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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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09-26 06:21 조회2,20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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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버지의 설악산 잠적
(1). 만해 한용운 선생댁과의 인연
당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내세운 38 이북 공산 치하에서는 ‘종교는 아편이다.’라며 김일성만 숭배하라는 시대여서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악산 신흥사엔 많은 스님들이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다만 얼굴이 넓적스레하고 눈에 눈곱이 더께더께 낀 나이 많은 절 지킴이 스님 한 사람만 있었는데 이름을 한흥운이라 하였다. 어머니는 그 스님의 이름이 만해 한용운 선생과 비슷하여 한용운 선생의 동생이 아닌가 하였는데 이름이 비슷한 것뿐이었다.
한용운 선생과 우리 집안의 인연은 내 외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해주 오씨이고 함자가 진(振)자 환(煥)자를 쓰는 어른이다. 사찰 같은 큰 건물을 짓는 상도문(지금의 속초시 설악동)의 대목(大木)이고, 소시 적엔 인제의 용대리에서 살다가 다시 고향인 도문으로 왔는데 백담사, 오세암, 봉정암, 신흥사, 낙산사, 홍련암 등 우리지방 근처엔 외할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대형 사찰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회룡초등학교 전경
어머니의 소싯적 기억 속에도 만해 선생이 집에 들르던 정경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 모두가 1962년에 우연히 서울 만해 선생 댁 이웃에 이사를 가서 그분의 딸과 병약한 만해 선생 부인을 처음 만나 나의 어머니와 만해 선생의 딸이 옛날 얘기를 하면서 친하게 지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있지 않아 만해 선생 부인은 그 곳 성북동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신흥사에 숨어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속초에 탁발 나갔던 스님이 허겁지겁 돌아와 지금 밖의 공기가 수상하니 피하라고 하여 설악산 울산바위를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흔들바위 옆에 있는 계조암으로 또 피신하였다. 주로 그곳에서 나무껍질, 산나물, 풀뿌리 등으로 생식을 하면서 1947년부터 1950년 1월 하순까지 있었으니 참으로 오랜 동안 숨어 지낸 시절이었다.
가끔 어머니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 만나보면 아버지 모습은 머리는 어깨 너머로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렸고, 수염을 깎지 않아 흡사 산 귀신 으시미(이무기?) 같아 아주 우스운 꼴이라 하였다. 이때 아버지는 설악산 일대의 모든 역사와 일화들을 기록해 두었다.
아버지가 안 보이는 사실을 이튿날 아침에야 안 나는 아버지가 어디 갔느냐고 자꾸 물었는데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때마다 어린 나를 보고 아버지는 저 멀리 돈 벌러 갔는데 이담에 돈 많이 벌어 올 거라고만 하였다. 아버지의 행적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어머니는 한밤중에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설악산 깊은 산골에 식량을 준비하여 아버지에게 비밀리에 가져다주고는 밤새도록 왕복 40리 길도 넘는 거리를 목숨을 걸고 다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1948년 봄 4월 회룡인민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할머니의 손만 잡고 입학식에 참석했다.
그 때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학교 교실 쪽으로 다가가 교실 안을 신기한 장소로 알고 호기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여기가 어떤 곳인가’ 하는 생각에 유심히 여러 차례 들여다보던 어린 시절의 느낌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지난 30여 년간 교직생활을 하면서 항상 학교를 사랑하고,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갖게 만들어준 ‘학교’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47년 우리 집의 얼마 되지 않는 농경지는 모두 김일성 집단에게 몰수당하였다. 인민군에 입대한 아버지의 4촌형제 종각, 종숙 두 아재의 어머니(나에게는 작은댁 할머니)는 밭일도 할 줄 모르는 분이었는데 우리 텃밭은 작은집의 소유가 된 것이었다. 우리 집은 농사지을 손바닥만한 땅도 그나마 없는 완전한 거지꼴이 되었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 때 작은댁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자기 집에 땅이 공짜로 생긴 일을 두고 “에이그! 세월이야 참 잘 됐지 뭐유.”라고 말하여 나의 할머니에게 평생의 한을 심어 주었던 일도 있었다.
당시 38 이북 공산 치하에서는 공산 사회주의로 인해 분배라는 핑계대며 친척과 이웃간의 인간적인 관계의 파괴가 도처에서 이런 현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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