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197)] 현대사의 주역은 전두환, 김일성을 13회 KO시킨 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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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11-24 01:43 조회16,7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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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197)] 현대사의 주역은 전두환. 김일성을 13회 KO시킨 대영웅.
거목 비난하며 먹고사는 잡목들
며칠 전 12.12를 영화로 제작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스쳐가는 몇 개의 컷을 보니 전두환을 악마로 희화화한 영화 정도로 인식됐다. 이제까지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빨들은 문재인, 노무현, 이재명을 위시하여 전두환 이름을 땅에 새겨놓고 쿵쿵 발로 짓밟기도 했고, 전두환 조형물을 만들어놓고 입을 찢고, 눈을 후벼파고, 머리를 조각내고 발길질 연습을 했다. 이제는 5.18과 전두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돼가자 12.12를 새로운 소재로 지정하고 또 다시 증오심을 분출하려는 모양이다.
한 공간에는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서부터 대통령이 끝날때까지의 객관적 족적을 기록해 놓고, 다른 한 공간에는 그를 증오하면서 스스로를 인격파탄자로 타락한 인간들 하나 하나에 대한 족적을 기록해보자. 배움으로 보나 인격적으로 보나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바퀴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당신이 전두환보다 무엇이 잘났는지 열거해보라”
영화 12.12는 보지 않아도 ‘화려한 휴가’처럼 황당한 수준으로 왜곡돼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10.26, 12.12, 5.18과 전두환을 수사기록 18만쪽을 가지고 21년 동안 연구한 사람은 오로지 필자 한 사람 뿐이다. 따라서 수사기록으로 쓰지 않은 작품들은 부정확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이제까지 나온 보도들이나 작품 중 왜곡되지 않은 작품을 단 한 개도 만나보지 못했다. 역사사건만 왜곡된 것이 아니라 역사 인물인 전두환도 황당한 수준으로 왜곡됐다. 수사기록에 나타난 전두환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학습으로 내공을 쌓은 출중한 인물이고, 이타심과 공인의 자세와 호연지기와 의협심이 충만한 세계적 수준의 거목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이 나라 국민수준에는 너무나 과분한 거목들이었다. A학점을 맞은 사람은 많은 노력을 한다. 하지만 C학점을 맞은 사람은 A학점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A학점을 받은 사람을 헐뜯는다. 열등생일수록 우등생보다 더 잘난체를 한다. 바로 이 C학점을 받은 사람이 김일성이고, 김일성을 교주로 모시는 전라도 중심의 남빨들이다.
김일성, 전두환과의 13라운드 결전에서 13회 모두 KO패 당해
제1라운드: 10.26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김일성의 평생소원인 ‘박정희 제거의 꿈’을 실현시켜 주었다. 권력이 일거에 사라진 전국이 무정부상태로 치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데, 바로 그날 밤 전두환이라는 2성 장군이 혜성과 같이 등장해 김재규를 전격 구속했다. 전두환이 갑자기 김일성의 주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제2라운드: 12.12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정승화는 10.26. 밤의 4시간 동안 김재규의 뜻에 따라 김재규와 자신의 범행을 숨기고 비상국무회의에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12.12까지 47일 동안 자신에 대한 전두환의 수사를 방해하고, 정치현장에 간섭하고, 김재규를 살려내려고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정국이 불안해지고 있을 때 전두환이 정승화를 살인방조 혐의로 구속시켰다. 4성장군에 계엄사령관이라는 직책과 사법처리 수장인 2성장군 사이의 충돌이었다. 군의 여론은 전두환 편이었다. 12.12는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살신성인의 본보기였다. 여기까지의 결단에 의해 어지러운 질서가 점차 회복되면서 사회와 군 내의 여론은 전두환을 연호했다. 이로써 1980.9.1. 전두환은 주위에 포진한 선후배들과 여론에 의해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열광적인 추대를 받아 대통령이 된 사람은 이제까지 전두환이 유일했다.
제3라운드: 5.17
1980.4.3.부터 5.17까지 45일동안은 김대중의 정국이었다. 학생시위로 정국을 마비시켰고, 5월 15일에는 서울역 10만 학생시위가 국가전복을 위협했다. 이에 기세를 업은 김대중은 최규하 정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5.19까지 내각을 해산하고, 계엄을 철폐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해 전국폭동을 일으켜 국가를 뒤엎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주영복 국방장관은 5월 17일 전국 지휘관 회의를 열어 계엄령을 확대강화할 것을 최규하 대통령에 건의했다. 이에 전두환은 그동안 조사했던 김대중의 혁명내각 요원 24명을 전격 체포하여 김대중 내란음모를 일망타진했다. 김대중의 국가전복 계획이 무산되자 그동안 김대중이 선언한 전국 폭동을 주도하기 위해 광주에 끌어모았던 600명의 북 특수군을 풀어 5.18 게릴라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5월 16일의 김대중 선전포고는 이미 북괴의 5.18작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5.18을 진압한 군사작전은 순전히 계엄사령관을 정점으로 한 작전지휘관들에 의해 수행됐고, 이 작전은 많은 허점이 있었지만, 미국이 극찬을 했을만큼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최대한으로 보호한 성공한 작전이었다. 전두환은 5.18에 전혀 간섭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전두환이 5.18을 진압시켰다는 주장은 군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선동꾼들의 요설이다.
제4라운드: 김대중은 5.18 배후 조종자로 무기징역형에 처해
1980.5.17. 김대중이 혁명내각 명단을 작성하여 전국학생시위를 주도한 사실을 밝혀냈다. 김대중이 광주에서 발생한 시위를 위해 공작금을 보냈고, 신부, 카톨릭농민회, 복학생들을 동원해 폭동을 배후조종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기소했다.
제5라운드: 김대중이 1972년 일본에서 반국가단체 한민통을 구성한 사실을 밝혀내 사형선고
김대중은 박정희 유신시대인 1972년 미국과 일본을 다니면서 한국에 군사원조를 차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어서 미국과 일본에서 북괴의 베트콩과 곽동의 등과 함께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을 구성했다. 전두환은 이 사실을 밝혀 사형선고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김대중을 남조선 꼭두각시 대통령으로 세우려 했던 김일성의 꿈이 사라졌다. 눈이 뒤집힌 김일성은 이후 전두환 암살에 올인했다.
제6라운드: 1981.7. 필리핀 암살계획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과정에서 전두환을 살해하려 했던 캐나다거주 간첩 최홍희 부자가 캐나다 경찰에 의해 극적으로 체포되었다.
제7라운드: 1982.8. 아프리카 가봉 암살계획
아프리카 가봉을 방문중인 전두환을 암살하려고 암살범 일당이 접근하다 교통사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8라운드: 1983.10. 아웅산 테러
대규모 각료집단만 살해하는데 그쳤고, 전 대통령은 무사했다.
제9라운드: 1984.8. 김일성의 ‘폭우피해 지원제안’ 전격 수락
경기도 지역이 물피해를 많이 보자 김일성은 의례 거절하겠거니 하고 호기있게 쌀 5만톤, 시멘트 10만톤, 의약품, 옷감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하자, 이에 전두환이 의표를 찔러 “고맙다. 받겠다” 수락을 했다. 보내온 쌀은 거의 다 썩었고, 다른 물자들은 거의 쓸모가 없었지만, 북한의 출혈은 대단했다. 김일성의 약이 극도로 올랐다.
제10라운드: 1986.4. 김일성이 시도한 서울 수공용 금강산댐 건축 무력화
1986년 아시안게임을 서울에서 성공적으로 치러 한국의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자 김일성은 1988년에 열릴 올림픽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소양강댐 저수량(29억톤)의 6~7배나 되는 저수량 200억톤 규모의 금강산댐을 건설했다. 전두환은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평화의 댐을 건설하여, 의표를 찔렀다. 김일성이 또 KO패를 당한 것이다.
제11라운드: 1987.11. KAL858기 폭파 행위가 김일성 소행임을 밝혀내 북괴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케 해
1987.11. 김현희를 도구로 KAL858기를 공중폭파시켜 한국에 선수를 보내면 위험하다는 국제여론을 일으키려 했지만 전두환의 진두추적과 숨막히는 외교전으로 실패했다. 북한은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제12라운드: 1988.9. 국제올림픽 역사상 최대규모, 최대 참전국의 참여로 한국 브랜드가치 급상승
참가국 160개국, 선수규모 13,304명. 국제올림픽 탄생 이후 최대 규모였으며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김일성의 온갖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꾀로는 전두환의 꾀를 당할 수 없었다. 이로써 북한과 남한의 위상은 천지 차이로 벌어지게 되었다.
제13라운드: 3고(高)시대를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경제성장율 기록 세워
박정희 대통령 말기, 과도한 중화학공업의 중복투자 등으로 고물가, 고환율, 고유가라는 3고(高)시대에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시절에 학습을 한 실력으로 고물가 46%를 3년만에 2.3%로 낮췄다. 세계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면서 아우성칠 때 평균 13%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1990년에 Made in U.S.A라는 트레이드 마크를 포기하고 기계공업에서 IT, BT로 산업의 방향을 선회한 데 반해 전두환은 1982년부터 전자산업, IT산업을 중흥시켜 오늘날의 반도체, TV, 핸드폰 산업을 선도했다. 엘리트 참모, 엘리트 장관을 뽑고, 기업계, 연구계 두뇌들을 네트워크로 엮어 사상 전무후무한 엘리트경영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북과 남의 경제격차는 40배, 50배로 벌어지게 되었다. 북한은 깡패국가, 거지국가로 추락했고 한국은 세계경제 10대 강국이 되었다. 남북간의 경제격차를 천문학적인 단위로 벌린 대통령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이러하니 김일성이 어찌 전두환에 대해 한을 품지 않았겠는가? 13전 13KO패 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남한 빨갱이들, 김일성을 신으로 모시는 주사파들이 어찌 전두환에 대해 한을 품지 않겠는가?
1980년은 전두환 역사, 전두환 재평가 이유
10.26은 김재규의 쿠데타 시도였다. 그는 그가 키운 정승화와 군벌을 이용해 정권을 잡으려 했다. 10.26 밤, 국방부 지하B2 벙커에서 정승화는 김재규의 뜻을 이행했다. 10.27.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12월 12일까지 47일간 사실상 국가를 통치했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7시, 전두환이 정승화를 체포하지 않았다면 정승화-김재규는 그들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독재왕국을 열었을 것이다.
10.26 밤 내내, 청와대 수석들과 장관들은 조용했다. 권력이 누구의 손에 있는가를 탐색하기 위해 눈들만 반짝였다. 국가는 주인없는 무주공산이었다. 이때 전두환이 정승화의 명을 무시하고 김재규를 서빙고로 압송해 그가 대통령을 시해한 장본인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시해 현장에 정승화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를 속이고 계엄사령관이 되어 47일동안 국가를 사실상 통치하던 정승화를 전격체포한 사건이 12.12.였다. 이는 목숨을 건 정의의 실현이었다.
김일성-김대중의 적화통일 콜라보
10.26 직후 김일성은 모택동으로부터 얻은 지혜로 남한에 게릴라 폭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잠수함으로는 최대 11명씩, 태백산맥으로는 20~50명 단위로 ‘열살 미만의 나이로부터 살인기계로 훈련시킨 맥가이버’들을 광주 주변으로 내려보냈고, 1980년 4월에 사북탄광 폭동과 부마사태에 파견했던 특수군과 결합시켜 600명을 확보했다. 김일성은 이렇게 광주 게릴라 작전을 준비하는 한편, 김대중으로 하여금 전국 규모의 학생시위를 주도하도록 했다. 1980년 4월 3일, 서울대 학생시위를 시발점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날로 규모와 강도를 더해갔다. 5월 15일에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이끄는 학생시위 규모가 10만이었다. 이들은 경찰 여러명을 깔아죽였다. 5월 16일, 믿는 구석이 있는 김대중이 5월 22일, 전국 규모의 전국민봉기를 선언했다. 이는 학생, 노동자, 농민에게는 총 동원령이었고 최규하 정부에게는 선전포고였다.
이에 전두환은 매우 귀한 정보를 수집했다. 김대중 일파가 북악 파크호텔에 3차례 모여 전국폭동으로 무정부상태를 만든 후, 민주질서를 확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집권을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집권시에 가동할 내각 명단 24명을 작성했다는 사실을 입수한 것이다. 이로써 5.17 전국비상계엄 확대조치가 이어졌고,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전국폭동은 실패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광주에 준비해 온 5.18은 포기할 수 없었다.
만일 전두환이 북악 파크호텔에서의 내란음모를 5월 17일 재빨리 차단하지 않았다면, 광주폭동과 싱크로나이즈 되어 김일성-김대중의 내란은 전광석화의 속도로 성공했을 것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진행된 남북연합의 내란공작이 그 성공을 불과 오 리 앞에 남겨놓고 전두환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으니 김일성이 전두환을 얼마나 미워했겠는가? 전두환이라는 강단있고, 치밀하고, 발빠른 인물이 없었다면, 김일성의 시도는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듯 쉽게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김대중은 북한에 정의의 전쟁을 요청하였을 것이고, 요청을 받은 김일성은 해주에 대기시켰던 10만 대군을 상륙시킴과 동시에 휴전선을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내려와 한국을 곧바로 적화통일 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도 정치적 명분이 부족해 더 이상 손을 쓸수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적화통일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그야말로 극적으로 국가 운명의 물길을 되돌린 인물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아슬아슬한 곡예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역사를 알기에 김일성 추종자들이 전두환을 이승만, 박정희보다 더 증오하는 것이다. 김일성 추종자들이 맥아더를 증오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맥아더가 아니었다면 한국은 1950년에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그에 대한 증오심으로 전환된 것이다. 5.18 직후 전두환 대통령은 ‘국난 극복’을 이벤트화 하여 훈장들을 수여했다. 키워드가 있었다. “국가가 풍선을 타고 북으로 날아가는 것을 가까스로 잡았다.” 이 전두환의 회고는 필자의 분석과 일치한다. “무정부 상태를 만들테니 선생님(김대중)이 집권 하십시오” 회의록에 있는 이 발언은 당시 장기표의 발언이었다.
이처럼 역사는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음미할 때에 그 평가가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현대사는 이를 평가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춘 필자가 다시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증오하라, 증오하라, 끝없이 증오하라!
1980년은 적화통일 일보직전이었던 해였다. 동시에 북한으로 날아가는 국가를 가까스로 붙잡은 영웅 전두환의 해이기도 했다. “증오하라, 증오하라, 끝없이 증오하라” 이는 1985년 황석영 이름을 빌려 정체불명의 존재가 발행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추천사에 ‘5.18 유족회’ 초대회장 전계량이 표현한 격문이다. 그 증오의 대상이 바로 전두환이다. 5.18은 광주와 전남지역에서만 일어났지만 그것은 김일성-김대중이 기획했던 남조선 전복작전의 극히 일부였다. 김대중을 바지 지휘자로 하는 전국의 학생, 노동자, 농민 등이 동시에 일어나 일으키려는 내란폭동 계획의 일부였다. 전두환이 전국폭동을 성공 1보직전에 5.17로 진압하자 할 수 없이 ‘일단 뽑은 칼, 무라도 자르자’는 심정으로 단행한 것이 전라도만의 공산화 작전이었다.
김일성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김일성을 추종하는 남한 빨갱이들이 전두환을 “갈아마시자”, “찢어죽이자” 거품을 물고 ‘악다구니’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증오를 생산하라!
공산주의를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은 신격화와 증오다. 김일성의 신격화는 항일유격전을 우화한 것이다. 김일성은 항일전쟁을 수행한 바도 없지만, 항일전쟁의 신으로 제조됐다. 솔방울을 던졌더니 그게 수류탄이 되었고, 나뭇잎을 던졌더니 그게 배가 되어 일본을 물리쳤다는 신화다. 남한 공산당의 신화는 5.18이다. 154명의 10대 양아치들이 지휘자 없이 스스로 뭉쳐 전남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무기고를 4시간만에 털어 5,403정의 총기를 탈취하고 도청을 맨손으로 점령하고,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여 광주교도소를 야간에 5회씩이나 공격하고, 도청 지하실에 2,100발, 화물열차 3개량 분의 TNT폭탄을 조립했는데 전두환이 직접 지휘한 공수부대에 의해 진압당했다는 신화다. 1215년 ‘영국의 마그나카르타’ 이상으로 화려한 세계 민주화의 대장전이었다는 것이 5.18 신화다.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모든 국민은 자손만대에 걸쳐 5.18을 기리고, 그 유공자와 후손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물질적 지위적 봉양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증오는 군중과 인민을 단결시키는 콘크리트다. 북한인민의 증오는 미국, 남한정부 그리고 자본주의다. 남한 주사파와 운동권의 증오대상도 이와 같다. 미국에 대해 증오심을 가진 사람은 어디서나 단결한다. 남한정부와 자본주의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공감하고 단결한다. 경상도를 증오하는 전라도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똘똘뭉쳐 단톡방을 구성한다. 이 증오심을 매일 기르고 나태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북괴는 매일 학습을 시킨다.
증오심 생산기계는 괴담과 요설
증오심을 키우기 위해 공산당은 늘 거짓말을 제작해야 한다. 거짓말을 지어낼 줄 모르면 혁명가가 될수 없다. 괴담과 유언비어와 요설은 혁명의 필수다. 미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해 김일성은 1960년 6.25 10주년을 맞아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개관했다. 미군이 시시덕거리면서 예쁜 여성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그림, 여성의 정수리에 피가 튀지 않게 백지를 올려놓고 대못을 박는 그림, 한 남자를 엎어 팔다리를 눌러놓고 톱으로 머리를 자르는 그림, 여성의 사지를 네 마리의 소가 찢는 그림,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여성에 던지는 그림, 구덩이에 어린 아이들을 밀어넣고 생매장하는 그림, 굴에다 사람들을 몰아넣고 폭파시키는 그림, 사냥개로 어린이와 부녀자를 물어 죽이는 그림 등이 가득하다. 실제가 없었던 상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모두가 그림이다. 이 신천박물관에 전시된 1960년의 그림이 그대로 괴담으로 번역되어 1980년 광주의 유언비어가 되었다. 이를 동영상으로 만든 것들이 비디오로 대량생산되어 전라남북도와 각 지역에 몰래몰래 관람됐다. 전두환에 대한 증오심은 이렇게 확산됐다. 언론은 6.25 이전부터 공산당 간첩에 장악돼 왔다. 우익 언론을 만들면 무엇하는가? 머지않아 공산당에 빼앗기는 것을. 대학을 만들면 무엇하는가? 상지대나 경인여대처럼 공산당에 빼앗기는 것을, 전두환이 설립한 일해연구소 역시 공산당이 빼앗아 세종연구소로 개명하지 않았는가? 이 모든 수단들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증오심을 확장하는 도구가 되지 않았는가! 공산화 작업에는 영일이 없다.
13전 13KO승으로 김일성 무릎 꿇리고 경제10대국 진입시킨 전두환은 대영웅
우리는 꺠우쳐야한다. 왜 빨갱이들이 전두환을 증오하는지를. 이승에서 끝없는 증오심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죽어서 천당간다는 교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반면, 공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가 천당에 간다는 교리는 차고 넘치도록 들어봤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일성이 다 삼켰던 나라를 토해내도록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보다 3배 더 잘살던 북한경제를 왜소해 보이도록 역전시키고, 자주경제와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전두환은 김일성 자체를 왜소하게 만들어 때려눕혔다. 여기까지를 읽은 독자들은 왜 빨갱이들이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세 분의 대통령을 증오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독 전두환 대통령을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했을 것으로 믿는다. 그가 추락해 있는 것만큼 우리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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