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된 상고이유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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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3-07 23:47 조회2,31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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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복에 대해여
1. 문제의 글
“‘택시 운전사’ 거짓엔 감동이 없다” 제하의 인터넷 게시글, 영화의 주인공은 5.18 영웅이 아니라 겨우 택시운전사.
영화는 힌츠페터와 순진한 택시 운전사를 두 주인공으로 내 세웠다. 그리고 관객의 분노를 자아낼 소재로는 통역 학생 ‘구재식’의 주검이었다. 택시 운전사 김사복은 빨갱이로 알려져 있다. 더러는 그를 간첩이라고 한다. 그 김사복은 영원히 잠적해 있다. 나오면 영웅이 될 텐데 찾고 또 찾아도 영원히 숨었다. 무서운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간첩(?) 김사복을 순수한 시민으로 세탁했다. . .
2. 공소의 요지
김사복은 민주화운동에 동참한 시민일 뿐, 간첩도 아니고 빨갱이도 아니다. 김사복은 1984년에 사망할 때까지 잠적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숨어있지도 않았다. 피고인은 허위사실을 적시했다.
3. 원심 판결의 요지
1)“김사복은 빨갱이로 알려져 있다. 더러는 그를 간첩이라고 한다”는 표현은 직접 김사복을 겨냥하여 빨갱이, 간첩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표현은 악의적인 명예훼손 표현이다.
2) 피고인은 힌츠페터를 601광수라 했고, 2015.10.10.. 북한 노동당창건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고 하지만 노숙자담요의 영상분석은 이미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북한의 행사 사진 속 얼굴은 76세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피고인들의 주장은 허위다.
3) “김사복은 영원히 잠적해 있다”는 표현은 간첩 신분을 속이기 위해 숨었다는 표현이므로 이는 악의적인 허위사실의 적시다.
4)힌츠페터를 비방한 것은 곧 김사복을 비방한 것이다.
4. 기초 사실
1)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된 날은 2017.8.2.이다(증171).
2)피고인이 범죄사실의 내용을 게시한 날짜는 개봉 12일 만인 2017.8.14.이다.
3) 김사복에 대한 사회적 궁금증은 개봉에 대한 예고가 쏟아져 나오면서부터 시작되었지만 피고인이 문제의 글을 올린 8월 14일까지 알려진 것이 전혀 없었다.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생사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다.
4) 언론계에 김사복에 대한 취재경쟁이 촉발됐고, 2017.8.25. 오마이 뉴스가 가장 먼저 첫 기사를 냈다(증172, 8쪽). 기사에서 김승필이 김사복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동명이인이 수두룩한 마당에 김승필의 아버지가 [택시운전사 김사복]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김사복의 생사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영화가 개봉된 지 24일 만인 2017.8.25.에 오마이뉴스가 찾아낸 소식의 전부였다.
5)1974.8.17. 동아일보는 김사복이 김대중이 일본에서 결성한 반국가단체 한민통이 보낸 자객 문세광을 조선호텔로부터 저격 장소인 장충동 국립극장에까지 태워주었다는 기사를 냈다([5.18답변서] 292~293). 이때부터 사회 일각에서는 김사복은 빨갱이, 간첩으로 회자돼 왔다.
6) 김사복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은 영화가 개봉된 지 15개월 이상 지난 2018.5.10.이었다. 광주가 기획한 ‘5·18 영상 특별전’에서 증174의 사진들이 전시되었다([5.18답변서] 291쪽). 증174의 아래쪽 사진은 촬영일자가 1975.10. 3.이며 장소는 포천 약사봉. 1975.10. 3.은 장준하가 1975. 8.17. 추락사한 지 49일째 되는 날(49제)이고, 약사봉은 장준하가 추락한 산이다. 이 사진으로 인해 김승필의 아버지가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과 김사복이 1984년에 간암으로 사망하였다는 사실이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 2018.5.10.은 김사복의 얼굴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난 날이었고, 아울러 그가 망자의 신분이라는 사실도 드러난 날이었다.
7)5.18 사건 5년 전인 1975년에 이미 힌츠페터와 김사복은 친북 반국가단체 한민통의 수뇌부 인물 함석헌과 계훈제 등과 연대해있었다는 것이 사진으로 확인됐다. 한민통이 친북 반국가단체라는 것은 대법원이 확인한 것이다.
8) 북한의 조선기록영화촬영소가 광주현장을 촬영한 42분 영상물(증137)이 있다.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은 조선기록영화촬영소]가 1980년 제작한 기록영화의 압축본이다([5.18영상고발 94쪽]. 이 기록영화는 1980년 5월 18일 이전부터 5월 24일까지의 광주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시위 전 기간에 걸쳐 광주의 수많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는 상황들을 힌츠페터 혼자 촬영할 수는 없었다. 증137의 기록영화 내용을 힌츠페터 혼자 촬영했다고 보는 것은 보편타당한 관측이 아닐 것이다. 특히 아래의 유명한 사진들은 상황 전개 일지 상, 5월 18일에만 촬영할 수 있었던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