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가 쓰는 왜곡된 역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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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09-12-14 14:01 조회21,8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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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가 쓰는 왜곡된 역사소설
2005년 2월 11일, 독립신문에서 ‘조갑제 실록’ “분초단위로 재구성한 박정희의 마지막 하루”-25년간 끈질긴 취재로 엮은 10.26 최종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조갑제의 책이 소개돼 있는 것을 읽게 됐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김재규의 지령을 받아 두 대통령 경호원을 사살하는 등 이날 궁정동 작전을 지휘했던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일대 학살극을 끝낸 뒤 두 여인(심수봉, 신재순)에게 각각 20만 원이 든 돈 봉투를 쥐어주고 차에 태워 집으로 보내 주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한 두 사람을, 아무 감시역도 붙이지 않고 현장에서 이탈하게 했다는 것은 이 사건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거사가 아닌, 홧김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란 사실을 입증한다.”
두 여인들에게 20만원씩을 주어 그냥 집으로 보냈다는 사실 하나만을 놓고 김재규의 범행이 우발적인 것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김재규의 범행이 우발적이었느냐, 계획적이었는냐를 판단하는 것은 조갑제처럼 두 여인을 그냥 집으로 보냈다는 하나의 사실로 유추될 일이 아니다. 김재규는 연속된 진술들을 통해 그가 정권을 잡으려는 망상을 가지고 혁명을 계획하였으며, 10.26날 저녁 8시에 국방부에 와서도 김계원에게 “3일 후에 간판을 혁명위원회로 바꿔달아야 한다”는 말을 명령조로 했고, 혁명위원회의 구성 개념을 매우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당시의 중앙정보는 아무나 가지 않는다. 우선 머리가 좋아야 간다. 해병 대령 출신 박선호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박선호가 두 여인을 그대로 돌려보낸 것은 바둑을 둘 때, 몇 수 앞을 내다보듯이 박선호 역시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여인들을 그대로 방출한 것이다. 순간적인 판단이었기는 해도 생각이 치밀했기 때문에 그 여인들을 그대로 내 보낼 수 있었다.
여인들은 박대통령의 술좌석에 시중을 들러 왔다. 이것이 알려지면 본인들에게는 엄청난 불명예다. 웬만한 여인들이라면 누워서 침을 뱉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감시하거나 감금해야 하는가? 또 통상의 여인들은 겁이 많다.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간직한 사람은 죽는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만일 그 여인들이 그 엄청난 비밀을, 더구나 중앙정보부장이 저지른 비밀을 발설한다면 어떻게 될까? 여인들은 그런 것쯤은 안다. 그리고 박선호 역시 그것을 사전에 단단히 교육시켰고 서약서까지 받았다 하지 않는가? 또, 여인들을 중정으로 데려다 감금시키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 이례적인 감금사건은 중정요원들 사이에 금방 소문이 난다. 이는 막중한 거사에 대한 비밀 유지에 오히려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조갑제와 필자 사이에 판단력의 격차가 발생한다. 박선호가 여인들을 감금하거나 감시인력을 따라붙게 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어찌 “10.26이 홧김에 저지른 우발사고였음을 입증한다” 는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가? 필자는 “수기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쓰기 위해 조갑제가 쓴 “12.12 정승화는 말한다”는 책을 읽어보았다. 정승화가 불러주는 말을 그대로 기계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보였다. 앞뒤가 다르고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변명들과 거짓말들이 뻔히 드러나 보이는데도 조갑제는 정승화의 말이면 모두가 사실이라고 믿는 듯했다.
조갑제도 수사자료를 보았다 하고 25년동안이나 끈질기게 취재하였다면서 이런 글을 썼다. 그러나 두 여인에 대한 박선호의 조치 하나를 놓고 김재규가 홧김에 순간적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단정하는 데에는 충격과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김재규는 저녁 7시에 그가 불러 놓은 정승화에게 와이셔츠 바람으로 가서 대통령과 만찬이 끝나는 대로 오겠다고 양해를 구한 후, 2층 집무실로 올라가 책장 뒤에 숨겨놓았던 리벌버 권총에 실탄을 장전해 가지고 두 대령을 불러 무서울 얼굴을 해 가지고 “저기 정승화 총장이 와 있다. 너희들은 똑똑한 놈 3명을 뽑아 다 해치워라” 이렇게 명령했다. 이것이 어찌 홧김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총격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김재규는, 대통령이 한참 신재순의 ‘사랑해’라는 노래를 한참 따라 부르고 있던 순간에 총을 쏘았다. 노래를 부르던 순간에 김재규가 왜 화가 났다는 말인가?
수사기록에 나타난 10.26의 밤
7시 35분이었다. 연회장에서 심부름을 하던 남효주가 들어와 “부장님, 전화입니다” 하고 암호를 전했다. 김재규가 박선호가 있는 부속실로 들어가니 박선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 준비되었는가?
박선호: 완료됐습니다.
7시 38분, 김재규가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신재순이 심수봉의 기타반주로 ‘사랑해’를 부르고 있었고, 대통령은 간간히 흥얼거리며 신재순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김재규가 권총을 하의 주머니에 넣고 들어온 것이다. 앉자마자 김계원을 향해 “각하를 똑바로 모시시오”하고 툭 친 후, 차지철을 쏘아보았다.“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새끼를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하면서 차지철의 팔뚝을 향해 권총을 쏘았다. 이에 놀란 대통령은 “무엇들 하는 짓이야” 하고 나무랐지만, 김재규는 그런 대통령의 가슴을 향해 권총을 쏘아 버렸다. 7시 40분이었다.
수사자료를 보면 10.26은 1979년 4월부터 김재규 머리에 구상돼 있었다. 또한 1979.12.6. 김재규는 아주 치밀한 3단계혁명계획을 실토했으며 그 계획은 그야말로 치밀했다. 그리고 김계원과 박선호에게는 임박해서 ‘거사’의 뜻을 밝혔고, 이들은 이에 동의했다.
김재규는 보안사령과도 했고, 중정부장도 했다. 그는 정보맨이며 보안-비밀이 생리적 DNA로 정착돼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전에 그의 심복들을 중정과 군에 심어놓고 그들이 깊이 생각할 여유 없이 상황에 직면해서야 그의 명령에 응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거사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나폴레옹처럼! 김재규의 작전수행 방법은 나폴레옹의 방법과 아주 꼭 같다. 부하장군들에게 미리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그의 머리에 있는 구상에 따라 시간이 임박해서야 "어디로 가라"는 식의 명령만 내렸다.
김재규는 박선호에게도 정승화에게도 사전 정보를 주지 않았다. 임박해서 임무를 주었고, 배반하면 죽일 생각이었다. 수사자료를 보면 “미리 계획을 알려주면 배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대목이 있다. 차 안에서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무슨 명령을 내렸는가? 1) 비밀을 지키고 2) 계엄을 선포하고 3) 계엄부대를 동원하라고 명했다. 우발적으로 사고를 저지른 사람이 이런 명령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국방부에 와서는 무슨 명령을 내렸는가? 국무회의에서 계엄선포가 결정됐고, 계엄부대 동원이 이루어 졌다는 정승화의 보고를 받고 난 다음에야 김재규는 혁명 제3단계인 "혁명위원회"의 간판을 달 것을 지시했다. 이는 김재규가 12월 6일에 자백한 "3단계혁명계획"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몇 가지만 따져 봐도 김재규가 홧김에 우발적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할 수는 없다.
3단계혁명계획은 김재규의 구상대로 아주 잘 진행돼 가고 있었다. 2단계인 비상선포와 병력동원까지는 대 성공이었다. 마지막 단계로 ‘혁명위원회’의 간판만 달면 성공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간판을 달 순간, 김계원이 배신한 것이다. 김재규가 잡혀가고 사실을 이실직고함으로써 그 간판을 달지 못한 것이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김계원은 대통령 시신을 병원으로 옮겼고, 거기에서도 시신이 대통령인줄 모르게 처리하는 기찬 솜씨를 보였다. 그리고 중정요원들을 배치하여 시신을 지키고 보안을 유지하도록 조치했다. 이는 치밀한 행동이었다. 사전 구상이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역사는 분석능력에 따라 정 반대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품질관리의 아머지인 데밍박사는 학문적 이론이 없는 경험은 원주민적 경험이며 이는 사회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했다. 분석의 질은 학문적 깊이에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위 조갑제의 분석을 보면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조갑제가 최근 잇따라 역사를 왜곡하는 글을 작정하고 다수 쏟아내고 있다. 전두환을 쿠데타와 내란의 수괴로 몰아가는 글이며, 5.18을 “반공선상에 서있는 정당한 민주화 운동”으로 몰고 가는 글들이었다. 여러 개의 글 중 12월 12에 쓴 “등 뒤에서 쏘았다! 영화보다,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12.12 사건 중계, 수사관의 선제 사격”이라는 제목의 글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유치한 왜곡이었다. 아래는 조갑제의 글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수사관의 선제 사격(조갑제의 글)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터진 최초의 총성은 육군본부 상황일지에 「19시 38분 공관지역에서 총성 네 발」로 기록되었다. 1979년 12월12일 밤의 이 총성은 10월 26일 밤 7시 40분의 총성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치게 하였다. 鄭昇和총장 납치가 매끄럽게 이뤄져 총성이 없었다면, 또는 鄭총장이 처음부터 순순히 연행에 응해 총격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날 밤의 병력출동과 유혈사태는 없었을 것이고, 역사의 진행방향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초 겨울밤 한남동의 밤하늘을 울린 이 총성은 한 정권의 잉태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이 첫 총성은 12·12사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쟁점이 돼 왔다.
全斗煥-盧泰愚장군 측에서는 「정총장 경비병이 먼저 수사관들에게 발포, 그 뒤의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해 왔다. 이 주장은 사실과는 정반대였음이 객관적 정황으로 입증되고 있다. 鄭총장은, 공관 1층 응접실에서, 『녹음실로 가서 조사를 받으시라』고 말하는 許三守·우경윤(禹慶允) 두 대령에게 『이놈들, 누가 그 따위 지시를 하던가?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해?』라고 소리쳤다. 그는 부관 이재천(李在千)소령을 불렀다. 『총리공관이나 장관에게 전화 대!』 그 순간 두 대령은 鄭총장을 양쪽에서 낀 채 끌고 가려고 했다. 鄭총장은 겨드랑이를 낀 한 대령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鄭총장의 고함소리에 놀란 총장부인 신유경(申有慶)여사는 2층에서 뛰어내려왔다. 鄭총장이 두 대령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을 보았다. 부관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을 지나 부관방 쪽으로 뛰어가는 데 총성이 울렸다. 申여사는 엉겁결에 사우나방 속으로 뛰어들어가 숨었다. 鄭총장은 『사격중지!』라고 외친 뒤 『그럼 가자』라면서 현관을 향해 스스로 걸어 나갔다. 이때 홀의 대형 유리창을 박차 깨고 한 사나이가 뛰어들어왔다. 그는 M16소총 개머리판으로 鄭총장의 뺨을 후려치면서 『뭘 꾸물대!』라고 소리쳤다. 안경이 떨어졌다. 鄭총장은 안경을 다시 집어 올리고 끌려갔다. 申여사는 사우나방에서 2층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내려와 부관 방에 가 보았다.
『경호대장 김인선 대위가 흥건히 쏟아진 피 속에서 쓰러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재천 소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기자 주:그는 복부에 한 방을 맞은 뒤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가 늘어 떨어져 덜렁덜렁 하고 있었습니다. 현관 쪽에는 아주 덩치 큰 사나이가 열십자로 뻗어 있었습니다』 부관실이 첫 총성, 그 현장을 경험한 사람들은 金仁先·李在千, 그리고 보안사 대공처 수사관 두 명이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생존해 있을 뿐 아니라 현역으로 복무중이다. 이 네 사람 이외에 공관관리 주임 반일부 준위가 중요한 목격자다. 반준위는 그날 저녁 부관실에 있었다.
許, 禹 대령과 함께 온 두 수사관이 부관실로 들어왔다. 총장 경호대장 金仁先대위가 들어오더니 두 수사관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 두 수사관은 쭈빗쭈빗 하면서 나가더니 다시 들어왔다. 반 준위는 바깥이 추워서 그러는줄 알고 『커피 들겠소?』라고 했다. 이때 李부관이 황급히 들어오더니 전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반준위는 당번병에게 커피를 시키려고 부엌으로 가다가 홀에서 나오는 당번병과 마주쳤다. 당번병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이때 부관실에서 총성이 울렸던 것이다. 보안사 수사관 두 사람이 전화를 돌리는 李소령과 金대위를 권총으로 쏜 것이었다. 金대위는 머리와 척추 근방에 네 발을 맞았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지근거리에서 쏘았으므로 관통력이 약했던 것이다.
禹대령, 오인사격의 피해자(조갑제의 글)
全斗煥측 주장대로 鄭총장 측에서 선제사격을 했더라면 두 보안사 수사관이 다쳤을 것이고 李부관과 金경호대장은 鄭총장을 끌고 가는 두 대령을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실상은 그 반대였다. 부관실에서 총성이 난 뒤 끌려가는 鄭총장을 구출하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면 禹慶允대령은 왜 하복부에 총을 맞고 현관 쪽에 쓰러져 있었던가. 禹대령은 지난 81년에 千金成씨에게는 『정총장 경비병한테서 피격 당했다』고 했으나 요사이는 일체 함구하고 있다.
禹대령은 합수본부 측 병력으로부터 오인사격을 당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첫째, 李소령과 金대위가 무력화됨으로써 鄭총장 공관에서는 총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 공관 초병들은 그 전에 이미 무장해제 돼 있었다.
둘째, 합수본부의 당시 수사책임자 李鶴捧씨에게 본 기자가 물었더니 『禹씨를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禹씨의 하복부를 맞힌 총탄을 검사하면 누구 총에서 나온 것인지 간단히 알 수가 있다. 더구나 禹씨는 자신을 쏜 사람을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쏜 사람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밝혔을 경우 全斗煥장군 측이 곤란하게 되기 때문이었으리라.
셋째, 金仁先·李在千 두 사람은 그 뒤로도 계속 현역에 복무하면서 승진도 정상적으로 되고 있다. 두 사람이 비열한 선제공격으로 그런 엄청난 사태를 야기 시킨 장본인이라면 그럴 수가 있을까. 오히려 두 장교에게 선제공격을 가한 쪽의 미안감이 엿보이는 인사이다. 넷째, 鄭총장쪽에서 쏜 사람이 없었더라면 합수본부 측에서 쏘았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공관 안팎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일부수사관들은 공관 안에서, 33헌병대 병력은 건물 바깥에서 초긴장 상태 하에 있었다.
초긴장 하에서 피아구별 안 돼(조갑제의 글)
부관실에서 총성이 난 것과 거의 동시에 반일부 준위가 현관을 박차고 나가 (공관 외곽 경비를 맡은 해병대에 신고하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이 반 준위를 향해 현관 바깥에 있던 합수본부 측 수사요원이 M16을 쏘았다. 이와 거의 동시에 朴모 보안사 수사관이 M16으로 홀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鄭총장을 후려쳤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긴장상태 하에서 불과 몇 초 사이에 벌어졌으므로 합수본부 측 요원들은 피아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鄭총장을 끼고 있던 許三守대령도 유리창을 깨고 뛰어든 사람이 자신의 부하인데도 순간적으로 누구인지 모르고 당황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엉겁결에 쏜 총탄이 禹慶允대령의 하복부를 맞힌 것으로 보인다. 禹씨나 全斗煥장군측이 『우대령을 쏜 사람은 ○○○다』는 반증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오인사격에 의한 총상」이 정설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全장군측은 또 「鄭총장을 수경사 30경비단으로 모셔 용퇴를 건의하려고 했다」는 해명도 하고 있다. 이날 全장군이 李鶴捧 수사국장에게 내린 지시는 「서빙고 분실로 연행, 법적인 처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용퇴를 건의하기 위해 무장병력을 보내고 대통령 결재를 받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다.
12월12일 밤 총장공관에서 일어났던 상황은 진정한 군사문화가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군사문화의 핵심은 상관에 대한 복종과 군인신분에 대한 명예심인데, 그날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鄭昇和씨의 말을 빌면 「마피아식」이었던 것이다. 12월8일 盧泰愚 9사단장이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을 찾아왔다. 육군본부로 鄭총장을 찾아 인사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張사령관은 『내 다음에는 盧장군이 수경사를 맡을 것 같으니 잘하시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날 조홍(趙洪) 수경사헌병단장이 오더니 『전두환 보안사령관한테도 말씀을 드려놓았는데, 張 사령관님과 함께 저녁을 모시겠습니다』고 했다.
張사령관은 자기 부하가 全본부장을 먼저 찾아간 것이 마음에 걸렸고, 준장 진급이 내정된 趙대령으로부터 술을 얻어 마신다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아 그 초대를 거절했다. 12월 10일 오후 許和平 합수본부장 비서실장이 張사령관을 찾아왔다. 張사령관에게 許대령은 『전 본부장께서 모레 저녁에 계엄업무로 수고하시는 지휘관들을 모시려 합니다』고 했다. 許대령은 『음식점 위치는 메모하여 사령관님 비서한테 맡겨 놓았다』고 했다. 許실장은 全본부장이 보내는 봉투를 전달했는데 그 안에는 1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형님! 김장에 보태쓰십시오」란 글도 들어 있었다. 張사령관은 참모장에게 그 돈을 건네주어 연말 부대회식에 사용하도록 했다.
조갑제의 글에 대한 지적
조갑제는 육본 상황실 자료라며 7:38분에 공관에서 난 총성이 5발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사기록을 보면 이는 엉터리다. 두 대령과 5명의 수사관들이 정승화 공관에 간 시각은 7:05분경, 정승화를 데리고 공관을 출발한 시각은 7:22분이었다. 이 동안 총장 공관에서는 5발이 아니라 12발의 총알이 발사됐다. 조갑제의 말대로 7:38분에 난 총소리라면 수경사 헌병들과 해병대 헌병 사이에 있었던 총성이며 이는 5발이 아니라 수백발이며 여기에서 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7:38분에 5발의 총성이 있었다는 것은 수사기록과는 거리가 너무 먼 소설이다. 총을 먼저 쏜 것은 2층 복도에 서 있던 정승화의 아들인 것으로 추측되며, 이 청년은 아무런 총소리가 없었던 시간대에 총장실 응접실에서 복도로 나오는 우경윤 대령을 쏘았던 것이다. 이것이 공관에서 발사된 첫 총알이었다.
당시 상황은 수사관들과 총장 부속실 요원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질 만큼 어지럽지가 않았다. 2층 계단에서 우대령을 향해 청년이 38구경의 권총을 어깨에서 대퇴부로 내려 꽂히는 사격을 했고, 이 총에 우대령이 쓰러진 것이다. 그 다음의 권총사격은 정승화의 경호대장 김대위가 전속부관 실에서 허리에 찬 총에 손을 대는 순간 수사관들이 경호대장과 전속부관을 향해 날린 6발의 총성이었고, 이 사격은 순전히 전속부관실에서만 발생했다. 그 다음의 권총 5발은 공포심리에 돌입한 수사관이 현관 밖으로 나와 하늘에 대고 공포사격을 가한 것이다. 따라서 조갑제의 이 주장은 정확히 정승화의 진술 하나에만 의존한 것이다. 이런 자세로는 역사를 쓸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당시의 수사기록을 모두 참조하여 필자는 총장공관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위의 조갑제 글과 비교해 보면 두 사람의 글이 얼마나 정 반대인지 잘 나타나게 될 것이다. 조갑제의 글은 순전히 정승화의 구슬 한 가지(12.12 정승화는 말한다)만 가지고 쓴 글임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사기록에 나타난 총장공관 상황
우대령: 김재규 재판과정에서 새로운 진술이 나와 총장님의 진술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총장: 그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하자.
허삼수: 여기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녹음 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총장: 김재규가 뭐라고 했는데 그래(짜증을 내며).
허대령: 총장님과 돈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총장: 그런 일 없다고 했잖아(고함을 치며)
허대령: 저희들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절차상 필요하니 같이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1962년에 방첩부대장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정승화는 이 말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에 총장은 노발대발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 가긴 어딜 가. 내가 적어도 육군참모총장이야. 너희들 누구지시 받고 왔어, 대통령 전화 대, 장관 전화 대” 두 대령은 대통령에게 이미 보고된 것이니 조용히 같이 가시자 했지만 총장은 연행을 거부하면서 “부관, 경호대장, 이놈들 잡아” 하면서 고함을 쳤고, 두 대령은 총장의 겨드랑이를 끼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조용히 가시지요”하면서 일어섰다.
한편 부관실에서는 이재천 소령과 김인선 대위가 3명의 수사관들에게 앉으라 권했지만, 수사들은 두 장교들이 사복 속에 권총을 차고 있는 것을 금방 감지하고 소파를 그들에게 극구 양보했다. 앉으면 제압당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양측이 총을 휴대한 상황에서 누가 기선을 제압하느냐, 마음속에서는 불꽃 튀는 전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총장의 고함소리를 들은 근무병들 7-8명(허삼수는 5-6명이라고 진술, 우경윤은 7-8명이라고 진술)이 순차적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놀라 들어와 지켜보기만 하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에 유경윤이 총장의 겨드랑이를 놓고 이들 근무병들에게 “너희들은 무엇 하는 놈들이야, 나가”하고 소리를 치며 다가섰더니 그들의 일부가 슬금슬금 나갔다. 혹시 외부에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밖을 살펴보고 현관으로 돌아오는 순간 총성이 울리면서 우대령이 쓰러졌다. 이 장면에 대해 우대령은 이렇게 진술했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보니 나로부터 2-3m 지점에 옅은 갈색 옷을 입은 청년이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총알은 우대령의 오른 쪽 팔뚝을 위에서 아래로 뚫고 들어가 좌측 하복부 쪽에 박혔다. 위에서 밑으로 쏜 것이다. 우대령은 덩치가 크고 우람했다. 그런 그를 어깨에서 하복부로 총알을 날렸다면 사선의 심한 각도로 보아 그 총알은 계단 정도에서 날아왔을 것으로 보인다. 우대령과 합수부측은 이 청년을 정승화의 아들이거나 공관경비 요원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누가 우대령을 쏘았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우대령은 그 청년이 총장의 아들일거라는 생각에 규명하지 말고 그냥 덮어두라고 했고, 우대령이 후송된 다음 합수부는 우대령의 요청에 따라 이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1994년 7월 25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근무하는 총기분석실장을 맡고 있던 이정필씨는 서울지방경찰서에 나와 당시의 X-레이 사진을 판독하며 사진 상으로는 우경윤의 몸속에 박힌 총알이 38구경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술했다. 우경윤이 어떤 상태에서 누구로부터 총을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심증만 가지 확실한 증거가 없다, 우경윤은 미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반신불수가 되어 있다. 38구경의 권총이라면 총장의 것이거나 수사관들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수사관이 우대령을 쏘았을 만큼 복잡하게 엉키지는 않았다. 이후 정승화의 아들이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두 차례 더 목격된다.
이 틈에 총장은 소파의 은밀한 곳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눌렀다. 부관을 부르는 벨이 울렸다. 이소령이 뛰어나가 응접실 문을 열고 “부관입니다” 하고 복명했다. 총장은 “총리나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대” 하고 화가 난 음성으로 지시했다. 부관실로 뛰어온 이소령이 수화기를 들고 막 전화를 돌리는 순간 응접실에서 “경호대장, 경호대장” 하고 김인선을 긴급히 부르는 소리가 또 들렸다. 총장의 위기를 감지한 김인선 대위가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이 가면서 응접실로 뛰어가려 했다. 이 모션을 수사관들은 김대위가 권총을 뽑아들고 총장에게로 가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되면 연행이 어렵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자 박원철 상사가 왼손으로 김대위의 손을 권총에 대고 누르면서 오른 손으로 자기 가슴에 차고 있던 리볼버를 꺼내 개머리판으로 김대위의 좌측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바로 이 때 복도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고, 이 총알에 의해 현관문 가까운 복도에서 우대령이 맞고 쓰러졌던 것이다. 위 총소리와 동시에 부관실에 있던 3명의 수사관이 흥분하여 김대위와 이소령을 마구 쏘았다. 이소령은 복부에 1발을 맞고 김대위는 5발을 맞았다. 상대방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렇듯 과잉액션을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쟁심리인 것이다. 이소령에게 두 발을 쏜 사람은 한길성 소령이었다. 한발은 복부에 맞고 다른 한 발은 요행이도 권총 피에 맞았다.
두 사람을 제압한 후 박원철은 현관 밖으로 뛰어나오다가 우경윤 대령이 피를 흥건히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공포심에 휩싸이면서 격한 감정이 폭발했다. 소위 전투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는 94년 2월 1일 수사관 앞에서 무서움과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박상사는 하늘에 대고 권총으로 5발의 공포를 연속하여 쏘았다. 이 총소리에 공관관리관인 반일부 준위가 정문 초소 쪽을 향해 달려갔다. 박상사는 “저 새끼 봐라”하고 소리쳤다. 이에 정문에서 현관 쪽을 감시하던 김덕수 준위 등이 앞으로 나섰다. 반준위는 다시 현관 쪽으로 달려왔다. 박상사는 그를 향해 격발을 했지만 총알이 없었다. 이 사이에 반준위는 높은 담을 넘어 해병대 내부반으로 피했다.
같은 시각, 한길성 소령은 복도에 쓰러져 있는 우대령을 보고 놀라며, 허대령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대령은 괴로운 표정에 손가락으로 응접실을 가리켰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총장이 “당신 누구야”하고 경계했다. “수사관입니다. 빨리 가시지요”하며 총장 옆으로 다가가 일어서기를 종용했다. 한편 권총 알이 떨어진 박원철은 슈퍼살롱 옆에 대기하던 신동기에게 달려갔다. “형, 트렁크 빨리 열어”. M-16 소총 1정을 꺼내 옆구리총 자세를 하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좌측 2층 계단에서 청년이 권총을 겨누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박원철은 그에게 M-16을 겨누며 “이 새끼” 하고 소리쳤다. 청년은 놀라 쏜살같이 2층으로 올라갔다. 박상사는 복도에 더 있다가는 어느 곳에서 총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사격을 주고받는 상황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변수가 발생한다. 이는 상식이다.
박상사는 유리창을 통해 응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총장의 좌측에는 허대령이, 오른쪽에는 한소령이 서 있었다. 연행을 조르고 있는 듯 했다. 박상사는 M-16 개머리판으로 유리를 위에서 밑으로 내려쳤다. 유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고 그 유리를 밟고 튀어 들어가 총장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댔다. “빨리 나갈 것이지 무얼 우물쭈물해” 이에 정승화는 겁을 먹었다. 총장의 양 옆에 서있던 허대령과 한소령이 총장의 겨드랑이를 끼자 총장은 순순히 연행에 응했다. 이 때 정태연 군이 응접실문을 열고 들어와 “아버지 총 여기 있어요” 하고 총을 내밀었다. 그러나 총장은 총을 가지고 올라가라고 했다. 나오는 광경을 총장의 부인인 신유경(당시51세)씨가 계단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동이 걸려있던 슈퍼살롱 뒷좌석 가운데에 총장을 앉혔다. 그 좌측에는 한길성, 우측에는 허삼수, 앞좌석에는 김대균 소령이 타고 신동기가 운전을 하고 나왔다. 현관출발시간이 7시22분이었다. 불과 12분 만에 총장이 체포된 것이다. 총장을 태운 차는 저항 없이 공관 정문을 나왔다. 해병대 초소에 이르자 헌병이 M-16 소총을 겨누며 차를 세웠다. 운전을 하던 신동기가 유리를 내리고는 “이놈들, 총장님이 타고 있는데 어디라고 총을 겨누느냐”하고 소리를 쳤다. 헌병이 차안을 들여다보자 총장이 “나다, 총장이다” 하고 신분을 밝혔다. 비상라이트를 켜고 클랙슨을 연속 울리며 달렸다. 그러자 경비병들이 바리케이드를 순순히 열어주었다. 서빙고 분실에 도착한 시각은 7시 30경이었다. 쓰러져 있는 우경윤 대령은 몸집이 매우 컸다. 두 사람이 달려들어 간신히 총장 차량에 태울 수 있었다. 박원철 준위는 조수 자리에 헌병 하사를 태운 후 총장 차를 운전하여 7시 25분 정문을 출발하여 10분 후 수사분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한소령이 그를 마이크로버스에 옮겨 싣고 통합병원 서울분소로 후송했다.
한편 이재천 소령은 의식을 회복하여 상황실장에 전화를 걸었다,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과 범수단장이 총장님을 납치해 갔습니다” 그리고 부상을 당했으니 앰뷸런스를 보내달라고 했다. 7시 40분경이었다. 그에게 시간은 일각이 여삼추였다. 상황실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자 그는 상황실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때는 윤성민 참모차장이 직접전화를 받았다. 이소령은 상황실장에게 했던 보고를 그대로 한 번 더 반복했다. 7시 50분이었다. 이 7시 40분에 윤성민은 총장이 합수부에 의해 연행된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윤성민 역시 94년 3월 8일 918호 검사실에서 이를 인정했다. 보안사 권정달과 우경윤이 10.26과 관련하여 연행한 사실을 상황실에 와서 인지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하지만 윤성민은 어찌된 일인지 역사바로세우기재판 제17차 공판정에 나와 이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총장을 불순분자들이 납치해간 것으로 알고 비상령을 내렸으며, 병력도 그래서 동원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변호인들이 육성녹음을 들려주자 그때서야 시인을 했다. 윤성민을 증인으로 세워놓고 변호인과 검사가 벌이는 신문 과정에서 재판장이 편파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로 인해 변호인들이 일괄 사퇴를 하게 되었다. 사실상의 법관기피였던 것이다.
총장실 이소령과 김대위는 통합병원에서 20일간 치료를 받고 서빙고 분실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80년 1월 31일 풀려났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94년 2월 당시 모두 대령으로 진급해 있었다. 정총장이 연행되어 공관지역을 유유히 빠져나간 다음에 33헌병대와 해병대 헌병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했다. 33헌병대는 11월 초순부터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합수부에 배속되어 합수부의 지시에 따라 수사업무를 보조하고 있었다. 33헌병대장인 최석립(육사19기)은 12월11일 오후에 허삼수로부터 정승화 연행에 따른 임무를 부여받았다. 12일 오후 6시까지 헌병 병력 50명을 이끌고 수사분실에 와 대기하고 있다가, 연행조가 출발하면 즉시 한남동 로터리에 가서 대기하고, 요청이 있을 때 공관으로 진입하여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연행통로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최석립 헌병대장은 12일 오후 황길수 한성동 차영복 대위를 불러 연행계획을 알려주면서 우발사태에만 대비하고 가급적 충돌을 피하도록 조심할 것을 지시했다. 최석립 헌병대장은 1대의 지프차와 2대의 마이크로버스에 65명의 병력을 태우고 오후 6시경에 수사분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연행조가 출발함과 동시에 출발하여 7시를 조금 지난 시각에 공관의 외곽초소로부터 150m 떨어진 한남동 로터리 근처의 슈퍼마켓 주차장에 도착한 후 거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이 도착한 후 10분 정도가 경과한 시각에 공관에서 총성이 났고, 공관 울타리 바로 밖에서 총소리를 들은 성환옥 대령은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최석립 중령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쳤다. 최석립 헌병대장은 황길수 대위 등 6명에게 해병 위병소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한성동 대위가 이끄는 팀은 총장공관으로 보내고, 차영복 대위가 이끄는 팀은 해병대 내무반으로 보냈다. 한성동 대위가 이끄는 팀이 공관에 갔을 때는 이미 총성이 멎은 상태였다. 그래서 성환옥 대령은 한성동 대위 팀을 공관 밖에 대기시킨 후 사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자 곧 총장을 태운 차량이 공관 외곽초소를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무전을 접수했다. 이에 성환옥 대령은 한성동 팀에게 철수를 지시하고 그들과 함께 철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해병대 매복조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장이 이미 연행되어 간 다음이기에 성환옥 대령은 해병대와 충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해병대 요구에 순순히 따르라고 지시했다.
반면 위병소와 해병 내무반으로 간 황길수 대위 및 차영복 대위가 이끄는 팀들은 매우 난처한 상황을 맞게 됐다. 차영복 대위 팀이 해병내무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병 내무반에 비상이 걸려 있었다. 총장공관을 관리하던 반인부 준위가 해병내무반으로 가서 불순분자들이 공관을 습격했다는 허위제보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차영복 대위 팀이 해병내무반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병대 주력이 이미 실탄을 지급받고 배치를 완료한 상태에 있었고, 나머지 일부는 내부반에서 실탄을 지급받고 있던 중이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차영복 팀은 내무반으로 가서 내무반에 있던 병사들을 제압했지만 곧이어 역공을 당했다. 밖에 나가 있던 해병들이 돌아와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밖으로 배치돼 있던 30여명의 해병이 두 갈래로 나누어 한 팀은 해병대 내무반을 장악하고 있던 차대위 팀에 사격을 가했고, 다른 한 팀은 위병소를 포위하여 황길수 팀에게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위병소에 있던 황길수 대위 등 4명이 죽고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반면 해병 내무반에 갔던 차대위 팀은 차대위의 지시에 따라 무장을 버리고 연금을 당했다. 이처럼 이들 33헌병대는 연행 시에 공관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연행업무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조갑제는 분석력을 기른 후에 이런 역사에 손을 대야
조갑제의 이런 허무맹랑한 소설들이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 동원되었다. 그의 글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몰라도 조갑제의 역사소설은 정승화측의 논리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결과를 하늘처럼 알고 그것이 기초하여 정의감을 부각시키려 노력한 흔적들이 역력했고, 이러한 그의 판단은 그가 쌓은 내공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의 역사 판단과 전개된 이야기를 보면 수사기록과 다른 것이 옳은 것보다 너무 많아 일일이 지적하기조차 벅차다. 다만 필자는 위에서 10.26에 대한 그의 판단이 얼마나 경솔하고 가벼운가를 지적해 주었고, 총장 공관에서 있었던 상황을 기술하는데 조갑제가 얼마나 무책임한가를 지적했다.
조갑제는 지금 5.18을 ‘반공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 12.12를 왜곡 매도하는 글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검사들이 변호인들에게 당했던 수모에 대해 단 한 가지도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군을 너무 모른다. 10.26 직후 전두환은 두 가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나는 보안사령관이고 다른 하나는 합수부장이었다. 보안사령관으로서의 상관은 국방장관이지 참모총장이 아니다. 합수부장으로서의 상관은 계엄사령관이지 국방장관이 아니다. 그런데 전두환은 보안사령부 업무에 관하여는 국방장관에게만 보고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갑제는 정승화의 말만 믿고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정승화에게는 보고하지 않고 국방장관에게만 보고했다는 실로 말도 되지 않는 것을 이유로 전두환을 찍어 내리고 있다. 조갑제의 글에는 맞는 말이 거의 없다. 거의 모두가 수사기록과 다르게 왜곡돼 있다. 글를 보면 조갑제는 수사기록을 가지고 분석한 것이 아니라 정승화와 장태완이 쓴 회고록만 보고 글을 쓴 것이다. 이는 매우 무책임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느 방송이든 조갑제와의 토론을 초대한다면 기꺼이 응할 것이다.
2009.12.14.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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