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답변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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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0-14 16:57 조회2,7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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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분석사례: 김용화 (98광수)
출생: 1953
한국도착: 1995.6. 태안 상륙
고소이유: 5.18때 평안남도 소재의 인민군 4군단 예하 차기수로 근무했다.
증거 자료
① 96.7.18 시사저널, 탈북자 김용화씨, 북한 주민 증거 없어 추방 위기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7939
② 96.12.11 연합뉴스, 무국적자 김용화씨 그는 과연 누구일까?
https://news.v.daum.net/v/19961211112800275?f=o
③ 2012.9.11 뉴데일리, '탈북자의 아버지' 김용화! 6천명 구해낸 진정한 탈북지원단체!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2/09/11/2012091100012.html
④ 2013.05.05 이제 만나러 갑니다. 73회, ‘탈북’하는데, 7년 걸린 남자의 레전드 탈북과정
https://principlesofknowledge.kr/archives/59215
⑤ 2016.1.25., 연합뉴스, 탈북단체 대표가 탈북민 지원금 1억3천만원 '꿀꺽'
https://www.yna.co.kr/view/AKR20160124069652004
⑥ 2019.8.24. 경향신문, 탈북시켜놓고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니…정부는 뭐 했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8241132001
(1) 경력
① (1996. 7. 시사저널), 중학교를 졸업한 뒤 농업기술전문학교와 단천 마그네샤 공장 기능공학교에서 기술을 배웠다. 김씨가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것은 열일곱 살 때인 70년. 인민군 892부대 운전병으로 시작해 1979년 3월 소위로 임관하여 1982.2. 중위로 제대
④ 2013.5.5. 이만갑 프로에서는 사회안전부 대위로 근무했다고 발언
의 견
북한에서는 6년제 중학교 졸업을 17세에 한다. 김용화는 17세였던 1970년 사병 입대하여 1979년 소위로 임관했다고 말한다. 사병 복무를 10년 한 것이 된다. 사병 근무 10년을 만기로 마치고 1979년에 소위로 임관한 후, 1982년 2월에 중위로 제대하고, 교화소 근무를 거쳐 1985.6. 함흥철도국 승무지도원으로 있다가 1988.7. 중국으로 탈출했다면, 마그네샤 공장 기능학교는 언제 다녔다는 것인가? 2013년 이만갑 프로에서는 자기가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이라고도 했다. 군에서는 중위로 제대하고, 이어서 경찰에 가서 대위계급을 달았다고 한다.
(2) 탈북 동기
① 1996. 7. 시사저널, 철도부 함흥철도국단천기관차대(기관차를 운영하는 철도기관) 승무지도원으로 근무하다가 88년(35세) 북한을 탈출한 것은 다소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김씨의 주장에 따르면, 출신 지역 등을 둘러싸고 누적되었던 내부 갈등에다 그가 책임졌던 열차가 정지 사고를 내 당정치부장 · 동료들과 갈등이 생겼다. 단순 사고인데도 처가 식구들의 사상성까지 들먹이면서 비판서를 강요당하자 정치부장과 싸움을 벌인 끝에 밤새 고민하다가 자살을 결심했다. 단천역에서 ‘차라리 먼 곳으로 떠나 자살하자’고 결심한 그는 충동적으로 혜산행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가 압록강변 도시인 혜산에 도착하자 ‘죽을 바에는 중국으로 탈출하자’는 생각이 들어 압록강을 건넜다.
② 1996. 12. 연합뉴스, 함경남도 단천시 철도승무대원으로 근무하던 중 일어난 열차 연착 사고의 책임추궁을 피해 혜산市까지 왔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③ 2012.9. 뉴데일리, 저는 한국에서 88올림픽 행사가 있을 때 탈북했습니다. 북한 함흥철도국 지도원으로 일을 할 때 열차 전복사건이 일어났는데 책임 질 사람이 필요했던 북한정권이 애꿎은 사람 2명을 사형시키고 다음이 내 차례라는 소식을 듣고 억울하게 죽기 싫어서 중국으로 탈북했다. . .
의 견
➀ 96년 7월의 시사저널에서 그는 함흥철도국 내 단청기관차대(관리기관) 승무지도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조직에서 지역 갈등이 있었는데 열차 정지사고가 발생했고, 열차 정지사고는 사소한 사고였는데도 이를 놓고 자기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해서 정치부장과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자살을 결심했고, 자살을 할 바에야 충동적으로 압록강변 혜산행 열차를 탔고, 죽을 바에야 차라리 탈출을 하자는 생각이 들어 압록강을 건넜다고 했다.
② 96년 12월 연합뉴스에서는 단천시 철도승무대원으로 근무하던 중 일어난 열차 연착사고의 책임 추궁을 피해 혜산市까지 왔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③ 2012년 뉴데일리에서는 열차전북사고가 발생했고, 이에 대해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에 애꿎은 사람 2명을 사형시키고 ‘다음에는 내 차례’라는 소문이 돌아 중국으로 탈출했다고 했다.
④ 2013년 이만갑 프로에서는 1988년 7월 13일 시설 노후로 인해 2호열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했다. 이 사고로 사형선고를 받고 도주할 결심을 했고, 당증과 권총을 챙겨 도주했다고 했다. 자살은 민족반역죄에 해당하고, 3대가 멸족되는 선택이기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죽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라디오를 듣다 보니 김만철 가족에 대해 당이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고 했다. 김만철이 탄 배가 북한의 폭격을 맞아 동해에서 침몰한 것으로 보도하는 것을 보고 북한에 대해 배신감이 들었고, 당 간부들도 속이는 판에 인민들은 얼마나 속고 있을까에 대해 깨닫고, 살아남아 북한의 이런 실상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탈북 동기가 96년 다르고 2012년 다르고 2013년 다른 것이다. 96년 시사저널에서는 승무지도원으로 근무하던 중, 열차 정지사고로 인해 정치부장과 싸웠기 때문에 자실을 하려 하다가 탈북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같은 해에 연합뉴스에서는 철도 승무대원으로 근무하던 중 연착사고가 발생했고, 그에 대한 책임추궁을 피하기 위해 혜산으로 갔다가 도강을 했다고 했다. 2012년에는 열차 전복사고에 대해 2명이 사형됐고, 다음에는 자기 차례라는 소문을 듣고 탈출하였다고 했다. 2013에는 열차 전복사고로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도주를 했고, 도주 도중 라다오를 통해 당국이 김만철 일가의 귀순 사실을 놓고 거짓말을 해서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에 북한 정권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탈북했다고 했다
남한에서도 권총을 구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검열과 몸수색이 일상화된 북한에서 일개 열차 승무 지도원이이라는 중간 간부가 권총을 소지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면 곧바로 체포 수감됐어야 했을 텐데 도주를 그것도 권총까지 가지고 도주했다는 것도 상식에 어긋난다. 그는 1953년생이다. 1988년에 36세였고, 처와 슬하의 자식이 있었다. 그의 탈북 동기에는 가족에 대한 고민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자기 자신도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에서 북한정권에 대한 내부고발자가 되기 위해 탈북을 결심했다는 것도 허풍으로 들린다. 더구나 우리민족끼리의 방송을 들으면 그는 파렴치범으로 교화소에 갔다가 탈출했다는 부분이 있다. 그가 북정권에 대한 내부고발 정신을 가지고 탈북을 결심했다는 말은 그의 상습적인 거짓말쟁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철로가 지극히 노후화돼 있고, 전기가 자주 끊겨 평양에서 나진까지 가는데 길게는 20여 일이나 걸린다고 한다. 열차는 잘 해야 시속 20km라는 것이 인터넷에 많이 게재돼 있다. 가다가 먹을 것이 없고 겨울이면 추위에 견디지 못해 죽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열차 정지사고는 식생활처럼 일상화돼 있다. 이런 정지사고를 놓고 억울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처형할 정도로 소란을 부렸다는 것은 과장으로 보인다. 또한 열차 전복사고라면 정비 기술부서나 선로부서의 우두머리에게 책임이 떨어지는 것이 특히 북한사회의 일반적 현상인데 책임 분야가 전혀 다른 하급 승무 지도원에게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했다거나 덤터기를 씌우려 했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탈북동기에 대한 그의 설명에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3) 탈북 과정
① 1996. 7. 시사저널, 단천역에서 ‘차라리 먼 곳으로 떠나 자살하자’고 결심한 그는 충동적으로 혜산행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가 압록강변 도시인 혜산에 도착하자 ‘죽을 바에는 중국으로 탈출하자’는 생각이 들어 압록강을 건넜다. . . 감시와 도피가 계속되는 중국 생활에서 그를 안정시킨 사람은 89년 초에 만난 조선족 교포 장춘선씨(43)였다. 장씨는 김씨와 힘을 합쳐 식당을 꾸리면서 지난해 6월 중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7년 넘게 사실상 결혼 생활을 해 왔다. . . 95년 김씨의 불법 체류 사실을 안 중국 공안요원들과 북한 정치보위부 요원이 김씨의 집을 급습했다. 김씨가 집을 비운 사이 장씨가 대신 연행되어 고초를 겪은 이 사건은 그가 탈출 경로를 베트남으로 변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탈북 사실이 밝혀져 하이퐁 시 감옥에 수용됐고 북한으로 송환되기 직전에야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겨우 감옥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 .0.5t짜리 쪽배로 산동성 해양현을 출발해, 70시간 만에 충남 태안 앞바다에 도착했다. 1차 밀항 기도가 선박 고장으로 실패한 뒤 한 달쯤 지나서였다. 88년(35세) 압록강을 넘어 북한땅을 탈출한 지 7년 만에 이룬 한국행이었다. . .
북한 주민임을 입증할 서류가 없어 법무부 서울출입국 관리사무소로 넘겨졌다. .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법무부 서울외국인보호소. 밀입국한 조선족과 방글라데시· 필리핀· 파키스탄 등 아시아 각국에서 불법 입국한 외국인들이 강제 퇴거 명령을 기다리는 곳이다. 지금 이 외국인보호소에 북한을 탈출한 귀순자 한 사람이 불법 체류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1년째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김용화씨(43). 수감 번호 232번이 적힌 푸른 수의를 입고 있는 그가 중국에서 두 번에 걸쳐 밀항을 기도한 끝에 입국에 성공한 것은 지난해 6월 말이었다(1995년 6월).
의 견
김용화는 단천역에서 충동적으로 혜산행 열차에 올라탔다고 말했다. 위키백과를 보면 그가 승차했다는 단천역은 함경선 중간 지점에 속하는 일개 역이고, 함경선은 동해의 원산으로부터 해변을 따라 함경북도 끝 부분인 성진을 연결하는 동해철로다. 혜산역으로 가려면 길주역에서 백두산청년선을 타고 22개 역을 가야 한다. 단천역에서 길주역을 가려면 함경선을 타고 동해안을 따라 북으로 12개 역을 가야 한다. 길주역에서 혜산을 가려면 백두산청년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철로 거리가 141.7km이고, 역 수는 양끝 역을 포함해 22개나 된다.
아무리 철도 승무원이라 해도 그는 단청기관차대 소속이고, 단청기관차대는 함흥 철도국 예하 기관이다. 함흥 철도국은 평남 일부, 함경남도 일부, 강원도 일부에 소재한 역들만 관할하며 관할 역의 총수는 218개역, 이 중에 기술역에 속하는 역이 7개 있고, 그 중 단천역이 있다. 참고로 잡중화물장 역이 20개 있다. 기술역은 정비를 하는 곳이다. 그래서 기차가 전복됐다면 이는 기술역에 근무하는 정비 부서에 그 책임이 귀착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개 승무원 신분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있을 시간대에 함경선을 타고 북쪽으로 12개 정거장을 가고, 거기에서 여러 개 군을 통과하면서 감시가 가장 심한 백두산청년호로 갈아타고 혜산에까지 21개 역을 가서 이렇다 할 스토리 없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대목이다.
김용화는 1988년 7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이듬해인 89년 초에 7세 연상의 조선족 장춘선(43)을 만나 7년 넘게 동거를 했고, 1995년도에 중국 공안요원들과 북한 정치보위부 요원이 자신의 집을 급습했지만 출타중이라 체포를 모면하고, 베트남으로 갔지만 이내 체포되어 하이퐁 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북송되기 직전에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탈옥하여 다시 중국으로 잠입하여 산동성에서 0.5톤 짜리 쪽배를 타고 70시간(3일) 만에 태안에 도착했디고 한다. 수위가 높았을 여름철에 압록강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 중국에 갔고, 중국에서 7년 연상의 여인을 만나 동거하다가 공안과 보위부 요원이 잡으러 오자 베트남으로 도망했고, 베트남에서 체포돼 감옥에 갇혔지만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탈옥하여 다시 중국으로 잠입하여 산동성까지 수만 Km를 걸어가 민물 낚싯배에 해당하는 0.5톤 쪽배를 타고 장장 3일 동안 항해하여 태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산동성 동단에서 태안반도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400km, 0.5톤짜리 낚싯배가 험한 파도를 극복하면서 70시간 동안 왔다면 첫째로 의심되는 것이 연료주입 없이 그 작은 쪽배가 3일 동안 밤낮으로((70시간)) 태안반도를 향해 계속해서 엔진을 돌릴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이고, 그 다음 의심되는 것이 생존 가능성의 문제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항해 도구의 부재다. 목표점을 정해놓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려면 GPS 장비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는 이런 장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 세 가지로 보아 그의 주장은 황당한 구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성공한 것은 2차 시도였고, 그 이전 한 달 전에는 1차 밀항을 시도했지만 선박 고장으로 실패했다고 했다. 그가 태안에 도착한 시점은 1995년 6월말이었다고 했다. 중국에서 베트남을 향해 탈주한 것도 1995년, 베트남에서 감옥살이를 한 것도 1995년, 탈옥하여 다시 중국으로 잠입해 산동성에서 태안으로 온 시점이 1995년 6월 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