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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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09 00:09 조회2,2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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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방군의 최초 38선 돌파와 김일성 폭정에 시달린 북한주민의 환호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 이후 내가 62년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대한 뒤에도 지금까지 군가와 행진곡만 나오면 내 몸은 기쁨과 용솟음치는 애국의 기상이 몸 안에서 서서히 일어남을 느낀다. 북진하는 차 위에서 환영 인파에게 간혹 여러 가지 물건을 던져 주는데, 태극기를 흔들던 내 가슴 앞으로 종이 뭉치가 날아와 얼떨결에 받아 뜯어보니 화랑 담배 한 뭉치였다. 담배를 피우는 내 할머니는 나중에 피워 보고 맛이 좋다고 하면서 동네 아저씨들에게도 골고루 다 나누어 주었다.
쉴집 할머니는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가운데 길 쪽으로 나가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연신 “어서 오너라! 어서 오너라! 자꾸 자꾸 오너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차량에 치일 뻔하기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한참까지도 흥에 겨운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할머니는 남쪽에 가서 국방군이 된 세 아들을 기다리는 열정은 우리 어머니들의 모성과 같으리라. 기다리던 아들들이 온다는데 신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머일 이모할아버지도 희색이 만면하여서 이상하게 매달고 다니는 상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기뻐했다. 온 마을 동해안 우리지방의 갑작스런 대축제였던 것이다.
인민군이 다 퇴각하였다고 하는 늦가을부터 우리 마을은 며칠간 평화롭게 지냈다. 남쪽으로 월남했다가 귀향한 동네 아저씨들이 여기저기에서 의기양양했고 그 가족들은 어깨를 재고 큰소리치면서 다녔다. 한편 이북으로 도망간 인민위원장 친인척 등 동네에서 인민재판 한다고 이웃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던 패거리 빨갱이들이 모두 다 이북으로 줄행랑을 놓았고 그들의 먼 친척들은 혹시나 하여 주목을 받을까 보아 무슨 다른 잘못도 없는 듯하였는데도 마을에서 쥐 죽은 듯이 지내곤 했다.
인민재판 광경
빨갱이들이 거론한 동네 사람들은 평상시 그분들과 농사를 지으며 다정하게 지냈고, 옛날은 거의 동네가 집성촌이므로 서로를 잘 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이때 모두 자리만 지키고 앉아서 불안한 기색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쫒아 나와 서 있는 아저씨들을 한사람씩 개 패듯이 두들겨대고, 아저씨들은 선혈이 낭자한 모습이 되었다. 어린 우리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놀랜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들에게 고함을 친다.
“동무들은 어서 집으로 가라!”
비명소리가 나오든 말든 그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이런 식의 무법천지의 일로 6ㆍ25 전후의 우리나라 전 강토의 국민들은 억울하게도 깊은 슬픔에 젖었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타지에서 우리 동네에 와서 살던 신현필이란 사람과 우리 집안 인척인 김일수란 사람과 우리집안 김종덕 아저씨가 인민 재판에 억울하게도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그들로부터 매질을 당하였다. 이유는 남쪽으로 내려간 반동분자 친척이라는 명목이었다. 종덕 아저씨는 몽둥이로 두 다리를 몹시 맞아 수개월간 운신을 하지 못하였다. 김일수라는 분은 공산당들의 무자비한 매질의 후유증으로 그로부터 약 15년간을 병석으로 지내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 났다. 소위 저 악랄한 김일성 추종자 빨갱이들이 어진 농촌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모아놓고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잣대로 일방적으로 행패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는 인민들이 원하는 대로 올바르고 합법적인 재판을 하였다고 널리 알린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인민재판이란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설치는 당시의 현상이 이렇게 무법천지였음을 말해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아주 원시적인 수단으로 몇 사람을 의도적으로 겁을 주어 동네사람들 전체가 꼼짝 못하고 그들의 말을 순순히 잘 듣게 할 목적으로 행패를 부리는 수단이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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