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쓴 제주 4.3사건-6(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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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3-07 19:37 조회2,7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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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쓴 제주4.3사건-6(끝)
6. 제주도 4.3봉기의 특징과 력사적 의의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들의 망국적인 단독선거를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서 맨 선참으로 폭발한 적극적인 투쟁은 제주도 4.3봉기였다. 4.3봉기의 성격은 이 봉기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4.3봉기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하여서는 그 발생 원인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4.3 봉기의 기본적이고도 주요한 발생원인은 한마디로 말하여 미제와 리승만 괴뢰도당의 식민지예속화 정책과 반인민적 반동통치, 포악무도한 파쑈폭압 통치에 있었다.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본토와 멀리 떨어져있어서 력사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지방 관리들의 학정이 그 어느 지역보다 심한 곳이었다. 이것은 제주도인민들에게 강한 저항의식을 심어주었다. 8.15후 제주도의 정치경제적 형편은 인민들의 불만을 더욱 크게 야기시켰다. 더욱이 미제침략자들의 악랄한 식민지예속화 책동은 이곳 인민들을 항쟁에 떨쳐나서게 하였다.
남조선의 일부 문필가들도 제주도인민항쟁의 원인에 대하여 이렇게 보고 있다.
“이 폭동이 우연히 혹은 어떤 하나의 계기에 의해서만 도발된 것이 아니라 제주도민이 조선시대 말기부터 겪어야 했던 력사적 경험과 해방당시 제주도의 정치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발발하였다”(사회와 사상 1989년 10월호, 370페지)
“단선단정거부와 조국통일의 기치 밑에 개시된 4.3항쟁은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왜곡된 삶에 대한 거부의 몸짓으로 리해된다”(사상 문화 서울 1988. 4.24)
"유엔림시조선위원단까지도 유엔 제3차 총회보고에서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 발생한 반란은 도 미군정의 그릇된 지방통치와 경찰, 서북청년동맹의 전률적인 폭압이 그의 화근으로 되였다.“(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자료집, 96페지)라고 제기하였다.
이 모든 것은 4.3무장봉기가 미군정의 학정과 리승만 괴뢰도당의 반동통치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4.3봉기가 일어나게 된 주요한 원인은 또한 해방 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 밑에 북반부에서 이룩된 민주건설의 찬란한 성과와 북반부인민들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행복한 생활이 제주도인민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고무를 준 데 있다.
제주도인민들은 해방 후 북반부인민들의 새 생활 창조를 위한 투쟁에서 이룩한 빛나는 성과를 희망의 등대로 바라보며 그에 고무되면서 나라의 민주주의적 발전과 자주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에 결연히 일떠섰던 것이다.
4.3봉기의 직접적 동기는 미제의 충실한 앞잡이 반동경찰이 1947년 3.1절을 경축하는 애국적 인민들을 학살하고 수많이 부상시킨 것과 관련된다. 이러한 반동경찰의 만행은 제주도 전체 인민들에게 참을 수 없는 민족적 격분을 일으키게 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의 4.3봉기는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민족 분렬책동을 반대하고 나라의 자주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반미 애국항쟁이었으며 리승만 괴뢰도당의 반인민적통치를 반대한 반파쑈 민족해방투쟁이였다.
4.3봉기의 이러한 성격으로부터 이 봉기의 일련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4.3봉기의 특징은 첫째로, 유격투쟁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여러 가지 형태의 투쟁이 결합된 적극적이고 과감한 애국투쟁이었다는데 있다. 제주도인민들은 자기들의 아들딸들로서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으며 유격대지휘체계와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고 유격투쟁전술에 기초하여 목적의식적인 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하였다.
제주도인민항쟁 지도자 김달삼은 1948년 8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자리에서 적과의 싸움에서 어려운 고비에 부닥칠 때마다 장군님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창조하신 필승의 전법을 되새기며 싸웠다고 말씀드리었다.
제주도인민들은 영웅적인 항쟁에서 무장유격투쟁을 기본으로 하면서 여기에 정치파업, 동맹휴학, 탄압과 략탈을 반대하는 항의집회와 시위 등 다양한 형식의 투쟁을 밀접히 배합하였다. 그리하여 4.3인민봉기는 원쑤들에게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 특징은 둘째로, 전체 도민 30만 명중 24만 명이 궐기한 대중적이고 전인민적인 항쟁 이였다는데 있다. 제주도 전체 인민들은 미제의 망국적 5․10단선을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용감히 궐기하였으며 희생성과 대중적 영웅주의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용감하게 싸웠다. 봉기에는 로동자, 농민, 사무원, 상인, 어민들과 해녀들, 목동과 학생들이 참가하였으며 칠순의 로인들과 어린 소년들까지 총궐기하였다. 인민들은 직접 무장을 들고 싸우거나 보초, 련락임무, 정보공작 등 전투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원호대를 조직하여 식량, 피복 그 밖의 물자들을 유격대에 보내는 지원투쟁을 적극 벌리었다.
그에 대하여 로동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제주도 전체 인민들은 무력항쟁부대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식량, 의류 등 필수품, 위문품은 물론 소위 토벌대의 동정에 관한 일체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1949.4.3)
이 항쟁대오에는 일부 량심적인 공무원들과 괴뢰군병사들, 경찰등도 합류하였다.
4.3봉기의 특징은 셋째로, 제주도인민들이 자주적인 원칙에 철저히 서서 자체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투쟁을 성과적으로 벌려나갔다는데 있다. 제주도인민들은 적의 대병력을 상대로 하여 륙지와 떨어진 외진 섬에서 그 어떤 외부의 지원도 바라지 않고 자체의 힘으로 항쟁을 조직하고 투쟁방법을 택하여 싸움을 벌리었다. 그들은 자체로 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유격근거지를 설치하였으며 투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였다. 인민들은 적들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하고 점차 장비를 강화하여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미군정의 G-2보고서에는 “폭도들은 4월 3일 하루 동안에 미국제 카빙총 6정, 일본제 99식총 1정, 탄약 119발을 로획해갔다”고 기록되여 있다.(사회와 사상, 1989년 10월호, 368페지).
그 특징은 넷째로, 제주도인민들의 4.3봉기가 매우 간고하고 치렬한 성격을 띄였으며 장기적인 결사전 이였다는데 있다. 제주도인민들은 적아간의 력량대비에서의 현격한 차이와 력사상 류례없는 대학살과 초토화 작전이 감행되는 등 간고한 조건에서 적들의 온갖 만행에도 굴하지 않고 장기적인 결사전을 전개하였다. 유격대가 대상한 적들은 미군정 군사고문단장 로버트와 악명 높은 학살만행의 주범자 조병옥이 직접 지휘하는 현대식으로 무장된 대무력 즉 미군과 국방경비대의 3개 련대, ‘백골대’, ‘아리랑부대’, ‘독수리부대’, ‘철경대’, ‘특공대’ 그리고 1,500여명의 무장경찰대였다. 여기에는 비행대와 함대까지 배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적들과 맞서서 2년간에 만해도 100여차의 대소전투를 전개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군사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농민들과 어민들로 조직된 생산유격대는 적들의 만행으로 부락이 불타면 다른 곳에 이동하여 다시 집을 마련하고 생산을 계속하는 등 장기적으로 유격대의 후방을 보장하였다.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은 전투마다에서 적들을 맞받아 결사전을 벌리었을 뿐 아니라 적들에게 체포된 후에도 목숨으로 조직의 비밀을 고수하고 동지를 구출하는 높은 애국심을 발휘하였다.
간고하도고 장기적인 유격투쟁에서 제주도인민들이 무비의 애국주의와 헌신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처지의 공통성과 향토애와 애국심으로 하여 서로 결합할 수 있은 것과 관련된다. 제주도인민들은 력사적으로 ‘섬땅’, ‘섬사람’이라 하여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았으며 ‘정배지’의 주민이라는 데서 또한 심한 감시와 압박을 받았다. 이로부터 제주도인민들에게는 력사적으로 버림받아온 사람들이라는 감정이 골수에 사무쳐있었다. 그리하여 제주도주민들은 서로 돕고 단결하는 기풍과 의리감이 강하였다. 때문에 그 어느 때나 외래침략자들과 착취자, 압박자들을 반대하여 한 결 같이 일어나 용감히 싸우군 하였다.
제주도인민들은 항쟁에서 그처럼 용감히 싸웠으나 응당한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주요원인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야수적 탄압, 학살 만행과 함께 투쟁지도부에 기어들었던 간첩종파분자달의 파괴책동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해방, 나라의 통일독립에 대한 인민들의 절절한 념원을 실현할 수 없었던 것과도 관련된다.
간첩종파도당은 제놈들의 반당적이며 반혁명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 항쟁이 정확한 투쟁 로선과 방침에 따라 진행되는 것을 음으로, 양으로 반대하고 제주도에 대한 지원을 의식적으로 태공하였으며 유격대지휘부 내에 잠입시킨 자기 추종분자들을 사촉하여 대렬 내의 사상적 통일을 파괴하고 계속 모험적 공세에로 내몰게 함으로써 당조직을 로출시켰고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내게 하였다.
조선인민의 5․10망국단선단정반대투쟁의 한 고리로 전개된 제주도인민들의 4.3봉기는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애국투쟁발전에서 거대한 의의를 가진다. 그 의의는 첫째로, 이 봉기를 통하여 남조선에서 5․10단선을 파탄시킨 첫 모범을 창조하였다는데 있다. 남조선에서 망국적인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전민족적인 투쟁을 벌릴 것을 요구하던 때에 제주도인민들은 단호하게 인민봉기를 벌려 선참으로 선거를 파탄시키었다.
4.3봉기이후 5월에는 남조선로동자들이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총파업을 일으켰으며 남조선 각지에서 일떠선 인민들은 140여개의 선거장과 수많은 경찰지서들을 습격 또는 파괴소각하고 악질반동들을 처단하였다. 진보적인 정당, 사회단체들이 제주도인민들과 함께 망국 단독선거를 거부 또는 배격하여 나섬으로써 남조선에서의 단독선거는 사실상 파탄되게 되였다. 이처럼 제주도인민들의 강력한 반미애국투쟁은 남조선에서 선거를 파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4.3봉기가 가지는 의의는 둘째로, 남조선인민들의 대중적인 반미애국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는데 있다. 무장투쟁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투쟁을 통하여 치렬한 항쟁을 벌린 제주도인민들의 4.3봉기는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을 반대하고 통일된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떠선 남조선의 각지 인민들에게 커다란 고무적 영향을 주었으며 보다 높은 형태의 투쟁에로 그들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제주도에서 시작된 애국적 무장투쟁은 1948년 하반기에 들어와서는 남조선의 곳곳에로 파급되었다.
그 의의는 셋째로, 미제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우리 인민들의 불타는 애국심과 견결한 투지를 힘 있게 시위한데 있다. 제주도봉기자들이 놈들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미제의 어용 사가 죤 메릴이 자기의 책 ‘제주도반란’에서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전후 점령군에 대하여 제주도에서와 같은 격렬한 대중적 저항이 분출된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회와 사상, 1989년 10월호, 369페지).
제주도인민봉기는 광범한 대중 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과 련계를 강화하고 군중을 옳게 조직 동원하여 올바른 투쟁방법과 전략전술을 가지고 과감히 싸워나간다면 원쑤들의 그 어떤 아성도 능히 쳐부시고 빛나는 승리를 이룩할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과 교훈을 남조선인민운동사에 남겨놓았다.
오늘도 제주도인민들은 조선인민 앞에 저지른 미제의 피비린내 나는 죄악의 력사를 잊지 않고 반미자주화의 기치 밑에 단결하여 지난날 남조선인민들이 흘린 피 값을 기어이 받아내고야 말 투지로 계속 싸워나가고 있다.
2011.3.7.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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