형이 장가를 가는 잔칫날 마당에서 시집살이 온다는 형수를 봤는데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도 아니고 줄곧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그 눈감은 모습이 하도 이상하고 답답해 보여 그날 저녁 어두컴컴할 때 동네 형들과 누나들 뒤꼭지를 따라 그 집 사랑방 앞으로 갔다. 나는 툇마루 끝에 매달려서 꼬마들은 저리 가라는 누나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호기심 가득하여 형들이 뚫어 놓은 창호지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잔치할 때와 마찬가지로 집안 형수는 방안에서도 여전히 귀신처럼 눈을 내리깔고 꼼짝 않고 있었다.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양 볼과 이마엔 연지곤지를 찍어 바르곤 그 예쁜 여자가 쥐 죽은 듯이 앉아 숨도 쉬지 않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신부가 말도 않고 있어 귀신처럼 보였다. 형들과 누나들은 연신 키득거리며 무엇이 좋은지 서로들 힐끔힐끔 쳐다보고 손바닥을 비벼가면서 법석을 떨었다. 다음날도 그 집 마당을 어슬렁거렸는데 그 새 신부는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역질에 걸린 나는 할머니와 같이 텅 빈 큰 쉴집 대청마루 밑에 웅크리고 숨었고 불도 피우지 않은 상태에서 할머니는 나를 간호하였다. 보름 가까이 오들오들 떨고 지냈으니 이왕 정신을 못 차리고 늘어져 투병하는 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간호하는 할머니의 고생은 오죽하였으랴. 할머니는 당신 생명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손자를 살리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전쟁 통에 무슨 예방약이고 치료약이 있었겠는가? 전통 한약재 하나 없는 그때의 상황이다. 생짜로 앓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대책 없이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방공호에 있는 동네 친척들은 얼씬대지도 상대하지도 않았다. 감염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나는 열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였다. 보름 동안 두 차례인가 어떻게 희미한 기억이 생각날 뿐 그 외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때 할머니가 하얀 무를 잘게 썰어 빨간 실고추를 띄워 만든 물김치 국물을 내 입에 떠 넣어 주었다. 나는 그 이후 지금까지 평생 그렇게 시원하고 입맛이 도는 물김치 맛을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었다.

서서히 회복하는 나를 보던 할머니는 매일 울다가 다 말라 버렸을 눈물을 기쁜 마음으로 다시 흘리며,

“찬수야, 이제 됐다! 네가 살아났으니 내가 네 애비 에미에게 너의 손목을 넘겨 줄 수 있게 되겠구나! 이제 됐다! 이제 됐다!”

하면서 기뻐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할머니는 나를 간호하는 중에도 그 무서운 장티푸스에도 전혀 전염되지 않았던 것인데, 지극한 사랑의 일념에는 맹위를 떨치는 전염병도 감히 우리 할머니를 범접치 못하였으리라!

요즈음 나는 손녀딸을 돌보고 있는데 가끔 아들 내외가 손녀딸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친정집을 다니러 갈라치면 2~3일 간은 집안이 텅 빈 것 같은데 하물며 그 옛날 나의 할머니는 어떠했겠는가. 또 홀로 살아난 나의 아버지 한 분만 쳐다보고 살아왔으니 나에 대한 집착이 어떠하였겠는가.

51년 그 해가 할머니의 회갑이 되던 해였다. 난리 통에 무슨 회갑이고 설이고가 있겠는가. 장티푸스를 거뜬히 이기고 일어선 나를 보고 동네 친척들은 우리를 다시 방공호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장티푸스를 앓고 난 사람들은 모두 머리털이 몽땅 빠지는데 이상하게도 나의 머리털은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계속)

 

댓글목록

금강인님의 댓글

금강인 작성일

참으로 "죽었다 깨어났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김찬수 선생님께서 이렇게 애국하시도록 신께서 도우셔서 머리털도 빠지지 않게 하셨나 봅니다.
김찬수 선생님의 글은 이념과 사상을 넘어,
  "민초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이 나라를 지켜왔는지"
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입니다. 같은 일이 고대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반복되겠죠.

그리고 책이란, 남에게 봉사하고자 쓰는 것도 있지만, 원고료도 챙겨야 할 측면이 있는데,
이렇게 다 공개해 주시니, 더욱 고개가 떨궈지고 숙연해질 따름입니다.

저는 추천 만빵합니다.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저도 어릴 때 죽을 병을 앓았지요!!!
다른 사람같았으며 다들 죽은 몸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아버님께서 의사였기에 살렸다고 하덴데
지금도 그 후유중이 있는지...
어쩐지는 모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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