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207)] 영화 ‘서울의 봄’ 상영정지 가처분 신청서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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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12-13 23:54 조회17,1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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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207)] 영화 ‘서울의 봄’ 상영정지 가처분 신청서 논리
* 애국자는 나서서 가처분신청을 속히 해주십시오. 변호사 필요합니다.
신청인
피신청인
위 신청인은 영화 ‘서울의 봄’에 대한 상영정지 가처분 조치를 다음과 같이 신청합니다.
신청취지
1. 피신청인은 영화 ‘서울의 봄’을 상영하여서는 아니된다.
2. 소송비용은 피신청인이 부담한다 라는 결정을 구합니다.
신청이유
1. 12.12는 현대사의 핵심역사에 속하고, 역사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지인들이 살아있는 당대사(Contemporary History)입니다. 10.26과 12.12, 5.17, 5.18은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진 set역사입니다. 따라서 위 네 개의 사건 중 한 사건을 잘라 영화화하려면 진실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더욱 더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엄중한 당위성을 도외시하면 현대사의 핵심이 왜곡되고, 당사자의 가족들은 사회에서 부당한 수모를 받으면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인륜으로서는 범해서는 안될 죄악일 것입니다.
2. 그런데 영화 ‘서울의 봄’(이하 영화라 칭함)은 진실을 반영하려는 선행적 노력 자체가 없이, 오로지 전두환을 ‘권력에 눈이 먼 악한’으로 묘사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오로지 ‘전두환 내란사건’ 수사/재판 기록에만 담겨있는데 영화는 수사/재판기록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고, 재판기록과는 180도 반대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3. 사법부는 2004년에, 역사연구를 위해 ‘전두환 내란사건’ 수사/재판기록을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후 누구든지 수사/재판기록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피신청인은 이 진실자료를 도외하고, 자의적 주관으로 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사회에 무한한 영향을 끼치는 영화를 만들면서 공익적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4. 대한민국에서 이 수사/재판기록을 가지고 연구하여, 그 연구내용을 책으로 펴낸 인물은 오로지 육사22기로 미국에서 응용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지만원박사 한 사람 뿐이며, 그는 2009년에 10.26으로부터 5.18까지의 연구결과를 증1의[수사기록으로 본 다큐멘터리 역사책 압축본, 12.12와 5.18]에 담았습니다. 10.26과 12.12는 상권에 담겨있습니다.
5. 피신청인은 수사기록을 직접 구해 살피거나, 아니면 최소한 위 다큐멘터리 책이라도 살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단정하는가 하면 영화 내 위 저작물 내용과 정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정 반대인지 아래에 정리하고자 합니다.
영화내용과 다큐멘터리 저서와의 차이점
1. 영화내용의 요지
1) 전두환은 미치광이, 정승화는 희생양, 장태완은 훌륭한 군인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2) 12.12는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10.26과 연결돼야만 설명이 될 수 있는 10.26의 부속사건입니다. 정승화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장소에서 불과 50m 떨어진 조그만 별채에서 콩볶듯 하는 권총과 M16 연발 총소리들을 들었고, 피튀긴 와이셔츠를 입고 권총을 허리에 찌르고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 모습을 보았고, 차량을 함께 타고 궁정동에서 국방부 지하 B-2 벙커까지 함께 오면서 김재규가 범인인줄 알았습니다. 이후 12.12까지 50일동안 범한 그의 범행에 대해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소장이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자격으로 임의동행시키는 과정에서 정승화가 응하지 않고 반항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 12.12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수사하는 것은 전두환 수사본부장의 의무였지, 쿠데타가 아니었습니다. 쿠데타를 하려면 12.12날에 곧바로 최규하 대통령을 몰아내고 대통령이 돼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1979년 12월12일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8월16일 자진하야 할 때까지 9개월에 걸쳐 전두환은 충실하게 계엄사령관, 국방장관, 최규하 대통령을 깍듯이 모셨습니다.
3) 영화를 관람한 젊은 세대는 이구동성으로 “전두환 죽일놈”이라고 반응한다 합니다. 부모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해주면, 근거가 뭐냐며 대든다 합니다.
2. ‘다큐멘터리 압축본’의 요지
1) 10.26 밤 7:40, 김재규는 권총으로 차지철과 박정희를 향해 총을 여러 발 쏘았습니다. 권총소리를 신호로 중정요원들이 대통령 경호원들을 향해 M16소총으로 연발 발사하여 몰살시켰습니다.
2) 정승화는 별채에서 콩볶듯 하는 총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3) 일을 끝낸 김재규가 대통령 시신처리를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에 맡기고 맨발로 정승화에게 뛰어갔습니다. 김재규 옷에서는 화약냄새가 진동했고, 피가 흥건히 묻은 와이셔츠 자락은 허리춤에서 빠져나와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권총이 꽂혀있었습니다. 숨 가쁜 소리로 “정총장, 정총장”을 부르고 부엌에 놓인 주전자를 입에 물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4) 두 사람은 정승화 관용차를 타고 국방부 지하벙커(B-2벙커)로 달렸습니다. 수행부관인 박흥주 대령이 구두와 새 옷을 내 주었고, 김재규는 차속에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김재규는 차내에서 정승화에게, 계엄발효조치를 취하라고 말했고, 이에 정승화는 상황실로 직진해 두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① 9공수여단과 20사단에 출동대기명령을 내렸습니다. ② 경호실장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2개부대 지휘자를 지휘했습니다. 경호실 차장인 이재전 중장에 전화를 걸어 경호부대를 시해현장에 가지 못하도록 동결하라 명하고, 수경사령관 전성각 소장에게는 수경사 병력으로 청와대를 포위하라 명했습니다. 천하의 차지철 시대에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월권행위였습니다. 차지철과 대통령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절대적 확신이 없고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월권이었습니다.
5) 밤 11:30분에 국방부 회의실에서 최규하 총리가 주재하는 비상국무회의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전두환을 계엄사 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6) 최규하는 8:40분,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이미 김재규가 대통령과 차지철을 살해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국무회의에서 이를 숨겼습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회의결과를 직접 국방장관실로 찾아가 김재규에게 보고까지 했습니다.
7) 밤 11:40분, 김계원이 김재규를 배신했습니다. 김재규가 준비도 없이 일을 저질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관 보좌관실에는 노재현과 정승화 그리고 김계원이 앉아있고, 장관실에는 김재규가 혼자 있었습니다. 11:40분, 김계원이 두 사람에게 김재규가 각하와 차지철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8) 노재현 장관이 정승화 총장에게 즉시 김재규를 체포하라 명했습니다.
9) 하지만 정승화는 명령을 어겼습니다. 전두환과 헌병감 김진기를 불렀습니다. 김진기는 김계원의 신병을 전두환에게 인계하고, 전두환은 부장을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명했습니다.
10) 정승화의 행동을 수상하게 지켜본 전두환은 곧장 김재규를 체포하라 했습니다. 서빙고에 도착한 김재규는 스스로 입을 열고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①자기가 각하를 살해했다는 사실과 ②정승화가 시해현장에 있었고, 정승화 차로 국방부로 이동했고, 정승화가 자기 명령을 수행중에 있다는 사실을 줄줄 실토하였습니다.
11) 이후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12.12까지 50일 동안 ①자기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지 못하게 고압적인 매너로 방해하고, ②김재규를 옹호하고, ③지휘관들을 포섭하고 ④정치현장에 개입하는 등 정권을 창조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12) 수사실무 총책인 이학봉 대령은 여러차례 정승화를 체포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내사를 좀 더 보강하라는 신중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2월6일, 결심을 하였습니다. “체포일을 12.12로 정한다.”
13) 12.12계획은 투트랙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전두환과 이학봉은 연행에 대한 대통령 재가를 오후 7:00시에 득하고, 오후 7:30분에는 헌병 우 대령을 중심으로 한 연행수사팀이 정승화 공관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전두환 수사본부장이 국방장관을 먼저 거치지 않은 것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직보’시스템이 이미 관행화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또다른 하나는 국방장관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는 전두환이 먼저 체포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상과는 달리 최규하는 “재가는 하겠는데 절차상 국방장관의 결재를 먼저 득한 후에 하겠으니 국방장관을 빨리 호출하라”고 했습니다. 국방장관을 총리 공관으로 불러 최규하가 보는 앞에서 결재를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방장관이 의외의 추태를 부리며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두절 상태로 숨어다니고 있었습니다.
14) 한편 한남동 총장공관에는 예정된 그대로 7:30분에 수사관들이 들어갔습니다. 우 대령과 총장 정승화가 소파에 앉아 덕담을 나누다가 수사사무실로 가자고 정중히 요청했습니다. 정승화는 그 자신이 보안사령관직을 거쳤기 때문에 사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겠지만 그는 무모한 반항을 하였습니다. 수행경호대장과 전속부관을 소리높여 부르고 부저를 누르며 이놈 저놈 욕을 하면서 성질을 부렸습니다. 이에 경호대장과 전속부관이 권총을 빼 드는 순간, 수사관들이 먼저 그들을 쏘았습니다. 두 장교가 졸지에 중상을 입고 평생 불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수사관이 M16 개머리판으로 응접실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이새끼 못일어서”하고 협박하자 비로소 수사에 임했습니다. 보안사에 연행되고 나서야 순순히 죄를 털어놨습니다.
15) 이 과정에서 정승화 부인이 윤성민 참모차장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윤성민은 즉시 정승화가 새로 임명한 수경사령관 장태완에게 총장님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장태완은 술이 만취돼 있었습니다. 윤성민 차장은 작전참모와 헌병감 김진기 등을 데리고 지휘부를 수경사 사령관실로 옮겼습니다. 이때부터 장태완의 취중난동이 이어졌습니다.
16) 자기 부하 지휘관인 수경사 30경비단 단장 장세동 대령과 33경비단장인 김진영 대령을 보는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수경사 전 장병에게 내렸습니다. 경복궁 울타리 내에 위치한 30경비단 부대와 맞은편에 위치한 보안사에 포병사격을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포병사격을 한 후 두 부대를 점령하겠다면서 공격개시선(LD:Line of Departure)을 아스토리아 호텔 앞으로 정했습니다. 탱크도 배치하라 했습니다. 탱크 대대를 지휘하던 차기문 중령은 탱크부대 일부를 수경사에 배속시킨 상태였습니다. 부하들끼리 서로 마주보며 탱크전투를 벌여야 하는 고약한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국방부 청사 옥상에 배치된 수경사 소속의 벌컨포가 국방부를 호위하기 위해 진입하는 1공수여단 병사들을 향해 불을 뿜었습니다. 같은 특전사령부 예하부대인 1공수와 9공수가 서로 총질을 해야하는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30경비단에 모여있던 장군들이 연달아 장태완과 특전사령관 전봉주 장군에 전화를 걸어 자제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들 5명의 장군들은 내전 직전으로 사태가 악화되고 있으니 속히 재가해달라 최규하에게 가서 정중히 읍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최규하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였는지 못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 국방장관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17) 다행히 장태완의 부하들이 장태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수경사 소속의 헌병대장 신윤희 중령이 수경사 사령관 사무실에 들이닥쳐 장태완을 체포했습니다. 이로써 장군들이 조용해졌고, 12.12 난동은 종결되었습니다.
18) 이 엄청난 사태가 진전되고 있는 동안 군을 책임진 국방장관 노재현은 숨어서 도망만 다녔습니다. 국방장관 공관과 육군총장 공관은 한남동 공관 컴플렉스에 이웃해 있었습니다. 총장 공관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은 노재현은 담을 넘어 단국대 교정을 통해 여의도 부하 집에 가서 숨었습니다. 이후 연합사로 가서 숨어있다가 국방부로 잠입했습니다. 국방부에서 옥상 방공포 병력과 1공수여단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자, 부관과 함께 국방부 청사 1층계단 밑에 들어가 숨어있다가 새벽4시에 수색대 병사에 의해 발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총리공관으로 안내되어 최규하 앞에 섰습니다. 최규하로부터 꾸중을 들은 후, 그는 재가 서류에 서명을 하였고, 이어서 최규하가 서명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최규하는 이희성을 계엄사령관 겸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9) 여기까지가 12.12사건의 대강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오로지 수사기록과 대조함으로써 밝혀질 것입니다. 요약한다면 정승화의 추태, 장태완의 추태, 노재현의 추태 그리고 최규하의 무능으로 범벅이 된 사건이 12.12인 것입니다. 전두환이 아니었으면 김재규도 체포할 수 없었고, 정승화도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전두환은 순기능자였고, 정승화, 장태완, 노재현은 역기능자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역사를 거꾸로 왜곡하였습니다. 영화가 아무리 픽션이라 해도 관객은 논픽션으로 인식합니다. 전두환을 과연 이렇게 악인으로 매도해도 되는것인가?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전두환이 대통령 직위에 있을 때 어떤 공적을 남겼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증2는 [전두환 리더십]이며 여기에는 ‘전두환 대통령 업적’이 연구돼 있습니다. 그 내용을 아주 짧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 요약
1. 일본에 방위 무임승차비 40억달러 물려
1981.2.2. 전두환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에 호소했습니다. “한국 GNP는 600억달러인데 6%를 떼어내 국방비에 쓰며 자유진영의 전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일본은 GNP가 한국의 20배, 1조 1,900억달러인데 겨우 방위비를 0.09%만 쓰고 있습니다. 이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각하, 일본 돈을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미국 전투기와 미국 탱크를 사서 방위를 튼튼하게 하겠습니다. 지금 한국은 경제파탄으로 IMF 직전에 내몰려 있습니다.” 1983년 나카소네 수상이 40억 달러를 가지고 왔습니다. 전두환은 그 돈으로 시궁창이던 한강을 지금의 아름다운 한강으로 바꾸고, 누구도 가능하다고 상상할 수 없었던 국제올림픽을 치르고 한국형 원자로 개발, 1가구 1전화 보급, 반도체, 컴퓨터, 전산화, 전기통신, TV, 핸드폰 시대를 열어 오늘의 먹거리 산업을 육성해 주었습니다.
2. 한강개발사업
한강은 가뭄이면 악취를 뿜어내고, 홍수가 오면 논밭을 쓸어가는 골치의 강이었습니다. 전두환은 40억달러에서 10억달러를 뗴어내 지금의 54.6km에 이르는 아름다운 강을 건설했습니다. 210만평의 고수부지가 생겼고, 강변도로와 교량이 생겼고, 지하에는 덤프트럭 두 대가 다닐 수 있는 지하터널을 만들고 4개의 정화공장을 만들어 오폐수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있는 국민, 과연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3. 올림픽단지 건설
일본 돈을 가지고 수박밭에 불과했던 잠실지역에 광활한 올림픽단지를 조성하고 선수촌을 만들었습니다. 올림픽 역사에 전무후무하게 160개국이라는 많은 나라가 참여했고, 국가의 브랜드가치를 엘리베이터 식으로 수직상승 시켰습니다.
4. 1가구 1전화 시대 개척
한국은 불가능하다는 1가구 1전화시대를 열었습니다. 당시 백색전화 한 대 가격이 강남의 30평 아파트 가격을 상회했습니다. 전두환은 기술공무원과 업체 기술자들로 TF를 만들어 합숙시키면서 전자교환기를 개발시켰습니다. 일본보다 훨씬 앞서서 불가능으로 치부됐던 1가구 1전화시대를 열었습니다.
5. 한국형 원자로 개발
한국은 영원히 한국형 원자로를 개발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기술계의 여론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제2의 박태준을 키웠습니다. 미국 기술업체인 컨버스천 엔지니어링을 하청업체로 하는 기발한 방법을 창안해 70여명의 기술자를 3년간 파견시켜 불가능하다는 한국형 원자로를 개발해 냈습니다. 김필순 박사가 제2의 박태준이었습니다. 이 스토리는 눈물겨운 레전드입니다. 오늘날 자체 브랜드를 가진 원자로 보유국은 미국, 한국, 러시아, 중국 뿐입니다.
6. IT산업 육성
미국보다 7년 먼저 IT산업을 시작하여 오늘날의 한국을 IT산업국가로 올라서게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굴뚝산업, 중화학공업과 기계공업을 육성했고, 전두환은 IT시대를 열었습니다. 전두환은 미국 유학생들로 참모진과 장관진을 구성하여 한국 대통령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엘리트 경영을 하였습니다.
7. 자유화
이 나라 자유공간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확장시킨 유일한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입니다. 누구나 반대했지만 그는 야간통행금지 제도를 없앴습니다. 연좌제도 없앴습니다. 교복도 자유화, TV색상도 컬러화, 수입자유화, 해외송금, 해외여행, 해외이주를 자유화시켰습니다. 규제를 거의 다 없앴습니다. 훗날의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시행할 수 있도록 ‘금융실명제’를 마련하여 국회 비준까지 받아놓았습니다.
8. 교육과 문화 진흥
오늘의 교육시설과 광활한 문화시설은 모두 그의 작품입니다. “문명국가에서 문화의 국가로” 전두환의 슬로건이었습니다.
9. 3고(고유가, 고환율, 고금리)시대 진정시켜
박정희 대통령의 후기인 1980년, 도매물가 상승률이 54.2%였고, 고유가, 고환율, 고금리 시대였습니다. 기업들은 무분별하게 외국자금을 들여와 중복투자를 해서 공장가동률이 10~20%대였습니다. IMF직전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 되면서 대통령에 직보를 하는데 경제실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조시대 임금이 ‘경연’수업을 하듯 유능한 경제전문가를 초대해 아침학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실력이 있었기에 그는 54.6%의 물가를 4년만에 2.3%로 낮추었습니다. 세계 주요국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을 때 한국만 연 13%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이런 업적을 이룩한 고마운 대통령에게 오늘날의 국민은 어째서 이토록 패륜적이고 배은망덕한 것인지, 살펴야 할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1. 만일 이상의 연구결과가 사실로 확인된다면 영화는 상영정지가 돼야 할 것입니다.
2. 아무리 문화공간이 자유라 하여도 이 정도의 왜곡과 모략이라면 이는 역사와 역사적 인물에 대한 범죄행위일 것입니다.
3. 신청취지를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입증방법
증1. [수사기록으로 본 다큐멘터리 역사책 압축본, 12.12와 5.18] 상권
증2. [전두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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