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주사태의 진실과 의미를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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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갈천 작성일10-01-18 21:09 조회3,270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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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전두환의 정권탈취를 위한 쿠테타인지 / 일부 불순분자들의 선동과 유언비어에 의해 촉발된 단순폭동인지 / 북한군의 개입과 간첩들에 의한 폭동인지
북한군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은 보수세력이 기대했던 것이고
광주사태의 의미는 법원판결과 180도 뒤바뀌며
지난 세월 고초를 겪은 보수세력들은 비로소 마음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사태 진실을 탐구하는 역사학도님과 뜻을 같이하는 여러분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필자가 예상하기에는 이것이 쉽지가 않을 듯하다.
우리가 광주사태 진실을 규명하는 목적은 이렇다.
첫째 과제는 아무런 잘못없이 충직하게 임무를 수행한 국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둘째는 전두환에게 씌어진 황당한 죄목을 풀어주는 것이다. <살인마 전두환>.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
******************************
12.12사태나 광주사태라는 개별적인 사건만을 조사하다 보면 벽에 부닺쳐 전체의 연결고리를 생각하게되고
전체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다가 보면 역시 뚜렷한 것이 없어서 광주사태를 이잡듯이 뒤져본다.
이렇게 두세번 거듭하다가 몇년을 흘렀다.
그런데 1년반쯤 전에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전체 연결고리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들어왔다. 뻥 뚫리는 기분.
그러나 돌아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상쾌하지가 않고 오히려 우울하기까지 하다.
조갑제 선생의 주장은 분명 틀렸다.
12.12 부터 80년8월까지 광주사태를 주도한 것은 전두환이 아니고 최규하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은 전두환이 아니고 최규하이었던 것이다.
조갑제씨는 12.12군사반란의 후환이 두려웠던 전두환이 집권의 기회를 노리다가 국회의 계엄령해제 결의를 막으려고 5.17 계엄확대을 일으켰다며 국회의 계엄령해제 요구와 이에대한 신군부의 거부감을 최대의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가장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것은 계엄유지의 필요성을 증대시키는 학생들의 시위이었고 5월22일 시한부 최후통첩 후에 이어질 전국적인 반정부 봉기이었으며
개헌주도권을 둘러싼 정부, 공화당, 신민당, 재야 등 각 정치주체들간의 갈등이었다.
조갑제씨는 12.12를 경계로 그 이전과 그이후의 사회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전에는 사회전체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혼란을 경계한 시민들 스스로의 자제분위기가 있었고 정부도 흔쾌히 빠른시일내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12.12이후에는 안개정국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필자는 조갑제씨가 뭔가 착각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아니면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12.12 이전이나 12.12 이후나 정치분야에서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사회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기 시작한 것 80년 3월 부터였다.
갈천.
전두환의 정권탈취를 위한 쿠테타인지 / 일부 불순분자들의 선동과 유언비어에 의해 촉발된 단순폭동인지 / 북한군의 개입과 간첩들에 의한 폭동인지
북한군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은 보수세력이 기대했던 것이고
광주사태의 의미는 법원판결과 180도 뒤바뀌며
지난 세월 고초를 겪은 보수세력들은 비로소 마음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사태 진실을 탐구하는 역사학도님과 뜻을 같이하는 여러분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필자가 예상하기에는 이것이 쉽지가 않을 듯하다.
우리가 광주사태 진실을 규명하는 목적은 이렇다.
첫째 과제는 아무런 잘못없이 충직하게 임무를 수행한 국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둘째는 전두환에게 씌어진 황당한 죄목을 풀어주는 것이다. <살인마 전두환>.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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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사태나 광주사태라는 개별적인 사건만을 조사하다 보면 벽에 부닺쳐 전체의 연결고리를 생각하게되고
전체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다가 보면 역시 뚜렷한 것이 없어서 광주사태를 이잡듯이 뒤져본다.
이렇게 두세번 거듭하다가 몇년을 흘렀다.
그런데 1년반쯤 전에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전체 연결고리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들어왔다. 뻥 뚫리는 기분.
그러나 돌아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상쾌하지가 않고 오히려 우울하기까지 하다.
조갑제 선생의 주장은 분명 틀렸다.
12.12 부터 80년8월까지 광주사태를 주도한 것은 전두환이 아니고 최규하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은 전두환이 아니고 최규하이었던 것이다.
조갑제씨는 12.12군사반란의 후환이 두려웠던 전두환이 집권의 기회를 노리다가 국회의 계엄령해제 결의를 막으려고 5.17 계엄확대을 일으켰다며 국회의 계엄령해제 요구와 이에대한 신군부의 거부감을 최대의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가장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것은 계엄유지의 필요성을 증대시키는 학생들의 시위이었고 5월22일 시한부 최후통첩 후에 이어질 전국적인 반정부 봉기이었으며
개헌주도권을 둘러싼 정부, 공화당, 신민당, 재야 등 각 정치주체들간의 갈등이었다.
조갑제씨는 12.12를 경계로 그 이전과 그이후의 사회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전에는 사회전체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혼란을 경계한 시민들 스스로의 자제분위기가 있었고 정부도 흔쾌히 빠른시일내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12.12이후에는 안개정국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필자는 조갑제씨가 뭔가 착각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아니면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12.12 이전이나 12.12 이후나 정치분야에서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사회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기 시작한 것 80년 3월 부터였다.
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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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인님의 댓글
반공인 작성일조갑제, 그 양반은 나설 때가 따로 있지, 쓸데없는 추측만 나불거리는 게 맘에 안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