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6·25전쟁 60년 만에 ‘기적 코리아’ 전쟁폐허 딛고 무역 10대강국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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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비역2 작성일10-06-21 20:12 조회2,520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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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하다보니 청소년 경제교육을 위한 신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녀들에게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 차이를 이해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퍼 왔습니다.
한국경제교육협회 ( http://www.keea.co.kr/ )가 발간하는 "0아하경제" http://www.ahaeconomy.com/index.html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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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0년 만에 ‘기적 코리아’ 전쟁폐허 딛고 무역 10대강국 우뚝!
한국경제교육협회 ( http://www.keea.co.kr/ )가 발간하는 "0아하경제" http://www.ahaeconomy.com/index.html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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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0년 만에 ‘기적 코리아’ 전쟁폐허 딛고 무역 10대강국 우뚝!

올해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절망 속에서 끼니를 걱정하는 나라였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생산시설이 파괴됐고 농촌도 도시도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하루에도 젊은이들이 몇천 명씩 죽어갔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겨우 비와 이슬을 피하면서 하루하루 살기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거기에 보릿고개까지 겹쳐 서민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형편이었습니다.
1950년에 한국은 수출 1천600만 달러, 수입은 300만 달러였고, 1951년에는 수출 1천700만 달러, 수입 4천100만 달러밖에 안되는 동양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3천635억 달러로 60년 전보다 1만 배 이상 뛰었고 수입도 3천231억 달러로 거의 같은 수준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전쟁 직후 우리나라의 총생산량은 얼마였을까요? 1953년 국내총생산량은 불과 13억 달러였습니다. 1조 달러가 넘는 지금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수치입니다. 그 당시 도시근로자 월평균 일인당 소득은 얼마나 됐을까요? 가장들의 한 달 월급은 지금 학생들의 용돈에도 못 미치는 5천 원쯤 됐답니다.
무역 규모로 살펴보면 6·25 당시와 지금의 대한민국의 차는 무려 3천 배나 된답니다. 그 무렵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품목은 가발이었습니다. 지금은 자동차·가전·반도체 등을 주력으로 수출하는 나라가 불과 60년 전만 해도 가발이나 수출하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하게 당시와 지금의 삶의 질이 드러납니다. 1953년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불과 67달러였습니다. 이 액수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인 브룬디 수준이고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들 중에 하나라고 봐도 무리가 없는 수치입니다. 아프리카 브룬디가 몇십 년 만에 서방 선진국들과 대등한 나라가 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으로나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 상상을 실현시킨 나라입니다. 비포장도로 위를 달려가던 우마차길이 자동차로 넘치는 도로가 됐고, 띄엄띄엄 있던 농촌 마을은 공장과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섰습니다. 연대별로 한국의 수출 세계 순위를 살펴볼까요? 1948년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필리핀·태국·베트남·케냐보다 낮았으며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베넹 수준이었습니다. 1964년에 이르러서야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며 세계 90위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은 초고속 경제성장계획을 실현하며 1977년에는 중국과 인도를 앞질러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2006년에는 3천억 달러를 넘어서며 독일에 이어 11위에 올랐습니다.
2010년, 올해 대한민국에게 매우 뜻깊은 해입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원조 받던 나라가 이제 남을 도와주는 나라가 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전쟁의 잿더미에서 ‘아시아의 신데렐라(필리핀)’ ‘동남아의 보석(태국)’ ‘앙카라의 자존심(터키)’ 등을 제치고 번영한 나라를 일궜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은 ‘불가능은 없다.’는 굳은 의지로 잿더미 위에서 경제발전을 이뤘습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받은 만큼 돌려주는 ‘기여 외교’를 펴며 새로운 번영의 60년을 위해 노력할 때입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절망 속에서 끼니를 걱정하는 나라였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생산시설이 파괴됐고 농촌도 도시도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하루에도 젊은이들이 몇천 명씩 죽어갔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겨우 비와 이슬을 피하면서 하루하루 살기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거기에 보릿고개까지 겹쳐 서민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형편이었습니다.
1950년에 한국은 수출 1천600만 달러, 수입은 300만 달러였고, 1951년에는 수출 1천700만 달러, 수입 4천100만 달러밖에 안되는 동양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3천635억 달러로 60년 전보다 1만 배 이상 뛰었고 수입도 3천231억 달러로 거의 같은 수준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전쟁 직후 우리나라의 총생산량은 얼마였을까요? 1953년 국내총생산량은 불과 13억 달러였습니다. 1조 달러가 넘는 지금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수치입니다. 그 당시 도시근로자 월평균 일인당 소득은 얼마나 됐을까요? 가장들의 한 달 월급은 지금 학생들의 용돈에도 못 미치는 5천 원쯤 됐답니다.
무역 규모로 살펴보면 6·25 당시와 지금의 대한민국의 차는 무려 3천 배나 된답니다. 그 무렵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품목은 가발이었습니다. 지금은 자동차·가전·반도체 등을 주력으로 수출하는 나라가 불과 60년 전만 해도 가발이나 수출하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하게 당시와 지금의 삶의 질이 드러납니다. 1953년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불과 67달러였습니다. 이 액수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인 브룬디 수준이고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들 중에 하나라고 봐도 무리가 없는 수치입니다. 아프리카 브룬디가 몇십 년 만에 서방 선진국들과 대등한 나라가 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으로나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 상상을 실현시킨 나라입니다. 비포장도로 위를 달려가던 우마차길이 자동차로 넘치는 도로가 됐고, 띄엄띄엄 있던 농촌 마을은 공장과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섰습니다. 연대별로 한국의 수출 세계 순위를 살펴볼까요? 1948년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필리핀·태국·베트남·케냐보다 낮았으며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베넹 수준이었습니다. 1964년에 이르러서야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며 세계 90위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은 초고속 경제성장계획을 실현하며 1977년에는 중국과 인도를 앞질러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2006년에는 3천억 달러를 넘어서며 독일에 이어 11위에 올랐습니다.
2010년, 올해 대한민국에게 매우 뜻깊은 해입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원조 받던 나라가 이제 남을 도와주는 나라가 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전쟁의 잿더미에서 ‘아시아의 신데렐라(필리핀)’ ‘동남아의 보석(태국)’ ‘앙카라의 자존심(터키)’ 등을 제치고 번영한 나라를 일궜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은 ‘불가능은 없다.’는 굳은 의지로 잿더미 위에서 경제발전을 이뤘습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받은 만큼 돌려주는 ‘기여 외교’를 펴며 새로운 번영의 60년을 위해 노력할 때입니다.
< 심우일 기자 / info@ahaeconomy.com > 2010-06-2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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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강님의 댓글
김안강 작성일대한민국의 온국민은...살인귀 김정일을 추종하는 남한내의 불순분자들인 빨갱이 전위대들의..거짓 선전선동 기만전술에 절대로 속지 말아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