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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중인 상고이유서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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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3-03 22:49 조회4,7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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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 중인 상고이유서 (상편)

 

                         상고이유서

 

사건 2020804 .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위반(명예 훼손)

. 사자명예훼손

. 상해(일부 인정된 죄명 폭행)

. 명예훼손

. 출판물에의한명예훼손

피고인 1. . . , , . 지만원

2. . 손상대

 

피고인 측은 다음과 같이 상고이유서를 제출합니다.

 

                        원심 판결의 요지

 

1. 피해자 정형달 남재희, 안호석, 이영선에 대하여

 

1) 61의 삐라를 만든 주체와 제작 및 배포시기가 불분명하다.

2) 삐라가 1982년에 북한이 제작한 작품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

3) 1987년 얼굴들의 일부가 광주희생자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4) 사진 출처에 대한 김양래의 주장은 사실로 보인다.

5) 따라서 피고인 지만원의 표현은 허위에 해당하고 표현마저 단정적이고 악의적이라 의도적인 범죄에 해당한다.

 

2. 박남선 등 14명의 피해자에 대한 판단 부분에 대하여

 

1) 광주에 북한군은 오지 않았다. [북한군 개입] 표현은 5.18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표현이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점은 1997년의 판결, 피고인에 손해배상을 선고한 광주법원의 판결,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의 제정과정에서 밝혀졌다.

2) 따라서 당시 광주현장 사진 속 얼굴들은 북한 얼굴일 수 없다. 현장 사진 속 얼굴들이 북한특수군이라 주장한 것은 피고인이 주장하는 [북한군 개입]을 뒷받침하기 위한 모략이다. 이는 5.18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폄하하는 것으로밖에 불 수 없다.

3) 사진 속 인물들은 실제 누구인지 밝혀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위 공간에 있었던 광주사람들이 자기라고 주장하면 그 주장이 맞는 것이다. 피고인이 북한고위층을 지칭한 행위는 특정인'을 지목한 경우에 해당하므로, 이 사건 피해자들의 이름을 특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피해자들의 진술은 구체적이고 상세하며 모순이 없다.

 

3. 장철현에 대하여

 

1) 장진성의 신문 진술은 자세하고 구체적이고 모순이 없다. 피고인들은 허위의 사실을 적시했다.

2) 국과수도 분석할 수 없는 영상을 노숙자담요가 분석했다는 것인데, 그런 분석결과는 그 자체로 믿기 어렵다.

 

4. 김사복에 대하여

 

1) 김사복은 빨갱이로 알려져 있다. 더러는 그를 간첩이라고 한다는 표현은 직접 김사복을 겨냥하여 빨갱이, 간첩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표현은 악의적인 명예훼손 표현이다.

2) 피고인은 힌츠페터를 601광수라 했고, 2015.10.10.. 북한 노동당창건 기념행사에 참석했다고 하지만 영상분석은 신뢰할 수 없고, 북한의 행사 사진 속 얼굴은 76세로 보이지 않아 피고인들의 주장은 허위다.

3) 김사복은 영원히 잠적해 있다는 표현은 간첩 신분을 속이기 위해 숨었다는 표현이므로 이는 악의적인 허위사실의 적시다.

4) 힌츠페터를 비방한 것은 김사복을 비방한 것이다.

 

5. 추혜성, 백종환에 대하여

 

1) 추혜성을 향해 손을 휘저으면서 얼굴을 가격했다.

2) 백종환의 좌측 가슴을 가격했다.

3) 2개의 폭행은 집단 몸싸움을 벗어난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피고인이 선제타격을 가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방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6. 지용에 대하여

 

피고인은 제73광수를 북한 인민군 대장 오극렬이라고 주장하지만, 73광수는 지용이 맞다. 그 이유는 피해자의 상황진술에 모순이 없고, 피고인의 주장만으로 지용 주장의 신빙성을 배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고의 요지

 

이 사건은 6개의 사건이 병합된 큰 규모의 사건입니다. 1,2심 모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습니다. 피고인은 무죄를 달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정의를 바로 잡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1,2심을 심리과정에서 제출한 쟁점별 답변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재판용 겸 시판용으로 발행한 A4366쪽 분량의 [5.18답변서]를 통해 위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들을 제출하였습니다. 하지만 1,2심 모두 이 증거들의 채택여부에 대하여 공판 과정에서도 심리하지 않았고, 판결서에서도 배척하는 논리 전개 없이, 증거 외의 비논리적 잣대를 가지고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는 이 병합사건 모두에 공통적으로 실재한 현상입니다.

 

특히 원심 재판부의 초기 재판장은 A부장판사님으로 각 쟁점에 대해 법정에서 심리하는 절차를 거치기로 약속하고, 피고인에게 각 주제별로 심리 소요시간을 제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피고인은 2021.5.12자에 [답변서] 형식으로 시간표를 제출하였지만, 2021.9.8. 속행과정에서 재판장 B부장판사님께서 갑자기 2021.11.12.에 변론을 종결한다며, 재판부가 약속한 공판절차를 일방적으로 그리고 기습적으로 파기하였습니다. 1,2심은 사실심이지만, 사실심리를 정당하게 거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사건을 파기 환송하여 하급심에서 사실심리를 하도록 판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건의 개념

 

1) 이 병합사건은 모두는 [북한군 개입]이라는 큰 우산 아래 존재합니다. 피고인이 [북한군 개입]을 사실로 믿을만한 상당한 근거를 제출했다고 인정되면 이 부분 표현은 무죄가 되는 것이고, 여타의 모든 사건들 역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많은 무게를 갖는 부분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북한군 개입]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얼굴에 대한 [영상분석] 부분입니다. 피고인은 2002~2014까지 순전히 남북한 문헌들을 가지고 연구했습니다. 2014.10.24자로 [5.18분석 최종보고서]를 펴낼 때까지 총 8권의 5.18역사책을 펴냈고, 여기까지의 연구 결론은 [5.18은 북한군이 주도했다] 것이었습니다. 5.18을 북한군이 주도했다면 당연히 당시 광주현장에서 촬영된 수백 장 사진 속 주역들은 북한 얼굴이어야 한다는 가정이 가능해집니다. 바로 이때에 필명 노숙자담요라는 과학적 얼굴분석 전문가가 나타나 2015.5.5.부터 2018까지, 광주현장 사진들에서 총 661명의 북한 얼굴을 찾아냈습니다. 광주에 왔던 북한 사람들을 [광수]로 명명하면서 발굴되는 순서에 따라 제661광수까지 번호가 매겨진 것입니다.

 

2) 따라서 [문헌연구]가 종료된 지 8개월이 지난 시점(2015.5.5.)에서 부터 시작된 [광수연구]는 문헌연구의 부산물(byproduct)일뿐, [북한군 개입]이라는 결론을 내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었습니다. 원심판결서에 인용한 1심 판결서나 광주민사 판결들이 일관성 있게 피고인은 몇 사람의 현장얼굴이 북한인물과 비슷하게 생긴 점을 이용해 북한군 개입을 주장한다고 판시했기에 특별히 교통정리 차원에서 말씀드립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북한군 개입]을 믿으면 661명의 얼굴이 북한 얼굴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고, 북한군이 절대로 오지 않았다고 믿으면 광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피고인은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정황증거 42개를 제출했습니다. 42개 정황증거를 신뢰하기 때문에 자연 661명의 광수도 믿는 사람입니다. 반면 원심 등 재판부는 이 두 가지 모두를 믿지 않는다합니다. 믿지 않는 재판부가 피고인이 제출한 42개 정황증거를 탄핵하는 절차 없이 [북한군 개입은 없었다]는 자의적 잣대를 가지고, 피고인의 주장이 재판부의 잣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벌을 주는 것은 직권남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42개 정황증거 모두가 상당한 이유로 배척되지 않는 한, [북한군 개입] 표현은 학술적 의견인 것이며 범죄행위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피고인은 같은 [북한군] 표현으로 인해 광주법원으로부터는 늘 유죄판결을 받았고, 타 지역으로부터는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은 사건2010고합51에서 피고인의 4부작 책은 연구목적으로 저술한 것이라 판결했고,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은 사건 2019년 형제7446, 8976호에서 피고인의 국회공청회 발표내용이 학문적 의견이라며 불기소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재판부는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에게 [북한군 개입]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상당한 이유가 있느냐의 여부에 대해 판단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피고인이 [5.18답변서] 50~224쪽에 걸쳐 지시한 42개 정황증거는 재판부의 반론 과정을 거쳐야만 배척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론 과정 없이 ‘5.18은 이미 역사적 법률적으로 민주화운동으로 확정되었다는 이유 등 증거배척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42개 정황증거를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위압이라고 생각합니다.

 

3) 재판부는 [북한군 개입]여부를 판단하는 기관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기관은 업무소관 상 국방부이며 국방부는 [5.18진상규명법]에 의해 2020.5.22.부터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해 조사를 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1,2심 판결대로 북한군 개입이 없다고 판명되었다면, 국방부는 지금 무엇 때문에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제3과를 설치하고 상당한 국비를 사용하면서 북한군 개입 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4) 피고인은 661명의 광수얼굴이 북한 얼굴이라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안보 목적으로 이들에 대한 노숙자담요의 분석 결과를 발견 되는대로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에 게시했습니다. ‘5.18기념재단은 이 661명 중 15명에 연락하여 이들의 이름으로 소송을 하였습니다. 15명의 광수얼굴로 지정된 얼굴을 자기 얼굴이라 주장한 것입니다. 자기 얼굴이라는 데 대한 고소인들의 주장에는 얼굴의 각 부위에 대한 특징 등 일체의 분석이 없습니다. 15명의 주장은 다 같이 육안으로만 보아도 내가 제 몇 번 광수인지 다 알 것이다, 내가 내 얼굴 모르겠느냐이 하나 뿐입니다. 나이나 생김새부터가 전혀 다른 사진, 흔들려서 얼굴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사진 등을 내놓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고소장에는 89세의 김진순이 1980.5.23. 도청에서 아들 이용충의 관을 잡고 우는 여인이 자기라고 주장돼 있습니다. 이에 피고인은 김진숙 등 유족이 이용충이 사망한 사실을 안 시기는 1980.6.30.이고 그 날 경찰서에 가서 거기에 진열돼있는 이용충의 유품을 확인함으로써 확인했다는 내용이 담긴 2개의 증거(66,67)를 제출했습니다(5.18답변서 230). 알리바이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했는데도 원심은 판결서에 이 증거를 배척하는 반론을 펴지 않은 채, 무조건 김진순의 주장을 신뢰한다 판결했습니다.

 

80대 해남 노파 심복례의 이름으로 제출된 고소장에는 1980.5.23. 도청에서 남편 김인태의 관을 잡고 울고 있는 주인공이 심복례라고 기재돼 있습니다. 이에 피고인은 이 주장을 배척하는 증거자료 2개를 제출했습니다. 해남에 사는 심복례가 남편이 사망한 소식을 전해들은 날이 1980.5.29.일이고, 전남도청에서 차를 타고 망월동에 가서 가매장되어 있던 남편의 관을 열어본 날이 1980.5.30.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2개의 증거(70, 증거기록413, 5.18답변서 232). 알리바이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 명백한 증거를 제시했는데도 원심은 판결서에 이 증거를 배척하는 반론을 전개함이 없이 무조건 심복례의 주장을 신뢰한다 판결했습니다.

 

박남선의 이름으로 제출된 고소장에는 제71광수가 박남선이라고 주장돼 있습니다. 노숙자담요는 제71광수를 황장엽이라고 판독하였습니다. 박남선은 제71광수의 얼굴이 자기 얼굴이어야 하는데 피고인이 요술을 부려 황장엽과 비슷한 얼굴을 창작해가지고 자기 몸에 합성시켜놓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피고인은 조선일보 사진DB에서 원문을 인쇄해 제출함과 동시에 그 원사진이 위치한 페이지를 구글로부터 찾아들어가는 경로까지 제출했습니다. 그랬는데도 원심은 피고인이 제출한 증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배척근거를 밝히지 않은 채, 박남선의 주장에 모순이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5.18당시 18세로 고2를 중퇴했다는 고소인 박철은 흔들리는 사진, 식별 자체가 안 되는 아래 3장의 사진을 내놓고 누구든지 육안으로만 보아도 제출하는 사진의 얼굴이 제388광수로 지정된 얼굴과 같은 얼굴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심 제4공판준비 기일조서’(2018.8.16.)에는 당시의 이경진 재판장님께서 박철이 제출한 사진은 식별이 어려우니 식별 가능한 사진을 제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이후 박철은 이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도 원심은 박철의 주장이 다 옳다고 판결했습니다.

 

4가지 경우만 살피더라도 원심 판결이 얼마나 자의적인 것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피고인은 광수를 주장하는 15명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를 모릅니다. 이 세상에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원거리 사람에게 명예훼손의 범의를 가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1심 제4공판준비 기일조서’(2018.8.16.)에는 당시의 이경진 재판장님께서 검사에 촉구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피고인은 이 사건 오래 전 사진 속의 인물들이 공소장에 피해자로 적시된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군이고,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공소장에 피해자로 적시된 사람들은 사진 속 인물인 북한군과 전혀 다른 사람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주장 자체를 공소장에 피해자로 적시된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허위사실의 적시로 판단한 논리적 근거를 설명할 것을 촉구”. 하지만 이후 검사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이행이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원심은 판결서 23~24쪽을 통해 검사에게는 입증 의무가 없다하면서 피고인이 생면부지의 고소인들에게 범의를 품었다 판결합니다. 법리가 논리를 파괴하고 있는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피해자가 없도록 판례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6) 이하 다른 사건들에서도 피고인이 제시한 증거에 대한 반론 없이 자의적 판단을 하였습니다.

 

                           북한군 개입에 대하여

 

피고인은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정황증거 42개를 174쪽 분량으로 제출했습니다(5.18답변서 50~224). 42개의 정황증거는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판결의 공정성을 위해서나, 국가안보를 위해서나 결코 반론과정 없이 무시될 수 있는 가벼운 증거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 광주운동권 인물들과 항쟁본부 구성한 최고 5.18유공자들은 충돌이 가장 치열했던 5.18~5.24. 기간에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광주-전남지역의 운동권 선두에 섰던 윤한봉과 박관현은 517일 이전에 도망갔고, 남아 있던 정동년은 체포됐습니다. 광주지역 운동권들은 5.18시위현장에 없었습니다. 5.18 최고반열의 유공자들은 훗날 항쟁본부라고 개명된 시민학생수습위원회를 구성한 사람들이며, 이 위원회는 525일에야 전남도청에서 꾸려졌는데, 이들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었습니다(59, 정리 5.18답변서 76~77). 1980.5.25일 이전에는 광주시민들이 조직한 시위대가 없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2) 광주 시위 참가자의 80% 이상이 10~20대의 초중고학생, 공원, 식당종업원, 무직자, 노동자, 농민, 구두닦이 등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저변 인구들로, 정치 슬로건을 선도하거나 시위의 조직화를 선도할 수 있는 계층이 아니었습니다.

 

사망자 154명과 군법회의 제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처벌을 받은 257명에 대한 성분을 분석한 결과 10대가 20%, 20대가 61%였고, 직업은 학생, 무직, 공원, 농부, 종업원, 목공, 철공,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벽돌공, 칠기공 등 주로 초--고 학생들과 하층계급에 속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조직력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북한 조국통일사가 1982년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194) 600쪽에는 체포자 730명에 대한 성분분석 결과가 기재돼 있습니다. 학생21%, 노동자 35.8%, 실업자 17.3%, 농민6.4%, 상인 6.4%, 회사원 5.1%, 기타 8%로 정리돼 있습니다. 시위공간에서 사망한 사람이나 붙잡힌 사람의 80% 이상이 초중고 학생들과 10~20대의 어린 사람들이고, 직업 역시 의식을 계몽하는데 앞장서거나 발언권이 있거나 시민들을 결집하여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 자료들은 [5.18답변서] 89~91쪽에 정리돼 있습니다.

 

3) 광주에 출현한 맥가이버 부대

 

시민들을 의식화시키고 선동할 수 있는 운동권은 1980.5.17. 산천초목이 얼어붙었다던 예비검속이 무서워 도망갔거나 체포됐고, 시위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리거나 직업이 없거나 사회저변에서 기름 묻히고 땀 흘리고 천대받던 사람들이 그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주동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군사작전 상황들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현장 사진들이 수백 장 규모로 나와 있습니다.

 

국제 용병급 이상의 기적적인 군사작전

 

1980.5.21. 상황입니다. 부대이동 계획은 극비로 취급됩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300명 집단이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광주 톨게이트를 정확히 08시에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알아가지고 장애물을 미리 설치하고 매복하고 있다가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하여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하여 이웃에 있는 군납업체 아시아 자동차 공장으로 향했습니다. 이 지프차 차량행렬 사진은 [5.18답변서] 53쪽에 있습니다.

 

 

09, 또 다른 300명이 버스들을 타고 아시아 자동차 공장으로 와서 매복부대 300명과 합류하여 삼엄하게 경비되고 있던 아시아 자동차 군납공장을 점령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0여 대를 탈취하여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5,300여 정의 총기와 다수의 폭발물을 탈취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