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소설] 전두환 (6) - 12.12 (수정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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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1-19 00:03 조회29,2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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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소설] 전두환 (6) - 12.12
김재규 마음, 정승화 마음
10.26이란 무엇인가?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받고 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그 대통령을 시해하고 자신이 정권을 잡으려 했던 내란음모사건이다. 성공했으면 내란사건이었고, 성공하지 못해서 내란음모에 그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은 어째서 감히 대통령을 시해하려 했는가?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차지철 경호실장의 행패였다. 김재규 부장은 대통령 면전에서도 차지철 실장로부터 참기 어려운 수모를 당했다. 김계원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주위의 인물들이 같은 수모를 당했다. 차지철 실장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불만과 증오심이 대통령에게 전이됐다.
둘째는 박근혜의 추문이었다. “국가 망신이야.” 최태민과의 추문이 날이 갈수록 증폭되고 확산되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문제시됐다. 이를 김재규 부장이 보고할 때마다 대통령은 김재규 부장에게 역정을 냈다. 역정을 내신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로 인해 대통령의 총기가 수명을 다 했다는 이른바 ‘용도폐기론’까지 대두됐다. 셋째는 김영삼의 난동이다. 김영삼이 재야 불순세력과 연합하여 일으키는 소란 행위들을 김재규 부장이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여 그 무능을 대통령이 알고 곧 언사조치 될 것이라는 데 대한 불안감이 일었다. 그러면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계원은 왜 또 대통령을 미워했는가? 그 역시 차지철과 박근혜에 대한 대통령의 편애에 대해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왜 내란음모에 가담했는가? 군에서나 사회에서나 예나 지금이나 출세길은 누구로부터 신임을 받는가에 따라 열린다. 특히 군에서는 자기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 바친다는 것이 신조처럼 여겨졌다. 윗사람으로부터 두툼한 금일봉을 받는다는 것은 신임과 사랑을 받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런데 정승화는 거사 직전의 추석에 김재규로부터 지금의 화폐가치로 20억 정도에 해당하는 300만원의 금일봉을 받았다. 이 엄청난 규모의 선물을 받았을 당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거사 직후 정승화 총장은 또 생각했을 것이다. ‘내 나이 불과 53세, 참모총장으로 끝을 내고 사회로 복귀하느냐, 아니면 김재규가 주도하는 새 시대를 함께 열 것이냐?’ 숟갈을 놓을 것이냐, 더 들것이냐? 그는 더 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연행 세부계획
연행일은 왜 12월12일로 정했는가? 이날은 육군 장군 진급일이었다. 그 이전에 거사를 하면 진급 분위기를 망치기 때문에 군에 불만이 생긴다. 대령들 중에서 누구누구를 1성 장군으로 진급시키는가에 대한 심사는 이후의 장군심사, 1성에서 2성으로 2성에서 3성으로 진급하는 심사와는 규모와 의미가 다르다. 12일 낮에는 장군심사라는 큰 행사가 있기 때문에 심사행사에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밤으로 정한 것 같다. 실제로 이날의 장군심사 대상에는 정승화 총장의 처남인 육사 15기 신대진 대령도 들어있었다. 12월 6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학봉 수사1국장에게 ‘정승화를 김재규 관련 사건 관련범’으로 연행 수사할 수 있도록 재가문서를 작성하라고 명했다. 가장 빠른 시간이 장군심사가 끝나는 12일 오후 시간이었다.
정승화 총장에 대한 연행수사 권한은 누구에게 있었는가? 당시 군법회의법에 의하면 구속영장 발부권한은 군법회의 관할관인 정승화 총장에게 있었다. 당시 국방부에는 군법회의 자체가 없었고, 계엄군법회의도 설치돼있지 않아서 장관에게는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할 권한이 없었다. 따라서 정승화를 구속하려면 바로 정승화로부터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법적인 맹점 때문에 부득이 ‘긴급구속’이라는 법 절차에 따라, 사전영장 발부 없는 ‘강제연행’을 계획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지휘계통으로 보면 관례상 국방장관에라도 사전보고를 해야 했지만, 당시의 내사 결과에 의하면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정승화와 한 배를 타고 정국을 주도하고 있어서 그에 보고하면 즉시 정승화 총장에 알려질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병력이 없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병력을 가진 정승화 총장에 곧장 체포당할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내란사건은 극비에 극비를 요하기 때문에 늘 대통령에 직접 보고해왔다. 이른바 ‘직보 시스템’이었다.
12월 6일, 최규하가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2월8일 이학봉 수사1국장은 대통령 보고시간을 오후 6:30분, 정승화 총장 체포시간을 7시로 계획하여 보고했다. 과거 전례로 보면 이런 결재는 보고하자마자 재가가 났다. 보고시간과 집행시간을 30분으로 바짝 잡은 이유는 재가와 집행 사이의 시간이 길어지면 재가 사실이 누설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통신지휘로 인한 정보누설을 예방하기 위해 연행 팀을 무조건 7시에 집행하기로 계획했다.
12월 9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헌병대령을 불러 이학봉 수사1국장과 함께 실무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은 두 대령은 총장공관 주위를 답사하여 경비상황을 파악했다.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 10여명의 육군헌병이 상주하고 있었고, 50여명의 해병 헌병들이 공관의 외곽 초소들을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발견한 두 대령은 이학봉 수사1국장이 작성한 연행계획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허삼수 대령은 보안사 조정통제국장이었고 우경윤 헌병대령은 수사2국장이었다. 헌병인 우경윤 대령은 원체 신망이 좋은 인물이라 헌병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연행시에 헌병감실 성환옥 대령과 육본 헌병대대장인 이종민 중령을 대동하여 집행 시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경비 헌병들에게 연행의 배경을 설명해주고 미리 마찰을 예방해야겠다는 복안을 세웠다. 성환옥 대령은 전직 육본 헌병대대장이었고, 이종민 중령은 현직 대장이기에 공관에 나가있는 육군 헌병들은 이들의 얼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허삼수 대령은 정승화 총장이 경비병들을 동원하여 저항할 것에 대비하여 당시 합수부에 파견 나와 있는 33헌병대를 인근 한남동 로터리 근처에 대기시킬 것을 구상했다.
12월 12일 오후 3시, 이학봉 수사1국장은 서빙고 수사분실에 있는 수사계장 한길성 소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정 총장을 연행한다. 연행에 필요한 준비를 하라” 이에 한길성 소령은 총과 포승줄을 준비했다. 이어서 이학봉 수사1국장은 또 다른 수사계장 김대균 소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총장을 연행한다. 수사관들을 대기시켜라” 오후 5시, 허삼수 대령이 신동기 준위를 분실장 방으로 불러 의전용 차량인 일제 도요타 슈퍼살롱을 운전 연습하라고 지시했다. 신동기 준위는 1961년 경희대 체육학과를 수료하고 일반병으로 입대했다가 1963년 대간첩작전으로 공을 세워 하사로 특진되면서 1964년부터 보안사에 근무했다. 체격이 우람하고 근육이 울뚝불뚝 튀어나왔으며 허삼수 대령과는 형제처럼 가까웠다고 한다. 운전연습 하라는 명을 받은 신동기 준위는 ‘오늘 사령관에게 아주 중요한 비밀모임이 있는가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차량감각을 익혔다. 오후 6시, 허삼수 대령이 신동기 준위를 불러 한남동 공관촌의 약도를 건네주면서 명했다. “오늘 정 총장을 연행하러 간다. 네가 운전해라”
6시 40분, 수사분실장 방에 총 출동인원 9명이 모였다. 허삼수 대령, 우경윤 대령, 김대균 소령, 한길성 소령, 신동기 준위, 박원철 상사, 양일근 준위, 김덕수 준위, 이장석 준위였다. 허삼수 대령이 회의를 주재했다. “7시에 정 총장을 연행하러 간다. 모두들 신중하게 행동하라” 이어서 지도를 내놓고 임무를 부여했다. “한길성 소령, 김대균 소령, 박원철 상사는 총장 부관실에서 우발상황에 대비하라. 양인근, 이장석, 김덕수 준위는 성환옥 대령과 함께 경비병을 관리하라.” 반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2월 12일 오전 9시30분, 전속부관 황진하 소령에게 대통령 비서실과 협조하여 이날 오후 6:30분에 보고시간을 잡으라고 했다.
이날 정승화 총장은 오후 5시 40분에 퇴근했다.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육사28기)이 총장에게 물었다. “이후 시간계획 있으십니까?” “저녁 먹고 처가에 가보자” 그의 처가는 청담동 경기고 근처에 있었다. 이날 낮에 육사15기인 처남 신대진 대령이 장군으로 진급하였기 때문에 이 진급소식을 장모에게 알려주면서 경사의 기쁨을 나누려던 참이었다. 이에 따라 이재천 소령과 경호대장 김인선 대위(육사31기)가 사복 속에 권총을 차고 대기했다.
12월 12일 오후 6시 10분, 보안사령부 수석부관 황진하 소령이 이재천 소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 퇴근길에 총장님께 드릴 긴급보고서를 가지고 갈 것이니 받아서 총장님께 드려라. 차량번호는 00000다.” 권정달 대령의 이름을 이용한 것은 그가 총장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승화의 부관인 이재천 소령은 공관 정문헌병에 차량번호 00000가 보이면 즉시 통과시키라고 지시했다.
오후 7시 00분, 도요타 슈퍼살롱에 6명이 탔다. 운전병은 신동기 준위, 그 우측에는 김대균 소령과 박원철 상사가 탔고, 뒷좌석에는 좌로부터 한길성 소령, 허삼수 대령, 우경윤 대령이 탔다. 그리고 별도의 지프차에는 성환옥 대령과 나머지 3명의 수사관이 탔다.
오후 7시 05분, 여러 채의 공관들이 수용돼 있는 공관층 정문에 이르자 해병초소에서 차를 세워 검문했다. 우경윤 대령이 유리문을 내렸다. “나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다. 총장님 공관에 미리 연락이 돼 있다.” 해병 헌병이 총장공관에 연락을 하더니 통과시켰다.
오후 7시 10분, 슈퍼살롱이 총장공관 현관 앞에 도착했다. 경호대장 김인선 대위가 우경윤 대령을 알아보고 뛰어와 거수경례를 했다. 우 대령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는 “급히 총장님께 보고할 사항이 있어서 왔다”고 했다. 이에 부관 이재천 소령이 우 대령과 허 대령을 응접실로 안내해놓고, 부관실로 가서 인터폰으로 2층 거실에 있는 총장에게 보고를 했다. 이때 부관실에는 한길성 소령, 김대균 소령, 박원철 상사가 점령하고 있었다. 2층에서 인터폰을 받은 사람은 정승화의 둘째 아들 정태연이었다. “아버지, 보안사 사람들이 급한 보고를 드리러 왔대요.”
오후 7시 15분, 총장이 계단으로 내려오자 이재천 소령이 뛰어나가 총장을 응접실로 안내하고 다시 부관실로 들어갔다. 총장이 상석에 앉고 맞은편 소파에 우경윤 대령과 허삼수 대령이 앉았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우경윤 대령이 입을 열었다. “총장님, 이번에 진급시켜 주실 줄 알았는데 좀 서운했습니다.” 이에 총장이 약간의 웃음 띠고 대꾸했다. “다음에 하면 되지” 그리고 시간이 없다는 식으로 시계를 보면서 “그래, 보고할 사항이 뭐요?” 하면서 재촉했다.
우경윤 대령: “김재규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진술이 나왔습니다. 총장님의 진술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정승화 총장: “그게 무언지 모르지만 여기서 하자”
허삼수 대령: “여기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녹음준비가 되어있는 곳으로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승화 총장: “김재규가 뭐라고 했는데?”(짜증을 냈다)
허삼수 대령: “총장님과 돈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정승화 총장: “그런 일 없다고 했잖아”(고함을 질렀다)
허삼수 대령: “저희들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차상 필요하니 같이 가시는게 좋겠습니다.”
이에 정승화 총장이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아, 가긴 어딜 가? 내가 적어도 육군참모총장이야. 너희들 누구 지시 받고 왔어-? 대통령 전화 대, 장관 전화 대” “이미 대통령께 보고가 됐습니다.” 두 대령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조용히 가시지요” 허삼수 대령이 목소리를 깔아 단호하게 말했다. “부관, 경호대장, 이놈들 잡아” 정승화가 고함을 질렀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총장님, 조용히 가시지요” 두 대령이 좌우에서 총장의 겨드랑이를 끼고 일어섰다.
전속부관실에서는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과 경호대장 김인선 대위가 세 명의 수사관에게 앉으라고 권했지만 수사관들은 두 장교의 사복 주머니 속에 권총이 있는 것을 감지하고 소파를 그들에게 양보하며 앉으라고 권했다. 이때 총장의 고함소리에 근무병 7-8명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이 놀라운 장면에 압도되어 지켜보기만 했다. 우경윤 대령이 정 총장의 겨드랑이에서 팔을 빼고 근무병을 향해 섰다. “너희들은 무엇하는 놈들이야? 어? 당장 나가!” 주눅이 들어 슬금슬금 빠져 나갔다.
우경윤 대령이 잠시 밖의 사정이 궁금해서 밖을 한번 둘러본 후 문을 닫고 현관문을 들어서려는 순간, 총성이 울리면서 우경윤 대령이 쓰러졌다. 2층에 있던 정승화의 둘째 아들 정태연이 계단에서 권총을 발사했거나 다른 공관 경비원이 발사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공관 경비원은 집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후 우경윤 대령은 평생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그를 누가 쏘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삼지 말라고 했다. 1994년 7월25일, 국과수 총기분석 실장인 이정필은 서울지검에서 나와 “X-ray를 판독한 결과 우경윤 대령 몸 속에 있는 탄환은 38구경의 권총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38구경의 권총이라면 총장의 권총이다. 이후 정승화 아들 정태연이 총장의 권총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두 차례 더 관찰됐다.
총소리가 나자 정승화는 소파의 은밀한 곳에 설치돼 있는 버튼을 눌렀다. 부관인 이재천 소령이 뛰어나가 응접실 문을 열고 “예, 부관입니다” 복명했다. “총리나 국방장관에게 전화 대~” 6일전에 대통령이 된 최규하를 총리라고 한 것이다. 부관이 부속실로 뛰어와 전화기를 막 들려는 순간 정승화가 또 외쳤다. “경호대장, 경호대장!” 숨 넘어가는 소리였다.
총장이 위기에 처했다는 낌새를 챈 경호대장 김인선 대위가 권총에 손을 대면서 뛰어나가려는 순간, 박원철 상사가 왼손으로 김대위의 손을 잡아 누르면서 오른손으로 자기 가슴에 차고있던 리벌버 권총을 꺼내 개머리판으로 김대위의 좌측 머리를 힘껏 후려쳤다. 한편 수사관 세 명은 우경윤 대령이 쓰러진 것을 보자 흥분하여 부관과 경호대장을 마구 쏘았다. 이재천 소령은 복부에 한발을 맞았고, 김인선 대위는 다섯발이나 맞았다. 원래 한길성 소령이 이재천 소령에게 쏜 총알은 두발이었다. 한발은 복부에 맞고 다른 한발이 권총피에 맞은 것이다. 박원철 상사는 현관에 우경윤 대령이 쓰려져 있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하늘을 향해 권총 다섯발을 날렸다.
이 총소리에 공관 관리인 반인부 준위가 정문 초소쪽을 향해 달려갔다. “이 개새끼 봐라, 저새끼 잡아!” 박원철 상사가 소리쳤다. 이에 정문을 감시하던 김덕수 준위 등이 앞으로 나섰다. 반 준위는 다시 현관쪽으로 달려왔다. 위협을 느낀 박원철 상사는 그를 향해 권총을 쏘았지만 실탄이 없었다. 이 사이에 반 준위는 담을 넘어 해병대 내무반으로 도망을 갔다. 한길성 소령이 정문쪽에서 들어왔다. 공관 현관에 쓰러져있는 우경윤 대령을 보고 허삼수 대령이 어디계시냐고 물었다. 손가락으로 간신히 응접실을 가리키며 괴로워했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승화 총장이 “당신은 누구야?” 적대감을 담아 물었다. “수사관입니다. 빨리 가시지요” 총장 옆으로 바짝 다가서서 일어서라고 압박했다.
한편 권총 실탄이 떨어진 박원철 상사는 슈퍼살롱 옆에 있던 신동기 준위를 향해 외쳤다. “형, 트렁크 빨리 열어” M16소총을 꺼내어 옆구리총 자세를 하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마주 보이는 계단에는 정승화 아들이 권총을 겨누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새끼 뭐야?”하면서 M16소총을 겨누자 쏜살같이 2층으로 달아났다. 박원철 상사는 집안에 있다가는 총알이 다른 곳에서 또 날아올 것만 같은 공포감이 들어 밖으로 나와 대형 응접실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총장의 좌측에는 허삼수 대령이, 우측에는 한길성 소령이 서 있었다. 박원철 상사는 M16 개머리판으로 커다란 유리창을 가격했다. 대형 유리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를 밟고 들어가 정승화의 가슴에 M16총구를 대며 말했다. “빨리 못나가?” 정승화 총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허삼수 대령과 한길성 소령이 겨드랑이를 끼자 순순히 응하기 시작했다. 이때 정 총장 아들 정태연 군이 권총을 가지고 나왔다. “아버지, 아버지 총 여기 있어요” 총을 내밀었다. “태연아, 총 가지고 올라가라” 끌려나오는 모습을 총장의 부인 신유경씨가 계단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인의 나이 51세였다.
시동이 걸려있는 슈퍼살롱, 뒷좌석 한 중간에 정승화를 태웠다. 그 좌측에는 한길성 소령, 우측에는 허삼수 대령이 탔고, 앞 조수석에는 김대균 소령, 운전은 신동기 준위가 했다. 현관 출발시간이 7시 22분, 12분 동안에 우경윤 대령과 전속부관 이재천 소령 그리고 김인선 대위가 평생 불구가 되는 비극을 당한 것이다. 정승화는 1962년에 보안사의 전신인 방첩대의 수장을 지낸 바 있다. 수사관들이 여러명 왔으면 사안의 심각성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는 바람에 세 사람의 젊은 인생들이 피를 본 것이다.
총장을 태운 차량이 해병대 초소에 이르자 헌병이 M16소총을 겨누며 차를 세웠다. 이에 운전을 하던 신동기 준위가 유리를 내리고 의연한 자세로 말했다. “이놈들아, 총장님이 타고 계신데 어디라고 함부로 총을 겨눠~” 헌병이 차 안을 살폈다. “응 나다, 총장이다” 비상라이트를 켜고 클랙슨을 연속 울리며 달리자 겹겹이 설치됐던 바리게이트가 착착 열렸다. 서빙고 분실에 도착한 시각은 7:30분이었다.
정승화의 불필요한 저항으로 이날 피를 본 사람들은 더 있었다. 33헌병대와 해병 헌병대 사이에 총격전이 일어나 4명의 사상자가 더 발생한 것이다. 허삼수 대령의 지시를 받고 한남동 로타리 근처 슈퍼마켓 주차장에 마이크로버스 2대에 65명의 헌병대원을 태우고 대기하고 있던 최석림 33헌병대장은 성환옥 대령으로부터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받았다. 공관 밖에서 공관경비병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성환옥 대령은 총소리가 나자 사태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33헌병대장에 지원출동을 명한 것이다. 이에 최석림 헌병대장은 황길수 대위 등 6명에게 헌병 위병소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한성동 대위팀은 공관 안으로 진입하고, 차영복 대위팀은 해병대 내무반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총장이 연행되어 공관 단지를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연행팀에서 ‘연행완료’라는 무전을 받자 성환옥 대령은 철수를 지시했다. 철수를 시작하자 이들은 해병대 매복조에 걸려들었다. 성환옥 대령은 인명피해를 염려하여 해병대 요구에 순순히 따르라고 했다. 반면 위병소로 간 황길수 대위팀과 해병대 내무반으로 진격한 차영복 대위팀은 매우 난처한 상황을 맞게 됐다. 차영복 대위팀이 해병대 내무반에 도착했을 때 해병대 내무반에는 이미 비상이 걸려있었다. 담을 넘어 도망갔던 반인부 준위가 해병 헌병들에게 “총장님 공관에 불순분자가 침입해 총격이 벌어졌다. 나는 구사일생으로 담 넘어 도망왔다” 이렇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해병들은 이미 M16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이를 알 리가 없는 차영복 대위팀이 해병내무반을 제압하려 들어서자 내무반은 이미 텅 비어있었다. 해병헌병들은 이미 두 개의 팀으로 나누어 내무반 밖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한 개의 매복팀은 내무반에 들어가있는 차영복 대위팀을 향해 사격을 가했고, 또 다른 매복팀은 위병소에 접근해 있는 황길수 대위팀에 사격을 가했다. 이에 황길수 대위 등 2명이 사망했고, 또 다른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반면 해병대 내무반에 갔던 차 대위팀은 차 대위의 지시에 따라 스스로 무장을 해제했기 때문에 전원 무사했다.
참모차장 윤성민의 난동
공관에서 총을 맞고 신음하던 이재천 소령, 의식을 회복하자 상황실에 전화를 했다. “저 총장님 부관 이재천입니다. 보안사 권정달 대령과 범죄수사단장이 총장님을 납치해 갔습니다. 제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빨리 앰뷸런스를 보내주십시오.” 저녁 7시 40분이었다. 이는 총장이 연행된지 18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10분이 지나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이재천은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3성)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차장님, 저 이재천 부관입니다. 보안사 권정달 대령과 범죄수사단장이 총장님을 강제로 납치해갔습니다. 저는 총을 여러발 맞아 중태입니다. 앰뷸런스 조치가 급합니다.” 7시 50분이었다.
이처럼 윤성민 참모차장은 정 총장이 보안사로 연행된 사실을 상황장교로부터도 보고받았고, 이재천 부관으로부터도 받은 것이다.
하지만 훗날, 어쩐일인지 윤성민은 전두환 관련 제17차 공판정이 증인으로 출두하여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저는 총장을 불순분자들이 납치해 간 것으로 알았고, 그래서 비상령도 발동했고 병력도 동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 발생했던 병력동원 사태에 대한 책임을 벗으려는 거짓말이었다. 목포 출신 윤성민은 전두환 아래에서 국방장관을 5년씩이나 했고, 장관이 끝나고도 여러 국영단체에서 이사장직을 지내면서 전두환의 배려를 가장 많이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전두환이 핍박을 받자 전두환으로부터 얼굴을 돌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변호인과 검사 사이에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재판장이 편파적인 태도를 보이자 전두환 측 변호인들이 집단 사퇴를 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1979년 12월 12일 밤 7시 15분경, 윤성민 참모차장은 퇴근하여 육군본부 울타리 안에 지어진 참모차장 공관에 있었다. 7시 30분 경, 정승화 총장 부인 신유경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총격전이 벌어졌어요. 살려주세요” 총장이 연행된 시각은 7시 22분이었는데 8분이나 지났는데도 전화 할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이 정도의 정보만 제공한 것이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즉시 군복을 갈아입고 헌병상황실에 갔지만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차를 타고 B-2벙커로 달려갔다. 바로 여기에서 상황실장의 보고를 받았고, 이어서 이재천 소령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윤성민 차장은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고, 합수부에 의한 군사반란이다”라고 생각했다.
합수부의 사전구속 처분에 대한 의견은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대부분의 장군들은 ‘올것이 왔다’며 합수부의 당연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며 환영을 했고, 정승화와 김재규를 따르던 장군들은 하극상이라며 분개했다. 오후 8시, 윤성민 참모차장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본부사령 황관연 준장(육사12기)으로 하여금 직접 ‘헌병감실 5분대기 기동타격대’를 이끌고 공관으로 출동케 했다. 육군의장대를 공관으로 출동시키고, 수경사 헌병파견대장 신윤희 중령으로 하여금 직접 수경사 기동타격대를 이끌고 공관으로 출동케했다. 총장이 연행되고 없는 공관에 병력을 출동시킨 것은 상황파악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윤성민 참모차장은 1,2,3군 사령부와 육군본부 직할부대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앞으로는 내 육성 지시에 의해서만 행동하라” 군을 사적인 감정으로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성민을 참모차장으로 발탁한 사람이 바로 정승화 총장이었다. 당시 군의 풍조로는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을 위해 목숨 바친다’는 이른바 사무라이 정신을 미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서 ‘진돗개’라는 말은 대간첩작전에서의 경계령이다. 윤성민 참모차장이 내린 ‘진돗개 하나’는 북한의 무장간첩이나 김신조 부대와 같은 특수침투조의 침입에 대비하는 최상의 경계령이었다. 이는 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경찰들에도 적용이 된다. 합수부가 정승화 총장을 연행했다면, 이는 당시 사회 전반에 확산됐던 ‘정승화 시해 관련설’에 대한 법집행이라는 인식을 하는 것이 정상이었고 상식이었다. 그런데 윤성민 참모차장은 총장연행사건을 간첩침투 사건으로 분류한 것이다. 특히 상급 지휘관에 중요시되는 ‘보편타당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1급 비상령이 육군본부에서 발령되자 가장 놀란 사람은 육군보안대장 변규수 대령이었다. 그는 즉시 B-2벙커로 달려갔다. 참모들인 투스타들이 있었고, 헌병감, 문홍구 합참본부장(3성)도 있었다. 변규수 육군보안대장이 B-2벙커 상황실에서 알아본 상황은 “우경윤 대령 등 합수부 요원들이 총장을 납치했고,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재천 전속부관은 분명하게 “총장님이 합수부에 납치돼갔다”고 했고, 정승화 부인은 “총격전이 벌어졌다. 살려달라”고 했다. 말이 각기 다를 때 윤성민 차장은 누구로부터 상황파악을 해야 했는가? 정보의 진원지인 전속부관으로부터 파악했어야 한다. 다시 전화를 걸어 “야야 이 소령,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돼가고 있니?”이렇게 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차분하지 못하고 방방 뜨기부터 했다. 개인감정이 앞섰던 것이다.
바로 12.12. 이날, 정승화 총장 공관 맞은편 길 건너에는 국방장관 공관이 있었다. 국방장관 노재현은 자기 공관에 있다가 앞집 총장 공관에서 울려 퍼지는 총소리에 놀라 단국대 교정을 통해 여의도 부하 집으로 도망을 갔다. 평소에는 큰 소리를 치던 지휘관이, 위기상황이 되자 정상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연행계획을 알지 못했던 변규수 육군보안대장이 B-2상황실에서 곧장 보안처장 정도영 장군에게 이 정보를 알렸다. 정도영 처장도 아는 바 없었다. 허화평 합수부 비서실장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파악한 후, 변규수 육군보안대장에게 다시 지시했다. “정승화 총장은 10.26과 관련하여 합수부가 조사차 연행한 것이니 육군지휘부에 이를 알려주고 병력출동을 하지 말라고 전하라” 이에 변규수 육군보안대장은 윤성민 차장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8시 20분이었다. 이런 사정을 파악하고 있던 윤성민은 이 사실을 예하 지휘관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오직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3군사령관 이건영에게만 “전두환이 총장을 납치해갔다”는 정도로 알렸다. 이건영 장군이 주월 한국군 사령부 부사령관이었을 때 윤성민은 그 아래 직책인 참모장이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에 전화를 걸어 9공수여단을 육본으로 출동시켜 육군본부를 경호하라고 명했다. 원래 유사시가 되면 육군본부는 1공수여단이 출동하여 경호하게 돼 있었지만, 윤성민 차장에게는 9공수여단장이 심복이었다. 원칙이 아니라 심복관계로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8시 20분, 윤성민 차장은 1,3군 지역에 추가로 비상을 발령했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예하지휘관들이 혼란에 빠졌다. 각가지 추측들만 무성했다.
오후 8시 40분, 윤성민 차장은 성남에 소재한 육군행정학교 교장 소준열에 전화를 걸어 행정학교 영내에 주둔중인 20사단 사단장 박준병을 체포하라 지시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에 전화를 걸어 특전사령부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71사단 백운택 사단장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그야말로 군사난동이었다. 박준병은 2성장군으로 20사단 현직 사단장이었고, 백운택 역시 2성장군으로 71사단 현직 사단장이었다. 이들은 10.26 시해사건으로 인해 선포된 계엄령에 의해 정승화 총장이 수도권으로 이동시킨 부대의 수장들이었다. 이들은 육사출신이라는 이유 말고는 체포당할 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이들을 체포하려면 육군 군법회의 검찰부의 사전구속영장이 있어야만 했다. 내로남불, 정승화를 체포하는데에는 충분한 범죄사실이 밝혀져있다. 그것은 내란음모 혐의였다. 이것에 대해서는 체포하면 안된다하고, 아무런 혐의가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체포권한도 없는 사람이 체포하라 함부로 명령한 것이다. 한마디로 망동이었다.
30경비단
대통령 재가가 금방 날 것이라고 생각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수도권에서 군내 여론을 주도하는 9명의 장군들을 보안사에 초청해놓았다. 이들을 초청한 이유는 전두환이 정승화 체포계획을 극비에 붙였기 때문에, 이들에게라도 재가가 나는 즉시 내막을 알려주고 이해를 얻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정승화가 시해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일반 시중의 여론이 흉흉했다. 군 내부에서의 여론은 더욱 구체적이었다. “정승화는 최소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이 정도로 당연한 법 집행을 한 것이긴 하지만 원체 큰 일이라 그를 옹호해 줄 동지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초청된 사람들은 9명의 장군이었다. 이 9명의 장군들이 보안사로 몰려오면 이목이 많아 불필요한 소문이 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모이는 장소를 길 건너 경복궁 내부에 있는 30경비단으로 변경했다.
초청된 장성은 유학성(3성, 군수차관보), 차규헌(3성, 수도군단장), 황영시(3성, 1군단장), 노태우(2성, 9사단장), 박준병(2성, 20사단장), 박희도(1성, 1공수여단장), 최세창(1성, 3공수여단장), 장기오(1성, 5공수여단장), 백운택(2성, 71방위사단장)이었다. 이들 중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는 3성장군들로 정승화로부터도 신임을 받는 인물들이었다.
장세동 대령이 지휘하는 30경비단은 어떤 부대인가? 대통령 방호부대이다. 비록 수도경비사단에 속해있지만 설사 수경사령관이 공격해온다고 해도 이를 방어해야 할 의무를 진 부대다. 30단의 예하부대인 55대대는 청와대 울타리 내부를 방어한다. 그 나머지 30경비단 부대들이 청와대 외곽을 방어한다. 내곽이 뚫리면 경호실 경호관들이 대통령을 방호한다. 직속 상관인 30경비단장이 청와대 울타리를 넘으면 55대대장은 상관인 30단장과 전투를 해야한다. 이 특수성을 이해하는 군인은 매우 드물다. 수경사령관은 2성장군이고, 30경비단장은 대령이고, 55대대장은 중령이다. 수경사령관이 청와대 울타리를 넘어오면 중령은 그를 체포하거나 사살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극상’이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대통령 시해범을 싸고 도는 내란방조범에 대해서야 오죽 엄격하겠는가? 이를 이해하는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2성 장군이 4성 장군을 체포한 것은 하극상”이라고.
12월 12일 오후 4시, 30경비단장인 장세동 대령이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에 전화를 걸었다. “어이, 김진영, 오늘 저녁에 30단에 장군 몇 명이 오신다네. 장군들 시중을 병사들에게 맡기기가 좀 그러니 와줄래? 인사도 드릴 겸 나와 함께 안내 역할 좀 하지 그래” “네, 형님 알겠습니다.” 김진영 대령은 전화를 받은 후 30경비단으로 갔다. 33경비단은 1,200명 정도이며 필동에 소재한 수도경비사령부 자체를 방어하는 부대였다. 그리고 대통령을 방호하는 30경비단은 1,000명 정도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오후 6시 15분, 김진영 대령이 30경비단에 도착해보니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가 그날 낮에 있었던 장군 진급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후 다른 장군들이 속속 도착했다. 오후 6시 30분, 장세동 대령이 허화평 합수부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늘 합수부장의 대통령 보고가 늦어지고 있다” 이 내용이 전달되자 장군들은 먹을 것을 주문했다. “뭐 먹을 것 좀 있나? 좀 가져오지” 초밥과 맥주가 배달됐다.
오후 7시 40분, 장세동 대령이 허화평 합수부 비서실장으로부터 또다른 전화를 받았다. “정승화가 10.26과 관련해 연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격이 있었다. 대통령 재가는 이에 관한 것이다” 이 전갈을 장세동으로부터 전해들은 장군들이 놀라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장세동 대령이 김진영 대령에게 손짓을 했다.
장세동 대령: “총장공관으로 갔던 33헌병대가 해병대헌병에 포위되었대. 아군끼리 총격이 벌어지면 어쩌지? 누군가가 막아야해. 당신이 좀 나서면 안될까?”
김진영 대령: “그래야지요”
장세동 대령: “손발이 필요하지 않겠나, 당신이 부대에 돌아가서 병력을 챙길 시간이 없으니 30단 5분대기조를 데려가면 어떠려나?”
김진영 대령: “그러지요. 저는 혼자 가려고 했는데요”
혼자 가려고 했다는 김진영 대령에게 무슨 복안이 있었는가? 첫째, 공관지역은 그가 서종철 특보가 총장을 할 때 전속부관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많은 장군들을 포함해 총장 주변인물들에게도 안면이 넓기 때문에 많은 현장사람들이 자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둘째는, 충돌은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가서 ‘연행이 합법적인 것이고, 대통령에 보고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충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면 금방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는 5분대기조를 대동하고 총장공관으로 갔다. 도착해보니 육본 본부사령실 5분대기조가 40여명, 수경사에서 온 헌병 5분대기조, 공관을 지키는 해병헌병대가 어지럽게 혼재해 우왕좌왕 살벌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관 입구에는 해병헌병이 ‘엎드려 쏴’자세로 총구를 올린 채 “접근하면 쏜다”며 살벌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김진영 대령이 대동한 30단 5분대기조는 80명이었고, 대기조의 조장은 대위였다. 김진영 대령은 5분대기조에 “절대로 실탄을 지급하지 말라, 공관으로 진입하지 말라, 단국대 정문 앞에서 대기하라”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낯 모르는 상사를 만났다. 오 상사였다. “나는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이오. 옛날 서종철 총장님 시절 이 공관에서 전속부관을 했던 사람이오. 가서 해병대 헌병에게 내 말 좀 전해주면 고맙겠소. 여기 있는 병력은 모두 우군이오. 북에서 침투한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더 이상 충돌이 없어야 합니다. 가서 좀 전해줄 수 있겠어요?” 체격이 우람한 대령으로부터 자세한 상황을 전해들은 오 상사는 정문으로 걸어가 해병을 지휘하는 헌병중사에게 이 말을 전했고, 이에 위협사격이 중지되었다. 반인부 준위의 허위선동으로 야기된 우군간의 총격 충돌사건은 여기에서 끝을 맺었다.
문제를 해결한 김진영 대령은 5분대기조 트럭을 타고 30경비단에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세상은 바뀌어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1,200명을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직접 지휘하고, 그는 단장직에서 해임돼 있었다. 장세동 대령이 지휘하는 30경비단 1,000명을 제외한 모든 수경사 병력을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직접 지휘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장악한 전차 2개 중대에는 전차 24대, 장갑차 50여대가 있었다. 포병단에는 토우미사일 23문, 벌컨포 100여문, 무반동 총 등 실로 대단한 화력이었다. 김진영 대령이 30단 정문에 도달하기 전, 현저동에 주둔한 전차들이 광화문 거리를 통과하여 필동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김진영 대령은 33단장직에서 해임돼 있었지만 그래도 부대로 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30단에 모여 있는 장군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이에 노태우가 만류했다. “상황이 매우 악화돼 있는 것 같은데 먼저 부대에 전화부터 해보지 그래” 부대에 전화를 하니 작전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단장님, 해임되셨습니다. 부단장이 지휘하고 계십니다. 단장님을 보면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습니다. 오시면 사살됩니다.” 북악산 지휘소에 전화를 했다. 3개 중대가 배치돼 있는 지휘소였다. 당번이 전화를 받았다. “군수과장이 3개 중대 모두를 인솔하고 필동 쪽으로 갔습니다. 더 이상 단장님 지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윤성민의 난동이나 장태완의 난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발생했다.
하나는 대통령 재가가 지연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재가와 관계없이 당시의 장군들이 최규하를 권위 있는 대통령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무시했던 데에서 기인했다. 한마디로 정승화 총장 위에는 어른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가를 해달라고 보고한 시각은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그런데 그 재가는 최규하 대통령의 무책임한 고집으로 인해 한없이 지연됐다. “재가는 하겠는데 먼저 국방장관을 빨리 데려와라. 국방장관이 먼저 서명한 다름에 내가 재가하겠다” 그런데 국방장관 노재현은 정승화 총장 연행과정에서 발생한 총성을 듣고 밤새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숨어있었다. 그를 수색해서 찾아낸 후에야 대통령에 끌려갔고, 그가 서명을 하자 최규하 대통령이 서명을 했다. 그 시각은 12월 13일 오전 5시 10분, 이 9시간 동안 한국군과 한국군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내전상황이 촉발된 것이다.
장태완의 난동
12월 12일 오후 7시 40분, 대통령 부속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학봉 수사1국장은 허화평 합수부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연행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우경윤 대령이 부상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학봉 수사1국장은 즉시 접견실로 가서 보고 중에 있던 전두환에게 알렸고, 전두환은 이를 대통령에 알려주면서 재가의 긴급성을 설명했다. 그래도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장관만 고집했다. 답답한 전두환이 대통령실에서 나와 30경비단으로 왔다. 이때는 윤성민 차장이 이미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을 때였다. 전두환은 답답한 심경을 장군들에게 털어놨다. “대통령께 보안사령부의 특수성과 관례를 설명했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장관님을 빨리 찾아야 할 텐데요.”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병력과 포를 가지고 공격해 오겠다고 압박을 가하고, 윤성민 참모차장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 세력은 거병하겠다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 한없이 ‘없어진 장관’을 기다리면 어쩌자는거냐, 우리라도 대통령에게 가서 건의해 봅시다.”
이에 대통령실 방문단이 구성됐다.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박운택, 박희도였다. 이들이 대통령실에 도착한 시간이 밤 9시 30분이었다. 이들은 1열로 서서 대통령에게 거수경례했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장군들 한 사람씩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대표로 유학성 중장이 진언을 했다. “대통령 각하, 노재현 국방장관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지금 정승화 총장 연행에 반발하는 지휘 장군들이 병력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자칫 내전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속히 재가해주시기를 바란다는 건의 말씀을 올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여러 장군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최규하는 또 천하태평이었다. 밤 10시 10분, 연합사에 있던 노재현 장관과 대통령 사이에 전화가 연결됐다. 최규하 대통령은 빨리 오라고 했고 노재현 장관은 곧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 전화를 유학성 장군이 이어받았다. “장관님, 정 총장이 10.26 내란사건과 관련하여 합수부에 연행됐으니 빨리 오십시오.” 국방장관이 곧 올 것으로 확신한 장군들은 대통령실을 나왔다. 밤 10시 30분이었다. 이렇게 행동해 놓고 노재현 장관은 또 함흥차사였다.
밤 9시 20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윤성민 차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정승화 총장이 박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확인되어 대통령에 보고하고 연행하였다.’라는 요지의 배경 설명을 했다. 이런 보고를 받고서도 그의 난동은 계속됐다. 1996년 전두환이 재판을 받던 중 그는 공판정에 증인으로 나와 “저는 전두환 피고인으로부터 보고 받은 바 전혀 없습니다.” 딱 잡아떼었다. 1996년 6월 27일, 제17차 공판에서였다. 이에 변호인이 카세트를 틀어 녹화 내용을 틀어주자 그제야 보고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 보고 받은 사실을 적극 숨기려 한 것은 그가 그후에 취한 명령 조치가 심히 불량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두환이 취한 조치가 합법적인 줄 알면서도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9공수여단을 육군본부로 출동시키고 두 명의 사단장을 체포하라 명령한 것은 훗날 스스로 생각해봐도 언어도단이었던 것이다.
밤 9시 30분, B-2 벙커 상황실에는 30경비단에 장군들이 여러 명 모여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헌병감 이진기가 흥분하여 나섰다. “30경비단에 황영시, 차규현, 유학성 등이 영관 장교들을 이끌고 총장 연행을 지휘하고 있으니 무장헬기를 보내 경비단에 있는 장군들을 체포하고 정 총장을 구출해야 합니다.” 정승화 직계 장군들이 이에 호응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김종환 합참의장을 위시한 장군들이 강하게 나무라자 수그러들었다. 바로 이때 단국대로 피신했던 노재현 장관이 가족을 여의도에 피신시켜 놓고 B-2 벙커에 나타났다. 이때 김용휴 차관이 정승화의 연행 이유와 연행 과정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에 대해 소상히 보고했다. 차관의 보고가 있자 비로소 B-2 벙커에 있던 장군, 장교들이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게 됐다. 이야기하면 모두가 수긍될 일을 놓고, 윤성민 차장은 일체 숨기고 자기식대로 전횡을 저지른 것이다. 바로 이 시각, 하소곤 육본 참모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박희도 1공수여단장이 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출동한다는 것이었다. 오보였다. 하지만 이 보고를 받은 노재현 장관이 또 도망을 쳤다. “나는 연합사로 가 있겠다. 육군본부는 자체 방어 능력이 없으니 수경사로 가는 것이 좋겠다.” 지휘를 팽개치고 도망간 국방장관, 여기에서 지휘 공백 사태가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군은 오합지졸 상태로 치달았다. 육본 지휘부를 수경사로 옮기라는 말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싸우라는 지시였다. 도리대로라면 연행에 반발하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 전두환이 육사 출신이기 때문에 정승화 계열의 장군들은 육사 출신 장군들을 다 적대시했다.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모든 전투 여단에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육사 12기 박희도 장군이 지휘하는 1공수여단에 편제된 모든 차량을 비육사 출신이 지휘하는 9공수여단으로 이관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1공수여단이 출동할 수 없도록 발을 묶는 조치였다. 하지만 1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에 있었지, 특전사령관 손에 있지 않았다. 마음이 바쁜 정병주는 여섯번을 확인했다. “지시대로 완료했나?” 정상적 지시체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시대로 완료될 수가 없었다.
윤성민 차장은 “무장하라, 출동 준비하라.” 전 수도권 부대에 이미 비상명령을 내려놓았는데 이후의 정병주는 무장을 해제하라 명령하니, 그것도 명령권자가 아닌 사람이 호통을 치니 1공수여단 장교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 시각 1공수여단장 박희도는 30경비단에 있었기 때문에 부대는 부여단장인 이기룡 대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이기룡 대령이 사태 파악을 위해 작전참모 권대포 소령과 헌병 대장 백남석 대위를 지프차에 태우고 육군본부로 직접 찾아갔다. 따라서 밤 10시의 1공수여단에는 여단장, 부여단장, 작전참모 모두가 비어 있어, 지휘자가 없는 부대가 되었다. 이렇게 비어 있는 부대에 정병주가 보낸 장교들이 점령하여 부대 출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정병주가 보낸 감시자들은 이순길 부사령관, 강리건 인사참모, 홍덕현 교육발전처장이었다. 훗날 검찰은 이기룡 부여단장이 지프차 한 대를 타고 육군본부로 간 사실을 놓고 통로 개척 목적으로 간 것이라고 몰아갔다. 무장병 없이 참모만 데리고 지프차 한 대로 통로 개척을 하는 군인도 있다는 것이다. 군도 코미디, 검찰도 코미디였다.
B-2 벙커에 간 이기룡 대령, 너무나 복잡하여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민가의 전화기를 빌려 작전처장 이병구 준장과 통화만 했다. “특전사 명령과 육본 명령이 서로 어긋나는데 확인해 달라.” “국방부 경비는 9공수여단이 출동하여 받기로 돼 있다.“ 냉랭했다. 비상시 원래는 1공수가 국방부 경비를 맡도록 규정돼 있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9공수가 출동하기로 돼 있으니, 1공수는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1공수가 따돌림 당한 것이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이기룡 대령은 즉시 박희도 여단장에게 보고하려 무전을 쳤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부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밤 10시 30분이었다. 바로, 이 시각이 국방장관 명에 의해 육군본부 수뇌들이 지휘부를 삼각지에서 필동의 수경사령부로 옮겨가는 시각이었다.
이기룡을 태운 지프차가 제2한강교에 이르자 헌병들이 총구를 겨누고 차를 세웠다. “내리세요. 장교님들에 대해서는 수경사령관으로부터 체포하여 사살하라는 명령이 있으니 모두 손드십시오.“ 체포되었다. 헌병은 이기룡과 권대포 소령에 수갑을 채우고 지하실로 데려가 감금했다. 이것도 하극상인가? 12월 13일 새벽 3시가 되자 헌병 장교가 지하실로 내려와 수갑을 풀어주며 권총을 되돌려 주었다.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무릎도 꿇었다. 4시간 동안 수갑을 차고 감금돼 있었던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검사들이 이 지프차 사건을 가지고 사건을 꿰맞추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1공수 제1대대장 김경일 중령(육사 22기), 부여단장 이기룡 대령, 중대장 이경택 등이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한남동의 총소리는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 우경윤 대령을 쓰러뜨린 총성으로부터 시작됐다. 누가 쏘았는가? 정승화 총장 편 사람이 쏘았다. 공식적인 조사는 안 했지만, 정황상 정승화 총장의 2남 정태연이었을 것이다. 그 시각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어디에 있었는가? 신촌의 한 음식점에서 긴급 파티를 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당시는 폭탄주가 유행이었다. 수경사 헌병대장 조홍 대령이 별을 단 날이니 축하주가 계속 돌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장태완 수경사령관, 헌병의 최고자 김진기 소장, 그리고 정병주 소장이 보였다. 정승화 계열 골수들의 파티장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장군을 시켜 이들에게 전갈을 전했다. “내가 그 시각 대통령 보고가 있으니 끝나면 가서 동석하겠다고 전해 주고, 내가 갈 때까지 참모장이 대접을 하시오.” 보고가 금방 끝나면 정승화 총장 체포에 동의하는 30경비단 장군들에 가서 간단히 재가 사항을 설명하고 곧바로 신촌에 가서 정승화 총장의 심복들에게도 처분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려던 참이었다.
밤 8시, 육군본부 상황실로부터 장태완 수경사령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총장이 괴한의 습격을 받고 납치되었다.”라는 내용이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즉시 총장실 이재천 소령에 전화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사령관님, 총장님을 구해 주십시오. 저는 부상을 심하게 입었습니다.” 합수부에 연행되었다는 말은 쏙 뺐다. 부대로 돌아가면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참모장에게 무전을 쳤다. “정 총장님이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빨리 구조대를 보내 범인들을 잡아라.” 이에 참모들은 반대했다. 총격전이 일고 있는 공관에 대해 상황 파악도 없이 구조대부터 보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윤성민 차장으로부터 무전을 받았다. “정승화 총장님이 합수부에 연행됐소.” 오후 8시 40분이었다. 이 무전에 대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반응은 분노였다. ‘합수부장은 분명 계엄사령관의 부하다. 부하가 어찌 상관을 연행할 수 있느냐. 이는 명백한 하극상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에 대해 장군마다 인식이 다르고 개념이 상반됐다. 정승화 총장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은 다 같이 같은 생각을 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난동, 아니 술주정은 이로부터 출발했다.
수경사 전체 병력을 필동 사령부로 집결시켰다. 심지어는 청와대 외곽을 방호하는 북악산 3개 중대까지 철수시켰다. 이 3개 중대는 33경비대 소속이고, 이 부대에 대한 지휘권은 경호실에 있었다. 하지만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경호실을 무시하고 월권했다. 이 3개 중대가 없어지면 청와대 담장은 아무나 넘을 수 있었다. 참으로 위험한 행위를 한 것이다. 수경사 전원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전투준비를 시켰다. 이때 수경사 참모장 김기택 장군이 30경비단에 장군들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장태완 수경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이들이 총장 연행의 배후 세력이라고 단정했다. 30경비단에 전화를 했다. 유학성 중장이 받았다. 2성 장군 장태완이 3성 장군 유학성에게 던진 말은 반말이었다. “그곳에 여러 사람 모여 무슨 작당을 하는 거야. 계엄사령관을 납치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빨리 총장을 원위치로 돌려놔!” 호통을 쳤다. 이에 유학성 중장이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나도 연행 계획을 모르고 이 자리에 초청돼 왔다. 나도 여기에 와서 비로소 연행된 사실을 알았다. 연행 과정에서 총격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 걱정들을 하는 중이다. 총장 연행은 10.26과 연관된 사안으로 대통령께 보고된 사항이다. 여기 있는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이미 꼭지가 돌아 있었다. “이 반란군놈의 새끼야. 네놈들 거기 꼼짝 말고 있거라. 내가 직접 전차를 몰고 가서 깔아 주겠다.” 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평소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가까운 황영시 중장을 바꾸어 주었다. 황영시 중장이 같은 요지의 설명을 해주면서, “내 말이 미덥지 않으면 와 보라.”고 했다. “이 개 같은 놈들, 네놈들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라. 내가 포 가지고 가서 네놈들 머리를 다 날려 버릴 것이다.”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술주정이었다. 새까만 후배 장군이 군의 신망을 받는 계급 높은 선배 장군에 할 수 있는 언어가 절대 아니었다.
밤 9시 30분,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김용휴 국방차관과 윤성민 차장에 전화를 걸었다. “30경비단을 공격하여 총장을 구하려고 합니다. 26사단, 수도기계화사단, 9공수여단을 출동시키고 제가 지휘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군 상식을 벗어난 술주정이었다. 그리고 이건영 3군사령관에 전화를 했다. “30경비단이 반란군입니다. 쳐들어가야 하니 병력 좀 주시고 후방 지원 좀 해주십시오.” 이건영은 이 술에 취한 소리에 한마디 더 거들었다. “그 못된 놈들이 장관을 치는 모양인데, 장 장군이 잘 해야 돼. 황영시 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이 두 놈들이 지휘하는 부대는 절대로 서울로 출동할 수 없도록 조치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 30경비단 놈들을 즉시 소탕하시오.” 장태완은 이어서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에 전화를 걸었다. “보안사나 30경비단을 공격하려면, 26사단과 기계화 사단을 먼저 출동시켜야 하니, 당신은 육사 출신이 지휘하는 1, 3, 5공수여단은 출동하지 못하게 묶어 놓고 9공수여단을 출동시켜 주시오.” 이에 정병주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특전사 작전참모 신우식 대령과 육군 작전처장 이병구 장군의 만류를 뿌리치고 9공수여단의 출동을 지시했고, 이를 즉시 장태완 수경사령관에게 알려줬다. 같은 시각, 윤성민 차장은 남한산성 소재의 행정학교 교장 소준열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행정학교 교정에 주둔하고 있는 20사단 사단장 박준병을 체포하라 지시했고, 이어서 특전사 정병주에게 전화를 걸어 인근에 주둔한 71사단 사단장 정운택을 체포하라 지시했지만, 이들은 경비망을 뚫지 못해 체포에 실패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또 자기의 지휘 선상에 있지 않은 26사단장 배정도와 수기사단장 손길남에 전화하여 전 병력을 서울 운동장과 장충공원에 출동하라 요구했지만, 이런 월권적 행위가 수용될 리 없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또 한강교를 차단했다. 한강교를 통해 퇴근하는 시민 차량을 강제로 세워 시민 차량을 빼앗아 그것으로 바리케이드를 쳐서 1여단의 서울 진입을 차단하라 명령했다. 아울러 수도권 일대에 설치된 수많은 검문소에 명령을 내렸다. “검문에 불응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하라.” 이에 더해 윤성민 차장은 육본 보안대장 변규수 대령을 이유 없이 체포하여 구금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총장을 체포한 것에는 명분이 있었고 법이 있었다. 하지만 윤성민 차장이 변규수 대령과 그 수하 장교들을 체포하고 구금시킨 것에는 아무런 명분도, 법도 없었다.
밤 10시 20분,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난동이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수경사 모든 참모를 상황실로 모았다. 30경비단과 보안사를 목표로 하는 공격 명령과 반대파에 대한 사살 명령을 내린 것이다. “30경비단에 전두환, 유학성, 장세동 등이 모여 총장을 납치하고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 수경사 소속의 모든 전차를 사령부에 집결시켜 30경비단과 보안사를 공격하라.” 명령을 내리자마자 곧장 3군사령관 이건영에 또 전화를 걸어 “지금 빨리 26사단과 수도기계화 사단을 출동시켜달라.” 요구했다. “장 장군, 내가 지금 곧 장관의 승인을 받아 병력을 출동시키겠네.” “지금 장관의 소재를 알 수 없는데 언제나 기다립니까? 급합니다. 빨리 출동시키십시오.” 바로, 이 시각에 B-2 벙커 사무실에 있던 육군본부 지휘부가 수경사로 몰려왔다. 윤성민 참모차장, 천주원 인사참모, 최항석 교육참모, 안종훈 군수참모, 하소곤 작전참모, 황의철 정보참모, 정형택 예비군 참모, 김시봉 관리참모, 이정량 통신감, 김진기 헌병감, 신정수 민사군정감, 이들 모두가 정승화 총장이 신임하는 인물들이었다. 윤성민 차장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즉석 요구에 따라 변규수 육본 보안대장과 수경사에 파견된 보안사 요원 모두를 체포하여 감금시켰다. 이어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문홍구 합참본부장, 김진기 헌병감, 황원탁 총장 수석부관과 함께 별도 방으로 가서 “정승화 구출 작전”을 모의했다. 전차로 합수부인 보안사를 공격하여 총장을 구출하자는 결론이 도출됐다. 아울러 헌병 1개 소대를 투입해 최규하 대통령을 수경사로 납치하자는 안도 도출됐다. 김신조를 흉내 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격에 앞장서라는 명을 받은 전차장들이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김진기 헌병감은 손수 대통령 공관 부근에 나가 경비 상태를 확인했지만, 공관 경비가 삼엄하여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당시 대통령은 대통령에 오른 지 6일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청와대에 있지 않고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삼엄함 공관 경비를 놓고 판사들은 이 삼엄한 경비에 대한 해석을 판결문에 담았다. 삼엄한 경비를 한 행위는 대통령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판결한 것이다.
윤성민 차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난동은 지휘 체계 전체를 무시한 반란이었다. 이 두 사람의 동태를 지켜본 합참의장 김종환 대장과 이희성 당시 중앙정보부 서리가 차례로 수경사에 합세한 문홍구 합참본부장(대간첩본부장)에 전화를 걸었다. “정승화의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한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개인적 문제이니 일체의 병력 동원을 금지한다.” 국방차관 김용휴가 또 연합사에 숨어있는 노재현 장관과 전화를 연결하여 병력 동원의 난동 행위를 중지시켜 달라고 건의했다. 밤 11시였다. 이에 노재현 장관 역시 제정신이 들었는지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전화를 걸어 같은 내용으로 명령을 내렸다. “수경사에 모여 있는 장군들이 병력 동원을 협의하고 있는 모양인데, 절대로 병력 동원은 안 된다. 합수부의 총장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 사건에 관련된 총장 개인에 대한 문제이니까 장군들에게 흥분하지 말라고 하라. 보안사령관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니, 내일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난동은 계속됐다. 그는 상황실에 모인 전 장교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30경비단장, 33경비단장, 헌병단장(조홍)을 발견 즉시 체포해 사살하라. 지금 현재 30경비단에 있는 놈들의 명단을 배부하니 발견 즉시 체포 사살하라. 방송국과 모든 검문소에 병력을 증강하라. 모든 전차와 대전차 유도탄(TOW 미사일), 3.5인치 로켓포 등 모든 화포는 탄약 상자를 개방하여 차량에 탑재하라. 모든 야포는 현 위치에서 포구를 경복궁에 조준해 놓아라.” 이에 대해 훗날 장태완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자서전 [12.12쿠데타와 나] 175쪽에 이렇게 기재했다.
“경복궁 포격 명령을 받은 구정희 야포 단장은 사령관 명령이니까 일단 포를 경복궁에 조준해 두겠지만 포격은 어렵다. 야포는 피아가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은 시가전에서는 무용지물이 아니냐. 더구나 30경비단을 목표로 사격하려면 관측 사격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는 광화문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것은 물론 민간인 피해가 말도 못할 정도로 큰데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밤 11시, 윤성민 차장과 황영시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피차 병력 동원을 하지 말자.”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합의한 것은 순전히 합수부 쪽의 병력 동원을 차단해 놓고 자기만 병력 동원을 하겠다는 꼼수였다. 밤 11시 10분, 윤성민 차장은 26사단장과 기계화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출동 대기 명령을 내렸다. 11시 30분, 3군사령관 이건영이 또 똑같은 사단장들에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두 개 사단은 명령만 내리면 불과 1시간 이내에 서울에 올 수 있었다. 밤 12시, 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이 제5대대, 1개 대대를 이끌고 서울로 출동했다. 장태완이 완전히 미쳤다. 30경비단과 보안사 전멸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전차와 모든 장병은 전투조로 편성하라. 목표는 30경비단과 보안사다. 공격 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 지금 즉시 전개하라. 출발은 내가 선도한다. 중앙청 부근에 진지를 편성한다. 전차포, TOW 미사일, 106밀리 무반동포, 3.5인치 로켓포 등 모든 화기는 양 개 목표에 수백 발 단위로 집중 사격하라. 그다음 일제히 돌격하여 역모자들을 사살 또는 포획하여 반란을 진압하라. 즉시 출동 대기하라.” 이어서 30여 대의 육중한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2천여 명의 병력을 아스토리아 앞에 배치했다. 누군가가 막아야만 하는 매우 위험하고 무모한 난동이었다.
군사 반란 진압에 나선 전두환
‘대전복 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보안사는 이 엄청난 위기를 관리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었다. 계급 서열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없는 정승화 총장 계열의 장군들이 펼치는 난동은 무력이 아니면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계급 서열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전두환이 또 나섰다. 그 주위에 모인 선배들이 전두환에 힘을 실어 주었다. 밤 11시 30분, 드디어 전두환이 나서서 “장태완을 체포하라.” 명했다. 당시 계엄 공고 제5호 제1항에는 반란죄에 관한 수사 관할권이 합수부에 주어져 있었다. 하지만 합수부에는 병력이 없었다. 그의 지휘를 받게 돼 있는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장군에게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반란죄 현행범’으로 체포하라 지시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승화 계열의 움직임을 ‘국가 전복 행위’로 해석하고 대전복 작전 차원에서 특전사 1여단, 3여단, 5여단에 출동해 달라 요청했다. 밤12시였다. 박희도 1여단장은 경복궁 30경비단을 출발하여 밤 12시에야 부대에 도착했다. 와 보니 부여단장과 작전참모는 B-2 벙커에 상황 파악하러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있고, 정병국 사령관이 보낸 특전사 부사령관 김순길 준장 등이 나와 병력 출동을 못 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박희도 장군은 이들을 돌아가라 해놓고 4개 대대를 출동시켰다. 12월 13일 00시 20분에 출동하여 01시 30분에 국방부 앞에 도착했다. 박덕화 중령이 이끄는 제5대대가 국방부를 점령하기 위해 진입하는 순간, 국방부 청사 옥상에 배치된 벌컨포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았다. 벌컨포 소대는 장태완이 지휘하는 부대였다. 공수단원들이 산개하여 엎드려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지만, 부상자가 속출했다. 벌컨포는 방아쇠를 한번 당기면 수백 발이 나가는 무서운 대공포였다. 박 중령은 이 벌컨포를 제압하고 국방부 건물을 장악했다. 02시였다. 이때 장관을 수색하라는 합수부 요청이 있었다. 공수 대원들이 국방부 청사와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10층 건물에 방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는가? 공간과 공간 모두를 훑고 다녔다.
12월 12일 밤 12시, 전두환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전복 진압 작전 상황임을 설명하고, 정병주 사령관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라 요청했다. 최세창 여단장은 30경비단에 계속 있으면서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기에 제5대대장 육사23기 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 사령관을 반란 현행범으로 체포하라 명했다. 박 중령은 체포조 10명을 대동하고 사령관실로 향했다.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박 중령이 문고리 부분을 권총으로 쏘아 여는 순간, 안에서 총을 연발했다. 박종규 중령도 부상을 입었고 여러 명이 총을 맞았다. 이에 체포조가 응사했다. 김오랑 소령이 사망하고 정병주 사령관이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됐다. 이후 최세창 장군이 이끄는 3공수여단 3개 대대 병력이 중앙청에 도착했다. 13일 새벽 03시 30분이었다. 같은 시각에 장기오 장군이 이끄는 5공수 2개 대대가 효창운동장에 도착했다. 사태를 추적하고 있던 황영시와 노태우도 움직였다. 황영시 1군단장은 휘하의 30사단장 박희모와 제2기갑여단장 이상규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이상규 여단장은 김호경 중령이 지휘하는 제16전차대대를 중앙청으로 출동시켰고, 30사단은 부대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어 06시 30분에야 고려대에 진출시켰다. 노태우는 육사16기 이필섭 대령이 지휘하는 29연대를 중앙청에 도착시켰다. 04시 30분이었다.
신촌 식당에서 돌아온 조홍은 사태가 궁금하여 차규현 중장에 전화했다. “나도 궁금해서 여기 30경비단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리로 오게나.” 여기에 왔다가 그날 장군이 된 조홍은 전두환으로부터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반란 현행범으로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명을 받은 조홍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으로부터 사살 명령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 수하인 부단장 신윤희 중령(육사 21기)에 전화하여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라 지시했다. 11시 30분이었다. 신윤희 중령, 너무나 엄청난 명령이었기에 충격을 받고 당황했다. 이때 인사참모 이진백(이진삼 장군 동생) 대령이 와서 “사령관이 이성을 잃었는데 저대로 두면 나라 망하겠다. 당신이 좀 손을 써야 하는 게 아니냐?” 이 말에 신 중령은 혹시 인사참모가 자기를 떠보려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그와 언쟁했다. 인사참모가 나가자 곧바로 정보참모 박웅 대령(육사 17기)이 와서 인사참모와 같은 말을 했다. 직속상관의 명령을 놓고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신경이 곤두섰던 것이다. ‘누구의 명령을 따를 것이냐?’ 군생활을 오래 한 정보과장 최 준위와 한동안 의논을 했다.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 햄릿의 고민에 빠진 것이다.
12월 13일 새벽 3시, 헌병 병력을 이끌고 본관 건물에 가자, 본부를 지키는 수십 명의 병사들이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과 마찰을 피하고자 신윤희 중령은 편창휘 소령에게 “사령부 경비를 헌병이 맡기로 했는데, 너는 지시받은 것이 없냐?” 물었다. 편 소령은 “지시받은 게 있습니다.” 하고 순순히 병력을 철수시켰다. 사령관실로 들어가자 사무실 앞에는 권총을 휴대한 20여 명의 전속 부관들이 웅성거렸다. 헌병 하사관 다섯 명에게 명하여 그 전속부관들을 옆방으로 몰아넣었다. 이재우 대위, 한영수 대위, 최순호 준위가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손 들엇!”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대위가 벽을 향해 공포를 쏘았다. 김기택 참모장이 나섰다. “신 중령, 총은 쏘지 마!”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순순히 응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이 한마디에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기가 죽어 신윤희 중령 사무실로 졸졸 따라왔다. 조홍 장군에 전화하여 체포사실을 보고했다.
“신 중령, 수고했어. 사령관을 즉시 서빙고 분실로 태워다 이학봉에 인계해”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신윤희 중령이 직접 서빙고로 연행했고, 다른 장군들 모두가 헌병 장교들에 의해 서빙고로 연행됐다. 13일 새벽 3시 30분이었다.
새벽 5시, 윤성민 차장 혼자만 특별히 보안사령관실로 안내되어 갔다. 그 자리에는 전두환,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노태우가 있었다. 이들이 윤성민 차장에 기회를 주어 활용하자는 의견을 낸 것이다. 모인 사람들에 이미 합의가 이루어졌기에 모두가 윤성민 차장에게 1군사령관으로 나가줄 것을 요청했다. 윤성민은 매를 맞을 각오를 했던 지라 ‘웬 떡이냐!’ 싶었다.
12월 24일, 그는 원주 1군사령관으로 나갔다. 1980년 5월 20일에 대장으로 진급했고, 1981년 5월에는 합참의장, 1982년 5월부터 86년 초까지, 만 5년 동안 전무후무하게 최장수 국방장관을 했다. 이후 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대한방직협회 이사장, 현대정공 고문을 역임했다.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특혜를 받았는데도 세상이 그에게 돌을 던지자 그 역시 돌을 던졌다. 장태완도 그랬다.
1996년 11월 4일, 서울고등법원 제9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진영은 변호인 질문에, 장태완에 대한 말을 했다. “장태완이 그를 한국전산회사 사장으로 근무시켜 걱정 없이 살도록 해준 것에 대해 장세동에게 고맙다고 전해달라 부탁하여 전해 준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장태완이 심근경색증을 앓고 있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경비를 부담해서 미국에 가서 수술받게 해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했고 이 이야기는 장태완이 여러 사람에게 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도 장태완은 "은인이다, 고맙다"고 했던 장세동과 노태우를 배신하면서 늦은 나이에 스스로 영웅이 되려 안간힘을 썼다.
노재현의 기행과 최규하의 무능
12월 12일 오후 7시 20분, 이웃 총장 공관에서 난 생생한 총소리에 노재현 장관은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담장 사이로 분리된 단국대 체육관으로 도망갔다. 체육관에서 1시간 20분을 보낸 다음 국방부에 전화해 이경률 작전국장을 불러 그의 차를 타고 여의도 이경률 집에다 가족을 피신시킨 후 밤 9시 30분에 육본 B-2 벙커에 갔다. 장관을 초조하게 기다렸던 김용휴 차관이 장관을 보자마자 보고했다. “정승화가 합수부에 연행됐습니다. 대통령에 보고된 사항입니다. 빨리 장관께서 사태를 수습해 달라는 합수부장의 전갈이 있었습니다.” 이런 보고를 받고도 노재현 장관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한미연합사 상황실로 피신했다. 여기에서 10시 10분에 대통령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곧 가겠습니다.” 해놓고는 계속 연합사에 숨어있었다. 노재현 장관을 빨리 찾아달라는 합수부의 요청을 여러 차례 받은 김용휴 차관이 그때마다 노재현 장관을 연결해 독촉하였지만 계속 무시했다. 왜 이런 기행을 하였을까? 아마도 정승화 총장과 한패로 행동했던 자기에 대해서도 책임 추궁이 있지 않을까 하고 겁을 먹지 않았을까?
13일 새벽 1시 30분, 그는 국방부로 갔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 김용휴 차관이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와 대통령 호출에 즉시 응하라고 강력히 권했다. 노재현 장관이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병현 대장을 불렀다. “여보, 총장이 연행된 것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소?” 맞다. 노재현 장관은 사후 대책에 대한 결심이 서지 않아 시간을 끈 것이다. 전두환 편에 설 것인가, 윤성민 편에 설 것인가? 그리고 대통령을 우습게 본 것이다. 유병현 대장과 김용휴 차관이 이구동성으로 빨리 대통령한테 가라고 밀어붙이자 어쩔 수 없이 “가겠다.” 말은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이때 1공수여단 병력과 옥상에 설치된 벌컨포대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벌컨포 쏘는 소리는 심장을 쫄게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다. 총소리가 나자마자 노재현 장관은 부관 배상기 소령만 데리고 국방부 청사 1층의 컴컴하고 먼지투성이인 계단 밑으로 깊숙이 숨었다. 새벽 1시 50분이었다.
새벽 2시 30분, 대통령과 같이 밤을 새운 신현확 총리가 자기가 직접 국방부로 가서 노재현 장관을 찾아보겠다고 나섰다. 이때 이희성 중앙정부보장 서리가 따라나섰다. 국방부에 도착하자마자 두 가지 조치를 내렸다. 한편으로는 1공수여단 병력을 풀어 청사 내외를 뒤지게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구내방송을 계속 시켰다. 그래도 2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 03시 50분, 공수부대원이 청사 계단 밑에 숨어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누구야?” 놀란 병사가 고성을 지르면서 총구를 겨눴다. “나, 장관이다.” 이게 무슨 장관인가? 병사 앞에 어떻게 “나, 장관이다.” 소리가 나올 수 있었을까! 병사는 거수경례를 붙이고, 장관을 장관 방에 갈 때까지 보호했다. 이 사실을 놓고 판사는 공수여단이 무력으로 장관을 체포하여 장관실로 압송했다고 판결했다. 04시, 장관은 신현확 부총리와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와 함께 대통령이 있는 총리 공관을 향해 떠났다. 노재현 장관은 차가 보안사 앞을 지나자 차를 보안사 안으로 가라고 했다. 합수부장 사무실에 들러 재가 서류에 먼저 서명한 후 서류를 가지고 나왔다. 이를 놓고 판사는 보안사 앞에서 기다리던 무장 병력이 차를 강제로 세워 노재현 장관을 보안사령관실로 압송했다고 판결했다.
12월 13일 새벽 4시 30분, 노재현 장관 일행이 대통령 앞에 섰다. 사태가 기울어져 있다고 체념한 노재현 장관은 한동안 꾸중을 들은 후 재가 문서에 서명해달라고 청했다. 대통령은 노재현 장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결재선상에 들어있지도 않은 신현확 부총리에게도 서명하라고 했다. 신현확 부총리는 여백에 부총리 결재란을 따로 만들어 서명했다. 여기서 최규하의 본심이 드러난 것이다. 훗날 문제가 되더라도 혼자만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군에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읍소를 끝내 무시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최규하는 신현확의 서명까지 받은 후에야 서명했다. 그리고 서명란에 05:10이라고 시간까지 표시했다.
13일 오전, 노재현 장관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하여 수사기관이 체포하여 수사 중에 있습니다. 수도권 경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일부 병력이 증강 배치되었습니다. 12월 18일, 최규하 역시 기자회견을 통해 12.12사건을 정당한 것으로 갈무리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돌발 사건이요, 국가 중대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계엄군 수사당국이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의혹이 있다면 누구든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당연하고도 정당한 조치를 법관들이 모략하여 군사 반란행위로 판결한 것이다.
12.12 결산표
12.12의 밤은 광란의 밤이었다. 국민이 잠든 사이 내전의 병력이 공격 대기 선상에 집결했고 육중한 탱크들이 광화문 거리를 질주했다.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죽고, 다쳤다. 이는 모두 정승화의 불법과 반항, 그리고 그의 은혜를 입은 장교들의 개인적 충성심에서 야기됐다. 날이 새자 대대적인 군 인사가 단행됐다. 국방장관에 공군대장 주영복, 육군총장에 이희성, 참모차장에 황영시, 수경사령관에 노태우, 1군사령관에 윤성민, 2군사령관에 차규헌, 3군사령관에 유학성, 그리고 합수부에 저항하던 장태완, 정병주, 이건영, 김진기, 하소곤 등은 예편하는 것으로 매듭되었다.
1980년 3월 13일, 계엄 보통군법회의는 정승화의 내란방조죄 범죄 사실을 이렇게 요약했다. (판결사본, 12.12 수사기록 제12권 8060-8069)
”정승화는 김재규가 살인범임을 확신하고서도 김재규를 도울 의사를 가지고 김재규에게 계엄군 배치 장소들을 알려 달라 하여 메모했고, 국방장관에게 자신의 행적을 보고하지도 않았고, 수경사령관에 청와대 포위를 지시하였고, 20사단 및 9공수여단의 출동이 김재규의 내란 행위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출동을 정지시켰고,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노재현 장관의 지시를 받고서도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 했고, 김계원으로부터 범행에 사용된 김재규의 권총을 제출받고서도 범행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다. 이는 내란 행위다.“
1980년 3월13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5일 후인 3월18일 관찰관의 확인 조치로 7년으로 감행했다. 이에 정승화는 3월25일 항소를 취하함으로써 형이 확정되었다.
12.12의 주역은 5명이었다. 전두환, 장태완, 윤성민, 노재현, 최규하였다. 전두환은 법을 집행하는 합수부 수장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눈치 보지 않고 밀고 나갔기에 주위의 선배 장군, 후배 장군들의 지원을 받았다. 장태완은 정승화의 종이었다. 10.26 당시 그는 육본 교육참모부 차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곧장 정승화에 의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라는 막강한 정치 지휘관인 수경사령관이 된 것이다. 수경사령관은 통상 참모부장을 지낸 중량급 소장(2성) 중에서 임명한다. 그가 취임하던 11월 16일, 수경사 장교 식당에서 열린 취임 축하 리셉션 행사에서 그는 이렇게 흥분했다.
”나 같은 촌놈이 수경사령관이 된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나를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해 준 정승화 총장에 무척 감사한다. 더 이상 나는 바랄 것이 없다. 오로지 정 총장에게 목숨 바쳐 충성할 것이다. 모두 다 정승화 총장을 위하여 건배~“
당시 군의 모든 모임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건배~“, ”대통령 각하를 위하여 건배~“를 외쳤다. 건배사 내용 그대로 그는 오로지 정승화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했다. 이러한 돌쇠에 술이 만취 되었으니 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술 망동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윤성민 역시 정승화가 참모차장으로 발탁한 사람이다. 그는 장태완이 정승화의 심복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안다. 정승화에 대한 충성심이 장태완에 대한 동지 의식으로 전이되어 장태완과 함께 경거망동했다. 그런데도 윤성민은 전두환 계열에 발탁되어 최고의 출셋길을 원 없이 달려왔다. 이것은 ‘운명론’으로 말고는 달리 해석이 되지 않는다. 목포에서 서울로 온 그는 전두환이 힘이 있을 때 살갑게 충성했고, 힘이 빠지자 발길질했다.
노재현, 그는 정승화와 함께 김재규를 중심으로 열어 갈 새 세상의 주역을 꿈꾸었다. 그래서 정승화와 한 편이 되어 정치계의 두목처럼 행동했다. 세인들은 국방장관이 계엄사령관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노재현의 눈치를 살폈다. ‘정승화를 체포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전두환이 떠보았을 때 그는 단호하게 불가함을 표현했다. 그는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양 개 진영의 대립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 편이 이겨야 하나?’ 그는 단연 정승화 계열의 군벌이 이겨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빌었을 것이다. 그가 대통령이 호출했을 때 곧바로 달려가면 전두환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장태완, 윤성민, 정병주, 헌병감 이진기 그리고 막강한 수도권 부대를 장악하고 있던 이건영이 이기기를 바라면서 몸을 숨긴 것일 수 있다. 국방차관 김용휴가 그토록 그에게 ”빨리 대통령한테 가십시오. 대통령실에서 난리 났습니다.“ 수도 없이 호소했지만, 노재현은 ‘네가 내 마음 어찌 알겠니~’ 하면서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최규하, 이 인물은 극도의 보신주의자다.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때마다 애매한 행동으로 순간순간을 모면했다. 10월 26일 밤 8시 40분에 김계원으로부터 ‘각하와 차지철이 김재규에 의해 살해됐다.’라는 보고받고도 내내 함구했고, 비상 내각회의 결과가 김재규에게 유리하게 나오자 그 결과를 몰래 김재규가 혼자 있는 방으로 찾아가 은밀한 매너로 알려주었다. 김재규는 자신이 체포되어 갈 때 이미 세상이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간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옳지, 이젠 내 심복인 정승화가 칼을 잡았다.’
최규하는 김재규의 혁명 3단계 계획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김재규는 ‘혁명위원회’의 의장이 되고 최규하 총리는 부위원장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면 자기는 많은 약점이 잡혀 있어서 기용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최규하 역시 노재현의 마음처럼 어느 쪽이 이기는가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국방장관을 빨리 오라 하면서도 내심은 국방장관이 오지 않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재현의 마음과 최규하의 마음은 정확히 일치했을 것이다. 코 빨간 생쥐가 연상되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이 바로 이 두 사람이었다.
판사 입장 vs 피고인 전두환 입장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김영삼이 주도한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 판검사들이 행주 비틀듯 짜낸 지혜는 역사의 구경거리요, 온갖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정승화에겐 죄가 없다. 신군부가 군권을 잡기 위해 정승화에게 무고한 죄를 씌웠다.
대통령에게 재가받지 못하자 경호실 병력으로 대통령 공관을 삼엄하게 에워쌈으로써 안에 들어있는 최규하 대통령이 공포에 떨었고, 여기에 더해 6명의 장군이 늦은 밤 집단으로 들어가 대통령에게 공포감(외포감)을 줌으로써 대통령이 협박에 못 이겨 서명한 것이기 때문에 재가는 무효다.
30경비단은 불법 지휘소이고, 윤성민 차장과 장태완이 있었던 수경사가 정당한 지휘소였다.
공수부대, 30사단, 9사단, 2기갑여단을 불법으로 출동시켜 군권을 장악한 행위는 쿠데타였다.
위 모든 행위는 쿠데타를 위해 사전에 세밀하게 계획되었다.
위와 같은 토끼몰이에 전두환 측 변호인들은 무슨 논리로 저항했는가?
최규하 대통령이 오랫동안 유지돼 온 ‘직보’라는 관례를 깨지 않았다면 서명이 즉시 이루어졌을 것이다. 대통령이 ‘직보’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사리 판단을 했다면 즉시 서명했을 것이다. 쿠데타를 하는 사람이 왜 대통령 결재 서류를 애써 만들어 대통령이 서명할 때까지 오후 6:30분부터 익일 05시 10분까지 11시간 가까이 기다렸겠는가? 쿠데타를 했는데 어째서 익일인 12월 13일, 수많은 사람이 출세 자리에 보직되었는데 전두환은 그대로 합수부장에 머물러 있었는가?
노재현이 장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윤성민과 장태완의 거병 행위는 없었을 것이다.
합수부는 법을 집행하는 입장이었고, 윤성민과 장태완은 순전히 사적인 동기에서 거병했다. 이런 사적인 행동이 없었다면 그들을 체포할 이유가 없었다.
장태완이 적에게나 취할 수 있는 공격대형까지 취하고 두 사단장을 무단 체포하라 하고 부하지휘관들을 사살하라는 등의 위험한 지휘를 하지 않았다면, 합수부는 대전복 작전을 위한 병력 출동 요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승화가 합법적 연행에 반항만 하지 않았어도 위 모든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최규하가 비상 국무회의장에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매우 위중한 사실을 깨놓았다면 이후의 모든 소란 사건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정승화를 체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말할 나위 없이 세상은 김재규-정승화-최규하-노재현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 중에서 과연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을 계승하여 한강의 기적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왔을까? 사람들은, 이 재판에 동원된 판사와 검사들의 무식한 막가파식 곡법아세 횡포에 대해 무엇을 느꼈을까? 판검사들이 김일성의 뜻을 받들기 위해 점령군식 재판을 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상식과 사고방식이 별나라에서 취득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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