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198)] 다시쓰는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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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11-26 09:21 조회15,4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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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198)] 다시쓰는 5.18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 김대중의 선전포고
1979년 10월 26일 오후 7:40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시해당하는 순간부터 국가는 무주공산이었다. 시해현장 바로 옆 건물에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가 키워준 인물이었다. 시해 순간 이후 47일 동안의 정국은 정승화가 주도했다. 김재규의 시해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라며 김재규를 옹호하면서 정권장악 의지를 보였다. 이 모습을 인내심있게 43일동안 내사해오던 이학봉-전두환팀은 12월12일 오후 7시 30분, 정승화를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정승화 군벌이 병력을 동원했고, 이들 군벌은 불법으로 간주되어 보안사에 의해 체포됐다. 아군끼리의 내전이 12월 12일 밤을 긴장시켰다. 이로써 정승화의 정권장악 행진은 차단됐고, 정국은 사실상 전두환이 이끄는 보안사가 장악했다.
최규하는 능력도 판단력도 없으면서 고집만 강했다. 전두환은 이런 사람을 일일이 설득시키면서 시국을 수습하고 있었다. 전두환이 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하는 사이에 갑자기 김대중이 등장하여 시국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1980.3.26. YMCA에서 그는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국민 피를 먹고 자란다”는 연설을 했다. 피를 예고한 것이다. 이어서 1980.4.3. 서울대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적 학생시위를 선동했다. 1980.5.16.까지 43일동안 학생시위가 전국규모로 확산되고, 시위양상도 폭력화됐다. 해방 직후부터 발생한 모든 종류의 시위와 폭력은 모두 간첩의 배후조종을 받았다. 간첩이 나서지 않으면 시위도 없다. 1946년의 9월 파업과 10.1 대구폭동, 그리고 1960년의 4.19역시 간첩 이석의 작품이었다. 김대중을 목포에서 당선시킨 선거운동은 간첩들이 구성한 통혁당이 주도했다. 따라서 1980년 4~5월의 전국적 학생시위도 간첩들이 배후조종한 것으로 봐야한다.
김대중의 정국교란행위를 살펴보면 그의 행위 역시 간첩의 배후조종을 받고있었던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1980.4.10. 북악파크호텔 501호실에 김대중 혁명일당이 몰래 모였다. 복학생인 이현배, 장기표, 심재권에게 전국학생시위 선동임무가 부여됐다. 장기표는 이 자리에서 “학생시위로 무정부상태를 만들어 놓을테니 선생님께서 집권을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4월16일에는 한신대에서 “학원과 직장에서 쫒겨난 인물들이 새로운 정부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4월17일에는 서울대에서 김재규도 김상진이나 김주열 못지 않은 충신이라는 연설을 했다. 4월18일에는 동국대에서 “국민이 피를 흘리면 제2의 10.26. 무정부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연설을 했다. 김대중의 위 연설들은 모두 의미가 있었다. 이후의 사태를 예고한 발언들이었다.
5월1일에는 다시 북악파크호텔에서 비밀모임을 갖고 24명으로 구성된 혁명내각 명단을 작성했다. 수사관이 이휘호의 핸드백을 뒤져 이 명부를 압수했다. 5월들어 학생시위는 점점 더 규모와 폭력의 강도가 극성적으로 치닫아 공포감을 분사했고, 이는 경찰관 살인을 동반한 10만규모의 서울역 시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계엄당국과 국가기관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 기세를 탄 김대중은 5월16일 ‘반국가 민주화촉진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김대중 역시 간첩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로 보였다. 간첩이 짜놓은 시나리오의 배우역을 수행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김대중의 선전포고는 이러했다. “정부는 5월19일 오전 10시까지 내각을 해산할 것과 계엄령을 철폐할 것 등을 김대중에게 약속하라. 약속을 하지 않으면 5월22일 정오를 기해 전국규모의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김일성이 ‘비밀교시’를 통해 남한 간첩들에 수차례 내렸던 ‘전민봉기’명령을 김대중이 실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국에 있는 학생, 노동자, 농민 모두에게 5월22일에 일제히 봉기하라는 명령임과 동시에 정부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서슬퍼런 계엄령 하에서 감히 이런 무시무시한 선전포고가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43일동안씩이나 이런 람보식 무법자 노릇을 했는가? 믿을 구석이 없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이 무모한 행위였다. 이것이 늘 필자의 궁금증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믿었을까?’
김일성의 남침 준비는 10.26직후부터 가동
10.26 사태를 미리 예측이라도 한 듯이 김일성은 곧장 10월말부터 ‘폭풍명령’을 내려 10~30명 단위의 특수군을 장장 6개월에 걸쳐 잠수함과 태백산맥을 통해 광주로 침투시켰다. 이들 특수군은 10세 미만에서부터 살인기계로 훈련시킨 맥가이버들이었다. 사북탄광과 부마폭동을 위해 내려보냈던 특수군도 광주로 집결시켰다. 이와 동시에 해주에는 10만의 상륙부대를 준비시켰다. 5.18까지 6개월동안 광주와 광주 주변에 집결시킨 특수군 병력은 총 600명이었다. 이 숫자는 남한당국의 기록과 북한당국의 문헌에 동시에 기재돼 있는 숫자다. 동시에 5.18기념재단홈페이지에도 기재돼있고, 당시 광주에 유행했던 ‘연고대생 600명’이라는 숫자와도 일치한다. 광주를 폭동의 중심으로 잡은 이유는 김대중과 절대적인 연관이 있다. 황석영의 말대로 전라도는 반골기질이 강한 지역이기도 하거니와 김일성이 정성껏 키워온 김대중의 발판지역이기도 하다.
풀리는 수수께끼. 무력 적화통일
김일성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무력남침이었다. 김대중으로 하여금 5월22일을 기해 전국규모의 폭동을 일으키게 해놓고, 600명 특수군으로 하여금 전라도를 폭동의 진원지로 만들어 홍길동을 연상케하는 폭동의 신화를 만들어 내게 함으로써 이를 전 폭도들에 전파하여 영웅심과 사기를 진작시키려 했을 것이다. 이어서 김대중으로 하여금 북에 정의의 전쟁에 개입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게 함으로써 명분을 확보한 후 전면적인 남침으로 연결시키려 했을 것이다. 이렇게 했다면 미국의 개입이 이루어지기 전에 한국은 적화통일 되었을 것이다.
북악파크호텔의 기적
이러한 계획을 미리 알고있었기에 김대중이 감히 42일동안 거침없는 반국가 교란행위를 저질렀고 급기야는 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까지 했던 것이다. 김일성-김대중의 콜라보 작전의 D일은 5월22일이었다. 어물거리다 시기를 놓치면 5월22일을 기해 남한을 제2의 6.25전을 겪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천우신조로 전두환이 5월17일에 김대중과 그 추종자들을 전격 체포할 수 있었다. 김대중과 그 일당을 체포하려면 확실한 위법사실이 있어야만 했다. 의심과 짐작만으로 그를 체포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바로 북악파크호텔에서 작성한 김대중의 혁명내각명부였다. 그것이 없었다면 5월22일 이전에 김대중을 체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민이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한 것이다. 한마디로 전두환의 보안사가 북악파크호텔을 집중 감시했기 때문에 적화통일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5.18 역사는 정치역사가 아니라 군사역사
위와 같은 내용의 5.18역사는 정치인들이 평가하거나 사법당국이 평가할 역사가 아니라 군사분야 전문가들이 다뤄야 군사역사다. 광주 현장에서 발생했던 상황들은 군사전문가라야 소화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만일 천안함 사건을 잠수함 전문가들이 분석하지 않고, 국회에 맡겼다면 왜곡된 결론이 도출됐을 것이다. 5.18 현장상황과 김일성의 군사조치에 대한 연구를 처음부터 군사전문가들이 주도했다면 5.18역사가 지금처럼 황당하게 왜곡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하기에 역사는 두고두고 음미해야 새로운 평가가 나올 수 있다. 주사파와 전라도와 사법당국은 “5.18에 대한 역사평가가 이미 종결되었다”며 학문의 자유를 봉쇄했다. 오늘 필자가 5.18역사를 재평가 한 것은 이후의 국익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이 감히 국가를 향해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서 그 이유를 찾아보니 국가도, 국민도 모르는 사이에 국가가 통째로 북에 접수될 수 있었다는 점이 새로 발견된 것이다. 실로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5.18직후 전두환은 “국가가 풍선타고 북으로 날아가는 것을 가까스로 잡았다”는 말로 5.18을 평가했다. 아마도 그가 이 표현을 한 것은 바로 오늘 필자가 새롭게 평가한 내용이 그에게 공유돼 있어서일 것이다.
5.18 총정리
1. 박정희 대통령이 제거되자 김일성은 평생소원인 남침을 결심했다. 그가 평생 길러온 김대중은 제2의 박헌영이었다. ①김대중으로 하여금 남한에 것잡을 수 없는 속도로 내란폭동을 일으키게 하고, ②김대중으로부터 정의의 전쟁에 북이 참전해달라는 긴급요청을 하게하여 ③해주에 마련한 10만 상륙부대와 휴전선 부대로 하여금 한국군을 협공 포위하여 3일 이내에 남한을 접수한다는 시나리오다. [3일전쟁], 이는 당시 군사회에 회자되던 공포용어이기도 했다. 김대중의 내란폭동에 핵심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김일성은 잠수함과 태백산맥을 이용해 살인기계로 훈련된 만능 맥가이버 600명을 6개월에 걸쳐 광주-전남지역에 침투시켰다. 김대중은 이것을 믿고 감히 5월22일 전민봉기를 일으키겠다는 선전포고를 감히 한 것이다.
2. 이 엄청난 계획이 전두환에 의해 일부 좌절됐다. 5월17일 전두환이 김대중과 그 일당을 긴급체포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을 정점으로 하는 전민봉기가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그 전민봉기 방법을 수정했다. 광주-전라도를 혁명기지로 하여 전국폭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게릴라전과 심리전을 병행하는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핵심이 국민분노를 자극하는 유언비어와 괴담이었다.
계엄군에 환각제를 빼갈에 섞어 마시게 한 다음 양민을 미친 듯이 도륙하고 여성들을 희롱하다 칼로 이리저리 잘라 전봇대에 걸어놓았다는 등의 해괴한 유언비어가 먹혀들었다. 이 유언비어를 믿게하기 위해 600명의 맥가이버들은 계엄군이 배치돼 있지 않은 곳들에서 민간인들을 총으로 몽둥이로 칼로 살해해놓고 이를 계엄군 소행으로 뒤집어 씌우는 모략전을 수행했다. 마치 김대중이 자기 집 앞에 폭탄을 설치해놓고 폭발시켜 이를 박정희 대통령의 소행이라고 뒤집어 씌운 식의 모략전이었다.
3. 계엄군이 양민을 대량 학살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것은 “한국은 국가가 양민을 학살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정의구현을 위해 북이 남침한 것”이라는 명분을 얻는 데 필수요건이었다. 그래서 광주시민들이 수백명 단위로 나와 관을 진열해놓고 슬퍼한다는 사진들을 찍어 국제사회에 전파 할 필요가 있었다. 한쪽에서는 관을 붙잡고 통곡하는 모습을 수백명의 남녀노소들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바라보게 하는 이른바 시체장사 장면들이 쏟아져 나왔고, 사망자 명단을 바라보게 하고 찍은 기획사진들도 나왔다. 이 장면에 탈북자 50여명이 몰려있었다. 이렇게 광주 민간인들로 위장한 남녀노소 1,000여명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북한주민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민간 남녀노소 집단이 어떻게 광주에까지 왔는가? 간첩에는 불가능이 없다. 합참의장 유병현 대장이 5.18직전 전남해안을 경비하던 군을 모두 전라북도 변산반도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6.25 직전의 군을 지휘한 사람도 간첩이었다. 이 10개의 간첩행위를 군번1번 이형근 대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10대 불가사의라는 소제목으로 열거했다. 6.25 발발 전날 병력의 50%를 휴가보내고, 부대를 1주일 전에 이동시키고, 지휘관을 다 교체하는 등의 간첩행위들인 것이다.
4. 김일성은 무기를 탈취해 광주시민에 나누어주면 광주시민이 기꺼이 받아 전두환군을 향해 싸울 것으로 보고를 받은 것 같다. 6.25때 박헌영은 남침만 하면 남한의 공산주의자 20-30만이 적극 합세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자신감을 갖고 남침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예상을 빗나갔다. 5.18 광주에서는 사정이 다를 것으로 생각하고, 무기를 주었지만 광주시민은 오히려 남한말을 쓰지 않는 북괴군을 의심하면서 받지 않았다. 이에 다급해진 인민군 상장 리을설이 김일성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광주 교도소에 갇혀있는 간첩수 170명과 2,700명의 수용자들을 해방시켜 폭동의 동력으로 삼으라고 지시했다. 이는 계엄군에 무전도청 되었다.
5. 당시 광주교도소는 간첩으로 의심받던 정웅장군이 지휘하는 향토 제31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이 무전을 청취하고 교도소 방어임무를 제3 공수여단에 부여했다. 불과 2시간만의 발빠른 조치였다. 아마도 김일성은 교도소를 정웅 사단이 방어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내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희성 사령관이 허를 찌른 것이다. 김일성의 명령은 하늘의 명령이다. 특수군은 교도소를 공격하면 공격도중 다 멸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광스럽게 죽어야했다. 야간무장공격을 5회 씩이나 시도하다가 475명이 사망했다. 600명 중, 지휘부를 수호하는 100명 정도만 남기고 거의가 다 사망한 것이다. 전투력을 상실한 북괴 지휘부는 5월 24일, 낮에 전격 대형 선박을 타고 유유히 북으로 사라졌다. 이 475명 중 430명이 청주유골이었다. 이 475명은 북한문헌 3개와 조선영화촬영소가 1980년 그 해에 제작한 기록영화 내레이션에 강도 높게 등장한다.
6. 2014.5.13. 청주유골 430기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지만 세월호에 묻혀 이슈화되지 못했다. 아시안게임에 대한 홍보가 한창이었지만 북한은 시큰둥했다. 그런데 청주유골이 보도되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참가하겠다고 대들었다. 미국 Fox뉴스는 이런 북괴의 돌변이 수상하다는 보도를 냈다. 아시안게임을 기화로 김정은 전용기를 보낼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북괴 대남사업부장 김양건이 김대중 사망 5주기를 추념하기 위해 화환을 보낸다는 구실로 고정간첩으로 의심받는 임동원, 박지원, 김홍걸을 개성으로 불러 접선했다. 바로 이때 430구 유골이 선반식으로 일련번호를 달고 정리돼 있던 컨테이너박스를 실어갈 궁리를 의논했을 것이다. 2014.10.4. 아시안게임 종막식에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최고권력 3인방이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인천에 와서 하루종일 하품만 하다가 폐막식에 얼굴을 보인 후 돌아갔다. 필자는 이 이상한 현상을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박근혜시대의 김관진 안보실장은 하루종일 북괴권력 3인방에 대한 의전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던 어느날 필자는 무릎을 쳤다. 청주시에 법원을 통해 사실확인을 해보니 430구에 대한 화장증명서가 없다. 조달청 나라장터에도 입찰공고가 없다. 430구가 간 곳은 단 한곳, 평양뿐이다. 이와 같은 결론에 무릎을 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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