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89)] 지만원 족적[5] 1. 김대중과 나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6-03 01:28 조회11,019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지만원 메시지(89)] 지만원 족적[5]
1. 김대중과 나
벼락 출세한 예비역 대령
미 해군대학원 교수생활을 마감하고 나는 1989년 말에 귀국했다. 세계일보가 문 앞에 놓여 있기에, 율곡사업(전투기 증강사업)에 대한 칼럼을 하나 써서 회사로 보냈다. 그런데 세계일보의 기자 두 명과 논설위원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율곡 13년의 성과를 평가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국방부 건물에 사무실 하나를 차지하고 율곡 관련 사업문서 모두를 특명검열단으로부터 가져다 8개월에 걸쳐 분석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세계일보는 제 11면 전면을 나에게 할당해 매주 수요일마다 내 글을 실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들이라 일반 국민은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당시 군, 특히 공군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정치적 압력이 세계일보에 가해졌다.
나는 1991년, 이 내용들을 책으로 썼다. 앞부분을 김영사에 보냈더니 김영사가 바짝 다가왔다. “첫 문장에서 본질로 치고 들어가는 문장 스타일에 매력을 느꼈다.”며 나머지 부분을 마쳐달라 했다. 이렇게 저술한 책이 내 처녀작이었고 책명은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였다. 이 책은 베스트 1위를 7주간 연속했다. 당시 LA 랜드연구소에 들렸더니 오공단 교수가 나를 반기며 한국에서 알 수 없었던 소식을 알려주었다. “보안사에서 나를 군사기밀누설 혐의로 구속하려다 사회적 인기가 너무 높아 포기했어요. 알고 계세요?”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로써 나는 거의 모든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되었고, 세계 수준의 군사평론가라는 평을 들으면서 독보적인 군사평론가가 되어 TV, 라디오 방송에 단골로 출연하고 중앙과 지방의 일간지에 칼럼을 써 대기가 바빴다. 사람들은 나를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사람, 장안의 지가를 높인 사람이라고들 했다.
택시를 타면 요금을 받지 않겠다는 기사도 있었고, 몇몇 유명 호텔 커피숍에서는 내 일행에 대한 커피 값을 자기가 내겠다는 관리자도 있었다. 그야말로 나의 황금시대였다. 여기에 더해 1993년에는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라는 제목의 책을 내, KBS에 60분 프로, “인생 이 얘기 저 얘기”에 초대되어 우리사회에서 처음으로 시스템의 중요성에 대해 전도사 명함을 내밀었다. 이 프로는 나로 인해 “TV는 사랑을 싣고”로 발전했다. 어떤 신문은 나를 두뇌로 연간 1억 이상을 버는 경영학 강사 중 한사람으로 보도했고, 어떤 주간지는 나를 5대 경영학 강사 중 한명이라고 소개했다.
김대중의 러브콜
1995년 초, 김대중이 보낸 사람이 안양의 초라한 빌라에 찾아와 나 없는 사이에 꿀단지와 30만원을 놓고 가면서 아태재단 강사로 나와 줄 것을 요청했다. 다른 강사들의 명단을 보니 그럴듯한 사람들이었다. 첫 강의 제목은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 통일과 영구분단은 반대어이다. 제목 자체가 모순(Paradox)이었다. 3개월 과정인데 학생들은 주로 정치를 지망하는 교수, 변호사, 사업가들이었다. 3개월 과정이 끝난 다음 학생들은 인기투표를 했다. 그런데 내가 1위를 차지했다. 이전까지는 임동원이 1위였다. 졸업파티를 한다며 나를 초청했다. 서교호텔에 식탁이 길게 일열로 배열되어 있었다. 얼른 보니 내 명패가 맨 끝자리 부근에 놓여 있었다. 학생들과 대화를 나눈 후 자리에 앉으려 끝자리로 갔더니, 그 자리에 있던 명패가 김대중 바로 앞자리에 놓여 있었다. 김대중의 좌우 자리에는 서울대 전 총장과 중앙대 전 총장이 앉아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김대중을 너무 어려워 하여 말소리조차 떨리고 있었다.
나는 김영삼 시대의 사회, 경제 국방문제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좌중의 모두가 처음 들어보는 소리인 것처럼 신기해했다. 그러더니 어느 한 사람이 박정희에 대해 평해달라고 요청했다.
김대중에 박정희 업적 강의
“박정희요, 엉뚱한 발상의 천재였지요. 뜬금없이 공업고등학교를 많이 만들어 기능공을 양성하더라고요. 기능공들이 서독 국제 기능 올림픽에 나가더니 1, 2, 3등을 싹쓸이 하더라고요. 대통령이 그 기능공들을 다 청와대에 불러 어깨를 두드려 주는 거예요.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로 이미지화 된 겁니다. 각국에 특사를 많이 보내더군요. 한국에는 순박한 기능공들이 많으니 공단에 와서 공장을 세워달라고요. 창원, 구미, 인천공단에 외국 공장들이 막 들어서더라고요. 일본기업이 가장 많았지요. 1965년 국교정상화의 덕이었지요. 30프로가 넘던 실업률이 제로가 되고, 잠실 수박밭 가격이 금값으로 치솟더라고요.”
“그 다음엔 국산화를 시작하더라고요. 선진국에서는 한물 간 상품, 이른바 사양화 제품, 영어로는 Sunset Item이라 하지요. 수많은 부품에 대한 도면 스펙설명서 등 기술자료 패키지, 영어로는 Technical Data Package를 대형 선박으로 막 들여오더라고요. 한국 기업이 언제 공업제품을 만들어 봤나요. 기술자료를 어떻게 읽고 해석을 해야 하는지 캄캄했지요. 그래서 외국에 나가 있는 동포 과학자와 기술자를 유치해 KIST를 만들어 준거예요. 그 과학자, 기술자들이 근로자, 관리자를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고 훈련시킨 겁니다. 그래서 새까맣게 앞서가던 홍콩, 싱가포르, 대만을 따라잡은 겁니다. 이게 바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좌중은 처음 듣는 말이라며 신기해 했다. 김대중이 약간 이의를 제기했다.
“박정희가 분배만 좀 못했지 성장은 잘 시켰지요.”
일자리 만들어 주고, 봉급 많이 주는 것이 분배였다. 그런데 무슨 분배가 따로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빨갱이들이 말하는 분배는 삼성을 헐어 모두가 나누어 갖자는 것을 의미한다. 파티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마침 김대중이 같이 타고 있었다. “지교수님, 명함 하나 주세요.”
한-중 세미나에서 기조연설
1995년 5월,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한-중 세미나가 열렸다. 기조연설은 통상 총리 또는 부총리 경력자, 서울대 또는 연•고대 총장 경력자들 중에서 선정한다. 아태재단의 한 젊은 학자가 이런 인물 15명을 적어 김대중에 선정하라는 결재를 올렸다. 그런데 김대중은 이 15명이 적혀있는 종이에 ‘X’표를 긋고 새로운 이름 ‘지만원’을 썼다고 한다. 나는 18분짜리 기조연설문을 외워서 했다, 그리고 기립박수를 받았다.
“1997년 12월 7일, 고르바초프가 UN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불과 253자였습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무조건 해체하고, 군축을 단행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냉전의 벽이 갑자기 무너진 것입니다. 냉전시대의 제1가치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이제부터 세계 제1의 가치는 ‘삶의 질’이 되었습니다. 남북 사이에도 이데올로기를 청산하고 삶의 질로 나가야 합니다. 남북 간 이데올로기는 무엇이 만들어 냈습니까? 통일입니다. 그런데 통일은 영원히 불가능해 보입니다. 지난 50년간 남북은 다 같이 통일을 외쳐 왔습니다. 북에서 통일을 외치면 남이 긴장하고, 남에서 통일을 외치면 북이 긴장해 무기를 증강시켰습니다. 이처럼 통일은 긴장의 씨앗이었고 군비경쟁의 씨앗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땅덩이를 두 쪽으로 나누어 두 자식에게 등기를 내주면 두 자식은 평화롭게 잘 지냅니다. 그러나 반대로 땅덩이를 두 자식에게 내 주고,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라고 하고 죽으면 두 아들은 서로 물어뜯고 싸웁니다. 우리도 통일하기 없기를 약속하고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UN에 레프리를 맡기면, 우리도 캐나다와 미국처럼 사이좋게 비자 받아 왕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통일입니다. 서울과 평양을 합치는 법률적 통일이 아니라 사실상의 통일인 것입니다....”
중국에서 김대중과 지낸 일주일
김대중은 1995년 10월 24일부터 1주일간 중국에 가는데, 같이 가서 같은 내용으로 발표를 해달라고 전갈을 해왔다. 1등 칸을 타니까 부인의 자리와 바꾸어 앉아서 나를 자기 옆자리에 앉혔다. 중국에서의 발표 역시 기발한 발상이라며 많은 박수를 받았다. 김대중 일행은 국회의원들과 아태재단 간부, 후원자 등 30여 명이나 되었다. 식사 때마다 나는 늘 김대중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말동무가 되었다. 발표가 끝나고부터 일행은 매일 한 명씩 공산당 간부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공산당 서열 6위로부터 2위까지를 만났다.
김대중의 20억 수수 고백
10월 27일, 김대중은 일행의 누구와도 상의 없이 자기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전략적 고백을 했다. 8일 전인 10월 19일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 4,000억 원을 폭로한 데 대한 후속 조치였다. 김대중과 박계동은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처음 하루의 여론은 김대중이 받았다는 20억 원에 지향됐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의 여론은 김영삼에 쏠렸다. 노태우가 정적인 김대중에 20억 원을 주었다면 그가 대통령을 시켜준 김영삼에게는 수천억 원을 주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여론을 압도했다. 결국 박계동과 김대중의 콤비 플레이로 김영삼이 코너에 몰리게 됐다. 이에 김영삼은 노태우와 했던 3당 담합의 약속을 깨고, 5.18 사건을 꺼내들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광주에서 양민을 억울하게 학살한 자들이다. 당장 잡아넣어라.” 국면을 전환했다.
김영삼의 반란
개돼지 여론은 즉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반인륜적 범죄자로 몰려 구속됐다. 5.18은 이미 1981.1.23.자 대법원 판결이 나 있었고, 판결 내용은 김대중의 배후 조종에 의한 내란 음모인 것으로 종결됐다. 이를 뒤집으려면 ‘재심’절차가 필요했다. 하지만 재심 사유가 없었다. 그래서 1995.12.21. 특별법을 제정해 놓고, 그 특별법에 근거하여 5.18을 다시 재판했다. 이는 일사부재리 원칙을 위반한 편법이었다. 일단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넣은 이상 죄를 만들어내야 했다. 김영삼-김현철 부자의 종이라는 비난까지 감수하고 충성했던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이 홍준표를 수족으로 발탁하고, 권정달을 배신자 신분으로 동원하여 전두환에게 미리부터 집권을 하려는 마스터플랜, 즉 ‘집권 시나리오’가 있었다는 거짓 진술서를 쓰게 했다.
김대중의 제안, 장관하라
1998년 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김대중과 막역한 사이로 형님, 동생 하고 지낸 김상현 전 의원이 여의도 만하탄 호텔 일식당에 나를 세 차례 불러 장관 자리 하나 하라고 했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면 한전 사장자리라도 하라고 했다. 나는 지금의 프리랜서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어서 청와대 총무수석, 경제수석, 안보수석 그리고 심지어는 박지원까지도 나를 독대하여 한자리 하라고 했다. 나는 자유공간이 가장 넓은 프리랜서 생활을 고수했다. 2000년에는 이회창이 한나라당 총재였을 때 부총재를 하던 홍사덕 의원이 과천 호프호텔 7층 커피숍으로 세 차례나 찾아와 전국구를 하라, 정책 위원장을 하라 해도 나는 응하지 않았다.
웃는 얼굴에 침 뱉어
김대중이 임동원을 앞세워 햇볕정책을 밀어붙였다. 임동원은 육사 13기생으로 북으로 간 간첩 최덕신의 신원보증으로 육사에 입교했다. 임동원은 6.25때 북괴군 하사로 낙동강 전투에서 국방군에 잡혔던 자로 모친을 포함해 모든 가족이 북에 있었다. 그는 빨갱이로 의심받아 육사 총 동창회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이 둘은 취임하자마자 햇볕정책을 밀어 붙였다. 햇볕정책은 정책을 가장한 간첩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현대상선을 앞세워, 존재할 수도 없는 금강산 관광사업 독점권이라는 명목으로 9억 4,200만 달러를 북에 지불하라 닦달을 했고, 1년에 몇 명이 금강산을 가든 무조건 50만 명이 간 것으로 하여 1인당 300달러를 지불하도록 했으며, 삼성 등 수많은 기업들에 압력을 넣어 북한에 물질적 지원을 하라 했다. 그리고 정부는 쌀과 비료를 한 번에 수십만 톤씩 북에 수송해주고, 김정일에 몰래 현찰로 준 돈이 4억 5천만 달러였다. 이것도 미국이 확인해준 금액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북한 퍼주기 백서’를 처음으로 작성한 사람은 오직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잡지에 햇볕정책을 비판했다. 당시 햇볕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람은 나와 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 뿐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공개적으로 김대중과 임동원을 김정일의 총독이요 새빨간 빨갱이라고 평가했다. 나에게 그토록 공을 들이고, 어디에 가든 “우리 지교수가 최고야” 자랑했던 사람, 자기 부인 자리에 나를 앉히고, 일주일 세 끼 내내 한 테이블에서 말동무로 신뢰했던 사람인데, 갑자기 침을 뱉고 돌아선 것이다. 김대중이 나를 얼마나 증오했겠는가? 개인적 이득에 대한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살아있는 권력, 웃어주는 권력에 침을 뱉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의리를 배반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임동원의 도청과 밥줄 끊기 공작
1995년 4월 25일자 매일경제 신문기사다. “우리나라 경영계에도 고액강사 시대가 열렸다. 강연료만으로 연간 1억원의 소득을 올리는 전문강사들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 민간기업 연수원장들이 뽑은 베스트10 강사로는, … 지만원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장 등이 꼽히고 있다.” 1억원은 순전히 기업강의로 인한 수입이었지만 출판, 기고, TV 및 라디오 출연, 정부기관 강연 등으로부터 얻는 수입, 기업 컨설팅으로부터 얻는 수입은 1억원 속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당시 장관의 월급은 420만원 정도였다. 그러니 자유주의자인 내게 장관자리, 전국구 의원자리가 눈에 들어왔겠는가.
1999년 임동원이 북 통신 감청국인 제8국을 총동원하여 껄끄러운 인물들을 도청했다. 그 제1우선순위가 나였다. 1999년~2002년까지 도청한 사실이 2005년에 문제화되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다. 임동원과 제1차장 김은성이 구속되었고 김은성의 딸이 자살을 했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위에서 닦달당해 중간 심부름만 했을 뿐인데, 왜 억울하게 구속하느냐, 무슨 이런 국가가 다 있느냐“에 대한 분통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딸을 무지 사랑한 것을 보니 김은성은 심성이 곱고 자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동원을 사전구속한 ’구속영장‘의 키워드는 지만원이었다. 저항능력 없는 한 자연인을 불법도청한 행위는 매우 악질적인 죄질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임동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면서 법원 수레로 1개 가량 3줄로 올려 쌓인 그의 형사사건 기록을 모두 열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요자료 100쪽 분량을 복사해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2005년 11월 16일자 한국경제 기사다. 제목은 ”영장서 드러난 DJ정부 국정원 충격적 도청실태“. ”실제로 당시 국정원은 DJ정부 햇볕정책을 비판한 군사전문가 지만원씨와 ’안풍사건‘에 연루됐던 한나라당 강삼재의원, 한국논단 이도형 발행인 등 정권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인사들을 도청했다.“
국정원 김은성 차장의 검찰진술
아래는 김은성 차장의 검찰진술(피의자 신문조서 제3회) 일부다.
검찰: 왜 지만원이라는 사람을 DJ가 싫어했나요?
김은성:그 내막은 모르지만 아무튼 극우론자로 알려진 논객인데 그 무게에 비하여 DJ가 유별나게 싫어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찰:피의자가 기억하기로 지만원 관련 통신첩보 내용은 어떤 것이었나요?
김은성:지만원 본인의 통화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슨 교수니 예비역 장성 등과 전화를 하면서 “DJ 햇볕정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지해야한다. DJ나 임동원 이런 친구 전부 빨갱이다”는 내용입니다.
검찰:원장이 관심을 가졌던 사안과 관련한 통신첩보 내용 중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김은성: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DJ관심이 많은 부분인데, 지만원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제가 아는 바로는 DJ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지만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시 “DJ와 임동원 원장이 나라를 빨갱이들에게 팔아먹었다”는 식의 강연회 등을 다니면서 발언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오랫동안 본 것만 해도 10~20여회가 넘을 것입니다. 그 시기는 정확치는 않지만 2000년도 제가 부임했을 때부터(엄준익 차장때도 도청) 2001년도 제가 퇴임할 때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했을 것입니다.
검찰:임동원이 김은성 차장에게 지만원에 대한 첩보를 채근하고, 감시조치를 더욱 강화하라 독려했는가요?
김은성:“김차장, 자꾸 통화만 한다고 되는가요? 적극적으로 조취를 취해야지”라는 식으로 채근을 했고, 수시로 저에게 인터폰으로 연락이 와서 “뜬 것 보셨습니까?”(지만원의 행동이나 발언 동향에 대한 8국이나 대공정책실의 첩보내용)또는 “지만원 좀 조치가 되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수시로 체크를 하였습니다. 제 재임기간 중 지만원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검찰:지만원이 실정법을 위반했나요?
김은성: 아닙니다. (김은성 차장 피의자 신문조서 제3회 14쪽)
국정원 8국장 김병두의 검찰진술
아래는 국정원 8국장 김병두의 검찰진술 일부이다. 8국은 북괴에 대한 통신감청을 주 업무로 하는 기술부서인데, 김대중은 하라는 북괴정보는 수집하지 않고, 북괴를 경계하는 인사들을 도청하게 했다. 북괴의 통신을 ’감청‘한 것이 아니라 애국인사들의 통신을 ’도청‘한 것이다.
검찰:김은성 차장의 진술에 의하면 지만원의 경우 DJ를 비난하고 다녔기 때문에 임동원 원장도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하면서, 지만원에 대한 통신감청 보고서를 10~20회 이상 보았다고 진술하던데요?
김병두:지만원에 대하여는 제가 오기 직전부터 쭉 감청을 해왔고, 그 이후에도 쭉 감청을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0년 말로 기억하는데 원장 비서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비서실장인지 정보관인지 “지만원이 대통령과 원장님을 극렬하게 음해하고 다녀 원장님 관심이 크다. 집중적으로 지만원에 대하여 첩보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은 기억이 납니다.
검찰:그런 식으로 원장실에서 전화가 오는 경우가 자주 있는가요?
김병두: 제가 8국장으로 있으면서 처음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제가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김병두 8국장 피의자신문조서 제6회, 12쪽)
검찰:지만원에 대한 통신첩보는 주로 어떤 내용이었나요?
김병두:주로 강연 간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동 문서 13쪽)
너무나 아까운 기회 차단당해
거의 매일 약속돼 있던 대기업 강의가 한 순간에 셔터 내려지듯이 캄캄하게 끊기고, 강연 약속이 취소되었다. 언론 인터뷰, 조중동에 예약된 칼럼기고가 모두 취소됐다. 갑자기 멘붕상태가 왔다. 가장 아까운 기회는 LG로부터 요청받고 수락했던 ’토의문화의 창조‘였다.
LG요원: 일본의 가오루이시까와 박사가 되어 LG에 토의기술을 정착시켜 주십시오.
지만원: 와~ 정말 탁월한 선택이시네요. 제 평생 소원이 기업에 토의문화를 개척하고 생활화시켜 드리는 것이었는데 LG가 가장 먼저 중요한 착안을 하셨네요. 기꺼이 하겠습니다. 보수는 정하지 말고, 결과에 대해 기뻐하시는 것 만큼만 주시면 됩니다.
곧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약속했는데 이것이 날아간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꼭 하고 싶은 욕심나는 일이다. 2000년도에 토요타에서는 분임토의에 의해 문제가 4만여개나 발굴됐다. 토의는 관찰력을 매우 예리하게 길러준다. 문제는 문제가 거의 없다는 한국기업에 있는 것이다. 한국기업에서는 문제를 발굴해 내는 사람이 문제아로 찍혀 도태된다.
2002년에 촉발된 5.18과의 전쟁
2002년 8월 16일, 나는 동아일보 사설면에 5단 크기의 의견광고를 냈다. 제목은 “대국민 경계령! 좌익 세력 최후의 발악이 시작됩니다.” 4,500자의 칼럼형 광고였다. 보도에 나 있는 사실자료들을 집대성한 광고로, 요지는 ’김대중이 김정일의 충복이라는 것‘을 사실자료로 뒷받침하는 광고였다. 이 광고문 안에 “광주사태는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순수한 군중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습니다. 쌀, 마늘 파동 등으로 소요사태를 일으켜놓고 계엄령을 선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선거도 없고, 우익들이 잡혀가고 김정일이 무혈로 서울을 장악하는 사태가 올 수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모든 빨갱이들이 왕소금 세례를 맞은 미꾸라지들처럼 요동을 쳤다. MBC 손석희, 오마이뉴스 오원호가 나섰고 민주당이 2회에 걸쳐 성명서를 냈다. 8월 20일에는 5.18 부상자회 김후식이 검은 유니폼을 입은 조폭 12명을 끌고 올라왔다. 충무로에 있는 5층 사무실에 와 집기를 부수고, 건물주를 협박했다. 다시 안양 주거지 아파트로 몰려와 승용차를 부수고 아파트 문을 우구려트렸다. 아파트 사람들이 몰려와 공포 어린 눈으로 행패를 지켜보는 동안 경찰은 주눅이 들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경찰이 나에게 해준 것은 미리 가족과 함께 피신하라는 것 뿐이었다.
광주 검찰 최성필 부대의 집단 야만행위
2002년 10월 22일 16:00, 광주 검찰 최성필의 조사계장 김용철과 서부 경찰서 순경(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이 나의 아파트 안으로 구두를 신고 들어왔다. 대검찰청에서 나왔으니 순순히 응하라며 뒷수갑을 채웠다. 가족과 아이들이 울부짖었다. 승용차의 앞에 두 명이 타고 뒤에 두 명이 나를 가운데 앉히고 달렸다. 나는 이들이 조폭인 줄로만 알았다. 6시간 동안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하고, 연실 욕설을 하고 앞뒤에서 번갈아 가면서 내 머리와 얼굴을 쥐어박았다. 보통 사람들은 수갑을 뒤로 채우면 단 10분을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민주화의 주역이라는 광주, 그것도 법을 지키기 위해 봉급을 타 먹고 있는 검사와 경찰이 어떻게 이렇게 반인륜적일 수 있는가. 상식이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니미 씨발 좆같이,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씨발놈아. 네깟놈이 무얼 안다고 감히 5.18을 건드려. 이 씨발새끼가 가다가 목을 비틀어 파 묻고 가야 한당께. 뭐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다 있어. 야, 이새끼야. 너 이회창으로부터 얼마나 받아 처먹었냐. 이런 새끼가 무슨 대령 출신이야. 이런 새끼가 무슨 육사 출신이야. 대령질 하면서 돈은 얼마나 받아 챙겼겄냐. 이런 쥐새끼같은 개새끼, 우익 새끼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한당께. 너 이새끼 가다가 죽을 줄 알아. 너를 죽여서 파묻어도 증거가 남냐? 증거가? 엉? 우익 새끼들은 무조건 다 잡아 죽여 읎애 브러야 한당께.” 김용철과 이일남이 그 중 가장 악질이었다.
광주 검찰청 615호실에 끌려가니 최성필 검사가 곧 때릴 듯이 뛰어와 손을 번쩍 들었다. “이 개새끼, 수갑 풀지 말고 밤새워 조사해.” 등과 팔은 이미 내 살이 아니었다.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옆 사무실 여검사가 짧은 치마 자락을 흔들면서 나타나더니 내 턱을 치받쳐 올렸다.
“당신이 시스템공학 박사요잉, 시스템 공학이랑게 있당가? 어디서 학위를 받았소잉? 첨 듣는깅데 이거 가짜가 이닝기벼? 쫌 알아봐야 겠구만이라. 어이 좀 알아 보소잉? 당신 눈에는 광주시민 전체가 빨갱이로 보이요 잉? 에구- 광주가 아니었다믄 이 한국에 무신 민주주의가 생겼갔소, 어림도 없재이~ 참말로라 잉?”
나는 광주 교도소에서 101일 동안 구속되어 있다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2003년 1월에 풀려났다. 그리고 결심했다. “10년이 가든 20년이 가든 5.18을 반드시 규명해 낼 것이다. 광주와 김대중은 다 빨갱이가 맞다.”
2023.05.25.
지만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