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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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17 01:36 조회2,18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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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소금재 고개
전황은 다시 국방군의 진격으로 인민군인들은 우리 마을에서 완전히 북으로 물러갔다. 1951년 이때 4월 중순쯤인가 하여 멀리 남쪽으로 내려갔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1950년 9월 말 그때처럼 아주 지친 모습으로 꾸역꾸역 또 밀려 올라왔다. 그때 우리 집 텃밭 대나무 옆 언덕 쪽으로 빨간 뙈기복숭아(개복숭아) 꽃이 아름답게 피어 한참 볼 만하였다.
패잔병 인민군들이 줄을 지어 다친 몸을 이끌고 소금재 고개를 넘어가다가 모두들 쉬는데 인민군 한 사람이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여 우리 텃밭 쪽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나무 밑에 총을 내려놓고 복숭아나무에 기어 올라가 아름다운 꽃가지를 여러 개 꺾어 갔다. 소금재
4월 중순 넘어서 엄청나게 많은 국방군이 우리 동네 앞 관덕정 공터 넓은 곳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개울말 정승골 넘어가는 길 왼쪽에 있는 작은 서당집의 커다란 기와집에 사령부 사무실이 들어섰다. 우리 동네 소금재 고개 너머 북쪽 넘은들,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쌍천을 경계로 도문 속초 쪽으로는 인민군이 주둔하여 쌍방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양상으로 전황이 형성되었다. 넘은들 한복판에 철조망이 설악산 입구 핏골에서부터 내려와 상도문 그리고 장잿터 마을, 쌍천 남쪽으로 바닷가 기차 철교 있는 데까지 이어져 무시무시하고 삼엄하게 쳐져 있었다.
이때 우리 동네 개울 말에 슬픈 일이 또 벌어졌다. 내친구 심동갑 심동각 육촌 형제가 살았는데 동갑이 아버지 성근 아저씨가 물치 장거리에 국군 환영 만세 부르러 갔다가 강선께로 올라오는데 하필이면 마침 국군장교들이 전투 작전을 짜느라 지도를 들여 다 보는 곳에 가서 기웃거리다가 반가운 마음에 같이 머리 디밀고 같이 들여다 본 일이 있었다. 성근 아저씨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순간적으로 “너 정탐군이지!” 하며 오해를 해 아저씨가 변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백주 대낮에 바로 앞에 흐르는 강 현천 강둑으로 끌고 가서 총으로 사살해 갑자기 비명으로 목숨을 잃었다. 울고 불고 하는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의 말로는 아저씨가 평소 남이 뭘 하면 꼭 참여하려는 성격이 있어서 그날도 반가운 마음에 기웃 거리며 비상시 군대 수칙도 모르고 장교들 틈에 고개를 들여 밀었다가 난데없이 변을 당한 것이라 했다. 그런 뒤에 군인들은 전투명령을 받고 삽시간에 모두 소금재 고개 너머로 진군했다. 그 이후 동각이 동갑이네 가족들은 맥이 빠져 기운을 잃고 살았다. 양쪽으로 대치한 군인들이 이리진격하고 저리 진격하는 바람에 가운데 백성들만 죽을 지경이었다. 전쟁이란 이렇게 착한사람 나쁜 사람 구분도 없이 처신 잘못하면 이유도 모르고 모두 비명에 죽는 경우가 수두룩 했다.
이 무렵 국군들이 커다란 밥통에 밥을 담아 두 사람이 앞뒤로 하여 어깨에 메고 뒷산 참호로 나르던 모습을 많이 보았다. 어떤 때는 고지의 참호 진지로 밥을 나르던 군인 둘이서 무슨 의견 차이가 있었는지 싸움이 붙어서 앞뒤로 장대를 어께에 매고 맞들고 가던 커다란 밥통은 길옆에 내려놓고 피가 나도록 서로 주먹질을 하던 모습을 친구들과 같이 구경했던 때도 있었다. 서로 생명을 지켜주어 가며 전선에 같이 있는 전우들이 무슨 원수 졌다고 저렇게 아무도 없는 골짜기 안에서 단둘이 주먹질하며 코
피 터지게 싸운단 말인가.나는 지금도 9월 고향 선산에 벌초하러 갈 때마다 다 성장하고 군 복무도 오래 전에 마친 내 자식들과 며느리들에게 그때의 사실들을 들려준다. 소금재 고개를 넘어 차를 몰고 달리다 멈춰 세우고 그리고 모두 내리게 한 뒤 당시 이 벌판 양쪽에서 치열하게 총을 쏘며 대치하던 때를 떠올리며, 옛날 할머니가 나에게 옛날얘기 들려준 것처럼 나도 자식들에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때의 끔찍했던 전쟁이야기를 해 주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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