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79)] 5.18 1급 유공자들의 공적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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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5-06 11:52 조회9,6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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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79)] 5.18 1급 유공자들의 공적내용
민주화 유공 공적의 성격
5.18 유공자 등급은 1급에서 14등급까지 매겨져 있다. 1급 유공자 중 최고로 많은 보상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1급 유공자일 것이며 그가 1991년에 받은 금액은 일시금으로 3억 1,700만원 플러스 월 연금 420만원 이었다. 월 연금은 물가 상승률에 비례해 오르니까 아마도 지금은 3~4배쯤 올라 있을 것 같다. 독립 유공자나 전쟁 유공자들 중 이러한 보상을 받은 사람은 없다.
경찰관 7명 불태워 죽인 살인자가 최고의 1급 유공자
1989년 부산 동의대 사건, 도서관에 경찰관 7명을 몰아넣고 신나를 뿌려 모두를 불태워 죽인 살인 주범자가 2002년 문재인의 역할과 김대중의 재가로 6억 원의 보상을 받았다.”경찰은 군사정권의 앞잡이이기 때문에 많이 죽일수록 민주화의 공도가 크다“는 것이 핵심 논리였다.
광주 고교생 19세의 윤기권, 광주에서 경찰을 닭장차에 한동안 가두고 있었다는 공로로 1991년 일시금 2억 원을 받고 그 다음 달인 3월에 북으로 갔다. 그리고 대남 방송의 도구가 되었다. 이처럼 이 나라의 모든 민주화 유공자는 대한민국에 항적한 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5.18 1급 유공자들의 공적 내용
5.18의 기획자는 김일성과 김대중 급이지만 현장 실행 계급에서의 1급 유공자는 1980.5.27.에 계엄군에 의해 도청에서 체포된 20대 들이다. 당시 그들이 작명했던 저항 조직은 1980.5.25. 밤중에 급조한 ‘시민 학생 수습 위원회’였다. 이 명칭이 너무 길고 ‘항쟁’이라는 단어가 없는 ‘수습’이라는 단어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후 자의적으로 ‘항쟁본부’라고 개명해 불렀다. 항쟁본부의 주역은 김종배(25), 정상용(29), 허규정(26), 박남선(25), 윤상원(29) 등이다. 이들은 2002년 전남대 출판부가 발행한 [5.18 항쟁 증언 자료집]에서 그들의 공로를 스스로 밝혔다. 이들이 자신들의 공적을 스스로 밝힌 사실은 5.18을 지휘하고 기획한 사람이 광주에 없다는 것을 웅변해주는 매우 귀중한 ‘이실직고’ 문서다. 이들의 이실직고적인 증언을 소개하기 전에 배경과 아울러 등외자이거나 열외자 두 사람의 증언부터 살피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루살이 수습대책 위원회
전남대생 김창길은 5.21 계엄군이 철수한 다음날인 5.22에 도청에 들어간 최초의 학생이었다. 22일 도청에는 광주 유지들과 일부 교수들이 들어가 무기부터 반납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이 때 김창길이 심부름을 했다. 당시 유지들은 ‘시민 수습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갑론을박하다가 불과 이틀 만에 해산했다. 그 다음 김창길이 5월 25일 도청에 들어가 ‘시민 학생 수습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위원장이 되었다. 김창길은 도청에 조립되어 있는 2,100발의 폭탄이 위험하다며 몰래 계엄사령부에 찾아가 자신과 동료 몇 사람이 신변을 지킬 터이니 폭탄을 해체해 달라고 간청했다. 계엄 사령관은 유일한 전문가인 배승일 문관과 조수들의 도청에 잠입 시켰고 김창길과 몇 명의 젊은이들이 보초를 서주었다. 5.25일 밤, ‘김창길이 도청에 모딘 사람들을 계엄사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부위원장이었던 김종배는 소영웅심에 불타는 박남선을 상황실장하라고 포섭했고, 박남선은 김창길에 권총을 들이대며 협박해 축출해 버렸다. 그리고 김창길이 차지했던 위원장 자리를 차지했다.
5.18 열외자 2인의 증언
1. 김창길의 증언: 수습위원회는 학생들이 다 도망갔고, 일반인들로 채워졌다. 시민군 조직들은 모두 자생적인 조직이었고, 도청에서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23일부터 무기를 회수하러 다녔다. 윤상원, 정상용 등 핵심인물들은 5월 24일 오후에야 도청에 들어왔다.
2. 김효섭 증언: 상원이형(윤상원)이 무기를 개발하자고 했다. 깨진 블록들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철공소들에 다니면서 쇠토막하고 나사를 많이 가져오라고 했다. 21일 새벽부터 계림동 대인동을 다니면서 나사와 철근 토막을 구해 녹두 서점으로 가져 왔다. 그걸 가지고 나가 땡겨 보았는데 날카로워 손에 피가 났다. ‘이거 안 되겠다” 하는 순간 어디선가 모르게 총이 쏟아져 나왔다.
참고로 윤상원은 5.18 최고의 영웅으로 추대돼 있다. 그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성역화 돼 있다. 윤상원은 5월 27일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특사 회보‘ 몇 장 작성한 것 말고는 별로 성적이 없다.
1급 유공자들의 공적
1. 항쟁본부사령관 김종배의 공적: 예비군을 모아가지고 본격적으로 투쟁해 보자 작정한 날이 5월 25일 이었다. 이날 기동 타격대를 조직한 사람은 자개공 이채호였고, 기동타격 대장을 한 사람은 윤석루(19, 구두공, 무기징역) 이었는데 그는 어리고 뭘 잘 모르는 아이였다. 도청발포 이후 21일 오후에 총이 나왔다.
2. 외무위원장 정상용(무기징역) 공적: ’시민 학생 수습 위원회‘는 일명 ’항쟁 지도부‘였다. 이는 5월 25일 오후에 급조된 조직이었다. 5월 19일부터 윤상원 등과 녹두서점에서 대책을 상의하다가 21일 총소리가 나자 각자도생 하자며 보성기업으로 도망쳤다가 22일 녹두 서점에서 다시 만났다. 운동권들은 5월 18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다 잡혀갔기 때문에 운동에 대해 전혀 개념 없는 사람들만 모였다. 국장급처럼 보이던 높은 사람들은 24일 도청을 빠져나갔다. 김종배와 허규정은 여기서 처음 만났다. 이 두 사람은 조선대 학생이고 운동권이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거기에서 생전 처음 만난 것이다.
3. 내무위원장 허규정(무기징역) 공적: 나도 공수부대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운동권에 속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개인 사격으로 휩쓸렸다. 시민들하고 이리 저리 밀려다니기만 했다. 시위는 누가 주도하는 사람도 없고 리더도 없었다. 21일 누군가가 도청을 탈환했다. 이걸 장악한 사람이 있을거 아닌가!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우리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도청으로 간 것이다. 장악한 사람들은 위엄 있는 높은 관료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우리에게 ’곧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니 학생들은 나가라‘고 말했다. 우리는 맨날 회의를 했지만 방법은 안 나왔다. 어른모임 따로, 학생모임 따로, 일반 모임 따로 제각각이었다. 통제도 안 되고, 콩가루였다. 나는 밖에 가서 소주를 마시고 다시 들어 왔다.
4. 상황실장 박남선(사형) 공적: 시민군은 모두 블루칼라였다. 식당 종업원, 구두닦이 등 가장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이 가장 앞장섰다. 운동권은 다 도망갔다. 지식인들은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얼굴 세울 궁리만 했다. 5월 17일 운동권 인물들은 다 잡혀갔다. 고등학생들, 총들고 싸우겠다 했는데 내가 26일 밤에 다 돌려보냈다.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은 광주가 통제되어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간 사람들이다.
박남선은 중 2 중퇴자로 절도죄, 협박죄,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은 바 있고, 5.18 당시 25세로 화물차 운전수였다.
특기사항들
이들은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운동권도 아니고 각자 개인단위로 5월 25일 어쩌다 도청에 들어와 5월 26일 하루 동안 ’수습위원회‘를 구성해 갑론을박 하다가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급습으로 진압당한 좌파들이다. 5월 18일 전남대 공수부대를 찾아가 돌멩이 공격을 가한 사람도 없었고, 5월 21일 20사단을 습격한 사람도 없고, 무기고를 턴 사람도 없고, 교도소를 공격한 사람도 없다. 어쩌다 어슬렁거리며 도청에 들어왔다가 하루만에 진압된 사람들이다.
계엄군이 잡아놓은 사람들은 이들 뿐이다. 이들밖에 없기에 계엄군은 5월 18일부터 5월 21일 사이에 벌어진 폭동의 죄를 이들에게 씌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에 부과된 형량에 따라 5.18 유공자 급수가 매겨졌다. 민주화 세력이 전두환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5공 인물을 처벌할 때 역시 5공에서 받은 각자의 훈장 급수에 따라 형량을 부과했다. 피장파장이었던 것이다.
5공의 가장 큰 잘못은 상황일지로부터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북괴 특수군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군 출신이라면 야간 무장 공격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이고 자살행위 그 자체라는 점을 잘 안다. 그 야간 공격을 5회씩이나 감행한 존재가 광수 양아치들이라고 속단한 것은 조롱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동 중인 최정예 사단인 20사단 차량부대를 매복-습격한 300명의 존재를 양아치들이라고 속단한 것도 비판받아야 하고,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5,403 정의 총기를 탈취한 행위자들이 양아치 계급일 것이라고 넘겨 버린 대목도 코미디에 해당한다.
생각할수록 5공의 정보 분석관들, 계엄사의 정보 분석관들의 정신상태가 의심 된다. 국민은 위 항쟁본부 지휘부 사람들의 공적부터 밝히라 요구해야 할 것이다.
2023.5.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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