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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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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15 07:12 조회2,30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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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설악산 전투

 5월 말쯤 설악산 대청봉 아래쪽에서 치열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대낮에도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그 유명한 설악산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전투가 일어난 곳은 화채봉 골짜기와 능선 그리고 대청봉 동쪽 골짜기 쪽이라고 했는데 당시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 소리를 우리 동네에서 밤낮으로 들었었다.

다시 생각해 보지만, 어디에 포탄이 어떻게 떨어졌고 어디에서 양쪽 군대가 총을 쏘았는지 전혀 짐작을 할 수가 없다. 무섭게 터지던 포탄 소리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콩 볶듯 하는 소총 소리와 동해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함포소리 그리고 지진이라도 난 듯한 포탄 터지는 소리만 저 계곡에서 있었겠지 하고 내 마음에 아른거릴 뿐이다.

멀찍이 떨어진 동해바다에서 UN군 전함이 함포사격을 하는데, 비유하자면 소북과 대북으로만 형성된 타악기 연주단의 연주소리와 같았다. 리드미컬하게 장단을 맞추어 규칙적으로,

“쿵닥 쿵닥 쿵닥 쿵닥……. 쿵다닥 쿵다닥 쿵다닥 쿵다닥……. 쿵 쿵 쿵 쿵……. 슈잉 슈잉 솨아아…….”

하고 소리가 나면 조금 있다가 우리 동네 상공으로,

“슈아악 슈아악… …. 씨잉 씨잉……. 후아악 후아악…….”

동해의 UN군 함포사격 전함

하며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로 밤에 났는데 이 소리는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해상에서 설악산 내륙을 포격하는 함포소리가 그렇게 났던 것이다.

이렇게 일어난 설악산 전투는 우리 국방군이 진군하는 북쪽으로 확산되었다. 강원 북동부 태백산맥의 모든 능선을 포함하여 그 아랫동네 서쪽으로는 인제, 서화, 그리고 지금의 양구군 해안 면과, 동쪽으로는 간성과 고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줄기차게 벌어진 인민군의 공격과 우리 국군의 방어와 공격전이었다.

1951년 늦봄 내내 동해에서 올라오는 함포소리가 끊이지를 않았고 설악산 일대 전역에서 포탄의 굉음이 밤낮 없이 산천초목을 진동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 휴전이 될 때까지 오랜 동안 쉼 없이 밀고 밀리는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어른들의 말로는, 바로 북쪽에 금강산을 두고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은 더더욱 지독했다고 하였다. 또한 설악산 전투에서 함포의 지원사격이 없었으면 우리 국방군이 도저히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시간이 지난 뒤 어른들이 말했다. 바다에서는 함포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튿날부터는 하늘도 먹구름으로 덮여 장대비가 주룩주룩 밤낮으로 내렸다.

이런

미군 전차부대

가운데 민간인이 거주하는 우리 동네와 이웃동네에서도 큰 일이 있었다. 동네 기운께나 쓰는 청년들이 숨어서 지내다가 주동이 되어 상복골, 둔전리 석교리 등지에서 설악산 전투에 투여된 국방군 식량보급을 우리 강현에 사는 사람들이 지원하였던 것이다. 식량 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송암산 뒤로하여 가파른 화채봉 골짜기 쪽으로 올려 나르고 둔전리 쪽과 간곡리 청년들도 대청봉 아래 골짜기로 올라가 우리 국군 진지에 식량을 날랐다.

사흘 낮밤을 그렇게 쉬지 않고 날라다 국방군이 전투에 이기도록 자발적으로 힘을 썼으니 민간인들의 애국적인 성의도 대단했다. 공산 치하에서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서러움을 받았으면 생명을 걸고 국방군을 돕자고 그 가파르고 높은 설악산 골짜기까지 식량 가마니를 지고 오르내렸겠는가. 그런데 설악산 전투에서 진 인민군이 금강산 쪽으로 모두 도망을 가고, 더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국방군에게 패한 패잔병들이 후발대로 잠행해서 북쪽으로 쫓겨 갈 때 마을마다 들렀는데 이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밀고로 쌀가마니 지고 나르던 청년들이 많이도 납치를 당했다.

이들은 인민군들에게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윗복골 서울집, 밀양집, 큰고성집, 작은고성집 형제분, 오석집, 안산집, 밤나무집, 작은 가랫핏집 등 그리고 둔전리의 추씨 아저씨 석교리의 김씨 아저씨 등등 이 사람들이 모두 다 납치당해서 총살당했다 하는데 지금도 슬픔을 안은 아주머니들과 후손들은 마을을 지키고 산다.

세월이 지나 그때의 우리 또래는 70세 안팎이 되었고 아주머니들은 할머니가 되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많다. 납치당한 사람 중에 후손이 없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 마을 안에서 서로의 갈등과 오가며 교차하는 남북 군인들 틈바구니에서 밀고 당한 사람들이 붙들려가고, 그런 뒤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서로 눈치를 보면서 경계하며 지내고, 참으로 전쟁이란 이렇게 온천지의 평화를 박살내고 휩쓸어 무너뜨렸던 것이다.

설악산으로 날아가는 포탄이 오발되어 송암산을 넘지 못하고 산 아래 떨어져 불발탄이 된 것이 있었다. 이것을 윗마을에서 주워다가 마을 공회당 앞마당에 뇌관을 밑으로 하고 길이별로 일렬로 주르륵 땅바닥에 세워 놓았는데 작은 것도 있었지만 큰 것은 웬만한 사람이 들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무거운 것들이었다.

마을 형들과 우리들은 그것들을 겁 없이 들어가며 기운 자랑들을 하였다. 불발탄이라고 위험하지 않은 게 아닌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후에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주워온 포탄을 가지고 놀다가 포탄이 터져 마을이 둘러빠지고 또 죽은 사람도 많았다.

나의 왕고모 할머니의 큰아들 안동석 아저씨, 즉 내 아버지의 고종사촌 동생 되는 아저씨가 겨울에 낟가리에서 검불을 한 아름 안아다가 소여물을 끓이느라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었다. 그런데 한참 타들어가던 아궁이 속에서 갑자기 수류탄이 터져서 커다란 소여물 통과 부엌 전체가 굉음과 불똥으로 난장판이 된 일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자세히 모르나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사상이 다른 나쁜 사람이 아저씨 몰래 수류탄을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어 휩쓸려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아저씨도 폭음과 화염과 파편으로 온 몸을 크게 다쳐서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했는데 겨우 실명은 면하였으나 그 이후 평생 동안 그믐날 밤 야경을 보는 느낌으로 거의 맹인같이 살았다.

그 이후 눈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구해 복용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고 특히 생 뱀만 있다면 그것을 구하려고 불원천리하고 가서 구해서 복용하였다. 몸의 다른 곳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눈에는 효과를 보지 못한 것 같았고 그 폭발 후유증으로 50을 조금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저씨의 아버지 즉, 나의 왕고모 할아버지는 양양 일대에서 제일 기운이 세어 안장사라 불리어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땅바닥에서 수 맷돌 짝에 뾰족이 나온 쇠를 앞 잇빨로 깨물어 땅바닥에서 머리 위까지 하늘로 쳐들어 올렸다 하니 힘이 얼마나 센지 짐작을 할 수가 있겠다.

1967년도 동석 아저씨는 돌아가기 얼마 전 서울 성북동 우리 집에 다녀갔는데 그때 나는 아저씨를 안내하여 창경궁과 비원 구경을 시켜 드렸다. 아저씨는 주변이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안내하는 나에게 “이 코스는 어디로 가는 곳이고 저 코스로 가면 어디로 가는 길이야?”라고 방향을 코스라고 영어로 말하면서 나의 손을 잡고 수도 없이 묻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저씨의 큰아들 광혁은 나의 6촌 동생이다. 삶의 자세가 아주 성실해서 지금도 양양 일대에서는 신의 있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이웃들과 손을 잡고 농촌마을을 잘 일으켜서 부농의 마을로 이끄는 성실한 그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든든한 느낌이 든다.

1ㆍ4 후퇴 이후 국군이 다시 전세를 뒤집어 북상할 때 어느 저녁 무렵 나는 할머니와 같이 왕고모 할머님 댁에 갔다 왔다. 내려오는 길에 낙산사 위로 갑자기 비행기가 떴는데 절간에 포탄을 투하해서 낙산사에 불길이 올라 시커먼 연기와 함께 하늘을 찌르던 장면을 보고 아랫동네 우리 집으로도 못 내려가고 할머니와 밭둑에 웅크리고 숨어 오들오들 떨던 생각도 난다. 전시라 갑자기 일어난 사건들은 이런 끔찍하게 무섭고 놀라운 구경거리뿐이었다.(계속)

 

댓글목록

금강인님의 댓글

금강인 작성일

저는 늘 선생님의 글을 감명깊게 잘 읽고 있습니다.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들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반공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시는 글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도 625때 전쟁관련해서 국방부에 글을 써 준적있는데요.
아버지가 적들을 칼로 따내서 죽이기 전날 밤, 인민군들이 경계선을 넘어와
아버지의 전우들을 무참히 죽이고 갔기 때문에, 다음 날 새벽 전우들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되었는데.
너무도 적나라하게 북한 괴뢰의 등을 찌르고 모가지를 칼로 베어내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해서 주었더니.
국방부쪽에서, 전투 장면 중 잔인하다 싶은 것들은 이거저거 다 빼놓고 전쟁수기집에 실었습니다.
이래서 전쟁당시 참여했던 분들의 참전수기집이 꼭 동화집 같아졌습니다.(좌빨시절에 국방부가 만든)
한번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나갔다가 아버지의 1개 소대가 아버지 빼 놓고 모두 전멸당한 적도 있었다고.
아버지는 그때 운좋게 살아남았고, 전쟁때 입은 부상으로 지금도 휴유증이 남아서 생활이 불편합니다.
그리고 우리 집안은 황해도에서 공산당들 때문에 친가쪽 일가친척이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북한쪽 아버지 친구들도 대부분 반공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사형당한 바 있습니다.
남한에서 피난민 이용해서 돈좀 챙긴 이들과 북에서 빨갱이의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토록 "뼈에 사무친 사연"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종북좌빨이 되는 듯 싶습니다.
"설마! 인간이 그렇게 잔인하게? 선거용으로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야!" 라고 착각하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이승복 사건, 칼기사건, 천안함 폭파등도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제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개xx 들을 실제 많이 보았습니다.
이래서 김정일을 도와준 김뒈중, 뇌물현의 주구들이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간당한 딸을 두고 있는 부모는, 강간범을 갈갈이 찢어죽이고도 억울함을 달랠 길 없는 법이죠.
그런 피해자들한테 방관하는 구경꾼들은 이렇게 말하죠.
우리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라고. 그러니 강간범 사형만은 없애야 한다고.
글을 쓰다보니 말이 빗나갔습니다만.
아무튼 김찬수 선생님의 글을 정말 공감하면서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달마님의 댓글

달마 작성일

남다른 점이 있으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법인데....  김찬수님의 기억력은 정말로 남다르십니다. 눈길을 자꾸만 잡아 끄는군요.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初代 駐越 韓國軍 總司令官 '채 명신(蔡 命薪)' 중장님의 회고록 - - - '死線을 넘고 넘어{1998년도 경 4판 발행, 매일 경제 신문사 발행}' - - -  아마도 '채 명신' 소령님께서 1951. 2월 ~ 5월 경 까지의 약 700여명의 유격대를 인솔; 북위 37도선이던, 경기도 평택 - - -  강원도 영월을 연하는 선에서, 자진 북괴군 진지 후방으로 지상 침투, 북괴군 복장으로 반란군 행세를 하면서 후방을 교란 및 첩보를 무전으로 통보하고 미군 공군기를 유도, 동해안 속초.양양의 북괴군 제88여단을 완전 붕괴시키고, 북괴군 대남 빨치산 총책인 '길 원팔' 중장{아군의 소장}을 체포, 사상 논쟁을 하고 끝내는 후송치 못하고 자결케 하며, ,,.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눈치를 챈 북괴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자진 철수. 후퇴!

속초 ㅡ 양양 ㅡ 미시령 고개 ㅡ 백담사 ㅡ 인제 설악산 ㅡ 한계령 오색 약수터 ㅡ 박달재 ㅡ 인제군 기린면 현리 군량밭 ㅡ 홍천 ㅡ 평창 진부! ,,. 아군 제 9사단 수색대대 尖兵(첨병)과 '백골병단' 유격대 斥侯(척후)와의 奇蹟的인 연결 작전 성공, 제9사단 참모장이던 '박 정희' 대령에게 재 편성되어지는 ,,.

그 철수 왼료가 1951.5.16일이었다고 합니다. ,,. 그 뒤로부터 만 10년 뒤! 역사적인 1961.5.16에 참가하여 혁명 제3일차 새벽에 제5사단장이던 '채'준장님은 동대문으로 사단을 출동, 혁명을 결정적으로 성공시키셨죠. ,,. 그 때와 우연히 장소가 일치합니다만 ,,.

'김 찬수'님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읍니다요. ,,. ^^* 餘不備禮,悤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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