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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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hagok22341 작성일10-09-23 06:52 조회2,061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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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공치하(人共治下)
아버지는 1946년 봄부터 초가을까지 간성에 있는 오호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그 해 가을부터 소련 공산주의 앞잡이 김일성 우상화와 공산정권의 세력 다지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때부터 우리 집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개울마을 어느 잔칫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을 ‘인민위원장’인 지씨의 집에 가서 젊은 사람들끼리 사상 논쟁을 벌이다가 공산주의 패들과 싸움이 붙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힘이 모자란 아버지 일행 세 사람, 개울마을 봉근 아저씨와 과수원집 종대 아저씨 등이 숫자가 많은 그들에 밀려
6․25 당시 우리집 터
아버지 생존시에 왼쪽 눈썹 가운데의 길고 커다란 흉터만 보면 어린 시절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집에 와 정신을 차리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할머니더러 어서 빨리 바늘을 가져와 생살을 꿰매라고 연신 고함을 쳤는데,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면서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안타까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할머니가 뒤뜰 장독대의 된장 항아리에서 된장을 한 움큼 떠다가 생살 갈라진 상처에 붙이고는 헝겊으로 싸매어 주었다. 머리를 동인 나의 아버지…… 밤낮으로 신음소리만 내던 내 아버지…… 나는 지금도 그 일만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사흘쯤 지나 물치 내무서에서 내무서원이 몸져누운 아버지를 조사할 일이 있다면서 데리고 갔다. 인민위원장 지씨 패거리의 고발로 연행된 것이다.
양양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면회를 다녀온 어머니 말로는 혹독한 고문에 온몸이 퉁퉁 부어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몽둥이로 온 몸을 맞아 전신이 구렁이 감아 놓은 것처럼 얼룩덜룩 무섭고 끔찍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외아들인 아버지는 나의 할머니, 즉 당신 어머니가 놀랠까봐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어머니에게 가서 내가 이렇게 무서운 매를 맞았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 신신당부하였다 한다. 할머니가 너무 애통하여 충격을 받을까 염려해서 한 말이었다.
얼마 뒤 내무서원들과 양양 정치보위부 놈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어머니와 할머니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여러 차례 짓이기며,
“감춰둔 서류 어디 있어! 모두 죽여버리겠어!”
하고 윽박지르면서 위협했다.
그들은 새로 한 집 천정을 마구 뜯어내며 아버지가 썼다는《공산주의의 허구성》,《마르크스 레닌의 공산사회주의의 비판》등 논문집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난리를 쳤다. 다행히 그 논문과 글들은 어머니가 집 뒤 장독대 근처의 큰 돌 밑에 숨겨 놓아 발각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할머니는 아버지가 쓴 논문과 다른 글들을 모두 찾아서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렸다.
1945년 8ㆍ15 광복 이후 1950년 6ㆍ25가 발발할 때까지 이북의 통치 방식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시골 우리 동네까지 철저히 행해졌다.
먼저 이북의 위정자들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종교를 탄압했다. ‘종교는 아편이다!’ 이 말은 6ㆍ25 전 이북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귀가 아프도록 들은 말이다. 이렇게 해야 김일성을 살아있는 신으로 온전히 숭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종교도 용납하지 않았고 종교 자체를 말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음으로 친일청산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강조했다. 친일파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과 정치적 노선이 다른 사람과 항일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까지 친일파로 몰아세워 숙청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의 사례와 김구 선생을 이용한 것도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민족을 위한다는 구호를 내세워 사리사욕을 채우는 타락한 정치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이북 주민들은 갑자기 낮도깨비같이 나타난 공산당 패거리들이 억압적으로 내세우는 그들의 명분(?)을 대놓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김일성과 그를 돕는 자들이 자행했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들은 친일청산이란 명분을 업고 정당화되었다. 친일청산을 비롯한 과거청산의 문제는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 번째로 재산의 몰수와 재분배를 실시했는데 대 지주나 잘 사는 사람들은 물론, 인민군에 지원한 집안에 경작지를 나누어 주기 위해 다른 집의 토지를 빼앗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모두 다 잘 살게 해주려고 재산을 몰수해 재분배한다는데 성실하게 일하면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일시에 죄인으로 전락하고,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가난했던 사람들이 일시에 위세를 떨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전통시대의 신분적인 한계로 인해 가난했던 이들은 성실하게 일했지만 사회적인 구조가 가져다준 가난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기도 했다. 노력하지 않고 남 잘되는 것만 보면 배가 아파하는 이들이 무조건 몰수와 분배만 떠들어대고 있었다.(계속)
댓글목록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맞지요!!!
남이 잘 되는 것 배 아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
그게 바로 공산주의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합니다.
부럽기는 해야지요!!!
허지만 그걸로 배까지 아파해서는 문제가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