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를 쿠데타라고 규정지은 세력은 좌익들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인민군 시각으로 재단한 인민재판이요 관심법 재판이었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법정은 광적으로 소리치는 아주머니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세상은 마녀사냥시대였다. 권성 재판장이 작성한 제2심 판결문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 법률과 헌법 조문들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 여론법(자연법)으로 한다는 문구가 명시돼 있다. 불법재판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 아닌가?
12.12가 쿠데타였으면 전두환은 12월13일부터 권력을 장악했어야 했다. 12.12가 쿠데타였으면 2명의 점잖은 대령이 정승화 총장에게 가서 수사분실로 가시자고 20여분 동안 설득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공관을 무력으로 점령했을 것이다. 쿠데타를 시도했다면 전두환이 이학봉 한 사람만을 데리고 최규하 대통령에 가서 재가를 앙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먼저 데려오라는 말에 순순히 복종하면서, 이리저리 피신하다가 국방부 청사 1층 계단 밑에 숨어 있던 국방장관이 발견되어 대통령 앞에 갈 때까지 10시간 이상 초조하게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무슨 쿠데타가 이렇게 하는 쿠데타도 다 있는가?
정승화는 시해 현장으로부터 국방부 청사 밑에 있는 B-1벙커에까지 오면서 김재규가 범인임을 충분히 알아차렸으면서도 이를 이실직고 하지 않고 계엄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국무회의를 청와대에서 하지 말고 국방부에서 하도록 바람을 넣었다. 국방장관은 제쳐놓고 김재규의 명령에 따라 그의 소관사항이 아닌 병력 동원을 월권적으로 명령했다. 차지철만이 명령할 수 있는 수경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려 청와대를 포위하라 했고, 차지철의 직속 부하인 경호실 차장 이재전에게 전화를 걸어 청와대 태양요원들이 시해 현장으로 가는 것을 가지 못하도록 명하여 시해 현장을 보호해주고 범인이 색출될 수 없도록 조치했다. 차지철이 살아있다고 생각했다면 언감생신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부대를 이렇게 월권적으로 장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승화는 이런 명령을 내리는 순간에 차지철이 대통령을 살해한 범인준줄로 알았다고 사리에 맞지 않는 거짓말을 했다.결론적으로 정승화는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한 것이다.
계엄사령관이 되어서는 박대통령을 비방하고 김재규를 공공연히 비호했다. 그의 월권적 명령, 의심받아야할 명령을 수행했던 이재전 경호실 차장의 기소를 적극 저지했고, 비밀을 알고 있는 김계원의 구속을 적극 저지하려 했다. 이 두 사람이 기소되면 정승화의 범죄행위가 드러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군 내부에서는 물론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가 순순히 수사에만 응했더라면 참모총장 광관에서 총성은 일체 없었을 것이고, 이후 술 취한 장태완 등 정승화-김재규를 따르는 군벌들의 망동도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은 수사기록을 장기간에 걸쳐 분석한 결과 내놓는 글이다. 세간에는 12.12사건 7년 후인 1987년에 정승화를 인터뷰하여 그가 쏟아내는 거짓말들을 일방적으로 정리해놓고 이를 진실이라며 내놓은 책들이 있다. 이런 책은 읽기에도 앞뒤가 틀리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은 백담사에서 나와 국회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하여 12.12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12.12는 정당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이 계획된 쿠데타였으면 그 즉시 내가 권력을 잡고 대통령이 되었어야 하지 않느냐?” 수사기록을 보면 정확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야당 의원들은 이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격분하면서 소리부터 질렀다. 청문회장은 고함과 욕설과 삿대질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중에는 “회개해” 하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렸다. 양심도 없이 둘러댄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청문회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지금도 인터넷을 보면 “12.12가 우발적?”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여 전두환이 마치 해서는 안 될 거짓말을 한 것으로 비난하는 글들이 도배돼 있고, 다양한 표현에 의해 온갖 종류의 증오심들이 표출돼 있다. 당시는 민주화의 쓰나미가 온 사회를 뒤덮어 이성이 마비되고 광란만이 정의였던 그야말로 미친 사회였다. 누구든 전두환의 편을 들면 몰매를 맞아 죽어야 했던 시대였고, 386 주사파들이 일구어낸 인민민주주의 마녀사냥의 시대였다. 군이 멸시외 기피의 대상이었고, 국가안보가 냉소와 조소의 대상이었다. 빨갱이 잡는 우익이 무너지고 좌익이 사회를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제 낸정히 따져보자. 12.12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것인가? 아니면 전두환의 주장대로 합수부위 정당한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인가?
정승화는 김재규와 관련하여 조사를 받아야 할 만큼 의심스러운 행동을 충분히 했다. 서슬 퍼런 그를 조사하려면 연행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를 방치하면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제대로 할 수 없어 보였다. 또한 계엄사령관이 시해범 김재규와 한동안 행동을 함께 했다는 그 사실 자체로 그는 조사를 받아야만 할 대상이었다. 정승화의 연행에 대해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사전 승인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바보짓이었다. 노재현과 정승화는 당시 밀착하여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승화에 대한 연행은 대통령 결재를 전제로 했으며, 대통령이 허락할 것으로 확신했다. 대통령 재가가 늦어진 것은 노재현 장관이 직무를 포기하고 도망만 다녔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노재현 장관이 나타나자 금방 결재를 해주었다. 대통령이 결재를 했으면 연행의 정당성이 인정된 것이다. 이것이 결재의 상식이다. 이런 사실들만 보면 정승화 연행이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역사바로세우기 1심 재판부는 다섯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 연행의 동기가 불순했다는 것이다. 신군부가 군권을 잡기 위해 정승화에게 무고한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둘째, 대통령에게 사전재가를 받지 못하고, 당시 대통령이 주재하던 ‘총리공관’을 대통령경호실 병력으로 삼엄하게 에워싸고 6명의 장군들이 늦은 밤에 집단으로 들어가 외포감(공포감)을 줌으로써 대통령이 대통령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제로 받아낸 것이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이다. 셋째 30경비단에 불법적인 지휘소를 설치하고, 윤성민-장태완으로 이루어지는 정식지휘계통을 와해시켰다는 것이다. 넷째, 공수부대, 9사단, 30사단, 2기갑여단 등을 불법 동원하여 군권을 완전하게 장악했다는 것이다. 다섯 째, 위의 모든 것은 쿠데타를 하기 위해 사전에 세밀하게 계획한 불법행위였다는 것이다.
반면 12.12사건을,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함에 따라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어떤 논리가 내재해 있는가?
첫째, 대통령이 ‘직보’라는 관례를 잘 알고 있었다면 즉시 서명을 했고, 이렇게 되었다면 연행 이전에 사전결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전결재를 처음부터 생략한 것이 아니라 단지 대통령의 인식 부족과 노재현 장관의 도피 때문에 지연됐을 뿐이다. 둘째, 노재현 장관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대통령 호출에 즉시 응했다면 윤성민과 장태완이 비상령을 발령하고 병력을 거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합수부의 정당한 법 집행에 대해 윤성민-장태완이 사적인 동기에서 병력을 거병하여 위험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그들을 체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장태완이 공격대형을 취하고 위험한 지휘를 하지 않았다면 합수부는 부대장들에게 긴급 출동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 정승화가 연행에 반항만하지 않았어도 이후의 모든 현상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필자의 의견을 보태고 싶다. 정승화가 10월 27일 밤중에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지 않았다면 12.12는 없었을 것이다. 정승화는 2002년 9월 25일 발간한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도서출판 휴먼앤북스)에서 전두환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표현했다.
“전두환은 12.12를 통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치밀하게 짠 것 같지는 않다. 처음엔 군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육군참모총장을 밀어내고 군권을 장악하겠다는 생각에 일을 저질렀다가 사태가 커지자 사후 안전을 위해 국권까지 탈취하는 데로 치달은, 말하자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길로 달려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보기에는 정승화의 이 표현 중 뒷부분은 정직해 보인다. 12.12사건은 정승화 연행-조사라는 합수부의 정당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서 발생한 우발적으로 발생했던 상황들이었지 사전 시나리오를 짜가지고 그것을 착착 실현한 것은 아니었다. 정승화에 대한 연행은 10월 27일 한밤중인 01시경에서부터 대두된 문제였다. 김재규는 국방부에서 연행되어 가자마자 정승화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았고, 이 비밀을 알게 된 이학봉 수사1국장은 곧바로 전두환에게 정승화의 연행을 건의했다. 정승화가 국무회의에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불과 1시간 후였던 것이다.
전두환은 이미 계엄사령관이 되어 있는 막강한 정승화를 차마 연행하지 못했다. 그 대신 더욱 철저한 내사를 택했다. 이 순간부터 이학봉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승화에 대한 연행을 건의했다. 12월 12일까지 정승화를 연행하지 못한 것은 오직 최고자로서의 서슬 퍼런 권한과 힘을 가진 정승화를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연행은 법집행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 마구잡이식 쿠데타 차원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다.
누가 반란군이었는가? 합수부는 윤성민-장태완 등을 반란군이라 했고, 윤성민-장태완 측은 전두환-노태우-황영시 등을 반란군이라 했다. 재판부는 윤성민-장태완을 정식지휘계통이라 판단했고, 전두환 측을 반란군이라고 판단했다.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무고한 정승화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결인 것이다.
재판부의 판결대로 과연 정승화에게는 죄가 없었고, 최규하 대통령은 무장 군인들에 의해 연금되어 전두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였는가?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승화에게는 죄가 있었고, 최규하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노재현에게 꾸중도 했고, 전두환과 5명의 장군들이 건의를 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그의 의지대로 노재현이 나타날 때까지 재가를 지연시켜가면서 그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이튿날 아침 5시10분에 결재를 했다. 이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신현확이 이를 법정에서 확실하게 증명해주었다. 전두환에 반감을 가진 이희성도 그렇게 진술했다. 그런데 검찰과 재판부가 무슨 근거에서 이러한 판결을 내렸는지, 재판이 공사판보다 더 거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합수부는 왜 윤성민-장태완 등을 반란군이라고 생각했는가? 당시 합수부가 정당한 법집행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경로를 통해 윤성민-장태완 등에게 알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무조건 “부하가 상관을 체포 연행할 수는 없다”, “무조건 총장을 원상회복시키라”며 상당한 대의명분 없이 먼저 병력을 동원했다. 이들은 정승화에 의해 현 직책에 임명된 정승화 계열의 장군들로,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집착한 나머지 당시 윤성민보다 상위에 존재했던 국방장관-국방차관-합참의장 등의 명령을 거부하고 군사를 일으켜 공무집행을 방해하려 했고, 탱크를 가지고 수사분실을 공격하여 정승화를 구출하려 했고,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납치하여 정승화를 구출하려 했으며, 급기야는 광화문-청와대 일대의 수만의 시민과 대통령이 사살될 수 있는 무모한 포격명령을 내렸고, 2천여 명의 수경사 병력을 공격개시선에 집결시켰다.
육사출신들이면 무조건 적으로 규정했고, 탱크에 포를 장전시키라 명령했고, 정당한 법집행자인 합수부장, 대통령을 지키는 30경비단장 및 33경비단장, 1공수 여단장 및 부여단장을 포함하여 자신의 부하들까지도 사살하라 경찰에까지 명령을 내렸고, 2명의 사단장을 무단 체포하라 명령했고, 자기 휘하에 있는 30경비단 장교들을 무조건 사살하라는 정신 나간 명령을 내렸고, 국방부 청사에서는 수경사 병력과 1공수 병력 사이의 유혈 총격전까지 벌어지게 했다.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지휘와 방호시설이 갖추어진 육군본부를 내팽개치고 장군들이 대거 수경사로 몰려가 장태완과 합세하여 정당한 법집행을 방해하기 위해 거병을 했고 육군 보안대장을 체포 감금하는 등 난동을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은 분명 반란군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윤성민 참모차장이나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대통령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직계 지휘선상에 있었다. 참모차장은 계엄사령관의 대리자이기 때문이었고, 수경사령관은 대통령을 경호하는 직책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정승화 계열의 군벌들은 국방장관이나 대통령에게 품의를 얻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누가 감히 우리 보스를 건드려!” 하는 식으로 사사로운 인맥을 위해 불법적으로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반면 윤성민-장태완 등은 왜 합수부장 등을 반란군이라 주장하는가? 육군 소장이 직속상관인 육군대장을 체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참모총장이 유고가 되면 참모차장이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있는데 그런 참모차장이 “총장을 원상회복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이에 불복하고 정통 지휘선상에 있는 윤성민-장태완 등을 체포하고 공수부대 등을 거병한 것은 분명 반란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성민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전두환과 정승화의 관계는 육군 소장 대 육군대장의 관계가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합수부장 대 피의자와의 관계인 것이다. 또한 윤성민은 전두환에게 “총장을 원상복구 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바 없다. 장태완이 유학성 장군 등에게 욕설을 퍼 부우면서 했던 명분 없는 요구였을 뿐 이는 결코 명령이 될 수 없었다. 또한 명령이 있었다 해도 명령에는 정당한 것이 있고 정당치 못한 것이 있다. 범죄혐의가 있는 사람을 조사하는 것은 정당한 법 집행이고, 연행해서 조사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조사를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수사관들의 기술적인 판단 사항이다.
법 집행상의 문제로 총장을 연행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법을 무시하고 무조건 원상복구 시키라는 것은 부당한 명령인 것이다. 만일 정승화를 체포하지 않았다면, 또는 정승화를 원상회복시켰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됐을까? 우리는 김재규-정승화가 지배하는 또 다른 혁명시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재판부는 바로 이런 세상이 되어도 상관없었다고 판시한 것이다.
위 두 가지 주장 중 어느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가는 독자의 몫이다. 기록들을 보면서 필자는 장태완을 장군이기는커녕 자기통제 능력조차 없는 난동 꾼에 불과했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정승화가 자기 호신을 위해 새로 임명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것이다.
2009.12.1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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