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152)] (족적) 마구잡이 군사문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9-17 21:00 조회10,00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지만원메시지(152)] (족적) 마구잡이 군사문화
장군사회의 벌주문화
1981년 중령으로 진급한지 3년차인 39세 때 나는 국방연구원에 가서 처녀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고요했던 군 사회에 일대 풍파가 일었다. 당시 윤성민 국방부 장관이 이 연구에 자극되어 전군 예산 개혁을 추진했고, 이 예산 개혁은 전두환 대통령이 전 정부 부처에 확대 했다. 이로 인해 윤성민 장관은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국방부 장관을 5년 동안이나 지냈다. 나는 전군을 다니면서 강의를 했고, 감사원은 나와 함께 감사활동을 했다. 모든 독립부대에 자원관리 참모가 새로운 직제로 생겨났고, 공기나 물처럼 반 자유재로 취급되어 오던 장비와 물자에 가격표가 부착되었고 부대장은 예산 절약에 관심을 쏟고 모든 장병들에 비용 의식이 사상 처음으로 태동했다. 군 역사와 군사 문화의 대 변혁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군 장군사회는 프로-지만원과 안티-지만원으로 갈라졌다. 프로-지만원 장군들은 나를 국보급이라 옹호했고, 안티 장군들은 나를 건방지다고 비난했다. 프로-지만원 장군들 중에는 정호근 중장이 계셨는데 그는 당시 특검 단장이었다. 그는 중령과 대령급 감사관들을 이끌고 창원 공단에 들어 차있는 방위사업체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주도했다. 매일 방위사업체를 한 개씩 선정해 감사케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곧바로 감사 결과를 발표하게 했다. 중령 감사관, 대령 감사관들이 각자 자기가 감사한 내용과 처분에 대한 건의를 자세히 발표 했다. 한 사람의 발표가 끝나면 특검 단장은 꼭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감사관들의 관찰 내용이 처벌감이 아니라 격려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반대 의견을 많이 냈다. 이제까지 서슬 퍼렇던 감사관들이 경영 학습을 새로 한 것이다. 이렇게 창원에서만 보름을 지낸 후 진해 해군 클럽에서 종결 파티를 열었다.
단장님 테이블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소주-맥주를 마시던 중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하는 장군들에는 아무런 반응 없이 듣고만 계시던 단장이 나에 대해 막연한 부정적 표현을 하는 장군이 나타나자, 단장님이 물었다. 그 장군은 준장(원스타)이었다. “자네 소속과 직책이 무엇인가?” 대답이 끝나자 단장은 준장에게 벌주를 주었다. 맥주 글라스에 연거푸 소주를 세 잔 가득 따라 주면서 들이키라고 했다. 그 준장은 전주가 있던 차라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1986년, 나는 공군이 국방비의 7%인 2.5억 달러를 털어 미국 휴즈사로부터 구매한 방공 자동화 장비가 25달러 가치도 없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이 장비를 가지고 전투기 침투를 탐지한다면 그게 기적이라고까지 혹평을 했다. 그 결과 군이 요동쳤다. 윤성민 장관 후임으로 온 육사 11기 이기백 장관과 공군 총장 김인기가 전두환 대통령에 불려가 엄청난 꾸지람을 당했다. 윤성민 장관은 일반 간부 후보 출신이고, 이기백은 전두환 대통령의 육사 동기생이었다. 그런데 학습능력은 거꾸로였다. 윤성민 장관이 100이라면 이기백 장관은 10정도나 되었을 것이다. 이기백 장관 밑에는 제 2인자가 육사 12기 황인수, 제 3인자가 같은 육사 12기 황관영 예비역 소장이었다. 이들 정규 육사 출신 3인은 나를 ‘트러블 메이커’(문제아)라고 공언했다.
한번은 남한산성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클럽 하우스에서 저녁을 하고 있었는데 황인수-황관영 장군 팀이 몰려왔다. 장군들끼리 간단한 술파티를 하는데 그들은 양주를 마셨다. 나더러 오라고 하더니 수고 많다며 맥주 글라스에 양주를 연거푸 두 잔을 가득 부어 주며 들이키라고 했다. 나를 괴롭힐 속셈인 줄 알면서도 보란 듯이 기세 있게 두 잔을 다 마시고, 연구소 후배 장교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해군 준장에 소주 세 컵을 벌주로 마시게 한 정호근 중장님은 그 후 대장으로 진급하여 합참의장을 지내신 후 오래 사셨는데 나를 미워하고 양주를 마시게 했던 육사 12기 두 분의 황장군은 그 후 얼마 안돼서 하늘로 소천하였다.
장군과 영관급 박사
정호근 대장님은 나에게 은근히 조언하셨다. “지박사, 적이 너무 많아. 딱 1년만 입을 봉하고 있어. 그러면 내가 책임지고 장군 시켜줄게.” 하지만 나는 박사로 대표되고 싶었지 장군으로 호칭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1987년 2월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예편한 후 미 해군 대학원 교수로 갔다. 장군들이 부대 현장을 현실 파악 차 방문한다. 그가 현장에 가서 파악하는 것은 왜곡된 현장이다. 그래서 장군들이 현실을 거꾸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1군 사령관이던 육사 12기 안필준 대장은 동해안 전 지역을 맨발로 걸어서 해안 경비 실태를 파악하였다. 맨발로 걸어서 다녔어도 일선 군인들은 군 사령관을 감쪽같이 속였다. 각 초소에 마다 똑똑한 초급 장교와 병사들을 배치하고 앵무새처럼 보고 내용을 외워서 브리핑 하고 대답했다. 결국 진실은 파악하지 못하고 병사들 어깨만 두드려 주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민간복을 입고 연구원 한 명만 데리고 다니니까 병사들이나 일선 초급 장교들은 묻지 않는 말들도, 신나게 말해주었다. 더구나 저녁에 회라도 같이 먹으면 진실을 망태기로 담아온다. 이런 내용을 국방부 장관(윤성민)과 다른 4성 장군들에 말해주었더니, “우리 장군들은 군대생활을 헛했어.” 현실을 알고부터는 부하들의 보고를 액면 그대로 믿지를 않았다.
이 후 예편하여 기업 현장에 경영진단을 하러 나가면, 일선 사원들이 ‘공감’ 잘해주는 나에게 그가 아는 모든 것을 털어 놓는다. 기업이든 군대든 간부들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특히 한국의 계급 문화권 하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과 반대로 하는 감사원
1970년대 대전 국방 과학 연구소에는 박대통령이 며칠씩 머무시던 조촐한 독채가 하나 있었다. 영빈관이라는 작은 간판을 달고 있었다. 대통령이 국방 과학 연구소에 하루씩, 이틀씩 머무는 이유는 연구원들과 함께 호흡을 하는 것이었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말고 소신껏 해보고 싶은 대로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격려 하셨다.
그런데 최근 감사원 감사관은 시행착오를 저질렀다고 처벌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라면 박대통령이든 윤대통령이든 다 시행착오를 겁내지 말고 소신껏 창의력을 발휘하라 격려할 것이다. 그런데 정호근 특검 단장 시절의 중-대령급 감사관들처럼 지금의 감사원 감사관들은 격려의 대상을 처벌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러니 무슨 창의력이 발휘되겠는가? 더구나 감사원 감사관은 특검단 감사관들보다 더 답답한 사람들이었다. 대통령은 속히 군에 무기 관련 사업을 감사하는 미니 특검단을 발족시켜야 할 입장에 계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