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68)] 지만원 족적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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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4-27 23:54 조회4,8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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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68)] 지만원 족적 7~9
⑦ 정인숙과 정일권
1969년 5월, 나는 22개월의 베트남전 참전을 종료하고 귀국하여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모 처장인 원스타의 전속부관을 했다. 부속실에는 중령 보좌관과 당번인 정 상병, 그리고 타이피스트(미스 윤)가 함께 일했다. 점심때면 점심을 일찍 마친 이웃 사무실 아가씨들이 부속실에 모여들었다. “미스 윤, 미스 윤은 왜 그렇게 인기가 좋아요?” 대답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저 보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지 중위님 보려고 몰려 오는거에요” “뭐? 왜요?” 얼굴을 숙이면서 또 입을 열었다. “지 중위님이 육군본부 전체에 소문이 퍼져있대요. 영락없는 베트콩이라고요. 얼굴은 깡마르고 검은데다 몸집은 작고 눈만 걸어다니는데 한번 구경 가보라고요”
당시 사병들은 배경에 따라 국방부에도 배치되고 육군본부에도 배치됐다. 당시 육군본부에 배치된 병사라면 빽이 든든한 아이들이었다. 특히 정 상병은 체격도 좋고, 얼굴이 희멀겋고 기생오라비처럼 곱상했다. 그는 장군의 지시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가끔 꾸중을 듣고 나왔다. 집중력과 성실성이 떨어지는 병사였다.
그가 어느 날 퇴근하시는 장군에게 느닷없이 휴가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장군은 나와 중령 보좌관의 승인을 받은 줄 아시고 “오, 그래? 잘 다녀와” 하시고는 출발하셨다. 사무실에 올라온 그에게 보좌관님이 주의를 주고 휴가는 못 간다고 했다. “부관이 며칠 후 결혼을 하는데 부관이 신혼여행 가 있는 동안 사무실 시중을 네가 들어야 하는 게 아니냐, 결혼식 때 가서 시중도 들어줘야 할 자네가 의리 없이 굴면 되겠느냐, 그리고 너는 부관한테도 나한테도 허락을 받아야하고, 장군님한테는 내가 휴가 보내겠다고 보고 드려야 할 사안인데, 네가 직접 장군님한테 보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월권이야. 휴가 못 간다.” 정 상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보좌관님은 퇴근을 하셨다.
퇴근하자마자 정 상병은 나에게 “내일 휴가 갑니다.” 통첩을 했다. “너는 절차를 어겼다. 나와 보좌관님은 너의 휴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못가. 알았어?” 정 상병은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그게 명령입니까?” 되물었다. “그래, 명령이다. 윗 상관이 말하면 그게 명령이라는 거 몰라?” 그는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 모멸감을 주었다. 참고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정 상병의 행위는 베트남에서나 그 이전 양평부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작태였다.
그 다음부터는 그를 패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놈을 47kg의 체중을 가진 내가 패려니 힘이 딸렸다. 그의 손목을 꺾어 패대기를 친 후 발로 마구 찼다. 이웃 병사들이 몰려오고 주번 장교 소령이 달려왔다. 병사들은 죄송하다고 했고, 주번사령은 나를 힐난했다. “소령님이 해결할 일이 아니면 사고보고만 쓰시고 힐난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소령은 정 상병의 배경을 알고 있었다. 정 상병을 병원에 데려가 X-ray를 찍는 등 진찰을 받았더니 뼈에는 이상이 없으니 부기만 빠지면 된다고 했다. 이웃 병사들은 자기들이 책임지고 정 상병이 외출하지 못하도록 하겠으니 퇴근하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도망을 쳤고, 월요일 아침 나의 장군은 김계원 참모총장실로부터 받은 전통문을 가지고 오셔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 이전 나는 출근하신 장군께 사고의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그랬더니 장군은 내 역성을 드셨다. “그놈이 내가 방 정리, 책상정리 요령을 누차 가르쳐주었는데도 늘 제 멋대로 하더라. 그녀석 잘 혼내주었다”
장군이 들고 내려오신 전통문 내용은 이러했다. “지 중위라는 몰지각한 장교가 병사를 마구 구타한 사건이 있는 바, 참모총장은 엄벌에 처하고 결과보고 할 것” 정일권 국무총리실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장군님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령 참모님들은 각자 인맥을 동원하여 일을 잘 수습해 보려고 노력들을 하셨다.
그날 나는 장군이 퇴근하시자마자 이웃 병사들로부터 그의 주소를 알아가지고 서빙고로 갔다. 2층 양옥집 철문을 노크했더니 꼬리치마를 입은 미모의 여성이 노기 띤 얼굴로 나를 안내했다. 1층 응접실에는 TV가 켜져 있고, 그의 모친이 돌 이전의 남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여인은 모친에게 퉁명한 명령조로 TV를 끄고 애를 안고 2층으로 가시라 했다. 그리고 나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내가 며칠 전 미국에서 돌아왔다. 정 상병은 내 막내 동생으로 내가 무척 사랑한다. 어떻게 저 지경을 만들어 놓을 수 있는가 생각하니 분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장교님은 처벌을 크게 받아야 할 것 같다. 우리 아버지가 곧 퇴근하신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아버님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시면 아버님께 직접 말씀 드리겠습니다.” 적막한 시간이 한 시간 정도 흘렀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버님 퇴근이 늦으시네요. 저랑 이야기 하시지요”, “아닙니다. 저는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여인이 더 초조해졌다. “저에게 말씀하시면 제가 그대로 아버님께 전하겠습니다.” “정말이신가요?” “말씀 하세요” “그러면 정 상병이 있는 자리에서 말씀 드릴테니 정 상병을 배석시켜 주십시오.” 정 상병이 2층에서 내려왔다. 그가 동석한 자리에서 나는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님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같으면 패 죽이지요” 반론을 제기하려는 동생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가로막았다.
“누님한테는 대위 계급이 어려보이겠지만 이 대위계급 어제 달은 겁니다. 제 얼굴을 보시면 짐작이 가시겠지만 저는 5개월 전에 베트남에서 22개월 정글작전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소위와 대위 사이에는 신분상의 격차가 있습니다. 소위의 지휘에 따라 작전을 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베트콩 총알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그 병사들도 다 그들 집에서는 정 상병만큼 귀한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이 고국에서는 대위 명령에 불복하고 중령 명령도 어기고, 장군을 가벼이 여기는 병사가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죽어간 병사들과 대조하니 의분이 솟구쳤습니다. 저도 혈기가 있고 장교로서의 자존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에 호소하고 싶습니다. 국무총리가 이런 병사의 역성을 들어 육군사관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국가의 명에 따라 이국 먼 나라에 가서 목숨 걸고 전투를 하고 온 한 청년장교를 희생시키라는 전통을 참모총장실로 내려 보내는 것을 업무로 삼을 수 있는가, 언론에라도 호소하고 싶습니다.”
“지 대위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제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대위님이 덩치도 크고 우락부락하고 몰상식한 장교인줄로 상상했습니다. 만나 뵈니 얼굴도 착하게 보이시고 말씀이 너무 조리 있으셔서 놀랐습니다. 제가 아버님께 말씀드려 내일 곧바로 취소전문을 총장님실로 보내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 아이를 며칠 후 귀대시키겠습니다. 장군님께 죄송하다는 말씀 전해드리시고 이 아이가 가거든 혼을 아주 많이 내 주시라고 말씀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결혼식에라도 가 뵙고 싶지만 배웅이나 하겠다면서 거리에까지 걸어 나와 택시를 잡아주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장군께 보고 드렸다. 다음날 하루종일 기다렸지만 취소전문은 오지 않았다. 장군이 퇴근하시자마자 나는 정복을 입고 중앙청 국무총리실로 갔다. 얼굴도 검고 몸은 바싹 마르고, 눈만 커다란 젊은 장교가 들어서는 순간, 비서실 사람들이 한 번씩 훔쳐보았다. 나는 높아 보이는 비서관 책상 위에 전문을 올려놓으면서, 이 전문을 총장실로 내려 보낸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나는 공간의 한 가운데에 장승처럼 서서 기다렸다. 마냥 기다릴 태세였다. 한 사람씩 퇴근을 하고 책상들이 비어졌다. 그들이 모두 퇴근해도 끝까지 서 있을 태세였다. 결국 그들 중 무게가 있어 보이는 비서가 일어서서 내게 왔다. “대위님, 그렇지 않아도 취소전문을 내리라는 명을 받아놓고 있었습니다. 내일 취소 전통문을 발송할테니 염려말고 가십시오.” 그리고 그 다음날 약속대로 취소전문이 날아왔다. 그 바닥에서 나는 대단한 장교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날이 아침 10시에 시작되는 결혼식 바로 전 날이었다. 28세의 임시대위, 결혼한 지 두 달만인 1969년 11월, 그 장군은 주월한국군 사령부로 발령이 났고, 그 장군은 나를 다시 베트남으로 데려가셨다. 2차 파월이었다. 내가 만난 그녀가 정인숙이었다는 사실은 1970년 내가 정글지역으로 다시 배치되어 포대장을 하기 직전, 고국에 잠시 휴가를 나왔을 때 장군 사모님이 알려주셨다. “지 대위님, 정 상병 누나가 바로 정인숙이랍니다.”
언론에는 추한 여인으로 각색된 정인숙, 하지만 내가 만났던 그녀는 인간성과 인격이 매우 고매했다. 언론은 그녀가 박정희 대통령의 애첩이었다고 보도를 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정일권의 아이였다. 그 아이는 장성해서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소송까지 했다. 정인숙과의 짧은 만남, 그것은 드라마 그 자체였다. 그녀의 남동생이 저질렀던 행동을 또박또박 이야기할 때 그녀의 얼굴은 동생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나에게 사과를 하던 모습은 천사의 얼굴이었다. “국무총리실이 병사를 관리하는 곳입니까?” 국무총리실에 던진 내 말에 주눅들어하는 비서들의 모습도 드라마였다. 이런 경험 역시 다른 사람들의 상상 범위에 있지 않을 것이다.
⑧ 담배의 애교
사이공의 주월한국군 사령부, 참모장실 부속실에는 중령보좌관과 나, 그리고 병장이 있었다. 참모들은 거의가 다 대령들, 장군급, 고참 대령들이었다. 하루 종일 참모들이 결재를 받으려고 와서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어이, 지 대위 담배 있나?” “저는 담배를 안 피우는데요” 하지만 그들은 연일 같은 질문을 했다. 이에 나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해야 했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px에 가서 6가지 종류의 담배를 사다가 동동 걷어 올린 작업복 틈 사이에 좌우로 3갑씩 꽂아놓고, 타임지로 영어공부를 했다. 그랬더니 참모들이 내게 걸어와 팔뚝에서 담배갑을 꺼내 한 개비씩 뽑아 담배를 피웠다.
이에 영리한 병장은 각 참모들에게 즐겨 마시는 차를 메모했다가 각 참모가 오시면 그가 좋아하는 차를 대령했다. 전직 참모장은 윤성민 준장, 후에 최 장수 국방장관을 지내신 분이었다. 윤성민 참모장 시절에 그 분을 모셨던 전속부관은 고참 소령이었는데 무서운 참모장님의 성격을 등에 업고 인심을 많이 잃었다고 했다. 사무실 분위기가 밝게 바뀌자 대령 참모님들이 나를 귀엽게 여기셨던 것 같다.
나는 참모님들이 시간을 낭비하시지 않도록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걸어 당일 결재제목과 소요시간을 여쭈어 리스트를 만들고, 결재의 시급성에 따라 30분 전에 예령을 내렸다. 10분 전이 되면 올라오시라고 보고를 했다. 참모님들이 매우 고맙다고들 하셨다. 고국에서 참모장님과 사이가 안 좋았던 대령 한 분은 늘 주눅이 들어 계셨다. 나는 그분이 이웃 참모님과 나누는 대화에서 자랑거리를 찾아내 참모장님께 차를 타고 다니는 동안 조금씩 흘렸다. 고국에서 족보 있는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다는 말을 듣고 참모님께 강아지 한 마리를 고국에 계신 사모님께 갖다드리라고 귀띔해드렸다. “참모장님, 부관참모님 가족이 족보 있는 강아지를 갖고 계신데 사모님께 새끼 한 마리 드리라 할까요?”, “그래? 그거 좋지, 그러라고 해”, “참모님, 부관참모님도 조찬에 초대할까요?”, “응, 그래라” 이후 두 분은 자연스럽게 화해가 되어 잘 지내셨다.
사령부 건물과 멀리 떨어진 사이공 시내에는 3성 장군인 사령관 공관, 2성 장군인 부사령관 공관, 그리고 1성 장군인 참모장 공관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붉은 지붕에 흰색 벽으로 지어진 고급 저택들이었다. 각 공관에 파티가 잦았다. 참모장이 주최하는 파티에서는 내가 바텐더를 하는 등 바빴지만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주최하는 파티에 가면 밖에서 타임지를 공부하면서 기다리곤 했다. 한 번은 부사령관 공관에 일찍 도착해 넓은 홀로 들어서면서 영사들 앞에서 한 장군의 흉내를 냈다. 뒷짐을 짓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땅 한번 내려다보고…
그런데 병사들이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앞을 보니 그 장군이 소파에 앉아서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갑자기 하던 동작을 멈추다가 하마터면 콘크리트 바닥에 넘어질 뻔 했다. 나는 병사들만 보면 장난기가 발동했다. 병사들 사이에 인기 있는 장교가 됐다. 통신실에 근무하는 병사들은 얼굴 한번 보지 못했지만 어떤 때는 하루에 두 차례씩 고국의 새댁과 통화할 기회를 주었다. 대령들도 1주에 한 번씩만 할당된 통화였다. 병사들은 통화내용을 엿들으면서 즐기는 것 같았다.
대령들에서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나는 재미있는 장교로 통했다. 어느 날 참모장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어이 부관, 이제 백마부대로 내려가 포대장을 하지. 참모들이 나를 많이 졸랐네. 본국에 휴가를 갔다가 곧장 백마부대로 가게” 대령 참모들이 나에게 경력을 쌓게 의논들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4~5명의 대령 참모님들이 백마부대 포 사령관인 권영각 대령님께 각기 전화를 걸어 임시대위이지만 꼭 포대장 경력을 쌓게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한다. 당시 육사 3년 선배인 19기들도 내가 한창 포대장을 하고 있을 때 포대장을 나갔다. 딱딱하다는 계급사회였지만 나는 계급을 의식하지 못하고 넓은 자유공간을 즐겼다. 남에게 베푸는 것은 되를 주고 말로 받는 인과응보였다. 이러한 경험 역시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 범위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⑨ 불리한 위치에서 베트콩 제압
내가 부임한 곳은 용케도 내가 소위-중위때 작전을 하던 곳 투이호아였다. 성장(도지사)이 위치한 시내에서 자동차 거리로 10분 거리,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1번 도로변이었다. 높은 산머리에서 구렛나루처럼 길게 뻗어 내린 산자락의 끝 부분에 포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동쪽에는 남북으로 벨트처럼 길게 뻗은 관목지대가 있었고, 그 푸른 밴드밭과 바다 사이에는 하얀 모래밭과 야자수 지대가 남북으로 흘렀다. 북쪽에는 보병 제2대대 기지가 있었고, 남쪽에는 경주 고분을 수백 배 뻥 튀겨 놓은 것과 같은 동그란 산이 있었다. 서쪽에는 1km정도에서부터 시작되는 정글 산이 위압적으로 이어졌고, 포대와 정글 산자락 사이에는 드넓은 논과 밭이 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부임한 포대는 백마사단 30포 대대였는데, 1번 도로 주변의 붕로만 위로 가파르게 우뚝 선 바위산에 진지를 틀고 있다가 심심하면 박격포 세례를 받았다. 결국은 박격포가 탄약고를 명중시키는 바람에 많은 병사들이 죽고 다쳤다. 그리고 내가 부임한 새로운 진지로 이동했다. 벙커도 없고 그냥 맨 땅이었다. 황토 위에는 벙커를 구축하라고 공급된 육중한 사각나무 기둥들이 여기 저기 쌓여있었다. 황량한 맨 땅에 병사들은 20인용 텐트를 여러 곳에 쳐 놓고, 내려쬐는 땡볕에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행동들이 굼떴다. 부상을 당했지만 후송대상이 아닌 병사들은 따가운 햇볕에서 상처를 만지며 짜증스러운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내 전임포대장은 고압적 자세로 병사들을 다루어, 양평부대에서 하사관이 유 소위를 죽이겠다며 총기를 들고 난동을 부려, 여러 병사가 부상을 입어 포대장은 처벌을 받고 조기귀국을 당했다. 이러하니 새 포대장으로 부임한 내가 또 얼마나 짜증스러웠겠는가.
어둠이 깔릴 무렵, 앞에 있는 시커먼 정글 산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 굼떠있던 병사들의 행동이 재빨라지고 눈에서는 공포의 안개가 발산됐다. 숨을 곳이라고는 쌓인 목재더미 옆뿐이었다. 다행이 사거리가 20m정도 모자라 포탄들은 기지 밖에서 작열했기 때문에 피해는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이러한 공격을 얼마나 많이 당해야 하나?’ 당시까지 장교들은 사는 길은 오로지 베트콩이 봐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드넓은 정글 산, 어느 곳에 박격포를 설치하고 발사한 것인지 무슨 수로 알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포탄이 빗나가기를 바랄 수밖에!”
또 다른 하나의 우려는 베트콩이 살금살금 기어와서 부대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맹호부대와 청룡부대에서 기지가 쑥대밭이 되도록 공격당한 사례들이 있었다. 저 앞의 시커먼 정글 산에는 그런 습격부대가 충분히 포진돼 있음직했다. 나는 밤중에 플래쉬를 들고 작업장에 쪼그려 앉아 생각에 잠겼다. 소위시절, 수색중대와 함께 정글 산에 작전을 나갔다가 월맹 정규군 복장을 한 부대에 포위당해 있을 때, 바위틈에서 밤을 지샌 적이 있었다. 나는 베트콩이 우리가 있는 곳을 알아차릴까봐 1km 떨어진 곳에 밤새내 포탄을 한발씩 쏘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포 소리가 자장가였다. 그런데 보병 병사가 나를 향해 기어오더니, “소대장님, 포에서 파편이 날아옵니다. 좀 멀리에 쏘아주십시오” 겁을 먹었다. 나는 그를 따라 그가 있던 곳으로 기어갔다. 번쩍 하는 섬광이 비친 후 3초 후에 소리가 났다. 소리는 1초에 340m, 밤에 정글에서는 1km 밖에 떨어지는 포탄 작열음에도 겁을 먹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생각이 나자마자 나는 무릎을 쳤다. 그리고 상황실로 달려가 박격포 사거리 4km까지 2km간격의 바둑판 격자를 그렸다. 각 격자의 모퉁이에 포탄 1발씩 4발을 날리면 그 정 가운데 있는 베트콩은 아마도 정신병에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물망 사격. 장교들과 병사들에 그 아이디어를 말해주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낮에도 한바탕 콩을 볶고, 밤에는 시간을 예측하지 못하게 아무 때나 쏘아댔다. 어둠이 다가오면 병사들은 베트콩이 포복해 들어오지 않을까 겁을 먹었다. 저녁이면 역시 베트콩이 예측할 수 없게 아무 시각에나 “야, 그거 한번 하자” 한마디 하면 병사들은 신나했다. 온갖 종류의 화포와 총기를 동원해 앞산을 향해 불꽃놀이를 했다. 예광포가 날아가고 폭탄이 2km 날아가다 공중에서 작열하고, 무반동총, CAL50 중기관총, M16소총의 예광탄이 공중을 수놓았다. 소리도 각양각색이었다. 전쟁은 예술이라는 말이 이 장면에도 적용됐다.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말끔히 풀렸다. “얘들아, 이제는 베트콩 염려할거 없어, 안그래?” 병사들의 사기가 오르고 불신 받던 포대장이라는 직책이 다시 살아났다. 이렇게 1년, 포탄과 실탄의 소모량이 엄청났다. 우리 중사들이 1포대와 3포대에 전화를 걸어 실탄과 포탄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그들은 정량을 다 사용하지 못해서 쌓아두는 것이 골칫거리였다. 나는 포대장을 정확히 12개월동안 했다. 그 오랜 동안 단 한 번도 박격포 공격이 없었다.
“베트콩이 봐주어야 살 수 있다.”, “그 넓은 산 속 어디에서 쏘는지 어떻게 알고 대처하느냐?” 나는 늘 ‘문제 있는 곳에는 반드시 대책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베트남 전쟁터에서 나처럼 포를 운용한 장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역시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 범위에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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