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직후의 북한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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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4-13 07:58 조회3,6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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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직후의 북한 동향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에 의해 갑자기 시해되자,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대행자가 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끌던 내각은 1979년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같은 날 아침 9시에는 최규하 대통령대행이 직접 나서서 “국가비상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통해 국민의 단결을 호소했다. 제주도를 포함한 계엄은 전국계엄이고, 제주도를 제외한 계엄은 지역계엄이다. 지역계엄과 전국계엄의 차이는 계엄관리의 절차와 속도의 차이다. 지역계엄은 계엄사령관이 비상상황을 관리하는 데 있어 국방장관과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고, 전국계엄은 계엄사령관이 중간 절차를 생략한 채 곧바로 대통령을 상대하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그 시점에서 국민들이 가장 염려했던 것은 북한의 남침이었고, 간첩들의 준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해 12월, “1980년 초에 남침을 감행할 것”이라는 첩보가 미국으로부터 입수됐고, 같은 시기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도 “1980년 1월에 남침할 가능성이 높다”는 첩보를 입수했다(1979.12.25자.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작성한 “북괴대남도발 위협판단”). 이에 당황한 최규하 대통령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긴급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고, 여기에서 두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하나는 대규모 육군 기동훈련을 벌여 북한에 무력을 과시하기로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지도층에게 북한의 남침 위협을 알려 사회안정을 위한 협조를 당부하기로 한 것이었다(G-3, ‘육군위기관리대책’).
1980년 1월 21일, 최규하 대행 주재로 ‘대간첩대책중앙회의’가 열렸다. 최규하 대행은 이 자리에서 “북한은 공작간첩을 통한 정치선동과 무장간첩 남파에 의한 사회불안을 획책할 가능성이 있으니 특히 대공관계자는 불순분자 개입을 사전 방지해 달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어서 그해 1월 26일부터 31일까지 경기도 파주에서 보병 2개 사단과 공군을 동원한 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했고, 1월 30일에는 김종필, 김영삼 등의 정계인사들과 언론계 및 대학생간부 등 798명에 기동훈련을 참관케 하여 훈련의 목적을 설명해주었다(G-3, 육군기동훈련).
미국 역시 북한의 오판을 경계했다. 1980년 4월 3일, 군사정전위 제400차 대회의에서 UN군측 대표 '호스테트리' 소장이 북한의 잇따른 대량 무장간첩침투 행위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 것이다. 정부는 5월 17일에 전 공무원을 대상으로 비상근무령을 내렸으며,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위컴 사령관을 방문하여 일본내각으로부터 접수한 남침첩보 및 우려사항을 전달했다. 어수룩한 미국 정부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북한을 세밀하게 의심하지 않았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미국이 세계정세를 손바닥 보듯이 한 눈에 보고 있으며 매 사안마다 현미경적으로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다고 맹신한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미국은 한국의 사정을 한국인들을 통해 파악한다. 한국인들 중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정세판단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1차정보(First Hand Information)이고, 한국인들을 통해 얻는 정보는 2차정보(Second Hand Information)다. 패러다임 상의 이러한 학술적 원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미국 정보기관을 맹신하는 사대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저자는 1981년 초 중앙정부부에 근무할 때 미국 CIA 파견 간부와 나의 상관인 제2차장과 대화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국이 매우 어수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1999년 코리아나 호텔어서 만났던 CIA간부는 저자가 김대중에 대해 경계를 해야 하는 이유들을 신문 기사들을 보여주면서 설명해주었지만 정세판단이 매우 순진하고 어두워 있었다. 그 CIA 간부가 하는 이야기로는 자기가 국내의 내로라하는 정치학자들을 많이 만나보았고, 장군들도 많이 만나 보았는데 저자와 같은 성격의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계급이 있고, 지식이 있는 유명인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저자를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는 듯 했다. 이는 무슨 뜻인가? 미국 관리들이 스스로 창의적인 방법으로 첩보를 추적하고 독자적으로 정보를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카더라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한국국민들이 느끼는 위기감과 미국이 느끼는 위기감 사이에는 이처럼 많은 간극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1980년의 봄은 남침위기로 대표되는 매우 불안한 계절이었다. 하지만 재야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권력의 공백기를 국가전복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국민과 대학생들을 선동하여 폭력시위를 주도함으로써 사회에는 그야말로 무질서한 리더십 진공상태가 형성됐다. 3김을 포함하는 정치꾼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을 전복하고 싶어 했던 이른바 재야세력들이 저마다 일어나 선명성 경쟁을 벌이면서 사회혼란을 획책함으로써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은 과도정부를 해체시켜 그를 중심으로 하는 사실상의 혁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대중선동과 학생폭력을 주도했다.
이 권력의 공백기를 북한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대남사업부를 중심으로 남한에서 일고 있는 사회혼란을 폭동으로 증폭시켜 남침조건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하려고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 27일, 전군에 ‘전투태세강화“(폭풍5호)를 지시했고, 10월 29일에는 동구를 방문 중인 오극렬 총참모장 일행이 급거 귀환하여 군사 회의를 소집했고, 12월 18일에는 군-당 전원확대회의를 개최하면서 전군에 ’통일에 대비한 무장‘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980년 2월에는 해주, 세포, 곡산, 양덕 등에서 전쟁물자 동원훈련을 실시했고, 철도역에 비상열차를 24시간 대기시켰다. 1980년 3월에는 남파돼 있는 간첩들에게 남한의 시위조직을 확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질되도록 “점화 기폭조”를 시위 군중에 잠입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조총련에는 공작원을 침투시켜 시위대를 거리로 유도하고, 민중봉기의 계기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계엄사 114p).
1980년 5월 8일, 김일성은 극비리에 소련을 방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회동했고, 5월 18일에는 루마니아 방문을 통해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표현했다. “나는 두 개의 조선을 반대한다. 남반부 인민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금년 내에는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5.18이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5월 19일에는 북한 인민군 고위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모종의 비밀회동까지 했다.
남침징후에 대한 첩보가 5건이 잇따르면서 드디어 1980년 5월 10일에는 일본내각조사실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하였다”는 긴급첩보가 입수됐다. “남침 시기는 4월 중순, 김재규 처형시기와 맞물려 있다. 김재규 처형에 따른 항의데모가 절정에 이를 때를 결정적인 시기로 정하였다. 그러나 처형이 지연되자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5.15-5.20 사이에 남침을 하기로 재결정하였다”. 이 첩보는 중국 당국이 일본 방위청에 제보한 것이었다.(1980.5.10. 육군본부작성 “북괴남침설 분석”)
최규하 정부는 법과 원칙에 따라 민주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야세력은 일방적으로 최규하 정부를 유신잔재 세력으로 규정하고, 최규하 정부는 북으로부터 아무런 위협이 없는데도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며 대학생들을 선동해 최규하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과도정부를 즉각 해체하고 전국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당시 최규하 정부는 유신체제를 계승할 자세를 보였는가? 아니었다. 최규하 정부는 박정희 시대에 발생했던 시국사범들에 대해 일제히 사면복권을 단행했다. 재야 세계에서는 이를 서울의 봄이요 민주화의 봄이라며 매우 기뻐하면서 승리감에 도취했다.
재야세력이 퍼트린 유수한 유언비어가 나돌 때마다 최규하 정부는 헌법을 빨리 고치고 새 헌법에 의해 대통령 선거가 최단시간 내에 이루어지도록 하겠다고 다짐해 주었다. 이렇듯 민주화 요구에 적극 호응하던 최규하 정부를 놓고 유신체제의 후신이기 때문에 즉각 해체하고 거국내각을 구성하자는 재야세력의 주장이 과연 타당한 주장이었는가? 당시 물렁하기로 이름나 있던 최규하 정부가 독재정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도 최규하 대통령을 바지대통령이라고 판시했다. 최규하 정부가 유신을 이어받아 독재를 할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오직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재야세력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최규하 정부를 유신을 이어갈 독재정부라고 주장해 놓고, 이제는 전두환을 매장시키기 위해 최규하를 껍데기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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