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199)] 국민의 요구: 5.18이 왜 민주화운동인지 이유 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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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12-02 00:41 조회15,1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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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199)] 국민의 요구: 5.18이 왜 민주화운동인지 이유 대라
전라도의 주장
전라도는 5.18이 왜 민주화운동인지 이렇게 밝혔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독재를 하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광주시민이 분연히 일어나 전두환의 독재에 항거하여 이 땅에 민주질서를 확립해 주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이다. 누가 지휘하지 않았는데도 사회저변의 ‘기층 인구’들이 앞장선 운동이다.” 여기에서 ‘기층인구’라는 말은 구두닦이, 껌팔이, 식당보이, 넝마주이, 공원, 철공, 목공, 자개공, 실업자 등을 의미한다. 이어서 “5.18민주화운동은 1215년 영국의 마그나카르타나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과 같은 정도의 민주화운동으로 전 인류 민주주의 발전의 3대 이정표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은 이를 자손만대에까지 기리고, 이 운동에 앞장 선 유공자들에게 금전적 사회적 예우를 갖춰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내용은 모든 5.18관련 판결문에 일관되고 줄기차게 주장돼있다.
전라도 주장이 사실인가?
(1)12.12는 쿠데타였는가?
12.12는 1879년 12월12일 발생한 사법처리 사건이었지 쿠데타사건이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쿠데타는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단번에 잡아 통치자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쿠데타 역시 기존의 정권을 타도하고 쿠데타 지휘자가 곧바로 국가를 통치했다. 그리고 모든 언론은 검열되었다. 하지만 12월12일에는 정승화라는 한 사람만 ‘김재규 내란음모를 방조했다’는 혐의로 체포구속했을 뿐, 모든 헌정질서는 최규하 권한대행을 중심으로 정상적으로 유지돼있었다. 언론검열도 없었다. 1979년 10월26일, 오후 7:4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서 저녁식사를 하시던 박 대통령을 권총으로 쏘아 시해했다. 시해 현장 바로 옆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승화는 김재규가 범인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함구한 후 10월27일 오전4시에 계엄사령관으로 등장했다. 이후 12.12까지 그는 47일동안 김재규를 옹호하고 정국장악을 시도하고, 본인에 대한 수사를 강압적으로 방해했다. 이런 범법행위에 대해 전두환은 당시 국가 최고의 수사책임자로서 그를 체포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12.12사건이었다.
이때 전두환은 2성장군으로 합동수사본부장 즉 계엄시의 검찰총장에 불과했다. 기라성같은 3성장군들과 4성장군들이 전두환의 상관들이었고, 그 위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있었다. 전두환은 당시 그 누구도 감히 나설수 없는 분위기에서 정의를 세우는 데 최일선 담당관으로 역할했다.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계엄검찰총장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반국가행위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전두환의 과단성있는 업무수행에 많은 박수와 격려가 쇄도했다. 12.12로부터 9개월이 지난 1980.9.1. 그는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을만큼 전 후배와 원로들의 대대적인 추대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다. 전라도의 주장대로 1979년 12월12일 그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면 왜 정승화 한 사람만 체포했겠는가? 그는 정승화를 체포하기 위해 최규하에게 재가를 받으러갔다. 재가를 금방 해줄 줄 알고 갔지만 최규하는 국방장관 노재현이 결재한 후에야 재가를 하겠다고 시간을 끌고, 노재현은 총소리에 이리저리 도망다니다 이튿날 새벽4시, 국방부 계단 밑에 숨어있는 것을 병사가 발견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렇게 재가가 지연되는 사이에 정승화의 꼬붕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술주정을 부려 헌병이 체포했다. 한마디로 12.12는 추태사건이었다. 1번 추태는 정승화의 체포거부 난동이었고, 2번 추태는 장태완의 술주정이었고, 3번 추태는 국방장관 노재현의 숨박꼭질이었다. 품위없는 똥별들의 추태쇼가 바로 12.12였던 것이다. 12.12의 군사난동은 수경사 헌병중령 신윤희가 술주정꾼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면서 막을 내렸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바로 그날 최규하를 몰아냈어야 말이 된다. 하지만 전두환은 만8개월 이상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깍듯이 모셨다. 그리고 최규하는 국민들로부터 무능하고 걸림돌만 된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으면서 1980년 8월16일 스스로 물러났다. 역사가 이러한데 1980년 5월18일 이전에 전두환이 무슨 정권을 잡고 독재를 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괴담이라는 것이다. 청담동 술자리괴담을 아직도 사실로 믿는 국민이 30% 이상이라 한다. 군과 권력세계를 알지 못하는 순진한 국민을 향해 쏟아내는 괴담이 역사로 굳어지는 이 후진국적 현상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겠는가?
(2) 5.18민주화운동이 미국 독립선언과 같은 맥락의 운동인가?
콜럼버스가 미 신대륙을 발견하고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이 왕정으로 90%의 국민을 노예로 하여 학정을 펴는 답답했던 시기,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에서 개척을 시작한 이후 1776년 7월4일 독립선언을 할때까지 150여년동안 개척민들은 병사가 되고 장군이 되어 유럽 식민지배국들과 투쟁하고 전쟁을 했다. 1789년 구성된 연방정부에 귀임한 조지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오늘의 민주주의 국가를 열었고, 이는 역으로 유럽 민주주의를 열게 하는데 자극제가 되었다. 벤자민 프랭클린,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해밀턴 등 기라성같은 귀족풍의 지식인들과 장군들이 독립헌법에 장입한 가치는 자유, 평등, 품위, 도덕, 이성, 교육, 번영 등이었다. 초대 대통령 조지워싱턴은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귀족이고 장군이고 신이다. 그런데 5.18에는 누가 지휘자이고 누가 신인가? 5.18의 계획은 누가 짰는가? 송선태가 1980년 5월11일 노트한 [자유노트]가 5.18민주화의 헌장인가? 5.18이 민주화의 장전이라면 민주화의 [가치](value)가 무엇이었는가? [자유]이고 [평등]인가? [품위]도 있는가? 1789년 파리에서 일어난 폭력혁명이 내걸은 [자유][평등][박애]가 있는가? 미국의 독립선언에는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는가? 이들과는 정 반대로 5.18세력은 이 세가지 자유를 국민으로부터 박탈했다. 이것을 어떻게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민주화운동의 이정표를 말해보라. 방송국 불태우고, 공공건물-경찰건물 불태우고 파괴한 것이 민주화운동인가? 무기고 털어 광주 사망자의 75%를 쏴 죽인 것이 민주화이고, 교도소를 5회씩이나 공격한 것이 민주화운동인가?
(3) 조폭이 설치고 국민 등골 빼먹는 것이 민주화운동인가?
민주화운동이라면 [품위]가 전제돼야한다. 5.18단체 구성원들은 역대로 폭력쓰고, 협박질하고, 사기치는 조폭들이었다. 교수가 5.18에 대해 비우호적이거나 객관적으로 강의하면 5.18조폭이 단체로 달려가 이사장과 총장을 협박하여 직장을 박탈하고 민사형사 소송을 제기한다. 모든 소송은 광주법원이 주관한다. 이것이 민주화운동인가?
661명의 광수가 발견되자, 5.18기념재단이 겨우 15명을 내세워 ‘네가 광수라고 우겨라’ 이렇게 소송에 내보냈다. 빨갱이 판사들은 네모난 얼굴을 놓고 삼각형 얼굴이라 판결하여 4억씩 뜯어먹고, 필자를 감옥에까지 보냈다. 이런 것이 민주화운동인가?
(4) 5.18을 북한이 주도한 사실, 광주시장 윤장현과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가 법정에서 밝혔는데도 민주화운동인가?
2017년 봄, 광주시장 윤장현과 김양래가 언론에 선포했다. “광주시민은 절대로 교도소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필자는 이 말에 평가를 했다. “대법원 판결문에는 광주 무장시위대가 교도소를 5회 공격했다고 명시돼 있는데, 그것이 광주시민이 아니라면 북한군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광주시장이, ‘교도소 공격은 북한소행’이라는 것을 밝힌 셈이다.” 이 평론에 윤장현 시장이 소송을 걸었다가 스스로 취하했다. 그렇다면 필자의 평론이 맞다고 인정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김양래는 도청 안팎에서 촬영된 12매의 현장사진을 보고, “이 어깨들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전두환이 투입시킨 게릴라부대입니다.” 이렇게 답했다. 이 역시 5.18의 주역이 북한 게릴라부대라는 것을 고백한 말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북의 개입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5.18 상황이 해석되지 않는다고 했고, 2020년 일본 산케이신문 주필 역시 같은 요지의 글을 게재했다.
(5) 민주화운동이라는 호칭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5.18은 당시로부터 1990년까지 10년동안 [폭동]또는 [김대중의 내란폭동]으로 공식 호칭돼 왔다. 1981년 1월, 당시 대법원은 5.18을 김대중이 배후조종한 내란폭동이라고 판결했다. 이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개명한 사람들이 노태우와 김영삼이었다. 노태우는 1988년 2월부터 대통령이 됐지만, 여소야대라는 걸림돌에 걸려 행정을 펼 수 없었다. 그래서 김영삼과 김종필을 끌어들여 3당합당을 했다. 소영웅심, 공명심에 눈이 먼 김영삼은 자신이 ‘민주화’의 대부로 불리고 싶었다. 그래서 노태우에게 3당합당의 한 조건으로 [5.18폭동]을 [5.18민주화운동]으로 호칭변경하라고 내걸었다. 이에 노태우는 이것이 전두환을 추락시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쾌히 수락했다.
노태우는 위관장교때부터 대통령이 될 때까지 늘 전두환의 그늘 아래서 보호를 받았다. 그는 육사 졸업 이후 줄곧 열등의식을 쌓았다. 열등의식이 체질화 돼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자 그 열등의식은 이상한 방향으로 분출됐다. 전두환이 시궁창에 빠져야 자기의 명예가 올라갈수 있다는 병적인 심리가 형성됐다. 심지어는 전두환이 준비시킨 88올림픽 경기장에 전두환을 나오지 못하게 했고, 스위스로 망명하라며 [레만호 공작(레만호는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호수)]을 추진하다가 반발에 부딪혔고, 전두환에 대한 공격거리를 만들어 김영삼에게 패스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백담사에 오래오래 가두려했다.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부르기로 한 것도 이런 열등의식 해소의 한 방편이었다. 국민들 중에서 이 기막힌 사정을 아는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
민주화의 아버지는 전두환. 전두환 업적을 네다바이한 전라도
[5.18]과 [자유]는 상극이다. 5.18의 행패는 공포 자체다. 미국 헌법에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있다.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는 기본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는 5.18세력이다. 반면 [전두환]과 [자유]는 매우 잘 어울린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자유]를 가히 혁명적으로 확장시킨 대통령이 바로 전두환이다. 야간통행금지 철회, 교복자율화, 연좌제 폐지, 달러송금 자유, 해외유학, 해외이주, 해외여행의 자유, 수입 자유 등은 당시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자유다. 모두가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었다. 건국부터 지금까지 자유공간이 가장 넓었던 시절이 전두환 시절이었다. 지금의 자유는 5.18과 위안부, 친일 문제로 가장 협소하게 축소돼있다. 이것이 민주화인가? 공산, 공포, 나치가 연상되는 암흑시대가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족쇄는 궁핍과 교육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으로 생산기반 시설을 확충했고, 전두환은 미국보다 7년이나 더 빠르게 통신, 전자,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여 세계10대 경제대국을 건설했다. 두 대통령은 교육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국민이 낯설어 하겠지만 이 나라 민주주의의 아버지는 5.18이 아니라 전두환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널리 알려야한다. 5.18 빨갱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다. 이들이 전두환에게 괴담을 만들어 뒤집어 씌운 이유는 5.18을 김일성처럼 신격화시키기 위해서다. 마치 노태우가 전두환 죽이기라는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빨갱이 5.18세력이 정신병에 걸려 전두환을 찍어내리는 것이다. 얼마 전 이순자 여사가 한 유튜브 방송에서 “진짜 민주화의 아버지는 전두환 대통령이다”라고 발언한 것은 진실을 반영한 것이다. 전두환이 이룩한 민주화를 사기친 인간들이 전라도 인민족들인 것이다.
한국에는 왜 가짜만 생산되고 진짜는 없는가?
5.18에 대한 영화들이 10여개나 된다. 모두 주사파 시각으로 상상해서 만든 픽션들이다. 사람들은 픽션을 관람하고 넌픽션 다큐멘터리인 것으로 인식한다. 이것이 한국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오염시켰다. 10.26영화는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됐다. 이번에는 12.12가 ‘서울의 봄’이라는 제목의 영화에 실렸다. 몇 개의 컷만 보아도 전두환을 악마로 묘사하고 희화한 영화로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수사기록 및 재판기록 18만쪽을 분석정리한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 필자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18만쪽을 다 분석 정리할 시간이 없고, 동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제까지 출현한 모든 영화는 수사기록과 정 반대다. 영화를 제대로 제작하려면 18만쪽을 다 조사하거나, 필자가 쓴 책들을 읽어야한다. 그런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책마저 읽기를 거부하고, 자기 생각으로 흥미 위주의 상업성만 고려해 작품을 만든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은 김사복과 힌츠페터다. 영화는 힌츠페터가 1980년 5월20일, 광주에 간 것이 사진을 찍으러 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힌츠페터가 독일 NDR사를 통해 세계에 방영한 사진들은 5월18일에 촬영된 사진들이다. 힌츠페터는 5월20일, 사진을 찍으러 광주로 간 것이 아니라, 5월18일에 이미 찍어놓은 사진들을 가지러 간 것이다. 영화 속 힌츠페터는 의협심 있는 독일기자였고, 우연히 택시운전사 김사복을 만나 “오케오케”하면서 광주로 간 것으로 묘사됐지만, 김사복과 힌츠페터는 김대중 일파와 오래전부터 함께 회동했다. 1975년 10월3일은 장준하 추락사 49제 되는 날이었다. 장준하가 추락해 죽은 포천 약사봉 산 중턱 점심식사 자리에는 김대중이 구성한 반국가단체 관련 인물인 함석헌, 계훈제가 김사복, 힌츠페터와 함께 있었다. 최소한 5.18 발발 5년 전부터 김사복과 힌츠페터가 반국가단체 요인들과 친분을 쌓았던 것이다. 1974년 8월15일, 장충단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쏜 저격범 문세광을 조선호텔에서 태워다 준 차량도 김사복 차량이었다. 영화에서는 금남로에 모인 광주시민을 무차별로 사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금남로에서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금남로 옥상을 미리 점령한 무장괴한들이 위에서 밑을 향해 발사한 카빈총과 수류탄, 유탄발사기들에 의해 희생되었다.
2007년에 제작된 ‘화려한 휴가’ 역시 황당한 괴담으로 제작된 영화다. 계엄군과 전두환을 살인마로 모략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모두가 빨갱이들이 제작한 영화들이다. 왜 빨갱이라고 단정하는가? 그 어느나라 국민이 자기나라를 지켜주고 자기들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국군을 살인마집단으로 매도하겠는가? 그러니까 이 영화를 만든 인간들 모두가 빨치산계 진 빨갱이들이라는 것이다.
10.26의 진상은 수사기록에만 있다. 수사기록은 그동안 언론들이 자의적으로 쓴 기사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10.26역사, 12.12역사, 5.17역사 중 가장 쓰기 어렵고 분석하기 어려웠던 역사가 10.26역사다. 널부러져 있는 수사기록을 가지고 퍼즐을 맞추고 상황을 해석한다는 것은 종합실력을 요한다. 군의 생리, 군 시스템을 알지 못하면 섣불리 쓸수 없는 대목이다. 오죽하면 필자가 2008년말 당시 수사실무총책이었던 이학봉 전의원을 만났을 때 그가 던진 첫마디가 10.26에 대한 말이었을까.
“육사에 천재 있다는 말 들어본적이 없는데 자네가 천재인 것 같다. 당시 나에겐 그야말로 최고수라 할 수 있는 베테랑 수사관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퍼즐을 맞추느라 꼬박 3일밤을 새웠다. 그런데 자네는 29년전의 수사기록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했느냐. 다시 보인다.”
10.26 밤의 역사는 그야말로 스릴과 박진감 넘치게 정리돼있다.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압축본] 상권에 정리돼있다. 복잡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는데도, 수십페이지만 읽으면 진실을 알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조차 읽지 않고, 빨갱이들에게 두뇌를 점령당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대통령 머리를 점령한 러시아 간첩들과 빨갱이 관리들
1950년을 전후하여 미국대통령 트루먼을 에워싸고 있던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국무장관 애치슨, 국방장관 마셜이었다. 이들은 이상하게도 러시아가 원하는것들을 다 들어주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 광활한 중국땅을 장개석에서 빼앗아 모택동에게 내 주었고, 남은 대만과 남한까지도 러시아에 내주기 위해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그어 두 나라를 미국의 방위선 밖으로 내 몰았다. 두 나라를 가져가라는 뜻이었다.
이를 수상하게 지켜보던 사람이 바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미국 최연소의 상원의원이 된 조지프 매카시였다. 그는 애치슨과 마셜을 강도높게 비난하면서 두 사람이 러시아의 간첩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입김에 놀아나고 있다고 공격했다. 그는 러시아 스파이와 그들을 이롭게하는 정책입안자들을 공산주의자라 칭하면서, 205명의 명단을 비밀청문회에서 밝혔다. 트루먼이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205명은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어서 4개월만에 6.25가 터졌다. 여론의 코너에 몰린 트루먼이 이튿날 미군파병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대만과 한국은 정말로 매카시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하지만 매카시에 펀치를 맞았던 205명과 그들의 프락치들이 연합하여 매카시를 근거없는 마녀사냥꾼이라며 괴담을 퍼뜨렸고, 속내를 모르는 미국인들은 매카시를 외면했다. 1950년 2월, 대한민국을 살린 매카시는 그 후 8년동안 비참한 고독에 시달리다가 50세의 나이로 1957년에 사망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비밀문서가 해제됐다. 매카시의 말이 모두 맞았다. 2000년~2004년 여러 사람들이 매카시를 재평가하는 책들을 펴냈다. 매카시는 미국의 가장 훌륭한 애국자이고 영웅이었다는 평가들이 속출했다. 우리는 우리를 구해준 매카시에 늦게나마 명복을 빌어야 마땅할 것이다. 1800년, 스웨덴 귀족이자 뉴턴급 과학자이자 상원의원이었던 스베덴 보리가 27년동안 천계를 관찰한 후 쓴 책들에 의하면, 매카시는 이미 천국에 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공격한 지상의 악마들은 아마도 지옥에 가 있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하늘에 존재하지만 그리로 가는 길은 지상에 있다.
트루먼은 중국공산화, 윤석열은 한국공산화?
중공처럼 영토만이 공산당 침략의 대상이 아니다. 국민의 사상이 공산침략의 대상인 것이다. 트루먼은 중국이라는 광활한 토지를 공산진영에 내주었다.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우익진영의 사상공간을 좌익진영의 사상공간으로 넘겨주는 것이다. 중국의 공산화는 땅을 넘겨줌으로써 완성되었지만, 대한민국의 공산화는 우익의 사상공간을 4.3과 5.18의 왜곡된 역사로 채워감으로써 달성될 것이다. 우익진영 최상의 가치는 4.3과 5.18에 대한 진실한 역사를 널리 계몽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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