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토를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를 품고 있는 이런 대통령님들이 한 없이 그립다! 지금 보라!지금의 국가지도자를,무식한데다 무례하고, 의식의 깊이도 없고, 철학도 없는 거짖 투성이의 면피놀음을, 뭐가 국가를 위함인지?국가안보가 뭔지?모르는 이런 위정자가 어딨는가? 뭐,대통령이란 자 입에서 독도에 대하여 "지금은 곤란하다! 나중에....."란 말을 일본 총리에게 했다니.....????
이러고도 대통령이라 할수 있는가?이게 과연 대한민국 대통령이라 할수 있는가? 맞는가?
***아레는 회원 "흐흣"님께서 올리신 퍼온글중 후반부의 울릉도,독도에 관한 전임 대통령님들에 감명받아 다시 한번 올려 보고 싶었읍니다. 존경하는 대한민국을 지킨 우리의 국부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몇천년의 가난을 퇴치하고 국방력을 반석위에 올린 박정희 대통령의 울릉도,독도에 대한 결연한 행적을 옮깁니다.***
.울릉도(독도)와 대통령

가. 이승만 대통령과 독도 : 평화선(이승만 라인)이 독도를 조국의 품으로 끌어 안았다.
독도이야기를 하자면 이승만 대통령을 빼 놓을순 없습니다. 현재까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외교부분에서 이승만 대통령만큼 최대의 역량을 발휘한 분도 없다고 저는 단언합니다. 이승만 라인은 사실 국제 해양법상 문제소지가 많은 그런 선이기는 하지만 이승만대통령의 그런 뚝심덕분에 지금 우리가 독도를 품에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1952년 4월28일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연합국 측과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1951년 9월 8일 체결한 강화조약이 그날 발효되기 때문입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표됨과 동시에 일본어민의 조업구역을 제한하고 있던 "맥아더 라인"이 없어짐으로써 일본어민의 조업구역이 대폭 확대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일본의 허를 찌른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선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면 일본어선을 한정된 구역에 묶어 두었던 "맥아더 라인"이 소멸될 것이고 그러면 일본어민이 한국근해에서까지 맘대로 조업하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전을 치루고 있던 대한민국으로서는 속수무책의 그런 상태였습니다. 변변한 배도 없는 상태에서 게다가 전쟁중이었으니 사실 감당이 불감당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정확히 꿰뚫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선언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평화선" 선포였습니다.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이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의거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요구에 의하여’ 해안에서 50∼100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기절초풍하였습니다. 일본은 이를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고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으며 우방인 미국, 자유중국도 비난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까딱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히려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며 ‘평화선’ 으로 불렀습니다. 이에 일본은 자국의 어민들에게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라고 하였지만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나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어민 1명이 숨지기도 했다. 1961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은 300척이 넘고 억류된 일본인은 4000명에 가까웠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국전쟁와중에도 이렇게 일본에 대하여 이승만대통령은 선수를 치고 우리의 바다를 지켰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노련한 외교의 힘은 100만대군의 힘보다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의미에서 50년대 이승만대통령의 외교력은 100만대군의 위력을 발휘했다고 봅니다.
평화선은 외교상 문제의 소지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력 발휘의 결정판이라고 저 견적필살은 생각합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한국은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전쟁당사국이 아닌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비록 조약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평화선"선포로서 일종의 제동을 걸었고 확실한 외교적 승리를 거둔 것이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어업 보호의 절박함이 낳은 산물이긴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선견지명의 결단이 독도를 지킨 것이었습니다.
평화선은 후일 한일수교회담에서 우리의 최고 무기
다급해진 일본은 열흘 뒤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며 ‘독도 문제’를 쟁점화했으나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뒤였다. 또한 이 평화선은 후일 1965년 한일수교회담에서 우리의 강력한 카드로 작용하여 당시 보잘것 없던 한국이 회담에서 주도권을 행사 할 수 있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평가하는 민간의 속말중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외교엔 귀신, 내치엔 등신"
저 견적필살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과를 평가함에 있어서 "한미동맹을 통한 한국의 해양세력화"와 "평화선 선포" 해양주권의 공세적 선포는 이승만 대통령의 과실을 보상하고도 남을 대한민국을 위한 최대의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울릉도와 박정희 대통령
다음 사진은 사실 제가 작년에 특종아닌 특종한 사진입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당시 혁명최고의장)이 울릉도를 방문한 모습입니다. 그때는 일본과 수교전입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박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핵심생각한 국가안보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국가최고 지도자 자격으로서 울릉도를 방문한 분은 박대통령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반 필부에게조차도 천마디의 말보다는 한번의 결연한 행동이 더 진가를 발휘합니다. 하물며 국토수호의 최고책임자에겐 더더욱 그렇습니다.
당시 공산집단과 대치 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일본에 대한 견제책으로서 국가최고 지도자로서 국토의 막내인 울릉도를 직접 방문한 것 만으로도 일본에 대한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 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의 기억에 매해 첫날 1월1일 박대통령은 꼭 독도수비대와 전화교신 한 것으로 압니다.)
 아마도 저당시의 위치는 지금의 이 위치와 비슷 할 것입니다. 이길로 죽 올라가면 울릉군청과 울릉경찰서가 나오며 아래로 내려가면 도동부둣가입니다. 또 울릉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곳입니다. 우리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아침에 해가 안떠서 보면 눈이 지붕까지 올라가 있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저 정도 눈은 울릉도에선 약과입니다.

다음사진은 박대통령이 울릉도 방문 기념으로 울릉도 학생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행사의 사진입니다. 내 기억에 70년대까지도 외딴 도서지역 학생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격려한 기억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다음 사진은 한국 해군이 일대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함정입니다. 충무급 1번함인 충무함(DD-91)의 사진입니다. 미국에서 원조받은 것은 두말 할 필요 없겠지요. 충무함은 우리나라에 기어링급이 도입되기 전까지 기함역할을 한 함정이기도 합니다. 미 해군의 플래쳐급으로서 미국에선 구축함으로 분류하지도 않은 함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콜벳이나 프리킷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미 해군에선 고속전투수송함이었습니다.

◆ 이 충무함(플래쳐급)을 타고 박정희대통령이 처음으로 울릉도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국가최고 지도자가 울릉도를 방문한 예는 없습니다.
 충무함 인도식 모습
출처 및 근거 http://koreadefence.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