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내란을 전두환 내란으로 뒤집은 과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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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12-24 11:10 조회7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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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을 전두환 내란으로 뒤집은 과정(2)
5.17 사건
1980년 5월 15일, 심재철을 중심으로 한 서울역 10만 집회는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극렬한 폭력시위였습니다. 전국이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이에 만족한 김대중은 5월 16일 [민주화촉진선언]이라는 제목을 달고, 최규하가 이끄는 정부에 대해 감히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5월 19일까지 김대중에게 ➀ 계엄령을 철폐하고 ➁ 내각을 해체할 것을 통보해주지 않으면 5월 22일 정오를 기해 전국 시위를 감행할 것이다. ➂ 군인과 경찰은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라.”
5월 17일, 김대중의 선전포고에 놀란 군이 긴급히 전군지휘관회의를 열고, 10.26 이후 선포되었던 지방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통제를 한층 강화했습니다. 전국계엄은 계엄사령관이 장관과 총리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과 직접 보고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전두환은 5.17 자정을 기해 김대중의 혁명내각 요원 24명을 전격 구속했습니다. 김대중이 감히 국가를 상대로 이런 기상천외한 선전포고를 한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황당한 짓이었습니다. 믿는 데가 있기에 가능한 협박이었습니다. 아마도 5월 22일, 그가 전국시위를 시작하는 날 북괴가 남침을 할 것이라고 사전 약속이 돼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김일성, 제2의 6.25 획책
김일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려 했습니다. 저는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 김일성의 공작이라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김일성은 마치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될 것임을 미리 알고 있는 듯, 박 대통령 시해 직후 [폭풍작전]을 명령하고, 김신조급 살인 기계로 훈련된 특수군을 잠수함(11명씩)과 태백산맥 통로(20-30명씩)를 통해 광주 외곽에 잠입시켰을 것입니다. 남북한 당국의 문헌과 자료에 의하면 6개월여에 걸쳐 소규모 단위로 밀파시킨 병력이 600명이었습니다.
600명에 대한 시비가 많습니다. 조갑제는 북한군이 단 1명이라고 왔다면 자기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선동하였습니다. 이런조갑제를 향해 다수의 분들이 ‘5.18이 조갑제에게 무엇이기에 거기에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가’ 태클을 걸었습니다. 휴전선을 제외한 3면이 모두 모래사장이고, 군이 매일 모래밭을 빗자루로 쓸기 때문에 단 한 명의 북한군이 와도 발자국이 날 수밖에 없다고 선동하였습니다. 600명이 왔으면 발각이 되고 국군과 교전이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교전이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600명이 어디로 왔다가 어느 통로로 갔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면 600명은 거짓이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조갑제의 이 말을 저를 2년형에 처했던 여판사 장윤선이 인용하면서 북한군 개입 표현이 허위라고 말했습니다. 조갑제의 손이 제 사건을 관장하는 판사에게까지 뻗어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의 조갑제 주장에 대해 저는 인터넷에 아래와 같이 반론했습니다.
“대한민국 동서남은 모두 해안이다. 모래사장은 해안선 길이의 5% 미만이다. 조갑제의 ‘빗자루 이론’은 허위다. 이 세상에 강도를 당한 시민이 강도를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와서 강도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도망갔습니까 하고 물었다. 시민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강도는 당했다“ 이렇게 주장했다. 강도에 털린 것은 현장이 증명한다. 하지만 주인은 강도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면 강도가 오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냐? 이 세상에 적의 깊숙한 후방에 600명의 특공대를 투입시키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열을 지어 침투하라고 명령할 또라이 지휘관은 없다. 600명을 적진으로 보내면서 60만 대군과 교전하라고 할 미친 장군은 없다.“
5.17 조치가 국가 살려
김일성은 ① 반골의 고장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전국 폭동을 [의용군]의 의거로 포장하여 전국화시키고 ② 광주로 상륙시킬 10만 병력을 해주에 대기시켜 놓고, ③ 휴전선에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1980년 5월 22일을 기해 ① 해주 10만 대군이 광주로 상륙하고 ② 휴전선에서 일제히 밀고 내려오고 ③ 광주 및 전국에서는 시민의용군 형식으로 국가전복을 꾀하는 내란 폭동이 일어나 대한민국은 속절없이 점령될 수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도 5월 17일, 전두환 소장은 김대중과 그 일당 24명을 전격 체포하였습니다. 5월 22일로 계획됐던 전국 폭동이 4일 앞당겨 5.18 광주폭동으로 국지화됐습니다. 결론적으로 전두환은 멸망 당할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느라 당시에는 소소하게 취급됐던 광주폭동에 관여할 시간도 에너지도 없었습니다. 그는 5월 17일까지 나라를 지키는 전쟁에 올인해있었습니다. 나라가 처한 위기가 너무 위중하고 크고 다급한 나머지 그에게 광주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은 5.18진행 과정에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이 5.17을 기해 김대중 혁명일당을 기습적으로 구속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남침 의도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김일성에게 전두환은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2성 장군에 불과한 전두환을 공격목표 제1호로 지정한 것입니다. 전두환으로 인해 전면남침 기회가 사라졌고, 전국 폭동이 광주폭동으로 축소되었고, 폭동의 D-데이가 5월 22일에서 5월 18일로 4일 앞당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입증하는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5월 23일 서울역에서 간첩 이창룡이 붙잡힌 사실입니다. 그의 소지품에서 [환각제]가 나왔습니다. 간첩이 환각제를 보유한 것은 간첩 역사상 이창룡이 처음이었습니다. 참고로 이창룡의 환각제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오로지 저 지만원 한 사람 뿐입니다.
2025.12.2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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