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위인, 한국의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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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07-12 17:55 조회6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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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위인, 한국의 위인
한국화폐에 실린 초상들
천원권 초상은 퇴계 이황이다. 연산군 시대에 태어난 대제학이다. 5천원권의 초상은 10만 양병을 주창했던 성리학자 율곡 이이다. 1만원권에는 세종대완의 초상이, 5만원권에는 이율곡의 모친 신사임당이 실렸다. 10만원권에는 김구가 등장하려다 좌절되었다. 이율곡 선생의 모자가 5만원권과 5천원권에 나란히 오른 것이다.
화폐에 초상으로 등장한 인물들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업적이 있는 인물들일 텐데 대한민국에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인물이 세종대왕이고, 이율곡이고 이퇴계이고, 사임당 신씨인가? 세종대왕은 훈민저음 창제자이기 때문에 누구나 인정하는 인물이지만, 나머지 세 인물의 공헌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분분할 것이다. 그리고 사임당신씨가 과연 세종대왕보다 상위에 속하는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이견들이 분분할 것이다. 한마디로 뒤죽박죽이다.
미국 화폐에 실린 초상들
100달러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50달러 율리시스 그랜트 18대 대통령, 20달러 앤드류 잭슨 7대 대통령, 10달러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재무장관, 5달러 아브라함 링컨 16대 대통령, 2달러 토머스 제퍼슨 3대 대통령, 1달러에는 조지 워싱턴 초대대통령이 그려져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 해밀턴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고, 프랭클린은 미국 헌법을 기초한 과학자이고, 해밀턴은 미국의 금융 및 경제의 틀을 잡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모두 다 업적이 뚜렷한 인물들이다.
일본 화폐 초상화
일본 화폐의 초상화는 수십년 단위로 초상의 체계를 재평가하여 초상을 바꾸고 있다. 저액권에 나오는 초상들은 우리 국민이 잘 알 수 없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최고액권인 1만엔권의 초상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1984년부터 40년간 1만엔권의 초상이었던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이고, 2024년부터 새롭게 총상으로 선택된 인물이 시부사와 에이치(1840-1931)다.
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로 영미식 자유민주주의를 일본에 소개한 개화파로, 영미 유학자들을 모집하여 옥스포드 영영사전을 영한문 사전으로 전환하고, 서구문명을 도입케 한 대학자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영한시전은 영한문사전을 국어화한 것이다. 이로써 한문을 사용하는 동양의 모든 나라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덕으로 서구 문물을 용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가 영한문 사전을 만든 것은 문자계의 불가사의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파 유학생들을 가르친 조선 개화파의 아버지였다. 고종이 개화파 인물을 무자비하게 처형시키는 것을 보고 그는 여러 날 통곡을 했으며, 이후 일본 군벌에 맞서 조선정벌을 반대해온 그는 “조선백성을 살리려면 조선의 왕조가 사라져야 한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시부사와 에이치
시부사와 에이치는 일본식 자본주의를 정립한 위인이다. “모든 일본 기업인들은 한손에는 공자의 도덕률을, 다른 한 손에는 주판을 잡아라. 주판은 오로지 도덕률 아래서만 두어라.”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기업의 최고의 가치를 ‘이윤극대화’라고 인식하지만 일본은 그때부터 창의력과 개선의 극대화를 기업의 최고 가치로 인식해왔다. 1920년대의 기업인 마쓰시타 고노쓰케는 송하전기(파나소닉)를 이렇게 정의했다. “송하전기는 인간을 제조하는 회사다. 아울러 상품도 제조한다.” 돈이 가치가 아니라 인간이 가치라는 뜻이다.
그는 서울에 조선은행을 설립했고, 엽전을 지폐로 바꾸고 철로를 설치하고 광산업을 개발했다. 500여 개의 기업을 설립했지만,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은 단 1개도 없었다. 600여 개의 사회기업을 설립했지만 그의 이름으로 등록된 것은 1개도 없었다.
대한민국 영웅 김구
김구 기념관이 웅대하다. 야야 국회의원들의 99%가 김구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답했다. 정치인들이 여-야 할 것 없이 무식하다는 이야기다. 2003년 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김구는 살인마요 오사마빈 라덴과 같은 테러리스트다”라는 표현을 했다.
1896년, 21세때 김구(본명 김창수)는 항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의 젊은 상인 ‘쓰치다 조소케’를 돌멩이와 몽둥이로 개패듯 패서 죽여놓고 금품을 절취했다. 그 죄로 인천 감옥에 사형수로 갇혔다가 탈옥한 살인마가 바로 김구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훼방을 놀다가 1948년 4월 19일 휴전선을 몰래 넘어 평양에 가서 김일성 정권창출 행사에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연설을 했다. 젊은 청년 윤봉길과 이봉창에게 폭탄 공격을 사주했다. 김구( 김창수)를 후쿠자와 유키치와 비교해보자, 김창수를 시부사와 에이치를 비교해 보자. 비교하는 그 순간 한국은 일본에 비해 너무나 작아 보인다.
김구가 위대해진 것은 오로지 그가 이승만의 건국을 훼방했고, 김일성이 보낸 모사꾼 수준의 간첩 성시백에 놀아나 김일성의 노예가 됐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김대중이 김정일의 노예가 됐기 때문에 위대해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2025.7.1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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