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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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03 08:08 조회2,088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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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일성의 기습남침
1949년 늦여름부터 시작하여 1950년 봄철까지 김일성은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농사일이나 집안 일 틈틈이 별도로 밤이면 그릇에 곡식을 담아 그 그릇 안에 있는 곡식 알갱이를 정확히 세어 한 그릇에 곡식 종류별로 몇 개씩이나 들어가는지 알아보라고 시켰다.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릇안의 콩도 세고 보리쌀도 세고 심지어 깨알까지도 세었다.
또 낮이면 소와 말먹이 풀을 베어 바짝 말려 온 동네마다 쌓아두곤 했다. 어느 정도 쌓이면 그 말린 마초(馬草 : 말먹이풀)가 강현 역 안에 우마차로 실려 왔다. 어디다 쓰는지도 모르고 지게까지 동원하여 동네마다 법석을 떨었다.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억새풀을 베다가 손도 베어가면서 참여했는데 우리 동네에서 나보다 네 살 더 많은 기운이 센 형들이 지게로 그 풀을 동네 공회당 마당이라든지, 각자의 집에 말렸다가는 강현 역 역사 앞으로 날랐다.
내고향 이웃동네인 간곡리에 사는 내 친구에 지금 한시작가인 추종삼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나보다 한살이 더 많았는데 1949년 7월 강현면에 있었던 "호림부대" 사건당시 호림부대에 협조한 사실이 발칵이 되어 인민재판에서 처형을 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그때 종삼이는 열살이었다. 공산치하가 흉흉하기 말이 아닌 때 였다. 그해 9월부터 종삼이네 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초를 장만하여 소 질매바리로 옮겨 강현(낙산)역에 날라다 쌓았다. 그 동네 마초 만들기는 화채봉께로 올라가는 10리나 떨어진 학소암이라는 곳에서 이루어 졌다. 대청봉 아래 넓은 산골짜기에서 억새풀을 베어 바닥에 깔아 말렸는데 비기오면 그 말리던 억새풀 더미에 곰팡이가 피어 다시 장만하여 바짝 말린 뒤 그것을 소 질매바리로 날라다가 역사안의 광장에 산더미 같이 쌓았다고 했다. 종삼이는 10살인데도 벌써 체격이 커서 어머니와 같이 소를 몰고 다녔다고 지금도 고향에 가서 만나면 당시 경험 이야기를 극성스럽게 한다.
그의 외 할아버지 최종서란 분이 있었는데 6.25가 나던해 6월 중순께 다 되어 갑자기 짐실어 날르기에 동원된 동네 어른들과 함께 간곡리에서 20리 떨어진 양양역까지 빈 질매바리 소를 끌고 가서 거기서 부터 남쪽으로 30리 실이 되는 기사문리 까지 낮에는 쉬고 야밤에만 밤새도록 군수물자와 화약상자 포탄등의 병기물자를 38선 임박한 전 지역부대 진지에 일주일이 넘게 비밀리에 신속하게 실어다 날라다 놓았다고 한다.
6.25 바로 직전 우리고장 전지역에서 농촌 어른들을 동원하여 일어난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런 일들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1952년에 거제도에 피난을 가서 피난민들에게 들어보니 38선 접경 바로 이북지역 중부지방 전역에서 똑깥은 일이 벌어졌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는 참 신기하고도 이상하게만 생각하엿다. 그런 일 들이 우리동네의 양양고장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양양일판 전체에서 모아 놓은 마초더미가 초여름인데도 강현역을 비롯하여 양양역등 전역에 난데없는 마초더미가 갑자기 이곳저곳에 산처럼 쌓여 보관되었다. 동네어른들의 말은 왜 저러는지를 몰랐거 어린 우리들은 더더구나 몰랐다. 학교 한구석에도 마른 마초더미를 높다랗게 쌓아 놓곤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어다 말린 풀은 인민군들이 6ㆍ25가
2월 초순, 어머니는 아버지와 몰래 약속을 하고 여섯 살 난 여동생은 걸리고, 세 살 난 여동생을 업고 강현 역에서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떠났다. 중간 간성 역 어디에서 아버지가 몰래 타고 원산으로 함께 간 것이다. 이때부터 할머니와 나만 고향에 남아 6월 이후 1952년까지 전쟁 한복판에 들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리 쫒기고 저리 쫒기면서 전쟁 통의 모진 고생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어린 두 여동생이 원산으로 간 뒤 이른 봄부터 우리가 하교하면 학교 운동장에서 동네 아저씨들이 군인아저씨들과 같이 나무로 깎은 총을 들고 매일같이 앞에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을 찌르면서 “이야! 이야!” 하는 고함 소리를 지르면서 훈련했다. 우리가 모여서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하면 선생이 어서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이 훈련은 6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는데 1950년 6월 초순쯤 아침에 등교해 보니 학교 교사 건물 양쪽으로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집채보다 훨씬 커 보이는 탱크가 그물(위장망)이 씌워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난꾸러기인 우리들은 호기심이 생겨 탱크 가까이 접근해 구경도 하고 만져 보려고 했는데 선생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엄히 일러서 멀찍이 떨어져 신기한 듯이 쳐다보기만 하였고 그 근처에서 서성이면서 놀았다.
탱크의 크기가 너무 크고 앞의 포신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 크고 무서우면서도 위력 있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은 8ㆍ15 해방 될 때 함경북도에서 소련군 탱크도 보았다는데 나이가 어려서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1950년 6ㆍ25가 나기 3일 전쯤 학교에 등교해 보니 홀연 탱크가 없어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6ㆍ25 당일부터 며칠 뒤까지는 38 이북 우리 고장 전 지역에서는 전쟁이 난 줄 몰랐다. 나중에 들으니까 6월 중순이 넘어서까지 인민군군이 많이도 38선께로 이동하더니만 6ㆍ25 당일 지금은 연어가 올라오는 남대천이 있는 마을 양양 읍께서는 38선이 그어진 인구리 훨씬 남쪽 방향 주문진 쪽에서 요란스럽게 울리는 포 소리가 쿵쿵 하고 들렸다 했다. 인민군이 갑자기 남쪽으로 쳐 내려간 것이다.
1ㆍ4 후퇴 뒤에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피난 보따리를 지고 이고 강릉 옥계 방향으로 피난을 갔을 때 강릉 경포대께 초당마을에 머물렀을 때 들은 얘기이다. 그 동네 어른들이 말하기를, “6ㆍ25 그날은 공휴일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북쪽에서 인민군대들이 몰려 내려온다는 말들이 들리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멀리 피난도 못가고 옥계 쪽으로 줄행랑을 쳐 백봉령 산골로 숨어들어 그곳 산골마을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가 마을로 돌아 왔노라”고 하면서 “양양서 아주머니들이 어린아이 데리고 여기 까지 짐들을 지고 내려왔으니 고생이 참 많겠다.”고 위로했다.
바로 38 이북 우리 산골 마을이 있는 강현 면에서는 6월 25일 직후엔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우리 모두는 학교를 다녔다. 사나흘 여를 지나서부터인가 예쁜 여자 담임선생은 교실에서 우리를 앉혀 놓고 기쁜 얼굴로 칠판에 남조선 지도를 그리면서 분필로 화살 표식의 줄을 그어가며 목청을 높여 흥분한 목소리로 신나게 말을 하였다.
“어린이 동무들 ! 우리의 용감한 인민군 전사들이 위대하신 어버이 김일성 대원수, 우리 장군님의 드높으신 영도로 지금 남조선 해방전선에 뛰어들었어요. 며칠 전 여러분이 학교 양 옆에 있는 땅끄(탱크)를 보았지요? 바로 그 땅끄를 앞세우고 우리 용감한 인민군 전사들이 남조선을 해방시키려고 힘차게 내려가고 있어요.”
말하자면 인민군이 남쪽으로 쳐내려갔다는 것이다. 이러면서 날마다 학교엘 가면 서울도 해방, 서해안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도 쪽으로 모두 해방, 칠판에다 분필로 많은 줄을 그어가며 나중엔 중부지방 강원도 동해안 해안을 따라가며 해방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춘천이란 곳은 인민군대들이 뺑뺑 둘러싸기만 했지 해방시켰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곳 저곳 가르키며 그렇게 신나게 설명하는 담임선생은 여느 때와 아주 달랐다. 말끝마다 “자! 동무들 모두 박수!” 하면 그때마다 우리 반 급우들은 좋은 일 났다고 “야―!” 소리를 지르며 박수 치느라고 덩달아 신나서 야단들이었다. 쉬는 시간에 밖엘 나가 보니 매일 같이 전교생의 얼굴들이 설 명절에 웃음 가득한 그런 얼굴 표정 같았다. 그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인민군이 남조선으로 쳐 내려간 것을 비로소 모두 알게 되었다.
“아니 싸움 났다는 말이 사실인가?”
“언제부터 싸움 났다는 거야?”
“학교에 놔뒀던 땅끄가 보이지 않던 그때 모두 남쪽으로 쳐내려갔대”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웅성거리면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계속)
댓글목록
환선문님의 댓글
환선문 작성일정말 생생한 체험담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침을 안믿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면 좋겠습니다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영화 '포화 속으로!'에는 경북 포항 시가지 전투 때! 학도병들의 떼 죽음 이야기를 제재로 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북괴군부대는 1950.6.25 발발시 강원도 동해안에 상륙, 태백산, 오대산등지의 빨치산 공비들과 연결작전을 시도하여 양양.강릉 일대의 我 第8師團 후방을 교란했던 북괴 陸戰隊(육전대, 海兵隊)제766부대장 '오 진우'의 후임자(?)가 나오는데,,.
이것 하나만 봐도 북괴의 대대적인 선제 기습 남침임을 확연히 알 수 있음! 비참한 동족 상잔의 비극의 주범! '김 일쎙이'롬 봉건 세습 왕조는 타도되어져야만 하고, 그보다 먼저 이남의 빨갱이들을 모조리 도륙해야! ///
'오 진우'는 훗날 인민무력부장까지 승진, 1977년도경의 판문점 도끼 만행을 저지른 흉악한 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