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208)] 탈북광수 김성민(270광수) 신문결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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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12-17 23:39 조회17,04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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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208)] 탈북광수 김성민(270광수) 신문결과 분석
신문일시 : 2023.03.16.
증거자료
증48. 2012. 월간조선 9월호 ‘김부자 동상 까부수는 날 반드시 온다.’
증49. 2014.08.10. 경기일보 ‘탈북자 1호 시인 김성민’
증50. 2017.05.21. 주간조선 ‘암 투병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의 눈물’
증51. 2001.11.15. NK조선 리포트 ‘북녘 추억 / 나의 아버지 김순석’
증52. 2022.09.20. 레이디 경향 ‘문단 데뷔한 탈북 시인 김성민’
증53. 2002.09.09. RFA ‘기획 인터뷰 탈북자 동지회 김성민 사무국장’
12명 단체 고소 탈북자 재판 과정
1980.05.23. 남녀노소로 구성된 민간인 200명가량이 전남도청 앞에 질서정연하게 통제되어 촬영한 사진이 있습니다. 당시 광주 시민은 총알이 날아다닌다는 공포감으로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던 때였습니다. 건장한 30대 어깨 두 사람이 ‘사망자 명단’을 마주 들고 가는 시늉을 하고, 남녀노소 집단은 이 명단을 바라보게 한 사진입니다. 영상 전문가 노숙자담요는 이 군중에서 50여 명을 탈북자로 감정했습니다. 이들 50여 명은 남한에 와서 방송 등 언론을 하는 유명인들이었습니다.
이 50여 명 중 12명에게 하태경이 접근하였습니다. 지만원을 고소하자고 권고한 것입니다. 12명을 확보한 하태경은 변호사를 선정해 소송을 대리케 했습니다. 검찰은 이들 12명의 고소인들을 불러서 고소인 조사를 하지 않고, 전화로만 확인하고 공소장을 썼습니다.
맨 처음으로 이순실이 법정에 출두해야 하는데 두 차례씩이나 펑크를 냈습니다. 세 번째에 나와 150분 동안 질문을 받았습니다. 거짓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말할 때마다 사실이 달랐습니다. 잠시 멘붕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판사에게 말했습니다. “판사님, 저는 북한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을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거짓말을 하면 국정원이 가만있겠습니까?" 하면서 국정원을 방패로 삼던 이순실이 180도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동안 국정원이 거짓말을 모두 허용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동안 수많은 정규 TV 방송과, 모임과 간증 집회와 유튜브 방송 등에서 거짓말로 시청자와 청중을 울리면서 성금을 모아 갑부자가 되었는데, 그것이 다 거짓말로 번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재주로 돈을 벌면 아마도 상당 부분이 북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정원 내부의 숨은 간첩과 결탁이 돼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가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량 탈북자가 외화벌이 수단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다음 강철환이 출석하지 않고 버티다가 출석했습니다. 강철환의 녹취록도 정밀 분석하여 게시하겠습니다. 그는 요덕 스토리로 동일시되었고, 이를 영문으로 번역한 책 제목이 [평양의 어항]입니다. [평양의 어항]과 강철환은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평양의 어항은 지어낸, 그것도 엉성하기 짝이 없게 지어낸 거짓이었습니다. 그의 저서와 기록을 보면 그는 요덕 수용소에 간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탈북 과정에 대한 스토리는 홍길동전보다 훨씬 더 황당합니다.
한의사 3형제 중 막내인 박세현, 그는 곧장 증인으로 출석하여 소를 취하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유를 찾아왔는데 애국자를 고소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소를 취하하겠습니다. “그는 하태경으로부터 3차례나 전화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1980년에 4살이 아니었습니까? 4살짜리 특수군이 어디 있습니까? 선생이 고소해야 지만원이 확실하게 또라이가 됩니다.” 2023.03.16. 김성민이 한차례 바람을 맞힌 후 두 번째로 출두했습니다. 그는 ‘자유 북한 방송’ 대표입니다.
김성민의 탈북 프로필
김성민은 본인 말로는 1962년생이고, 미혼으로 탈북해 중국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고 하지만, 북한 유튜브 방송은 그가 1964년생이고, 북에서 결혼해 딸까지 있다며 이름을 공개했습니다. 법정에서 피고인이 북에서 발표한 누나들의 이름을 읽어주면서 맞느냐고 묻자 김성민은 맞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부인과 딸에 대해서는 부인했습니다.
김성민은 그의 부친이 북한에서 유명한 시인인 김순석(1922~1974)이라고 주장하면서, 부친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글재주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가 남한에 와서 쓴 시는 많지도 않고, 뛰어났다는 평가도 없습니다. 신문 과정에서 자세히 따져 묻자 그는 부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남한에 와서 남한 자료를 보고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가 정말로 김순석의 아들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심이 갑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모친에 대해서는 ‘부친과 함께 돌아가셨다.’라는 언급만 했습니다.
김순석이 부친이 아닐 것이라는 결정적 발언이 있습니다. 증22의 기사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남한에 할머니, 삼촌 두 분, 사촌 형제들이 계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친이 월북자가 되든지, 할머니와 두 명의 삼촌이 월남 했든지 두 가지 중 하나의 경우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가 월북자라면 북에서는 성분이 「복잡계층」으로 분류되어 출세가 불가능하고, 가족이 남한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더해 김순석에 대한 자료에는 이러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김성민은 부친이 사망하자 작가 동맹이 아파트를 압수해서 곧장 군에 입대했다는 시나리오를 잡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부친이 사망했다는 1974년에 그는 겨우 12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징병 나이는 17살입니다. 5년의 시차가 존재하니까 이를 메우기 위해 그는 부친 사망 시에 자기 나이가 14살이다, 15살이었다 하고 계속 늘려서 말을 했습니다. 이 부분 역시 김순석이 그의 부친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필자를 고소한 탈북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영웅으로 묘사합니다. 장인숙은 ‘1등이다’ 하면 자기 것이고, ‘큰 상이다’ 하면 그것도 모두 자기 것이었다고 자신을 영웅화했습니다. 강철환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자기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었다고 자신을 신격화하였습니다. 김성민은 자기에게 수갑을 2중으로 채우고 허리에 포승줄을 묶은 상태에서 호송자가 6~7명이었는데도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고, 기차의 지붕에 매달려 다시 탈북한 ‘불사신’이라 자신을 영웅화합니다.
김성민은 1995~6년에는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지키는 경비병도 없었고 철조망도 없어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1992년 8월에 탈북한 강철환은 경비부대장과 한동안 친분을 쌓고 술도 많이 먹여 모두를 곤드레만드레 시켜 놓고 새벽 2시에 강을 건넜다고 했습니다. 12명의 주장들을 합쳐 보면 대단한 그림들이 전시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관계
(증48) 나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유명한 시인 김순석(1922~1974)이다. 그는 1956~58, 34~36의 나이에 작가 동맹 중앙위원회 신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지만 1959년, 37세에 그의 시에 부르주아 풍이 배어 있다는 이유로 자강도 희천 공작기계 공장으로 추방되었다.
(증50) 아버지는 1961년 ‘혁명화 대상자’로 낙인찍혀 평양에서 자강도 산골로 추방되었다. 북한에서는 한번 ‘혁명화 대상자’가 되면 복귀하기 어렵다. 1963년, 부친은 나와 어머니와 함께 평양으로 돌아왔다.
(증51) 우리 가족은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작가 아파트에 살았고, 나는 평양 명문인 대동문 인민학교와 련광중학교를 다녔고, 시 분과위원장의 아들이라서 학급 반장과 소년단 간부를 연임할 수 있었다. 장군의 아들은 장군이 되고 비서의 아들은 비서가 되는 세상에서, 작가의 자식들 집단에서 나의 위치는 확고했다. 아버지의 권위가 일시에 무너진 것은, 1971년 12월 30일, ‘당 중앙의 선물’이 작가 아파트에서 우리 집만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학급 반장 자리도 빼앗기고 소년 궁전 물리 소조 자리도 빼앗겼다. 아버지 서재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밤마다 대동강 변에 나가 낚싯줄을 늘어놓곤 하다가 1971년 12월 24일, 쉰다섯 나이로 돌아가셨다.
(주. 1962년생인 김성민은 부친이 실각한 1971년에 9살로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친은 1974년에 북한식 나이 52세였습니다. 55세라는 말은 지어낸 말입니다. 부친이 사망한 나이도 그때그때 지어냈습니다.)
모친 : (증48, 증52) 모친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함께 1974년 이전에 사망했다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누나 : (증48) 누나 5명 중 첫째와 둘째는 철들기 전에 시집을 갔고 나머지 세 명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작가 동맹에서 살던 집을 내놓으라 했고, 얼마 후 군에 입대했다.
(증52) 내가 열다섯이 되던 해에 부친이 사망했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졸지에 혼자가 됐다. 위로 다섯 분의 누나가 있었지만 모두 시집을 간 터라 기거할 곳이 없어 곧 군에 입대했다.
(주. 부친이 사망한 1974년에 김성민은 12세, 그런데 15세였다고 합니다. 누나들에 대한 말도 다릅니다.)
본인 : (증48) 15세 때 부모를 잃었다. 2명의 누나는 출가했고 세 명의 누나와 살다가 부친이 돌아가시자 군에 입대했다.
(증49) 14~15세 때 부모를 잃었다. 혼자 고아로 살다가 군에 입대했다.
(증52) 15세 때 부친을 잃었다. 5명의 누나는 모두 출가했고, 집은 빼앗겨서 군에 입대했다.
(주. 1974년에 부친이 사망한 사실은 인터넷에 나와 있고, 본인도 인정합니다. 김성민이 1962년에 출생했다는 것은 본인 주장입니다. 그러면 부친은 그가 12살, 중1일 때 사망한 것입니다. 군대는 17세, 고3은 마치고 곧바로 갑니다. 그런데 14세다, 15세다, 이렇게 나이를 올리려고 합니다. 군대는 17세가 되어야 가기 때문에 12세에서 17세가 될 때까지 아파트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생활하며 중고교 6년 동안 학교에 다녔느냐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기가 심히 곤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법정 증언 녹취록
위 내용들은 언론 보도 내용들입니다. 이를 근거로 2023.03.16.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성민에 피고인이 질문을 하였고, 질문에 대해 김성민이 답변을 하였습니다.
(녹취록 25쪽)
문 : 자강도 희천에서 평양으로 복귀한 시기가 1963년이라 했는데 그 이후의 직책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 모릅니다. 단, 남한에 와서 아버지에 대해 쓴 박사 논문에서 아버지에 관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부친이 1963년 이후 무슨 직책을 가졌는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문 : 북한의 모든 건물 재산은 당이 관리하는데 어떻게 작가 동맹에서 집을 압수 하는가요?
답 : 압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주: 그말이 그말 아닌가요?)
문 : 레이디 경향 기사인데요. 증인은 작가 아파트에서 월급을 받아 가면서 시를 썼을 만큼 잘나가던 직업 작가였다고 소개했는데, 12살에 그렇게 유명했나요?
답 : 기자가 마음대로 쓴 것입니다.
문 : 증51에 의하면 증인이 아버지가 시 분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로 반장도 하고 소년단 간부도 했다고 되어 있는데, 아버지가 김정일 선물 대상에서 누락 되어 실각한 때가 1971년이고, 아버지가 시 분과위원장일 때가 1956~58년인데 어떻게 실각한 아버지의 후광을 입었다는 것인가요?
답 : 기자가 멋대로 쓴 것입니다.
(녹취록 27쪽)
문 : 증인이 반장을 하고 소년단 간부도 하는 등 혜택을 누린건 사실이지요?
답 : 예
문 : 그 혜택은 부친이 시 분과위원장이었기 때문이었다 했지요?
답 : 예
문 : 증인의 부친이 시 분과위원장을 한 시기가 증인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1956~58년이었는데 어떻게 부친이 1971년 실각한 이후 10여년 후에 증인이 부친의 후광을 입었다는 말인가요?
답 : 이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주 : 북한의 유명인이라면 잘나갈 때도 이름이 남고 못 나갈 때도 이름이 남습니다.)
(녹취록 27쪽)
문 : 증인은 레이디 경향에서 부친이 사망했을 때 증인 나이가 15세였고, 누나 5명 모두가 출가했기 때문에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했지요?
답 : 이 역시 기자가 마음대로 쓴 것입니다.
(녹취록 28쪽)
문 : 아파트 빼앗기고 오갈 데 없어서 곧바로 입대했다고 증인 말로 직접 하지 않았나요?
답 : 기사 하나 가지고 추궁하면 피곤합니다. 저 지금 많이 아픕니다.
문 : 레이디 경향에서는 부친 사망 시에 누나 5명 모두가 출가한 상태였다 했고, 월간 조선에서는 부친 사망 시에 누나 2명이 출가했고 3명만 있었다. 그래서 곧장 군대에 입대했다고 했는데요?
답 : 기자가 마음대로 쓴 것입니다. 막내 누나하고 몇 년 같이 살다가 군에 입대했습니다.
문 : 왜 진실이 말할 때마다 다른가요?
답 : 기자들이 마음대로 쓴 것입니다.
군대생활
증48(2012)
사병생활 10년 했다. 10년동안 글을 무지 많이 썼다. 첫 4년 동안은 28사단 경보병대대에 있었다. 훈련이 남한 특전사처럼 강도가 높았다. 강한 훈련을 이겨내기 위해 글을 써서 <노동신문>에 기고했다. 6년차 되던 해에 사단본부로부터 글을 본격적으로 쓰라는 명령을 받았고, 후에 군단 예술선전대에 들어가 작가활동을 했다. 그런데 몇 해 후 군단선전대가 해산됐다. 선전대가 연대에 들어갈 부식물을 다 먹는다는 이유였다. 그 후 인민군 총정치국 문예창작실로 옮겨 1년 근무하다가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에 들어갔다. 3년간 교육받고, 황해도 신계의 주체포(자주포) 군단에 갔다. 해산됐던 선전대가 다시 부활해 1991년부터 탈북했을 1995년까지 부대 메인작가로 활동했다. 원체 잘나가는 작가라서 1년에 1계급씩 진급했다.
(주: 이상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①특전사 훈련을 받으면 녹초가 되는데 그걸 이기기 위해 매일 글을 열심히 썼다는 것, ②사단 병사가 감히 <노동신문>에 기고를 많이 했다는 것, ③군단선전대가 해산되기도 하고 다시 구성되기도 한다는 것, 편제를 없앴다 살렸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④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은 2년인데, 3년이라고 한 것, ⑤인민군 총정치국 작가라면 군 최고사령부인데, 병사가 그렇게 발탁되어가서 위탁교육까지 받았다는 것, ⑥군최고사령부에서 위탁을 보냈으면 졸업 후 최고사령부, 그것도 군을 좌지우지하는 [총정치국]으로 돌아가야지, ‘생기기도 했다가 폐기되기도 하는 말단 군단선전대로 배치됐다는 것도 사리와 상식에 배치됩니다. ⑦북의 초급장교계급은 소위-중위-상위-대위 순입니다. 잘나가는 작가라서 1년에 1계급씩 진급해서 4년만에 대위가 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증50(2017): 사병생활 10년 6개월 했다.
증53(2002): 군대생활 16년 했다.
탈북동기
증48(2012)
<월간조선>과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에 대해 군 보위부가 조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탈북을 결심했다. 1995년 9월30일에 국경을 넘었다.
증50(2017)
1996년 탈북을 결심했다. 중국 보따리상을 통해 남쪽의 숙부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이 보위부에 적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장교로부터 전해듣고, 체포 직전에 탈출했다. 탈북을 결심한지 3일만이었다.
증52(2012)
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산에서 전단지를 주웠다. 여행증까지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체없이 짐을 꾸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한에 할머니, 삼촌 두분, 사촌형들이 계시다는 말을 해주어서 갑자기 삼촌이 보고싶어졌다. (주: 김순석을 검색하면 이런 자료 없습니다. 김순석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남한에 있다면 김순석은 혼자 북으로 월북한 사람이 되거나, 모친과 형제가 월남한 경우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다해도 북한에서 핵심계급에 해당할 수가 없습니다. 김순석이 김성민의 아버지라는 것을 믿기 어렵고, 김순석을 아버지로 도용했을 것이라는 의문이 강하게 듭니다.)
(녹취록 18쪽)
문: 어느날 훈련을 받고 오다가 전단지를 읽고 속았구나 하는 배신감으로 한국행을 결심했다 했지요?
답: 제가 좀 오버한겁니다.
탈북스토리
증53(2002)
1995년 북한을 탈북해 중국에 머물다 1999.3월에 남한에 입국했다.
증52(2003)
전단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여행증까지 소지하고 있어서 신의주로 갔다. 신의주에서 혜산으로 갔다. 강가의 폭이 좁고 깊이가 어른 키에 못미쳐 쉽게 건넜다. 연길로 가는 배를 타고 숨을 곳을 찾고 있을 때 중국경찰에 잡혔다. 연행도중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죽을 각오를 하고 뛰어내렸다. 두 손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했다.떨어지고 보니 시멘트 전봇대가 10cm앞에 있었다. 10cm만 더 굴렀으면 즉사할 수 있었다.
증48(2012)
1995.9.30. 국경을 넘었지만 이듬해 2월에 중국공안에 잡혔다. 정치망명을 주장하면서 김정일 정권을 대놓고 비판했다. 1개월 조사를 받고 북송됐다. 족쇄에 포승줄로 결박당한 채 온성에서 평양까지 가는동안 이틀째 되는 날 화장실에 간다하고, 포승줄을 풀고 족쇄를 조금 헐렁하게 채워줘서 화장실에서 뛰어내렸다. 새벽열차 지붕에 매달리고 하염없이 산길을 걸어 9일만에 옌지에 도착했다. 교회에서 숙식하며 연탄공장에 다니며 월급 300위안씩 받았다. 한국돈으로 3만원이었다. 1999년 2월, 삼촌의 도움으로 남한에 왔다.
증50(2017)
1996년에 탈북해 1999년에 한국왔다. 탈북을 결심한 때는 1996년이다. 중국 다렌에서 한국행 배를 타려다 중국공단에 적발됐다. 족쇄를 찬 채 42일동안 중국감옥에서 조사받고 북한군 보위부에 넘겨졌다. 호송당하면 총살이었다. 감시가 느슨한 사이에 양손에 족쇄를 찬 채열차의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렸다.
(녹취록 16쪽)
문: 국경 연선지대로 가려면 특별여행증이 있어야만 하는데 어떤가요?
답: 국경연선지대로 가려면 특별여행증이 있어야 하는건 맞는데 저는 ’군단에 한명밖에 없는 선전대 작가‘였습니다. 특별여행증 관리는 부대 보위부 말단직원이 다 합니다. 저에겐 특별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차 탈북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탈북할때는 달구지도 타고 화물차도 타고 열차지붕에도 타면서 갔습니다. 탈북할 의도만 있으면 누구라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못하는 사람이 바보입니다.
(녹취록 17쪽)
문: 강변에 철조망도 없고 경비병도 없었나요?
답: 1995년도엔 혜산쪽 강변에는 철조망도 경비병도 없었습니다. 이동경비병만 있어서 대화도 나눴습니다.
(녹취록 23쪽)
강가로 접근하는 것은 북한군 장교였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경비병이 총을 메고 혜산시내 둑을 왔다갔다 했을 뿐입니다.
(녹취록 8쪽)
문: 중국 어디서 체포됐나요?
답: 북한에 납치돼있는 김동식 목사와 연이 닿아서 브로커를 소개받았습니다. 브로커를 따라 대련항으로 가서 어느 집사님을 따라 움직였는데 어느 호텔에서 김동식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김동식 목사님이 조선족 청년을 따라가라 했습니다. 청년을 따라가 배를 타려는 순간 경찰에 잡혔습니다.
(녹취록 9쪽)
문: 대련에서 잡힌 후 몇일 기다렸나요?
답: 통역을 기다리느라 25일잡혀있었습니다. 통역이 왔기에 정치적 망명자라고 얘기했습니다. 이후 중국 도문으로 끌려가 탈북자구치소에서 8일동안 조사받고 온성감옥으로 갔습니다.
(녹취록10쪽~12쪽)
문: 온성에서 북한보위부 요원이랑 평양으로 출발했나요?
답: 온성으로 무력부 보위부 2명, 인민군 보위부 2명, 소속부대 보위부 2명이 달려왔습니다. 온성에서 신분을 속였습니다. ’원산악기 공장노동자‘다. 확인해보더니 거짓말인지라 매를 죽도록 맞았습니다. 다시 ’청진노동자‘였다고 둘러댔습니다. 또 알아보더니 거짓말 했다며 심하게 구타했습니다. 맞아죽겠다 싶어서 김진이라는 본명을 밝히고, 620훈련소 작가하던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널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하면서 대우가 달라졌습니다. 부대에서도 보위부 요원 2명이 오고, 인명구독부 보위부 지도원 2명이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동안 정이 들어 물어봤더니 평양에 가서 총살당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양에 거의 다 와서 신상천 역에서 뛰어내렸습니다. 화장실 간다니까 포승줄을 풀어줬고, 수갑을 느슨하게 채워주어서 발로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렸습니다. 제가 원체 빨리 움직여 도망쳐서 보위부 요원들이 손을 쓸 틈이 없었습니다.
(녹취록 21쪽)
문: 증50, 주간조선 기사입니다. 증인이 다렌에서 공안에 잡혀 족쇄를 찬 채 42일동안 감옥에 있다가 북한 보위부에 인계돼 양손에 족쇄를 찬 채 열차의 유리를 깨고 뛰어내려 8일만에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고 했는데요?
답: 제가 쓴게 아니라 모르겠습니다.
(녹취록 21~22쪽)
문: 연길에서 다렌까지는 2만키로가 넘는데 그렇게 먼 곳으로 왜 갔나요?
답: 연길 전도사가 김동식 목사를 소개했습니다. 400위안을 가지고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산의 목사님들이 백두산 관광을 왔기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했습니다. 400위안을 건네주셨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저를 안내한 전도사님과 함께 기차를 타고 다렌으로 갔습니다.
문: 여권도 없이 어떻게 한국행 여객선을 타려고 했나요?
답: 밀선 배에 몰래 타는거라 400위안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문: 여권이 있어야만 배를 타지요?
답: 탈북은 그렇게 신사적으로 안합니다. 죽기살기로 탑니다.
문: 돈은 여권사는 돈이 아니었나요?
답: 탈북을 여권갖고 하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녹취록 22쪽)
문: 한국행 여객선을 여권없이 탈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답: 여객선이 아니라 광석을 나르는 화물선이었습니다. 배 밑창에 타고 가는줄 알았습니다.
(녹취록 24쪽)
문: 다렌에서 한국행 배를 타려다 잡혔는데 어떻게 정치망명으로 연결될 수 있나요?
답: 제가 북한군 정치장교였기 때문에...
문: 아니 그래도 내륙에서 잡혔다면 정치망명을 주장할 수 있겠지만, 다렌에서 한국행 배를 타려다 잡혔는데, 배타고 한국으로 도망가려 한 사람이 붙잡히자 중국에 정치망명한다고 하면 말이 되나요?
답: 절박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말할 사람 거의 없다고 봅니다.
문: 그건 정상적으로 말한게 아니다?
답: 잡히면 죽는데 무슨 정상입니까?
문: 떳떳히 와서 ’나 정치망명 하겠다‘하면 말이 되는데 엄청 똑똑하다는 장교가 한국으로 도망가려다가 잡혀놓고, ’나 정치망명이다‘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게 납득이 안가는데 어떤가요?
답: 그래도 그렇게 했습니다.
’국경연선지대‘까지 가는 과정
’국경연선지대‘는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접경지역, 즉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을 의미합니다. 북한에서는 군과 군의 경계를 넘어가려면 반드시 보위부(국정원)가 발행하는 여행증을 받아야 합니다. 발급받기가 가장 힘든 지역은 첫 번째가 ’국경연선지대‘이고, 두 번째가 ’평양‘입니다. 여행증은 화폐 발권번호처럼 일련번호가 있어서 추적이 용이합니다.
그런데 김성민은 자기가 글을 쓰는 대위였기에 국경연선지대를 마음껏 다닐 수 있는 여행증을 늘 소지하고 다녔다는 말을 합니다. 거기에 비밀번호를 쓰는 란이 있는데 자기는 비밀번호를 아는 요령이 있어서 자기가 알아서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행증을 보위부 요원에 보여주고 통과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근무지에서 신의주로, 신의주에서 혜산으로 가려면 3개의 철로 노선을 갈아타면서 여러번 검문을 받았을텐데, 그 아슬아슬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일체 없습니다. 1차탈북을 할때에도 연선지대로 가야했고, 2차탈북 때에도 평양 부근에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다시 연선지대로 가야했는데, 여행증 검사를 받았다는 말이 일체 없는 것입니다.
증52(2003)
글쓰는 대위라서 여행증은 항상 소지하고 있었다.
(녹취록 6~8쪽)
문: 두만강까지는 어떻게 갔고, 어떻게 건넜는가요?
답: 황해북도 신계리에서 부대원들과 함께 평안남도 안주로 군사선동 나갔다가 곧바로 탈출하여 열차를 타고 혜산으로 갔습니다. 지형정찰을 하느라 3일동안 강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동경비원이 신분증을 보자해서 신분증과 출장증을 보여줬더니 제 이름을 금방 알아보고 반가워했습니다. 순찰을 마저 돌고 다시 오겠다며 지나갔습니다. 경비가 100m쯤 갔을 때 다시 돌아오면 잡히겠다고 생각해서 밝은 5시경이었지만 무작정 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평남 안주에서 여러번 기차를 갈아탔는데 무슨 노선인지도 모릅니다. 지리도 모르면서 무조건 ’김정숙군‘을 향해서 기차를 탔습니다. 10일정도 걸렸습니다. 출장증명서가 있어서 보위부 검문은 받지 않았습니다. 여기로 말하면 기무사 요원과 친해서 출장증명서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비밀번호를 기입했습니다. 저는 비밀번호를 아는 요령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 김성민은 여행증과 출장증을 마구 혼용하여 국경연선지대에까지 갔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여행증은 보위부가 발행하는 것이고, 출장증은 북한판 기무사가 발행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여행증은 보위부 말단직원이 발행해서 언제나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군사출장증은 북한판 기무사가 발행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평남 안주에서 열차를 여러번 갈아타고 수십개 역을 거치는 동안 검문을 한번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혜산시내 둑에 앉아있을 때 이동경비가 신분증 보여달라 했을 때 ’군사출장증‘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군사출장증에는 출장대상지역과 출장목적이 적혀있어야 하고, 여행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것도 혜산을 출장지역으로 기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황해도의 군단선전대에 근무하는 대위를 두만강에 있는 병사가 유명인이라고 알아봤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허풍입니다.)
총평
탈북자 12명 모두가 그렇지만 김성민에게도 턱없는 미스테리가 가득합니다.
1. 가장 미스테리한 부분은 그의 부친이 김순석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① 김성민은 그의 부친이 김순석이라고 했지만 이를 증명할 객관적 방법은 찾기 어렵습니다. 단지 그가 주장한 것 말고는 다른 객관적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김성민이 남한에서 그가 그의 주장대로 북한 전역에서 날리는 정도의 작가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은 없어보입니다. 단지 [시]몇편이 있지만 거기에서 천재성이 있다는 평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이미지를 ’잘나가는 작가‘로 상징화시키려 주력하였습니다. 그것을 입증 또는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작품으로 결정지으려 해야하는데 그는 북에서 날리던 김순석을 아버지로 선정하여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았다는 줄거리로 자신을 영웅으로 포장하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인생로드맵과 김순석의 로드맵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김순석의 사망일자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