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소설] 전두환(8) 5.18 - II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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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2-16 20:36 조회13,93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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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작전
5월 20일, 이날은 도시 게릴라의 최고봉, 폭동백화점이 개점된 날이다. 도시 게릴라의 진면목, 세계적인 모델이 전시된 날이었다. 이날 새벽 광주역으로 도착한 3공수 5개 대대를 포함해 총 10개 공수대대가 거수자 (거동이 수상한 자) 정웅 소장(2성)의 지휘 대상이 되었다. 불타는 용광로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아까운 공수부대를 몰아넣었는지! 11공수 여단장 최웅 준장(1성)은 정웅 소장과 윤흥정 중장에게 "우리 애들 다 죽습니다. 빨리 철수시켜 주십시오." SOS를 쳤고, 이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까지 보고되어 수용이 되었지만 군의 명령 시스템이 굼벵이처럼 느려. 실질적인 철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공수대원들은 명분 없는 희생만 치르고 말았다.
"차 온다" 모든 공수대원들의 노이로제요, 지금도 깊은 트라우마로 잠재돼 있는 말이다. '돌진 차량', '무인 돌진', '유인 돌진' 무인 돌진 차량은 계엄군을 향해 돌진해 오다가 돌멩이를 악세러레이터에 얹어놓고 충돌 직전에 운전자가 뛰어내리는 것이었고, 유인 돌진 차량은 운전자가 100km 속도로 돌진한 후 방향을 선회해 도망가는 차량이었다. 이런 차량에 함평 경찰관 4명이 즉사했고, 정관철 중사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비참하게 깔려 죽었다. 정관철 중사는 제대를 며칠 앞두고 있었고, 그의 부인은 임신한 상태였다. 또 다른 병사가 깔려 사망했고, 4명의 병사가 중상을 입었다.
3공수여단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육사 23기)는 이 순간을 회고했다. "차 온다"는 고함소리는 잠 못 이루게 하는 악몽이었다..... 전조등을 켜서 눈을 부시게 만들고, 요란한 경적으로 공포감을 주면서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100미터, 50미터 너무나 빨라 눈을 감았다. 죽음은 내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달려 있었다. 무조건 오른쪽으로 뛰어 넘어졌다. 차량이 순간에 지나갔다. 나를 에워싼 4명의 부하 대원 중 2명이 차량의 뒷바퀴에 끌려가면서 중상을 입었다. 운전병을 잡아 대원들이 곤봉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때리지 마”, 생포해보니 만취돼 있었다. 왜 그랬느냐 물었더니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무시무시한 얼굴로 압박했다고 했다. 20세 정도의 청년이었다.“
무등경기장에서 차량 100여 대가 집결해 경적을 울리고 상향등을 켜고 금남로로 달려왔다. 건물은 모두 셔터가 내려졌고 피할 곳이 없었다. 옥상은 모두 시민군이 점령해 벽돌과 화문이 계속 날아왔다. 차량을 막으려면 바리케이드를 쳐야 하는데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많은 병사들이 차에 깔려 부상당하고 죽었다. 이런 와중에 상부에서는 “MBC를 지켜라.” “시청을 지켜라.” “KBS를 지켜라.” “세무서를 지켜라.” “도청을 사수하라.” 무모한 명령이 내려왔다. 이런 명령을 무전을 통해 도청한 시민군은 세무서와 MBC를 전소시키고, KBS를 파괴하고 우체국을 불태우고, 파출소 10여 소를 불태웠다.
"제 병사들 다 죽습니다." 최웅 11공수 여단장의 호소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고 20사단으로 대체할 결심을 굳혔다. 이 정보가 또 새나갔다. 북 특공조 사령관 리을설 상장(3성)은 20사단이 광주에 투입되는 접근로인 철로와 육로를 차단하기 위해 600명 중 300명(A조)으로 하여금 고속도로 접근로를 차단케 하고 또 다른 300명 (B조)으로 하여금 광주역에 집결해 있는 3공수 여단을 몰아내고 광주역을 점령케 했다. 금남로와 도청 일대에서 7공수 2개 대대와 11공수 3대대를 포위해놓고 압살시키던 A조는 저녁 무렵 갑자기 포위망을 풀고, 서울-광주 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의 ‘군분교'로 갔다. 장애물을 설치하고 군분교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 20사단 병력을 습격하는 작전을 준비했다. 앞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군분교 작전은 20사단을 가두리 그물망에 가두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해서 습격하는 게릴라 작전이었다. 전략적 창안 능력이 대단하고, 육박전 전투 능력이 탁월하지 않으면 감히 생각해낼 수 없는 군사작전이었다. A조가 20일 밤에 이런 거대한 덫을 설치하고, 광주 청년과 노인들로 혼성된 유인 팀을 구성하여 예행연습을 시키는 동안 광주역에서는 이른바 '포위 섬멸전'이 새벽 2시까지 이루어졌다.
포위돼 있는 800여 명의 3공수 5개 대대는 돌진 차량과 화염병과 돌멩이 공격으로 전멸 위기에 내몰렸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전남대를 지키고 있던 예비대가 실탄을 싣고 굴다리를 거쳐 접근했지만 이들도 포위되어 버렸다. 자위용 사격으로 공포를 마구 쏘면서 겨우 포위돼 있는 3여단 병력에 실탄을 공급할 수 있었다. 실탄을 공급받자 병사들은 "아-이제는 살았구나." 얼마간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돌진 차량에는 방법이 없었다. 시위대는 의례히 '저거 공포탄이야'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다행이 제3공수여단은 최루탄 발사차량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한번 발사하면 64발이 나가는 E-8탄, 속칭 '지랄탄'을 발사해서 겨우 새벽 2시에 포위망을 뚫고 전남대로 피할 수 있었다. 전남대에 가서도 마치 낙동강 전선처럼 밀고 밀리는 육박전을 21일 오후 5시, 철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치러야 했다. 끼니도 굶고, 환자는 많지만 의무 지원을 받지 못했다. 단지 광주의 피해를 줄인다는 생각으로 광주의 주요 자산을 보호하라는 명령 하나에 이런 고통과 희생을 치른 것이다.
한편 고속도로 쪽 '군분교'로 달려간 A조 300명은 5월 20일 저녁부터 무엇을 했는가? 계엄군이 오면 막다른 골목 즉 가두리장으로 몰아넣고, 가두리장에 갇힌 계엄군을 몽둥이와 낫 등으로 때려잡는 시나리오에 따라 가두리장을 설치하는 공사를 했고, ‘노인들을 앞세운 환영객 집단’을 조직했다. 20사단 지휘부 차량 부대가 21일 08시 정각에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 중의 극비 정보에 따라 작전 준비를 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군에는 간첩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튿날 20사단 지휘부 차량이 군문교로 들어오자 미리 대기하던 노인부대가 손을 흔들면서 환영의 표시를 했다. 20사단은 환영받는 줄로만 알고 그들이 안내하는 손짓에 따라 가두리장으로 들어섰다. 가두리장에 갇히는 순간 머리카락 안 보이게 숨어있던 어깨들이 몽둥이와 낫을 들고 한국 군인들을 덮쳤다. 모두가 총과 무전기와 군수품을 내팽개치고 도망을 갔다. 1명은 실종됐다가 며칠 후 돌아왔다.
5월 21일 군사작전
5월21일 하루종일 북한집단이 보여준 군사작전은 세계 게릴라 특공작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고난도 고차원의 예술이었다. 08시에 수행한 ‘군분교' 작전, 세계의 그 어느 나라 공정부대가 적군의 깊숙한 땅에 침투하여 정규군 중에서도 전투서열 1급에 해당하는 부대의 이동정보를 입수해서 어떤 도로는 깊이 절개하여 차량으로는 건널 수 없게 해놓고, 어떤 도로에는 여러 가지 중장비를 동원하여 철조 구조물, 콘크리트 구조물, 목재 등을 높이 쌓아놓고, 특공 훈련을 받은 맥가이버 어깨들은 그 뒤에 매복하고, 노인들을 앞세워 웃고 손짓하게 하여 계엄군을 환영하는 척하면서 계엄군을 가두리장으로 안내해 놓고, 몽둥이와 낫으로 때려잡는 과감한 공격행위를 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일당백의 무술 능력을 배양한 자신감이 있는 이소룡들만이 가질 수 있는 배포인 것이다. 이 병력이 300명 A조였다. 이들은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아 몰고 인근 자동차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갔다. 이때 차량을 안내하는 몽둥이 든 어깨들의 모습과 차를 타고 가는 어깨들의 몸매에서는 무술의 아우라가 발산됐다. 오전 9시. 울타리 자체가 장애물이고, 높은 망루에 중무기가 설치돼 있는 군납업체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북한군 600명에 의해 쉽게 접수됐다. B조가 광주공원 쪽에서 버스를 타고 합류한 것이다.
이 600명은 한 번도 출고된 적이 없는 이태리형 바퀴 달린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몰고 나왔다. 일부는 시내로 들어가 도청과 금남로 일대에서 그날 낮에 전개할 '옥상 살육 작전'을 준비하고, 일부는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5,403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무기고로 가는 길, 오는 길을 사전에 예행 연습한 것이다. 광주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나주경찰서는 12시에 털리고, 땅끝에 위치한 먼 곳에 있는 무기고는 오후 4시에 털렸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북한 문헌에는 통계 정리가 잘 돼 있는데 반해 남한 자료에는 낱개 자료만 어지럽게 기록해 있을 뿐, 통계 숫자로 집계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제시돼 있는 자료는 훗날 한 학자가 정리해 놓은 자료다.
반면 북한 문헌을 보자. 1985년 노동당 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 35쪽이다.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 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군용 차량 공장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장갑차 4대와 400여 대의 군용 차량을 포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또 다른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괴뢰군 제199 지원단 제1 훈련소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폭약과 뇌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이리하여 무기탈취 투쟁을 시작한 1일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폭동 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총2,240정 <멤-1> 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만 6,400여만 발이었고,수백 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뇌관들도 획득하였다.”
1982년 북한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제 595쪽이다. “600명의 광주학생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전을 선언한 데 이어 남조선에 와있는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에게 중재를 요청하였으나...". 같은 책 599쪽이다. "봉기자들이 원쑤로부터 빼앗은 중기관총, 경기관총, 카빈총 등 각종 총기류만 해도 5,400여 정에 달하였으며 소총 탄약은 29만 발. 수류탄은 500여 발, 폭약은 3,600 상자나 되었다.”
북한 자료에는 무기고를 터는 구체적인 행위도 묘사돼 있다. [광주의 분노] 제36~37쪽 기재다. "괴뢰군 제179 지원단의 무기고를 습격할 때의 일이다. 폭동 군중이 무기고를 향해 밀려들자 보초놈들도 완강하게 저항하여 나섰다. 그리하여 무기고 기습 초기에 벌써 적지 않은 청년들이 희생되었다. 정면으로 밀고 들어가면 막대한 희생을 낼 수 있다고 본 폭동 군중은 정면에서 사격전을 벌이는 한편 몸이 빠른 청년들은 놈들의 배후를 기습하게 하였다. 정면의 폭동 군중을 막는데 급급했던 놈들은 배후에서 불의에 달려들어 내려치는 청년들의 각목 세례를 받고 모두 나가너부러졌다. 보초병들을 까눕힌 군중들이 무기고를 열어제끼는 순간이었다. 꺼꾸러졌던 보초 한 놈이 정신을 차리고 무기고 앞에 모인 군중을 향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이렇게 300명 부대가 무기고를 터는 동안, 또 다른 300명 부대는 도청 앞에 모여 있는 공수 5개 대대에게 집단 발포라는 누명을 씌우기 위해 '도청과 10시 방향으로 뻗어 있는 금남로‘ 5~10층 빌딩 옥상을 점령하여 금남로 학살 준비를 하였다.
도청 앞 발포는 모략용 괴담
5월 21일 오전까지 이른바 ‘시민군’(북한 표현: 의용군)에게 피탈 당한 무기는 150정 정도로 추산된다. 5월 17일, 20사단 수색 중대 130명이 괴한 부대 수백 명에게 포로가 되어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고, 차량과 소총을 빼앗겼다. MBC, KBS, 카톨릭센터 등을 지키는 31사단 병력이 매를 맞고 총을 빼앗겼다. 20사단 지휘부 차량 부대가 300명으로부터 습격당해 M16 등 총기를 빼앗겼다. 19일 밤중 세무서가 불타면서 17점의 카빈 소총을 피탈 당했다. 나주경찰서와 인근 무기고로부터 중화기와 소화기를 피탈 당했다. 따라서 5월 21일 오후 1시 이전에는 이미 수백 정의 중화기. 카빈, M1, M16 소총들이 시민군에 확보돼 있었다. 실제로 현장 사진들에는 옥상에서 카빈총은 물론 M16 유탄발사기와 유탄을 가슴 가득히 차고 있는 우악스런 괴한이 공포 분위기를 발산하는 모습이 촬영돼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순전히 픽션이다. 김일성 편에 서서 대한민국을 모략한 영화다. 제목인 '화려한 휴가' 자체가 북한 책을 베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서 중간 제목으로 나오는 표현이다. 전두환이 작전명을 '화려한 휴가'라고 지어서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씨를 말리라고 광주로 보냈다는 내용을 압축한 표현이다. 영화에서는 광주시민들은 모두 애국자들이라는 것을 바탕에 깔았다. 전두환과 공수부대는 대한민국의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살인마들이라는 것을 바탕에 깔았다. 관람객들은 픽션을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문화공작'이라는 것이다. 좌익에게 문화를 점령당하면 영혼이 좌익이 된다. 여기에 더해 북한이 1980년에 제작한 기록영화의 일부를 발췌하여 42분 분량으로 편집한 [광주비디오]가 지하로 확산되면서 전두환과 공수부대가 살인마로 부각돼 있다. 영화 이전에 1985년에 책으로 발행되어 '5.18의 바이블'로 자리잡은 것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일명 [넘어넘어]다.
이 책은 북한 책 2개를 짜집기한 책이다. 1982년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과 1985년 노동당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다. 심지어는 북한 책에 나오는 버스 차량번호와 쌍방 인원수 표현까지 베껴쓴 책이다. [넘어넘어]에는 광주의 수많은 장소에서 발생한 충돌들이 광범위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면 황석영이 무슨 수로 총알이 빗발치는 그 많은 장소들을 다 목격했다는 것인가? 그는 신동아에 고백했다. 여러 사람들이 와서 원고를 주고 갔다고 했다. “이 책은 유명세가 있는 황석영 이름으로 발행해야 공신력이 생기고, 황석영이 유명 인사라 경찰이 함부로 체포하지 못할 것이니 당신 이름으로 발행하라" 그런데 이 [넘어넘어]가 미국에서 번역되어 출간됐다. 그 영문판에는 저자가 '이재의'로 기재돼 있다. 이재의는 1980년에 대학 2년생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현장을 묘사한 책을 썼겠는가? 이재의는 노무현-문재인 시절, 국회도서관에 근무하면서 5.18에 대해 부정적으로 쓰인 책 모두를 제거했다. 불온문서 판매처인 ‘녹두서점’ 주인 형제 중 김상집은 [넘어넘어] 원고의 주인은 자기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처럼 [넘어넘어]는 출처가 수상한데다 그 내용의 대부분이 북한 문헌 내용들로 짜매기돼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 책이 지금까지도 5.18의 바이블로 널리 읽히고 있다. 한마디로 간첩이 출처라고 볼 수밖에 없는 간첩책이 1985년 이래 지금까지 39년 동안 5.18의 유일한 바이블 역할을 해온 것이다.
북한 책에는 상황만 스토리텔링 식으로 자세하게 묘사된 것이 아니라 5.18 군사작전에 대한 전략, 전술, 교훈까지도 도출해 있다. 반면 이렇게 자세히 구체적으로 쓰인 남한 책은 없다. 오로지 상황일지뿐이고 몇몇 장병들의 짧은 회고문뿐이다. 그런데 북한은 광주 현장사진을 수백 장 찍었고, 이것들이 2015년부터 확산돼 왔다. 북한이 제작한 기록 영화도 있고, 픽션 영화도 있다. 그렇다면 5.18에 대한 애착과 주권은 단연 북한에 있는 것이다.
도청 앞 발포! 도청 앞 주변은 어떻게 생겼는가? 도청 정문은 폭이 10m 정도 된다. 도청 정문 앞에는 넓은 분수대가 원형으로 사람 높이만큼 돌출돼 있다. 정문 중앙에서 분수대 중앙을 통과하는 직선을 그으면, 직선 200m 지점에서부터 10시 방향으로 금남로 6차선이 곧장 뻗어 있다. 금남로의 한쪽 끝은 분수대 쪽이고 반대쪽 끝은 유동삼거리 쪽이다. 금남로 양쪽에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금남로 분수대 쪽에서 유동삼거리를 바라볼 때 금남로 오른쪽 길가에는 차례로 전일빌딩, 동구청, 가톨릭 센터, 광주은행 등이 있고, 좌측 길가에는 YMCA, 관광호텔, 광주 백화점 등이 있다. 문제 많은 가톨릭 센터는 분수대쪽 입구로부터 800m 정도 떨어져 있다. 도청 정문으로부터는 꺾어진 길로 1km 정도 된다. 카톨릭 센터는 7층 건물이고 전일빌딩은 10층 건물,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5월 28일부터 6월 초까지 계엄사는 뒷말이 없게 한다면서 광주를 대표하는 모든 유지들과 검사, 변호사, 의사들로 '합동조사반'을 꾸려 모든 시민이 참여 할 수 있는 공간에서 검시를 하여 검시조서를 작성했다. 병원, 의원에서는 시체검안서를 작성했다. 현장에 있던 100여 명의 진술도 있다. 스카이데일리와 5.18 자료가 많은 당시 20사단 중대장이었던 최종원 (육사 32기) 등 육사 동문팀과 한국 의료계의 스타라는 법의학자 등이 팀을 만들어 5월 21일 사망한 62명에 대한 정밀 분석을 했고, 이 내용은 스카이데일리 [5.18 특별판] 제 10쪽에 자세히 실려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62명 중 계엄군의 총을 맞아 사망한 사람은 단 1명도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간과는 상관없는 아침 시간이나 밤 시간에 죽었고, 계엄군이 없는 장소에서 죽었고, 계엄군의 총알이 날아갈 수 없는 골목에서 옥상에서 내려다보고 쏜 총에 의해 머리 부분으로부터 여러 부위를 손상당해 죽었다. 주로 전일빌딩 주변, YMCA, 가톨릭센터, 광주은행, 노동청, 동구청, 광주 백화점 주변에서 60도~75도 각도로 내려 맞아 죽었다.
5.18 측 사람들이 가장 우려먹는 사망자는 조사천과 최미애다.
꼬마 상주 조천호, 아버지 조사천의 영정사진을 들고, 천진난만한 눈망울로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린다. 자세한 사정은 알려 하지도 않는다. 이 영정사진이 곧 전두환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5.18 측은 이제까지 조사천이 트럭을 타고 도청 앞을 지나다가 계엄군의 총에 목이 맞아 죽었다고 선전해 왔다. 그러나 검안서를 정밀 분석한 결과 그는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70도 각도로 내려다보고 조준 사격한 카빈총에 의해 머리-턱-가슴 순으로 관통당한 것으로 분석됐다. 가톨릭 센터는 도청에서 전혀 보이지도 않는 1km 밖에 늘어선 빌딩들 중 하나다. 그 빌딩 앞을 장갑차 타고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도청에 있는 계엄군이 총을 쏠 수는 없다. 이런 당치도 않은 주장을 가지고 조사천을 '도청 앞 희생자'의 아이콘으로 선전해온 것이다.
또 한 사람 ‘임신부 최미애’. 당시 23세였던 그녀는5월 21일 오후 1시 50분, 광주에 북구 중흥2동 331-45 앞길에서 점심을 먹으러 오는 남편(33세, 김충희)을 기다리느라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변을 당했다. M16 소총알이 이마에서 뒷통수로 뚫고 나갔다. 이를 놓고 5.18쪽은 공수부대가 쏘았다고 선전해 왔다. 그런데 이 시각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전남대에 10만 군중에 포위돼 있었다. 시위대는 전남대 정문안으로 100m 정도 들어와 있었고 전남대 정문 앞을 가로지르는 대로 300m를 가득 메우고 있어 정문으로는 몇 명씩의 공수대원이 부대를 이탈해 나올 수 없었다. 부대를 이탈하면 탈영병이 되었다 이탈하면 밟혀 죽는다. 그런데 그런 정문에서 300m 떨어진 곳에 최미애 씨 집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얼룩무늬를 입은 어깨가 얼굴에 검은 위장크림을 바른 상태에서 총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광주 현장 사진 한 장에는 얼룩무늬를 하고, 머리를 짧게 깎고, 얼굴에 검은 위장크림을 바른 어깨 세 명이 찍혀 있다. 예비군복을 입고 공수부대 행세를 하며 시민을 쏘아죽이고, 강간도 한 것이다. 참깨 뉴스에는 이런 복장을 한 어깨들에 강간을 당했는데 몸과 옷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말씨도 이상했다는 여성들의 증언이 있었다.
무장한 괴한들이 금남로 옥상을 점령했다는 데 대한 증언들은 많다. 가톨릭 센터 직원 유팔동씨의 증언이다. "시민군들이 총을 가지고 우리센터 옥상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금남로에서 가장 높은 빌딩에서 도청을 향해 총질을 좀 해야겠다고 하더라. 총을 들고 그러니까 말릴 수도 없고..." 광주를 취재했던 일본기자 카지마 고이치 기자는 사진 촬영을 위해 관광호텔 옥상으로 올라가려고 들어갔으나 종업원이 “만약 이 빌딩에서 사진 촬영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있으면 당장에 불을 놓고 말겠다.”는 통고가 있었으니 제발 다른 곳으로 나가 달라고 했다. 한국 각 신문사 사진기자 다섯 사람이 전남일보사(전일빌딩) 옥상에서 사진 촬영을 하려다가 갑자기 몰려든 무장 시위대들이 올라와 "당장 나가라" 몰아치는 바람에 쫓겨났다. 도청 뒷골목에 '동자여관'으로 도망왔는데 이들 사진기자들이 다 놀래서 와 있더라. 목수 차용봉(25)은 "광주은행 옥상에서 무장괴한이 금남로 시민을 향해 쏘는 모습을 보았다. 계엄군은 분수대에 있었기 때문에 총을 쏘면 정면으로 날아왔을 텐데 자꾸만 옆에서 날아오더라. 시민들의 오발인 줄로만 알았다."고 증언했다. 르몽드 기자이자 뉴욕타임즈 특파원 필립 퐁스는 "시위대 중에 섞여 있는 몇 명이 계속해서 군중을 향해 총력을 가하고 있었다" 고 증언했다. 이러한 증언은 100개 정도 확보돼 있다. 모두가 유네스코에 등재돼 있는 증언들이다.
만일! 도청 앞에 횡대로 정렬해 있는 계엄군이 도청 앞을 가득 메운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면 반드시 아래의 6가지 특징이 나타나 있어야 한다. ① 모든 사람들이 총을 맞은 시간이 같아야 한다. ② 총 맞은 사람들이 모두 도청 앞 광장에 쓰러져 있어야 한다. ③ 총알을 정면에서 맞아야 한다. ④ M16은 특성상 관통력이 매우 강하다. 맞으면 몸을 뚫고 나가지 박히는 법이 없다. ⑤도청 앞 사망자에 대한 증언자들이 많아야 한다. ⑥ 검안서에 M16 특성이 나타나 있어야 한다. M16은 들어간 자리는 볼펜 자국 같지만 나간 자리는 매우 넓다.
5월 21일의 사망자 62명 중에서 위와 같은 6가지 요소를 찾은 충족시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결론적으로 도청 앞 살인 발포는 없었다. 그 대신 시민군은 도청 앞 총소리를 빙자하여 금남로 옥상에서 집단살육을 자행했다. 이날 오후 5시. "내 부하들 다 죽습니다. 철수시켜주십시오" 20일 오전에 11공수 여단장 최웅 준장의 하소연이 반영되어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7공수 2개 대대와 11공수 3개 대대는 도청에서, 3공수 5개 대대는 전남대에서 차를 타고 시쳇말로 줄행랑을 쳤다. 그 대신 광주로 들어오는 모든 도로를 광주시 밖에서 차단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차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사격을 받았다. 11공수 여단장은 지프차를 타고 철로 길을 가로지르는 순간 집중 사격을 받아 지프차가 전복됐다. 지프에 타고 있던 운전병과 무전병과 함께 무등산 미군 방공존부대로 피신하다가 여러 날 후에 귀대하는 수모와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도청은 즉시 북한군의 지휘소가 되었고 민간 접근이 철저히 금지됐다.
5월 21일의 클라이막스, 교도소 공격
북한군의 교도소 공격! 대한민국을 보우하신 하늘의 한수였다. 교도소 공격이 없었다면 광주 봉기는 전국봉기로 이어졌을 것이고, 그랬다면 제2의 남침 전쟁이 분명히 촉발되었을 것이다. 북괴군이나 간첩 1~2명으로 하여금 TNT 폭탄 더미에 점화를 시키게 하고, 나머지는 다른 3개의 도시로 잠입하여 동시다발형의 폭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도청 TNT만 폭발시키면 이는 스카드 미사일 수천 발의 효과를 냈을 것이다. 광주시가 잿더미가 되면 민심이 동요하고, 정부는 사고 수습에 대해서만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수습의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이 혼미한 정국을 이용해 봉기를 여러 곳에서 일으키면서 ‘의용군의 초청'이라는 메시지를 발표하면 곧바로 남침할 수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준비를 해놓고, 왜 김일성은 구태여 교도소를 공격하여 거기에 수용돼 있는 간첩수 170명과 2,700명의 수용자들은 해방시키려 했을까? 결국 이 명령 하나 때문에 그들은 무리하게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475명의 목숨을 바치게 했고, 그래서 주력을 잃게 되어 가장 귀중했던 대남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김일성은 땅을 치고 후회를 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교도소 공격 이전까지의 광주폭동은 대성공이었다. 이것을 나머지 3개 대도시로 확산시키려면 동력이 필요했다. 첫째 반골의 땅 전라도 주민의 열광적인 시위가 동력이었고, 둘째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2,700명 규모의 수용자들, 특히 그중에 끼어 있는 170명의 골수 간첩수들이 동력이었다. 골수간첩 170명은 그냥 숫자 170으로만 보면 안 된다. 그들이 포섭한 동지를 합치면 몇만 명이고, 이들의 개인당 능력이 일당백이다. 이들을 교도소에 가둬둔 채 TNT 폭탄에 불을 지르면 이들이 다 죽는다. 이들 170명을 다 희생시키면 남한에 파견된 수만 간첩이 조국을 불신한다. 그래서 광주시를 날려 버리려면 사전에 이들을 반드시 구출해내야만 했다.
김일성은 남한에 파견된 간첩들과 김대중으로부터 거사만 일으키면 광주 조직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 받았을 것이다. 6.25때에는 박헌영이 이런 보고를 했다가, 김일성으로부터 간첩혐의를 받고 처형됐지만, 이번은 6.25때와는 달리 광주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은 것을 어찌 아느냐? 북한 특공조는 600명이다. 그러면 총기는 600여 정만 탈취하면 되었다. 그런데 저 멀리 땅끝마을에까지 가서 뒤지고 뒤져 무기고를 찾아내고, 5,403정이라는 엄청난 양의 총기와 수류탄을 탈취해 광주로 실어 왔다. 나머지 4,800여 정의 무기는 무엇에 쓰려고?
북한 특공조는 총기를 탈취해온 이후 광주공원과 도청 지역에서 시민들에게 사격 요령을 가르쳐주면서 총을 들고 싸우라 건네주었다. 개념 없는 10대들만 더러 총기를 받았고, 나머지 광주시민들은 그들을 의심하면서 받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북한 특수조원이 "쌍간나 새끼들, 날래 받으라우~" 정체를 노출했다. 이 말을 들은 여성이 "아저씨 여기 사람 아니네요." 하고 눈빛을 반짝였다. 특수조원은 이 여성을 뒤쫓았고, 그녀를 도우려 했던 애인까지 살해했다. 이는 탈북자 수기에 기재돼 있는 스토리다.
3성장군 리을설, 그는 광주 시위 내내 여장을 하고 지휘했다. 그가 숙지하고 있던 정보에 심대한 착오가 발생하자, 곧장 김일성에 S.O.S를 쳤다. "광주시민이 무기 받기를 거부합니다." 남은 희망은 오로지 교도소 해방뿐이었다. "교도소 공격. 날래 하라우" 암호할 시간이 없이 다급하게 명령이 날아왔다. 김일성은 한마디 했지만 이를 리을설과 김중린(대남사업 총책)에게 무전 치는 사람은 여럿이었다. 계엄사가 이 무전을 청취했다. "날래 공격하라우" 이 말에는 무슨 뜻이 들어있는가? '교도소 경비를 우리 쪽 사람인 정웅 사단장 동지가 맡고 있으니 염려 말고, 빨리빨리 진행하라'는 뜻이 들어 있었다. 만일 북한군이 21일 오후 5시에만 공격했어도 교도소는 쉽게 약속이나 한 대련처럼,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함락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오후 5시에 3공수여단은 전남대 포위망을 뚫느라 사선을 넘었고, 사선을 넘고 시 외곽으로 가는 도중에 시위대의 교도소 공격이 있을 것이니 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3공수여단은 즉시 교도소로 가서 31사단 병력을 밀어내고 호를 파고, 공용화기를 준비한 상태에서 야간에 공격해오는 북한군을 괴멸시켰다. 북한 특공조는 정웅 사단장만 믿고 공격에 임했을 것이다.
왜 475명인가?
북한은 해마다 5월이 되면 북한 전역 28개 도시에서 5.18 추모행사를 벌인다. 남한에서는 광주에서만 딱 1시간 하면 끝인데, 북한은 왜 이렇게 5월을 5.18의 달로 정해놓고 전 국토에서 기념, 추모하는 행사들을 거행할까? 북한에 정신병이 돌았는가? “북조선 아리랑, 무등산의 진달래!” 애간장을 녹여내는 구슬픈 가락에 실린 가사에 광주폭동의 본질이 실려 있다. 북한의 모든 학교에서는 등교 시 스피커를 통해 '무등산의 진달래'를 들려준다.
<제1절>
광주라 무등산에 겨울을 이겨내고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어나네
동강 난 조국 땅을 하나로 다시 잇자
<후렴>
억세게 싸우다 무리죽음 당한 그들 사랑하는 부모 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
죽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
<제2절>
광주와 무등산에 봄철을 부르면서 새빨간 진달래가 곱게 피어나네
찢어진 민족 혈맹 하나로 다시 잇자 <후렴>
사랑하는 부모 형제 조국에 두고 동강 난 조국을 하나로 잇고, 찢어진 민족 혈맹을 하나로 잇기 위해 광주에 가서 억세게 싸우다가 떼죽음 당한 조국의 용사들을 기리고 슬퍼하는 감정을 담은 노래다. 바로 이 노래가 북괴군이 광주에서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무리죽음‘, 우리말로 떼로 죽었다는 뜻이다. 떼를 지어 무리 단위로 죽었다면 몇 명이나 죽었다는 말인가? 475명, 그 단서가 네 군데 드러나 있다. 이 네 가지 단서는, 연구의 기간이 길고 끈질기지 않으면 찾아내기 어려운 단서다.
1980년 6월 5일, 일본에서 천주교 정의평화협의회 이름으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거기에서는 팸플릿 규모의 책자 [찢어진 깃폭- 어느 한 목격자의 진술]이 배포되었다. 그들은 시신을 도청 지하실에서 꺼내 밖으로 내오기 시작했다. 지하실에 내려가 475구의 시체를 보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탄 것도 있어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분노에 치를 떨게 했다." 이 내용은 대북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전 성균관대 교수 이영명의 [통일의 조건] 163쪽에도 소개돼있다. 다음은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591쪽이다. "광주시의 도청 지하실 한 곳에만도 얼굴을 알 수 없도록 화염방사기에 그슬리고 찢긴 475구의 시체가 쌓여져 있는 사실만 놓고 보아도 놈들의 살육만행이 얼마나 참혹했는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는 것이다..."
[광주의 분노] 86쪽이다. “<민주투쟁위원회>는 신임괴뢰 국무총리가 광주에 온다는 소식을 봉기군에게 알려주었다. <민주투쟁위원회>는 공정대 놈들이 도청 지하실에 감추어 놓았던 475구의 봉기군 시체를 꺼내다 도청 분수대 앞에 안치하여 놓았다." ‘김일성훈장을 수여 받은 조선 기록 영화촬영소’가 편집한 기록영화 [군사파쇼도당을 반대하는 광주 인민항쟁]을 42분 분량으로 발췌한 [광주비디오] 37분 전후의 나레이션에도 475명이 명시돼 있다. 전율이 넘치고 박진감 넘치는 어조로 5.18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교도소에서 미사일로 475명을 향해 쏘았다는 것이다. 중화기와 클래모아를 가지고 공격해 가는 북한군을 섬멸시켰다는 분노의 표현이다. "경상도 괴뢰공정대 놈들이 장갑차는 물론 미사일까지 내왔다. 야수같은 인간 도살자 전두환은 광주시민 70%를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했다. “젊은 놈들은 무조건 죽여라, 관용과 인정은 군대의 금물이다. 괴뢰군 놈들은 환각제를 마시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조건 찌르고 쏘라는 살인 명령을 받았다. 민족 살인에 광분한 괴뢰군 놈들, 동족상쟁을 일삼는 남조선 군사파쑈놈들. 국민학생은 물론 세 살 난 어린이, 노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살육, 임신부 태아는 꺼내 남판치는 치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순진한 여학생들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잔인성만이 군대의 길이라고 명령했다. 피로 물든 광주는 참혹한 인간도살장이 되었고 피의 목욕탕으로 변했다. 하루에 475명이나 도청 지하실에 끌어다 죽였다. 여학생들과 부녀자들을 생매장했다. 학살된 사람이 2천명을 넘고, 부상당한 자가 1만 5천을 넘는다. 전두환 도당의 살인 만행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통일이어 어서 오라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해 싸운 광주시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은 영원히 승리한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흘린 피값을 천백 배로 받아내며 통일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민주, 자유, 통일의 열망이 솟구치던 광주, 전두환을 영원히 쓸어버릴 새로운 투쟁의 폭동은 준비하고 있다. 인민의 의사를 짓밟은 전두환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신천박물관에 기록돼 있는 워커 장군의 살인 명령이 광주에서는 '인간도살자 전두환'의 살인 명령으로 대치된 것이다.
그러면 교도소를 야간에 공격하다가 이렇게 많은 시체가 생겼다면 왜 그 시체가 없는가? 김일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인멸이다. 버마(미얀마)에서 폭파조를 북으로 데려가지 않고 현장에서 수류탄으로 폭파시켜 없애려고 한 것도, 김현희에게 앰플을 깨물게 한 것도 증거인멸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시체를 몰래 도청으로 옮겨 놓았다. 22일 먼동이 트기 전에, 또는 낮에도 인부들을 투입하여 의심받지 않게 도청으로 옮겨놓았을 것이다. 이런 도청에 광주시민이 들어간다면 그들은 노무자로 동원된 개념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들은 군분교에 중장비를 운전한 광주사람들을 살해하여 암매장했을 것이고, 5월 24일 사라질 때 인부로 사용한 광주시민들도 증거인멸을 위해 살해하고 암매장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행불자로 등록된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해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면 이 475명은 어떻게 다 치웠을까? 12명의 시체는 광주인들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 12구가 신원불상으로 판정된 것이다. 475명에서 12구를 빼면 463명, 이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1997년 12월 20일, 종로서적이 발행한 [시민군 계엄군]에는 저자 이양우 국제신문 기자가 5월 22일 광주의 변두리, 광주교도소 옆에 있는 담양구 창평에서 이상한 시체 2구를 보았다고 썼다. ”22일 아침, 리어카 2대에 관을 하나씩 싣고, 각 리어커마다 얼굴이 매우 어두워 보이는 장정 4~5명이 마치 야반도주하듯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야산으로 급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는데 각 관에는 하얀 찔레꽃이 얹혀 있었고 뒤를 따르는 가족 같은 존재는 전혀 없었다“고 했다. 5월 23일 촬영된 관들에는 하얀 찔레꽃이 얹혀진 관들이 더러 보였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가야 할 부분은 조갑제가 5월 23일 광주로 가서 관뚜껑을 열어보니 시체 얼굴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23일에 도청으로 들어갔다면 북한군의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옮기느라 칭칭 끈으로 매어진 남의 관을 마치 솥뚜껑 열듯이 열어보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다. 5월 24일 북괴군이 떠난 다음에야 광주시민들은 비로소 관에 접근할 수 있었다.
청주유골 430구
475구에서 14구를 빼면 461구. 이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2014년 5월 13일, 청주에서 별난 모습으로 가매장된 430구의 무연고 유골이 발견됐다. 흥덕지구 축구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밀림이 있는 야산을 굴착하는 과정에서 지하 1미터 깊이에 축구장처럼 넓게 조성된 공간에 규격이 일정한 나무관(칠성판) 위에 두꺼운 비닐로 감겨져 있고, 그 비닐 위에는 지워지지 않는 매직으로 군번처럼 일련번호가 쓰여 있고, 군대식으로 대오가 질서 있게 정렬돼 있으며, 일체의 유물이 없었다는 내용의 뉴스들이 보도됐다. 보도한 매체들은 매우 많았지만 그 시기가 세월호가 침몰된 지 27일 이후였기 때문에 여론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왜 세월호 사고는 하필이면 청주유골 430구가 발견되기 직전에 발생했을까? 우연일까, 기획 일까? 먼저 430이라는 숫자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1989년 2월, 전남대 5.18 연구소는 당시 43세의 여교사 최봉희의 증언을 확보했다. "방송에서는 사망자가 170명이라고 했다. 말도 안 된다. 시립공동 묘지에서 일하는 사람이 모두 594구를 운구했고, 아직도 행불자, 신원불상의 시체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5.18 연구소는 또 1988년 7월, 당시 60세의 여성 안병복의 증언도 확보했다. "5월 27일 새벽, 시체를 가득 실은 화물차가 여러 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64명인 것으로 기록됐다. 그런데 지금은 166명으로 2명이 더 슬며시 늘어나 있다. 1980년 전두환이 부정독재자 체포 명단을 결재받는 과정에서 이희성 계엄 사령관이 1명을 뺏고, 대통령 최규하가 또 1명을 뺏듯이 이 추가된 2명도 광주에서 빽있는 사람이 하나씩 추가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야 보상을 많이 받고 명예도 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64구에 청주유골 430구를 더하면 정확하게 594명이 된다. 이는 단 1mm도 어긋나지 않는 '찰카닥' 궁합의 숫자다. 이러하기에 430구는 우선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시체를 비닐로 염하지 않는다. 대량의 시체를 흰색 비닐로 감싼 경우는 광주에서뿐이다. 시체는 많고, 날이 더워 부패는 빠르고, 악취 나는 액체는 흐르고, 비닐로 감을 수밖에 없었다. 광주도청 내부 사진에는 시체를 비닐도 포장하는 공간이 사진에 의해 드러나 있다. 나무판들과 비닐 뭉치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촬영된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모은 유골이었다면 430구를 한 구씩 올려놓은 나무판 규격이 동일할 수가 없다. 비닐 위에 쓰인 일련번호는 무엇일까? 도저히 대한민국 국민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유골은 청주시가 무명의 장묘업체에 긴급히 수의 계약하여 화장했다고 주장돼 있다. 무연고 유골은 그 수가 몇 구가 되었든 일단 조달청 홈페이지 '나라장터'에 경쟁입찰 공고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청주시는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다른 경우에는 꼬박꼬박 정식 절차를 밟은 청주시가 이 430구에 대해서는 입찰 절차를 밟지 않았다. 청주시는 '현대 장묘 개발'이라는 업체를 통해 430구를 모두 화장했다고 주장하지만 반드시 보존돼야 할 화장 증명서와 봉안 증명서가 없다. 2014년 '데일리 메디' 등 메디컬 뉴스 매체들에는 충청북도에 소재한 총 4개의 화장터에서 2014년 1년 동안 화장한 총 무연고 유골 숫자는 오로지 18구뿐이라고 기사화돼 있다. 청주시가 법원에 제출한 자료에는 이 430구가 컨테이너 박스에 진열돼 있었다. 철골로 조립된 진열장을 만들어 유골 1구당 불투명 봉지 한 개씩에 담아 진열해 놓고 그 비닐 위에 일련번호를 기재해 놓은 사진이 있다. 1미터 깊이에 정렬돼 있던 유골을 화장하려면 보관돼 있던 그 상태로 트럭에 실어다 화장하면 될 것인데 왜 구태여 1구씩 정성스럽게 뼈를 추려 비닐봉지에 넣고, 진열대를 정성스럽게 만들어 진열한 다음 번호를 쓸 이유가 있겠는가? 당시 지방자치단체가 장묘업체에 지불하는 시가는 1구당 80만 원에서 100만 원이었다. 그런데 청주시는 장묘업체 '현대장묘개발'에 1구당 20,930원만 지불했다. 화장을 한 대가가 아니라 컨테이너에 보관시키는 작업에 대한 가격이었다.
2019 청주시가 법원에 제출한 사실 확인서에는 아래 내용이 기재돼 있다.“유골 수는 430이다. 이 430구는 1994년 10월 19일부터 1995년 5월까지 7개월 동안 여러 곳에 흩어진 109개의 공동묘지에서 작업 중에 발굴된 것을 집단으로 이장한 것이다. 이것이 보도되기에 청주시는 국민에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5월 16일부터 보도 통제를 단행하였다. 5월 17일과 18일, 양일간 컨테이너 박스로 임시 안장했다. 이를 위해 ‘현대장묘개발’ 업체와 수의계약을 했고, 총 가격은 1,050,128원 이었다" 1구당 2만 원이 끝인 것이다. 조달청을 통한 시장가 1구당 80~100만원에 비하면 50분의 1인 것이다. 이러니까 화장 증명서가 없고, 봉안증명서가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청주시의 변명대로 109개의 묘지에서 7개월에 걸쳐 몇 구씩 발견했다면 그때그때 절차를 밟아 화장하고 봉안했어야 했다. 7개월에 걸쳐 한 구씩 발견한 것을 어떻게 똑같은 규격의 나무판에 흰색 비닐로 똑같이 싸서 일련번호를 써서 1미터 깊이에 열을 지어 묻어놓을 수 있는가? 무연고 유골이 발견될 때마다 똑같은 곳으로 가져가 똑같은 나무판을 구해서 땅을 파고 정돈시킨 후 다시 묻고 하기를 수백 번 반복했다는 것인가? 5.18 기념재단에서는 미리 청주로 찾아가 "이 유골은 광주와 무관하다"고 실드를 쳤다.
그러면 북한은 430구의 ‘공화국영웅’을 왜 하필 200km나 떨어져 있는 청주시에까지 가져다 가매장해 놓았을까? 광주 근교에 묻으면 도시개발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돼 있다는 생각에서 먼 곳으로 정했을 것이다. 그럼 왜 하필 청주인가? 문경새재는 지금도 간첩 소굴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준동하는 간첩의 주거지는 청주시일 수밖에 없다. 청주시와 문경새재는 광주의 영웅 간첩 손성모가 활동한 곳이었고, 체포된 곳이었다. 광주 현장 사실상의 지휘관이었던 손성모가 청주 지리를 잘 알기 때문에 곧장 청주시 흥덕구 밀림 지역을 선택했을 것이다.
청주 유골 북송작전
매우 수상한 방법으로 컨테이너 박스에 진열된 430구, 결코 청주 화장터에서 화장되지 않았다. 청주시의 축구공원 조성사업이 예상외로 진도가 빨라지자, 다급한 청주시 간첩이 북한에 S.O.S를 쳤을 것이다. 5월 중순경이면 발굴될 것이다는 판단도 해서 보고했을 것이다. 5월 중순이면 발굴될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북한 두뇌들은 어떤 작전을 생각해냈을까? 발굴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발굴되더라도 이를 여론에 숨기고 조용히 빼돌렸다가 기회를 보아 가져와야 한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여론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발굴되기 1개월 전쯤 여론을 모두 흡수할 수 있는 블랙홀 사건을 일으키려 했을 것이다. 2014년 3월 31일, 북한은 느닷없이 서해를 지키는 제 2함대 사령부에 전통을 보냈다. “오늘 10시부터 하룻동안 인천으로 연결되는 16개 지점에 사격훈련을 실시하니 모든 선박의 접근을 금해주기 바란다” 인천으로 잠수정을 보내 공작요원을 보내겠다는 의도였다. 이런 뜬금없는 전통을 의심하지 않는 군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세월호 침몰은 그냥의 사고가 아니라 다수의 인명을 학살하기 위해 정교하게 기획되고 공작된 사고였다. 세월호 사고를 부풀린 사람들은 좌익과 언론들이었다. 모든 여타의 잡다한 이슈는 모두 세월호라는 블랙홀에 다 흡수돼 여론화되지 못했다. 5월 13일에 작업 도중 인부들에 의해 발굴된 이 희대의 이변 430구의 무연고 유골은 당일과 그 다음 날 수많은 언론에 노출됐지만 세월호 여론에 묻히고, 청주시의 별난 보도 통제 조치로 인해 여론화되지 못했다. 이제 유골을 가져가는 사업만 남았다.
2014년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인천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게임 회원국은 45개국, 다른 나라들은 일찌감치 참가 의사를 통보해 왔는데 유독 북한만 시큰둥했다. 국제사회 모두가 북한은 불참한다는 인식을 굳히고 있었다. 그런데 5월 하순, 갑자기 호들갑을 떨면서 북한도 게임에 참가하겠다고 했다. 너무나 태도가 급변해서 Fox 뉴스가 북한의 태도가 이상하고 수상하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참가하면 시간 맞춰서 참가하면 됐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무슨 실무 접촉이니 조 추첨이니 이슈를 걸어 남쪽의 의심스러운 공무원들과 여러 차례에 걸쳐 회담을 하는가? 45개국 모두에 대해서도 실무 접촉이니 조 추첨이니 해서 여러 차례씩 만나는가? 이 역시 수상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7월 17일 ‘인천아시안게임 남북 실무 접촉’이라는 명목으로 45개국을 제쳐놓고 남북만 판문점에서 만났다. 다른 참가국인 45개국 각각과도 실무 접촉 회담을 하였는가? 아니다. 남한측 대표는 권경상(아시안게임 조직위 사무총장 겸 청산실장), 정기영(조직위 국제본부장), 김영일(조직위 자문위원)이었고 북측 대표는 손광호, 장수명, 고정철이었다. 북한측 3명은 광주에 왔던 얼굴들이었다. 청산실장이라는 직책은 북 선수단의 짐을 맡았다가 다시 포장해 넘겨주는 일을 하는 총책이었다.
8월 17일, 북한의 대남사업총책 김양건이 뜬금없이 박지원, 임동원, 김홍일을 찍어서 개성에서 만나자고 했다. 김대중 사망 5주기 기념을 위한 화한을 보내겠으니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화환을 보내려면 판문점을 통해 보내면 될 일인데 왜 빨갱이로 통하고 간첩으로 의심받는 세 사람을 콕 찍어 개성으로 오라 하는가? 공작 차원의 냄새가 진동했다. 정부가 어떻게 이런 수작에 고분고분 이 3인의 수상한 자를 개성으로 보냈는가? 참으로 한심한 정부가 아닐 수 없다. 이틀 후인 8월 19일, 조 추첨을 빙자하여 북한대표단이 8명씩이나 인천에 왔다. 컨테이너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최종 점검을 청산실장 권경상 등과 함께 최종 점검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의심의 눈으로만 현상을 해석하는가? 10월 4일에 이변 중 이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이변은 달리는 해석이 안되는 공작 차원의 이변이었다. 10월 4일 폐막식에 북한 권력 3인방인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인천에 와서 하루종일 하품만 하고 기다리다가 폐막식에는 형식적으로 참석한 후 전용기를 타고 떠난 것이다. 외국 국빈은 폐막식에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국빈은 개막식에만 온다. 폐막식에 와야만 청산실장이 북한 선수단의 짐을 챙겨줄 수 있다. 김정은 전용기를 권력 3인방이 타고 온 것은 달리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들이 하루종일 인천공항 VIP룸에서 하품을 하는 동안 대통령 안보실장 김관진도 하루종일 그들 옆에 앉아 똑같이 하품만 하다가 돌아갔다. 김관진! 북괴가 가장 무서워하는 남조선의 장군이라고 포장된 장군, 이것이 어째서 의심스럽지 않았는가? 장군은 머리가 장군이어야 장군인 것이다. 김정일 전용기는 남한에서 치외법권 제1호다. 거기에 무엇이 실리건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이 농락당하고 네다바이 당한 것이다.
이것이 청주 유골 430구의 행방인 것이다. 그러면 475구에서 430구를 뺀 나머지 45구는 어디로 갔을까? 이들은 이삭들이다. 그중 12구는 미처 챙기지를 못해 광주에 의해 ‘신원불상자’로 취급되어 광주 묘지에 묻혔고, 2구는 부산 국제신문 기자 이양우가 창평에서 찔레꽃이 얹힌 관 2개가 야산으로 리어커에 실려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는 그것이다. 나머지들은 광주 어딘가에 찔레꽃과 함께 묻히기도 했을 것이고, 중상 상태에서 북으로 가다가 죽기도 했을 것이고, 북에 가서 죽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가 바로 5월 21일의 마침표다.
5월 22일
살인 기계로 훈련된 600명 중 475명을 잃은 북한 게릴라 집단, 만일 계엄군이 금방이라도 다시 밀고 들어오면 꼼짝없이 잡혀 실체가 드러난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게 하려면 폭탄으로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야 한다. 자신들이 재가 될 바에는 고기값이라도 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저들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TNT로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놓고 소문이 나게 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면 광주시 전체를 히로시마로 만들어 버리겠다.” 이렇게 해서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5월 23일 힌츠페터가 다시 오는 날, 많은 심리전 모략사진, 시체장사 행사를 기획하여 광주 시민 모두가 나와 시체의 관들 앞에서 통곡하고 시체 명단을 바라보게 하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 촬영해서 힌츠페터를 통해 세계에 내보내야 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475명을 읽호 남은 125명의 북 특공조들은 복면을 쓰고 시내로 다니면서 무력쇼를 했다. ‘우리를 믿고 나서달라’는 호소였다. 하지만 이때에는 이미 광주 시민들에게 “속았다”, “이상하다”는 정서가 확산돼 있어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계엄군이 도청을 비우고 광주시를 빠져나가자 광주시는 사람없는 빈 공간이 되었고, 거리는 폭격맞은 도시처럼 더럽혀져 있었다. 광주유지들이 나서서 “무기를 반납하자” “계엄군 측과 협상하자” 의견들을 냈지만 갑론을박으로 끝나고 ‘수습대책위원회’라는 이름만 남기고 흩어져버렸다. 이날 계엄 당국은 이념이 의심스러운 정웅 사단장을 계엄 작전 라인에서 해임하고, 윤흥정 전투교육사령관을 소준열 중장(3성)으로 전격 교체했다. 오전 10시였다.
5월 23일과 24일
23일 북한군 집단은 도청 주위에서 대대적인 시체장사 쇼를 벌이면서 수많은 사진을 촬영했다. 5월 24일 새벽, 갑자기 광주시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막고 있는 공수부대 특히 광주와 목포를 연결하는 통로를 막고 있는 공수부대를 철수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으로 인해 5월 24일 낮에 북한 집단이 목포 지역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목포로 가는 통로만 열어놓는다고 하면 의심을 하기 때문에 모든 길목을 다 열게 한 것이다. 철수계획을 알고 있는 간첩들이 ‘계엄군이 철수하는 길목을 지키는 교도대 병력’에게 거짓 정보를 주었다. 오후 1시에 매복지점을 통과한 부대가 11공수였다. 간첩은 “반란군이 군복을 입고, 장갑차 1대를 앞세우고 15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교도대가 맡고 있는 도로 봉쇄 지역을 공격하려고 접근하고 있다"는 그럴듯한 정보를 무전으로 전해주었다. 이때 이 길목을 교도대가 90미리 무반동총등 중화기를 가지고 나와 지키고 있었다. 일부 간첩이 매복지점 직전 공간에서 달리는 공수부대를 향해 총을 쏘았고, 이에 공수부대가 응사하면서 차는 더 속도를 내면서 달렸다. 2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와서는 교도대원들에게 “폭도가 총을 쏘면서 접근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달려갔다. 정말로 장갑차를 타고 오는 부대가 총을 쏘고 오는 것을 확인한 교도대원들은 틀림없이 시민군이 쳐들어온다고 생각한 나머지 무반동총등 중화기를 쏟아부었다. 무전으로는 거짓 정보를 주고,총질도 하게 만들고, 시간에 맞추어 오토바이를 투입하고, 매우 정교한 작전이었다. 공수대원 11명이 사망했고 34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것이 바로 치밀하게 기획된 게릴라 작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교도대’라는 것은 전투교육사령부 내에 있는 단위 부대로 장교급 학생들에게 대포와 각종 중화기 사용법을 교육시켜 주는 시범 조직이다.
이날 전교사사령관 소준열 중장은 광주시 수복 작전을 계획하여 계엄사령관에게 제출했다. 한마디로 대규모 정규 작전을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정공법을 엄청난 인명의 살상을 동반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었고 그 대신 특공법을 택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에 따라 계엄사는 특공법을 활용하여 5월 25일 이후 의명 실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5월 25일 이후에 재진입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는데 이상하게도 광주시를 봉쇄한 모든 부대를 철수시켜 북한군이 24일 낮에 목포로 이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은, 간첩의 역할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북한군 부대700여 명(특수군 125명+민간인 600여 명)이 유유히 광주에서 빠져나간 사실은 계엄군이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5월 25일
광주시민들은 생필품이 고갈되고 식량이 떨어지고, 강도와 도둑과 강간범이 들끓는다며 계엄당국 측에 빨리 진압해 달라고 호소를 했다. 이런 보고를 받은 최규하는 마음이 급했다. 그는 5월 25일 오후 5시 40분, 전투교육사령부에 급히 도착했다. 계엄사령관을 비롯해 국방장관, 김종환 내무장관, 진의종 보건사회부장관, 최종환 건설부장관, 전남 도지사를 위시하여 2군 사령관 등 군 지휘 계통의 장군들이 모인 가운데 현장 대책 회의를 주재했다. 비관적인 상황을 보고받은 최규하 대통령, “내가 지금 곧바로 광주시에 가서 학생들과 마주해 대화를 나누어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섰다. 시위대를 학생 세력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소고집으로 알려진 최규하, 힘도 셌다. “각하, 큰일납니다. 절대 가시면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장군들이 울면서 가로막고 매달렸다. 다시 물러앉은 대통령, 작전 참모에게 물었다. “시민들의 불편이 보통이 아닌데 속히 수복해야 한다. 희생이 얼마나 예상되느냐?” “네, 각하. 줄여 잡아도 150명이 넘을 것입니다.” 뜸을 들인 대통령, “속히 수행하라” 구두 명령을 내렸다.
작전참모 김재명 소장은 ‘상무 충정 작전 지침서’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당시 계엄사령부가 파악한 상황이 요약돼 있다. “23일 이후 이성을 되찾아가는 징후가 보였다. 폭도들은 주요 도로변에 기관총을 배치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양민을 협박 난동하고 있다. 군은 그동안 양민을 보호하기 위해 선무작전과 봉쇄작전을 수행하면서 자제력을 견지해 왔다. 광주시민은 식량과 생필품 고갈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노약자와 환자의 희생이 증대하고, 의약품이 고갈되고 있다. 폭도들의 상당수가 살인, 방화를 일삼는 흉악범과 불량배가 급증하고 있지만, 지방의 자치 능력과 치안 회복 능력은 상실돼 있다. 이런 틈을 타 불순분자와 무장공비의 침투 가능성이 증대하고 있다.” 폭도 속에 무장 게릴라가 들어와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전 지침도 들어있다. “본 진압작전은 전투 교육 사령관 책임하에 실시한다. 양민과 계엄군의 피해를 최소화한다. 5월 27일 00:01에 작전을 개시한다.”
도청이 비어있다는 말이 퍼지자 호기심에 차있던 무개념의 아이들과 청년들이 하나씩 둘씩 도청에 들어갔다. 이들은 운동권도, 대학생도 아니었다. 대학생은 김종배, 허규정이 다였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갑론을박이 계속됐다. 홍남순 변호사와 김성용 신부가 여기에 들어와 젊은이들의 의협심에 불을 질렀다. 김성용 신부의 발언이 광주의 반골 의식을 대변했다. “무기를 반납하지 말라. 계속해서 강경하게 투쟁하라.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목욕까지 하고 왔다. 학생들도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총기를 반납하지 말고 끝까지 투쟁하라” 요구사항은 “비상계엄을 철폐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정치 일정을 단축하라” “광주 시민을 폭도로 부른 것을 사과하라”, “시민장을 실시하라.” “구속자 전원을 석방하라”, “피해를 보상하라”.....등이었다.
25일 밤 10시, 학생 수습 위원회라는 급조된 이름으로 회의가 열렸다. 무기 반납을 주장해온 온건파 김창길 위원장과 김성용 신부와 홍남순 변호사로부터 강경 투쟁을 주문받은 김종배 부위원장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때 강경파인 박남선이 권총을 뽑아들고 김창길을 쏘아 죽이겠다며 협박해서 내보내고, 김종배를 위원장 자리로 추대했다. 박남선은 누구인가? 당시 26세의 골재채취 화물차량 운전수였다. 1954년생으로 중학교 2년을 중퇴하고 19세(1973)에 절도죄로 징역을 살고, 25세(1979)에는 협박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그는 자기가 시민군 총사령관을 했고, 어깨 부대 600명을 자기가 지휘했고, 도청에 있던 계엄군도 자기가 몰아냈다고 법정에서 호기를 부렸다. 그런데 그는 유공자 급수 10급이다. 유공자 급수는 1급에서 14급까지 있는데 1급은 1991년 화폐로 3억1,700만원을 받았고, 이에 더해 매월 연금 426만원을 받았다. 아무리 따져봐도 그 정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김대중밖에 없어 보인다. 급수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고교생이었던 윤기권은 경찰 15명을 닭장차에 감금시켰다는 공로로 1991년 2억원을 보상받고, 그해 3월 북한으로 가서 대남방송을 했다. 겨우 10등급을 받았다고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불만을 표했던 박남선, 계엄검찰부에 기록된 그의 진술서를 보면 그가 왜 사형선고를 받았는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5월 23일 오후 2시부터 적심자 병원에 있는 시체 19구를 도청으로 옮기라 해서 도청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도청에 있는 시체를 옆에 있는 상무관으로 이동시키라 해서 부역을 했다. 5월 25일 05시경 김종배 부위원장이 상황실장을 맡으라고 했다. 45구경 권총을 어깨에 차고 다녔다. 김종배로부터 “김창길이 우리 모두를 계엄군에 넘겨주려 한다”는 말을 듣고 분개했다. 대책 회의가 열리자 회의를 하는 부지사실로 들어가 김창길을 권총으로 협박해 내보냈다.”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시체를 나르는 부역자 노릇을 한 것과 김창길을 권총으로 협박해 위원회에서 몰아냈다는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일까? 상황실장직을 맡았다는 것이 사형을 선고받을 만한 죄인가?
박남선을 상황실장 하게 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부위원장에게 위원장이 되어 낯선 청년들에게 직책을 정해준 김종배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물을 수 있는가? 수습 대책 위원회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위원장에 김종배(26, 학생, 무기징역), 대변인에 윤상원(본명 윤개원, 자상으로 사망), 외부담당 부위원장에 정상용(30, 사원, 무기징역), 내무담당부위원장에 허규정(27, 학생, 15년형), 상황실장에 박남선(26, 화물차 운전수, 무기), 기동타격대장에 윤석루(19, 양화공, 무기), 기획실장에 김영철(32, 사원, 7년형), 민원실장에 정해직(29, 교사, 5년형), 조사부장에 김준봉(21, 사원, 5년형), 경비 담당에 김화성(21, 종업원, 5년형), 보급부장에 구성주(26, 건재상, 2년형) 등이 위원회의 간부들이었다.
5월 26일
5월 25일 밤중에 형성된 이들은 다음날인 26일에 무엇을 하였는가? 26일 아침부터 계엄군이 진입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자극된 김종배는 강경파들을 이끌고 무장한 시위대를 계엄군이 올 만한 길목들에 배치하고 다녔다. 도청 내의 인력을 모두 기동타격대로 재편했다. 모두에게 총을 내주고 차량도 내주었다. 오후 6시 30분, 도청 부지사실에 대표들이 모였다. 이종기, 장세균, 조철현, 조아라, 이애신, 정상용, 김종배 등이 모여 황금선의 사회로 무기 반납에 관한 회의가 열린 것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기 반납쪽으로 기울여졌다. 그런데 갑자기 강경파가 들고 일어났다. 조아라, 이애신, 오병문, 김종배, 정상용등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 기동타격 대원 8명을 이끌고 다시 들어가 “왜 우리를 계엄군에 팔아넘기려 하느냐”며 무기 반납을 주장했던 노수남 등 온건파들을 구타한 후 부지사실에 감금시켜 버렸다.
강경파들의 주장은 참으로 설익은 주장이었다. “지금 미 7함대가 제주도 부근에 주둔하여 군부세력을 견제하고 있다. 광주에 피해가 많아서 결코 계엄군이 무력으로 진압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종배 위원장으로부터 대변인으로 임명받은 윤상원은 누군가가 보내준 외신기자에게 “결사항전”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보냈고, 김종배는 26일 밤 11시에 서울종합청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계엄군이 공격해오면 우리는 도청을 폭파하겠다” 협박을 했다. 이 순간 계엄군은 이미 작전 개시에 돌입해 있었다.
5월 27일, 진압작전
계엄군은 전남도청 지하에 TNT 폭탄이 조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창길 등 온건파 젊은이들이 전교사에 가서 TNT 폭탄의 존재를 알려주면서 제발 조립된 폭탄을 해체해 달라고 간청을 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됐다. 전라남북도 계엄을 관리하는 모든 부대를 통털어 폭탄을 조립하거나 해체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전교사 병기근무대 소속의 문관(5급갑) 배승일씨 뿐이었다. 사령관은 배승일에게 보조원 3명을 붙여주면서 잠입 지시를 내렸다. 죽을 수 있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온건파 학생들을 따라나섰다.
5월 25일 밤에는 밤 9시부터 새벽 01시까지 작업을 했다. 도청 2층에서는 이 시각에 강경파가 온건파를 몰아내고 있었다. 퇴근 후 26일에 다시 잠입하여 오전과 오후 꼬박 작업하여 TNT 폭탄 2,100발과 수류탄 500개로부터 뇌관을 제거했다.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고 한다. 광주는 배승일 문관과 3명의 조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뇌관이 제거된 줄도 모르고, 2층에서는 김종배가 서울 종합 사무실에다 광주를 폭파시킬 것이라고 협박 전화를 한 것이다.
핀센트식 진압을 하라는 지시에 따라 소준열 사령관은 수색팀을 광주에 보내 폭도들이 모여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파악했다. 폭도들은 주로 도청, 전일빌딩, YMCA 관광호텔, 광주공원에 모여 있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리고 정보가 자꾸 새어나가는 것을 염려하여 작전을 연기했다는 지시를 다른 지휘관에게 전파하고, 작전에 직접 관련된 지휘관만 따로 불러 몰래 몰래 작전 지시를 내렸다. 작전 개시 시각은 26일 밤 11시, 전남도청은 3공수 특공조가, 광주공원은 7공수 특공조가,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은 11공수 특공조가 점령한 후 20사단에 인계하는 것이었다.
전남도청 점령을 명 받은 3공수 11대대장 임수원 중령은 편종식 대위 등 장교 11명과 사병 66명으로 특공조를 꾸려 밤 11시 광주비행장을 출발했다. 주답마을-조선대 뒷산-전남기계공고-노동청을 거쳐 도보로 이동하여 27일 새벽 4시에 도청에 도착했다. 기밀은 여기에서도 새어나갔다. 27일 새벽 01시,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계엄군 진입 사실을 방송했다. 광주에 이르는 모든 진입로에 배치된 무장시위대가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광주공원을 지키던 무장시위대 100여 명이 도청을 지키는 시위대 150명과 합세했다. 250명대 80명, 새벽 4시 10분에 3공수 80명이 접근하자, 전남도청 옥상과 이웃 상무관과 전남대 부속병원 옥상에 거치됐던 기관총들이 불을 뿜었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임수원 대대장이 SOS를 보내자 20사단이 즉시 투입돼 도청 외곽을 포위했다. 3중대, 2중대, 1중대, 특공중대, 4중대, 11중대 순서로 후문의 담을 넘었다. 1개 중대가 담을 넘는 동안 다른 중대들은 기관총들을 향해 응사함으로써 담 넘는 순간을 엄호했다. 70분 동안의 총격전, 도청에 공수대원들이 들이닥치자 대부분이 손을 들고 항복했다. 05시 21분에 도청을 완전 점령한 후 07시 30분에 20사단 61연대에 인계하고 08시에 비행장으로 복귀했다. 이 과정에서 특공조 1명이 사망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끝까지 저항하던 무장시위대 4명이 사살됐고, 29명이 체포됐다.
11공수여단의 특공조 37명은 장교 4명과 사병 33명으로 구성되어, 광주 비행장에서 주답으로 공수되었다. 27일 01시 50분경 조선대 뒷산을 거쳐 도청 후문 쪽으로 접근해, 도청 담을 끼고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에 도착했다. 04시 38분이었다. 특공조가 들이닥치자 관광호텔에 있던 30여 명이 순순히 투항했다. 하지만 전일빌딩(전남일보)에 진입하던 제2지대는 전일빌딩 무장조 40명으로부터 기관총 사격을 위시한 총격을 받았다. 치열한 총격전이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옥상 밑에 있는 10층에서 최후 결전이 전개됐다. 100분 동안의 격전 끝에 06시 20에 전일빌딩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특공조 2명이 부상을 입었고, 무장시위대 3명이 사살됐다. 전일빌딩 10층에 나있는 문제의 탄흔들은 이 결전 과정에서 벌어진 치열한 총격전이 남긴 탄흔일 것이다. 전일빌딩을 점령한 11공수 특공조는 이어서 YMCA건물을 점령하여 06시 40분에 61연대에 인계한 후 07시 15분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7여단 특공조는 201명(장교 20, 사병 181)은 27일 01시에 광주 비행장을 출발하여 광주공원을 향해 가던 도중 용삼동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시위대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상호총격 끝에 폭도 1명을 사살하고 1명을 체포했다. 그후 산발적인 총격을 받았지만 광주공원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상하게도 무장시위대가 전혀 없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안도를 했다. 하지만 별 경계의식 없이 수색을 하다가 기습사격을 당해 공수대원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후방 지원업무를 담당한 20사단 3개연대는 27일 02시경 숙영지 전교사를 출발하여 03시 30분에 광주 시내로 들어왔다. 진입 과정에서 총격을 당해 1명이 부상을 입고, 폭도 2명을 사살했다. 그리고 08시를 기해 광주시를 완전 평정했다. 27일 05시 19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국방장관 주영복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했고, 주영복 장관은 05시 23분에 최규하 대통령에 수복작전이 종료되었음을 보고했다.
현장사진들을 보면, 공수부대가 떠나가는 순간, 광주 시민들이 도로변은 물론 도로 전체에 나와 작전을 마치고 가는 공수부대에 고맙다며 박수를 치고 포옹도 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1980년, 81년, 82년, 전남의 아이콘 박지원은 세 차례에 걸쳐 전두환을 ‘영웅적인 지도자’라고 호평을 했다. 1982년 KBS 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한국에는 전두환 대통령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12.12와 5.18은 영웅적 결단이었다”1985년 치러진 제12대 총선에서 전두환이 이끌던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 수에서 전라남북도 의원에 전국 최다였다. 1980년대의 전라남북도는 전국에서 최고로 전두환에 호응했다. 당시 전두환은 전라도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였다.
폭동의 주역들, 광주엔 없었다.
도대체 당시의 5.18 영웅들은 누구였고 최고 영웅은 누구였나? 운동권이 치는 최고의 5.18 영웅은 윤상원이다. 1989년 시인 박노해가 [윤상원 평전]을 썼다. 그의 생가가 신격화돼 있고 윤상원 기념관도 있다. 5.18 관련자 중에서 그만큼 신격화된 인물은 없다. 그럼 그의 공적은 무엇인가? 5월 18일과 19일 ‘투사회보’를 통해 유언비어 일부를 지어내 제한된 숫자의 프린트물로 뿌렸고 5월 24일까지 녹두서점과 보성기업 사이로 숨어다니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각자 도생하라고 권고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5월 25일 오후 도청에 들어와 김종배에 의해 ’학생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지명되었고, 26일 오후 6시 누군가가 모아준 몇몇 외신기자들 앞에서 '결사항쟁'을 선포한 후 27일 도청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다. 자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상황일지에는 기록돼 있지만 화상설, 총살설 등 뒷말이 여러 개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운동권에서 이름을 떨치던 박관현은 5월 17일 멀리 여수로 도망갔다가 수배되어 체포돼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광주사람들로부터 비겁한 자로 공격당하자 단식해서 사망했다. 김대중으로부터 300만원을 받은 정동년은 지금까지 5.18 대부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는 형이 운영하는 양복점 조수 등으로 별 직장없이 전전하다가 운동권이 되었고, 5월 17일 자정에 체포돼 곧바로 투옥되었다. 윤한봉은 5월 17일 아기를 업은 여동생과 부부행세를 하며 여동생 똥가방을 차에 놓고 내리는 둥 겁에 질려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화물선에 몰래 타고 미국으로 도망갔다. 이와 같이 5.18은 운동권이 주도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러면 5월 25일, 처음으로 도청에 들어가서 26일, 결사항전을 선언했다가 27일 새벽에 공수특공조에 두손들고 항복한 ’학생대책위원회‘ 간부들은 무슨 공적을 세웠는가? 전남대 출판부가 2001년에 발행한 [5.18항쟁증언자료집]에는 이들의 자술 증언 내용들이 기재돼 있다. 한결같이 “무기고는 광주 사람이 한 것이 아니었다. 도청은 24일까지 위엄있어 보이는 높은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못 들어갔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낯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자신이 개념없는 사람들로 갑론을박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이야기로 기술돼 있다. 한마디로 5월 20일과 21일에 수행됐던 눈부신 작전들은 ’학생대책위원회‘가 수행한 것이 아니라는데 대한 고백인 것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던 그 실력이라면 5월 27일 새벽 도청 등에 몰려있다가 “손들엇”하는 소리에 두 손을 들고 순순히 항복을 했겠는가?
5.18에 대한 미국의 시각
객관적 위치에 있는 미국은 5.18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을까? 미 연구소 연구 결과가 있고, 2020년 5월 11일, 비밀 해제된 미 CIA 문서 122건 522쪽이 있다. 1985년 미국 헤리티지재단연구소는 여러 명의 연구원들을 광주로 파견해 현지 조사를 한 후 9월 16일자로 [광주사태 재조명] (South Korea’s Kwangju Incident Revisited)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요점만 추려본다. 소요 첫날부터 뜬소문이 떠돌았다. 첫날 사람들이 다치지 않았는데도 40명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김대중씨가 처형됐다는 뜬소문도 돌았다. 군인들을 여러 날 굶긴 후 마약을 투여해 광주로 보냈다는 소문도 있었다. 광주 시민들이 가담한 것은 바로 이런 소문때문이었다. 5월 20일 폭도들은 시청과 TV방송국에 불을 질렀다. 강제 징벌한 버스와 택시가 시내를 질주했고, 경찰관 4명이 차에 깔려 죽었다. 시위를 처음 주도했던 사람들은 그들보다 훨씬 폭력적인 극렬분자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이건 우리 의도가 아니었는데’ 하면서 아연실색했다. 당초엔 대대적인 지지를 보냈던 시민들 역시 5월 22일부터는 ‘이건 아닌데’ 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의사, 변호사, 언론인, 종교인 등 60명이 나서서 수습시민위원회를 만들었다. 기독교 교회 목사인 수습시민위원장은 사망자가 191명, 그중 50명은 광주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망했다고 말했다. 사망자 수가 1,000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2,000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미국이 신군부와 공모하여 광주학살을 저질렀다는 사람도 있었고... 이런 억지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아픔을 치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픔을 재생산하고, 한미 우호관계를 이간질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두환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로, 조사결과가 모두가 다 거짓말이었다. “광주시민들은 광주시민이 1,000명, 2,000명 죽었다고 말해야 수긍하고 191명 죽었다고 하면 수긍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사망한 것은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공격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쌍방의 충돌과정에서 발생했다. 404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3명이 사형, 7명이 종신형으로 선고됐지만 곧 사면되었다. 현재 복역중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광주사대 진압권은 순전히 한국정부에 있다. 미국의 간섭은 전혀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다. ‘반란사태’의 규모로 보아 사망자 수는 상대적으로 극소수다. 이는 한국 정부가 그만큼 인명을 중시했다는데 대한 증거인 것으로 인정된다”
문 정부는 2020년 5월 13일, 미국이 비밀 해제된 CIA문서 43건 140쪽을 한국 정부에 이관했다며 5.18기념재단과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 게시케 했다. 그런데 이는 국민을 속인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정부에 이관한 문건은 122건 522쪽이었다. 문정부는 100을 받아놓고 30만 받았다고 국민을 속였다. 미 국무부 홈페이지에 게시돼 있는 자료들 중에서 중요한 정보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5.18은 불순문자들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배후조종한 사건이다. 공산주의자들과 김대중 추종자들이 전문적인 수법으로 군중을 선동하여 군중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키게 했다. 구호는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것이었다. 폭도는 15만명, 50명의 극렬주의자와 그 추종자 500여 명이 이들 군중을 이끌고 있다. 북 침투자들이 목포로 상륙하여 광주로 몰려왔다. 극렬분자들이 인민재판을 열어 즉결 처형을 자행했다. 희생자가 적었던 것은 계엄군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자위권을 사용하지 않고, 끝까지 자제한 덕분이고, 동시에 진압과정에서 사용한 기발한 점 단위 진압방법을 택했기 때문이고, 죽음을 무릅쓰고 도청건물에 폭도들이 설치한 폭약에서 신관을 제거함으로써 광주시 재탈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대참사’를 미연에 방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칭찬받아야 할 부분이다. 끝으로 상황 종료시 검거된 폭도 1,740명 중 1,010명을 훈방하여 관용을 베푼 것도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북한에는 5.18이 어떻게 알려져 있나?
2009년 10월 탈북한 인민군 출신들이 ‘자유북한군인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 단체 명의로 16명의 5.18 관련 수기를 모은 450여 쪽 분량의 증언집을 발간했다. [화려한 사기극 실체 5.18]. 이 중 40쪽 분량에는 함경남도 금야군 고등중학교(준고등학교) 여교사의 수기가 있다. 16명 모두의 수기가 100% 다 5.18이 북한의 작품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생생한 묘사물들이지만, 그중에서 구체성이 가장 강한 스토리가 영어교사의 스토리일 것 같다. 40쪽 분량의 스토리를 최대한 압축해본다.
“1980년 광주 인민봉기가 한창이던 때, 북한은 24시간 광주 현장을 생생하게 방송해주었다. 저들끼리 물고 뜯고 잘도 싸우네 이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1981년초부터 군인들과 간부들의 입에서 그것은 공화국 특수부대 군인들이 내려가서 일으켜 싸운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마치 전설처럼 온 사회에 퍼져나갔다. 말해주는 이나 듣는 이나 들뜨고 즐거웠다. 광주사태 이야기만 나오면 사적인 공간이든 공적인 공간이든 구수했고 신났다. 마치 자기들이 주인공이 되는 듯한 착각도 했다. 무장한 시민군이 경찰서를 습격하여 총기들을 빼앗고, 차량에 올라 세를 과시하며 광주시를 누비는 모습을 해마다 방송해주면 마치 자기가 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하나하나의 행동거지 속에서 북한의 훈련 냄새가 났다. 일터에서도 광주 얘기가 나오면 마치 자기들이 갔다 온 듯이 ‘광주사건! 그거 다 우리 공화국 군대가 했어요. 장갑차 뺏어 몰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 훈련을 받은 우리 사람들이 다 한 것이요. 평범한 시민들이 뭘 알겠어요? 우리 쪽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어요! 이 글을 쓰기 전에 탈북한 40대 이상의 사람 23명에게 일일이 물어보았더니 농촌 여성 1명만 빼고 22명 모두가 위 사실에 동의했다.
북한 사회는 너무도 봉건적이라 사생활에서 소문이 나면 얼굴을 들지 못한다. 내가 바로 내연녀로 내연남의 자식 두 명을 낳았던 사람이다. 이 부끄러운 사실을 남한에 와서까지 까발리면서까지 이 수기를 쓰는 이유는 남한 국민들이 사실을 너무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내 유년기의 꿈은 김일성 종합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성적이 좋았던 나는 학교장 추천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에 가게 돼 있었다. 그런데 막상 군단 교육부로부터 내려온 통지서에는 다른 학교 교장 선생님의 아들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세상이 캄캄해졌다. 식음을 전폐하고 여러날 누워있던 내게 군당선전부에 다니는 오빠가 친구를 데리고 인사를 시켰다. 절뚝거리며 다리를 저는 오빠 친구, 그가 바로 ’공화국영웅‘이라 했다. 그리고 내 이름이 기록돼 있는 김일성 종합대학 입학증을 건네 주었다. 오빠 친구 안창식, 그가 공화국영웅이기에 중앙당에 힘을 써서 성사된 것이라고 했다. 무슨 공을 어마어마하게 세워서 공화국영웅이 되었는지에 대해 감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대학 2학년때 오빠로부터 소식이 왔다. 그 사람이 총상으로 부상 당한 다리에 골수염이 생겨 무릎 아래를 절단한다는 소식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대학을 졸업하고 3대 혁명소조로 황해남도 연안군 풍천리에 나가있었다. 공장과 농촌의 생산라인을 감독하는 조직이었다. 그 사람이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 군당간부의 신원조회차 함경도에서 먼 길로 출장을 왔다고 했다. 대접할 것이 없어 창고장에 사정했더니 돼지고기 2kg와 소주를 내주었다. 15년이라는 나이 차이도 있었고 그 사람에게는 이미 아이가 둘이나 있었지만 은인이라는 고마움에 결국 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결국 나는 그의 자식을 낳았고, 또 둘째 아이로 만삭이 되어있었다.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도움으로 함경남도 영광군의 시골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남편도 없이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이가 5.18로 공화국영웅이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둘째 아이의 해산달이 임박해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찾아왔다. 이전의 다정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같이 동행한 오빠가 말해주었다. “저 양반, 명절 지나는 대로 평양으로 올라가 부상당한 다리의 허벅지까지 자르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고 한다. 장진에 있는 자기 마누라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이날 밤 나는 처음으로 내연남이 누구라는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사건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것이 국제사회에 나쁜 여론으로 비화되자 북한은 황해북도 연산에 주둔한 124군 부대를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비밀리에 함경남도 덕성과 량강도 후치령에 같은 기능을 갖는 부대를 만들었다. 함경남도 덕성에 있는 부대 이름이 534부대였다. 그이는 13살 때 1966년 가을, 아들을 조국에 바친다는 부모의 서약과 함께 국가보위부 소속의 첩보 훈련소에 모집돼 갔다. 서해 바닷가의 무인섬에서 같은 또래의 100여명과 함께 고된 훈련을 받았다. 그곳에는 생체실험장도 있었다고 한다. 1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1977년 함경남도 산골짜기에 위치한 534부대로 배치됐다. 대위의 군사칭호를 달고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할 때까지 2년동안 타격대원들에게 살인적 훈련을 가르쳤다. 1979년 11월 중순 그에게 폭풍 명령이 전달됐다. ”타격대’라는 소규모 부대를 점찍어 부대지휘관을 통하지 않고, 알 수 없는 상급기관에서 내려온 간부가 안창식을 불렀다. 신포시 앞바다에 위치한 마양도 섬에 지금 즉시 이동하여 대기하라는 짤막한 명령을 받았다. 도착하니 해군기지였다. 사복을 입은 간부가 나타나더니 타격대를 두 개조로 나누는데 우선 안창식이 포함된 11명은 즉시 잠수함에 타라고 했다. 출발한 지 3일째 되는 날 안내원이 현 위치가 전라남도 해상이라고 알려주면서 상륙하여 차후 명령을 수령하라고 했다. 11명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며 적의 손에 잡히면 즉시 자폭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 목포 해안가 작은 상점의 안방으로 안내되었다. 여기에서 사북탄광에 투입됐던 북한 특공조 7명을 인수받아 총 18명 조가 되었다. 고첩들이 미리 파악해놓은 무기고 위치를 재확인하고, 새로운 무기고 위치를 파악하기 시작해 3개월 동안 전라도 지역을 이 잡듯이 뒤졌다. 이 무기고 요해작업은 1980년 2월 말에 완료됐다. 이렇게 점조직으로 내려온 부대는 서로에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움직이는 행동을 보고 우군인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안창식 조원 18명 중 2명은 다른 임무에 투입되고 16명은 5월 19일 새벽에 광주에 투입됐다. 안창식 조가 2월 말에 파악한 무기고 위치는 고첩들에 전달됐다.
안창식은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무릎에 총을 맞았다. 그의 조원 1명이 복부를 관통당하는 총상을 입었다. 들것에 담아 병원으로 갔다. 안창식 조를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원이 누워있는 침대 앞에 30대 여성이 카메라를 들고 대원을 여러 방향에서 촬영했다. 여자의 정체가 수상했다. 안창식 대원들과 그녀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눈에 공포감이 솟았다. 그리고 부리나케 병원을 이탈해 나갔다. 안창식이 대원에게 눈짓을 했다. 대원이 뒤를 밟아 그녀를 잡았다. “우리가 북한사람이라는걸 어떻게 알았느냐?” “무기고 탈취할 때부터 행동을 보고 알아봤어요. 저는 정보기관에서 임무를 받고 왔는데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시체 조각조차 찾을 수 없도록 사라졌다. 폭동이 끝나기 며칠 전, 목포로 와서 치료를 받다가 7월에 잠수함을 타고 복귀했다. 남조선에서 간첩조직인 ‘통일혁명당’을 창당해서 이끌었던 김종태는 북한에서 어떻게 기리고 있는가? 평양시내 한복판에 ‘김종태 전기기관차공장’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북한에는 ‘5.18 청년호‘가 있다. 1만톤 대형 프레스 이름에 붙여진 이름이다. 제철소에도 ’5.18청년제철소‘, 학생들이 파철을 모아 군수공장으로 보내서 만든 탱크 이름에 ’5.18전진호‘, ’5.18누에고치반‘, ’5.18 공장‘ 등 북한 최고인 것들에 5.18을 명예의 상징으로 하사하고 있다. 남남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국민들은 5.18에 대한 진실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김대중과 국정원장 임동원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던 황장엽과 김덕홍은 어디까지 밝혔을까? 2013년 4월 22일,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은 TV조선 ’신율의 시사열차‘에 출연하여, 황장엽과 김덕홍의 인터뷰 발언을 극적으로 공개했다. 인터뷰는 임동원 국정원의 검열 속에서 매우 부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황장엽은 “광주 학생 문제는 그들의 뒤에서 사주한 북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을 남한에다 전가한 일”이라 했고, 김덕홍은 “조선 노동당 대남부서에 소속된 사람들 상당수가 광주민주화운동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 받았다”고 했다.
박승원 상장의 미스테리
매우 미스테리한 현상이 박근혜 시절에 발생했다. 2015년 6월 말, 박근혜가 상기된 표정으로 “북에서 고위급 간부가 넘어왔다”며 발표를 하고 대통령 역사상 처음으로 국정원을 직접 방문했다. 추측으로는 그 고위급 북한 간부를 직접 만나보려고 간 것이었다. 이어서 7월 3일에는 동아일보가 대서특필. 7월 4일에는 채널 A가 특별 방송을 했다. “북한 인민군 상장(3성) 박승원이 귀순됐다. 모든 조사가 끝났다, 곧 기자회견을 열 것이다.” 그런데 일부 군소 언론이 박승원의 신상 정보를 보도했다. “박승원은 5.18때 광주에 왔었다, 그는 북한에서 간부들을 상대로 광주에서의 영웅담을 발표하고 다녔다. 그는 '무등산의 진달래'라는 5.18관련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 관여했다.” 이 보도가 나면서부터 박승원이 기자회견 약속은 셔텨 내려지듯 차단됐다. 박승원은 온 것일까? 왔으면 지금 어디에 있을까? 박근혜는 왜 이런 비상조치를 취했을까?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가 발표한 ’고위급 탈북자‘는 그후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언론이 발표한 ‘고위급 탈북자’ 박승원은 온데간데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박근혜가 헛소리를 했을까? 아닐 것이다. 채널 A와 동아일보가 헛보도를 했을까? 이 또한 아닐 것이다. 박승원은 분명히 왔다. 왔는데 감금시킨 것이다. 왜일까? 박근혜의 입장과 성격에 비추어보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첫째 박근혜는 5.18 드러내놓고 민주화운동이라며 신봉했다. 2007년 ‘화려한 휴가’가 개봉됐을 때 박근혜는 그 영화를 구태여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 현장에 가서 보겠다며 광주에까지 내려가 보고 눈물을 흘리며 소감을 말했다. 박근혜는 5.18을 숭배하는 좌익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김대중의 아바타 황광옥을 옆에 모시고 있었다. 박근혜는 2002년 5월 김정은이 내준 전용기를 타고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최고의 융슝한 대접을 받았다. 김대중 생시에는 김대중이 가서, 김대중 사후에는 이희호에게 가서 아버지가 탄압한 죄를 용서해달라 빌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두환을 적대시했다. 그녀는 전두환에 찾아가 최태민과 함께 한마음 운동 등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을 욕 먹일 수 없다며 최태민을 동해안 부대로 격리시켰다. 2002년 박근혜는 전두환에게 사신을 보내 대통령이 되고 싶으니 도와달라 했지만 전두환은 설사 대통령이 돼도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없으니 생각을 접으라고 조언했다. 이에 앙심을 얻은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두환 추징법‘을 전격 제정하여 드론까지 띄워가면서 전두환의 재산을 탈탈 털었다. 역대 대통령 중 전두환을 가장 서릿발처럼 악랄하게 짓밟은 사람이 박근혜였다.
이런 마당인데, 만일 박승원이 드러나게 되고, 그가 1980년 광주에 왔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보자. 전두환이 영웅이 되는 것이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 박근혜가 박승원을 감금시켰을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 외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박승원은 한국 땅 어딘가에 감금돼 있을 것이다. 이것을 방치하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5.18 제 35주년때 광주시가에 나타난 김정일
2015년 5월 18일은 5.18 제35주년이 되는 날이다. 1년동안 준비했다는 광주시 퍼레이드 대열은 장관이었다. 온갖 현수막이 등장하고 경찰이 양 옆에 도열하고 호위하는 퍼레이드, 맨 앞에는 전기로 구동되는 초대형 조형물이 앞장섰다. 그 조형물이 눈을 의심케 했다. 김정일과 김대중이 평양의 명물이라는 주체탑 횃불을 함께 높이 들고 있는 조형물이었다. 현수막에는 ’전쟁연습 중단‘, ’반통일 세력 척결‘, ’5.24조치 해제‘, ’국가보안법 철폐‘ 등 반국가 종북을 나타내는 구호들이 도배돼 있었다. 광주가 북한 땅이고, 5.18이 김대중과 김정일의 야합품이었다는 사실을 영상으로 증명한 것이다.
5.18이 북한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북한이 인정한 사실들은 여러 가지 증거들에서 드러난다. 2015년 10월 14일, 연합뉴스는 북한 교과서에 남한의 모든 민주화 운동은 모두 김일성이 지시하여 일으킨 운동이며 김일성의 영도에 따라 남조선 애국인민이 호응해 일으킨 민주화 투쟁 가운데 가장 성공한 것이 ’5.18 인민봉기‘라고 표기돼 있다고 보도했다. 통일부가 매년 발행하던 [주간북한동향]에는 북한이 해마다 5.18행사를 전 도시단위(28개 도시)에서 광범위하고 성대하게 거행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통일부 자료들에는 북한에 ‘5.18 영화연구소’, ‘5.18 공장’, ‘5.18대형단조공장’, ‘5.18청년호’ 등 북한의 최고인 것에 5.18이라는 칭호를 붙인 것들이 많다는 내용들이 있다. 2010년 5월 17일 연합뉴스는 같은 날 평양노동자회관에서 거행되고 있는 5.18 제 30주년 기념 행사 사진을 보도했다. 북한은 5.18에 대해 매년 28개 도시에서 기념행사를 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도 제작했다. 영화는 다큐멘터리 광주 현장 기록 영화와 픽션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다. 다큐영화는 1980년 곧바로 편집하여, 그 일부를 발췌하여 [광주비디오]에 담아 전라도 전역과 전국 도시들의 지하에서 관람케 했고, 픽션 영화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제작하여 1991년 개봉하였으며 매년 여러 차례씩 방영해 준다고 한다. 1989년 김일성은 황석영과 윤이상을 북으로 불렀다. 황석영은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시나리오를 썼고 윤이상은 배경음악을 작곡했다. 배경음악의 테마곡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황석영은 그 대가로 20달러라는 거금을 받았고 윤이상은 평양에 5층 건물 ‘윤이상 음악당’과 저택을 선물로 받았다. 김일성은 무엇 때문에 황석영과 윤이상을 불러 거금을 주면서 5.18 영화를 정성스럽게 제작했을까? 돈이 남아돌고 시간이 남아돌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와 김사복
2017년 8월 2일 영화 ’택시 운전사‘가 개봉됐다. 주인공은 김사복과 독일 사진기자 힌츠페터였다. 영화에서 이 두 사람은 5월 20일 모르는 사람끼리 택시기사와 사진기사 사이로 서울에서 만나 광주로 갔다. 힌츠페터는 5월 20일 오후에 광주에 들어가 다음날 오전 서울로 올라와 일본으로 날아가 광주에서 그가 찍은 사진을 독일 본사인 NDR로 송고한 것으로 묘사됐다. 그런데 5월 20일은 광주시 전체가 가장 시끄럽고 살벌한 전쟁터였다. 그가 사진을 찍고 다닐 환경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20일날 시내를 촬영하였다는 사진은 공수부대가 곤봉으로 젊은 사람들을 때리고 꿇어앉히는 장면의 사진들이었다. 힌츠페터가 독일 NDR에 보내 국제 사회에 방송한 사진은 결국 5월 18일 북한 특수공작조 쪽에서 찍은 사진이었고, 힌츠페터는 사진을 찍으러 간 것이 아니라 북 공작조 촬영팀이 5월 18일 촬영해 놓은 사진들을 가지러 간 것이다. 힌츠페터가 정말로 사진을 직접 촬영하려고 광주에 갔다면 5월 20일 오후에 내려가 다음날 오전, 서울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힌츠페터는 순수한 독일의 사진기자였을까? 아니다. 그는 김대중 추종자였다. 김대중 조직의 멤버였다. 1975년 10월 3일은 포천 약사봉이라는 산에서 등산하다가 추락사 당한 장준하의 49제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 약사봉에 갔다가 49제를 지내고 점심을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그의 아들 김승필에 의해 2018년 5월 10일에 공개됐다. 이 사진에는 함석헌, 계훈제, 김사복, 힌츠페터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장준하, 계훈제, 함석헌은 김대중계 좌익들이었다. 1975년이면 5.18 발발하기 5년 전이다. 더구나 김사복은 1974년 박정희를 저격하기 위해 서울에 온 문세광을 조선호텔에서 저격장소인 장충동 국립극당에까지 태워다 준 고급 세단 콜택시의 주인이었다. 아들 김승필은 김사복이 1984년에 간암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그리고 2016년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 행사장에 힌츠페터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KBS 등은 연속 기획으로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수식어로 힌츠페터를 내세워 5.18을 왜곡했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1000만 관객을 훨씬 넘겼다. 그런데 그 두 주인공 김사복과 힌츠페터는 최소한 5.18 발생 5년전부터 김대중파들과 깊이 연결돼 있었고 힌츠페터는 북한과도 연계돼 있었다.
‘광수‘의 유래’
남북한 문헌들과 정부 기록들을 보면 5.18의 현장 주역은 분명 북한 특수군이 었다. 여기에 더해 이를 뒷받침하는 현장 사진들과 북한이 1980년 촬영 편집한 기록 영화가 있다. 무기를 배분하고, 차량에 탑승시키고, 차량의 순서를 정해 한쪽은 정지, 다른 한쪽은 출발, 이쪽으로, 저쪽으로 통제하는 어깨의 몸놀림이 이소룡처럼 날래고 박력이 있다. 현장 사진들을 보면 지휘하는 사람이 있고, 긴장한 상태에서 지휘를 받는 모습들이 있다. 장갑차를 모는 사람 있고, 몽둥이를 들고 장갑차를 전투대열로 유도하는 사람도 있다.
탈북자들 수기를 보면 북한에서는 당시 모든 TV프로를 보류하고 24시간 광주사태를 중계해 주었는데 군 내부반에 있던 병사들이 자기가 아는 병사가 차에 타고 기관총을 걸어놓고 질주하는 모습을 보자 “야 저기 광수 있다. 저거 광수야, 광수 좀 봐라~”하고 외쳤다고 한다. 2015년 5월 3일, 일베의 어느 청년이 2010년 5월 17일, 연합뉴스가 사진으로 보도한 평양 노동자회관에서 진행된 5.18 제 30주년 기념 행사장 로열석에 세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 가운데 사람이 광주 현장 사진에서 가장 유명한 기관총 사수와 똑같은 얼굴이라고 했다.
이에 미 정보기관에서 영상 분석을 전문으로 하던, 스스로의 필명을 노숙자담요라 말하는 이민 1.5세대가 나타나 일베 청년의 관찰이 정확하다며, 왜 평양의 얼굴과 광주의 얼굴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인지를 전문가적 매너로 확인시켜주었다. 이에 네티즌들이 흥분하여 들고 일어섰다. 평양노동자회관 로열석에 앉은 세 사람이 광주에서 캐리버 50증기관총을 차량에 설치하고 거리를 휩쓸고 다닌 그 3명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북한의 농업상이고, 노동당 비서이고, 체육계 인물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이에 네티즌들은 이들 세 명의 북한인에 광수라는 명칭을 붙여 제1광수, 제2광수, 제3광수라 했다. 이후 3년 동안 네티즌들과 전문가가 소통하면서 총 661명의 광수를 발굴해 냈다. 로열석에 앉은 세 명 중 제3광수가 바로 김광수, 체육인이었다. 여러 해 전 중국에서 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우리나라 야구계 기자가 우연히 제3광수옆에 앉았는데 기자를 보더니 “남조선 사람이냐” 해서 “그렇다” 했더니 갑자기 살기가 돋더라고 했다. 덩치도 있는 기자인데 오금이 저려 눈치보며 슬슬 피해 나왔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얼굴영상 분석, 많은 국민들이 관상학 정도로 치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사람 얼굴이 다 비슷비슷한데 얼굴로 어떻게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느냐며 ‘얼굴 분석’이라는 말 자체를 일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신한은행은 2023년 5월 10일부터 얼굴로 결제한다. 중국은 ATM 거래를 비밀번호로 하지 않고 얼굴로 한다. 5만 명의 콘서트홀에 돌아가는 CCTV로 오래전의 경제범을 찾아냈다고 한다. 지하철, 버스, 음식점, 식대를 얼굴로 결제한다. 13억 인구중에서 CCTV에 비친 얼굴로 범인을 찾아내는데 3초만 걸렸다는 뉴스들이 많이 있다. 2023년 5월 11일 자 동아일보는 ‘통장이나 카드 없이도 얼굴 인증만으로 출금 OK”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금융권에서는 처음으로 ’얼굴 인증서비스‘를 실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얼굴은 화장하면 달라지고 마스크 쓰면 누구 얼굴인지 잘 인식이 안 되고 카메라 각도에 따라 옆모습도 찍힐 수 있고, 머리 스타일만 바꿔도 인식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창구에 앉기만 하면 본인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세상 그 누구도 만일 한 장의 얼굴 사진을 주면서 이와 비슷한 얼굴을 찾아보라고 하면 10년이 가도 찾아내지 못한다. 신한은행 창구 직원도 신한 고객 100만 얼굴 중에서 창구에 앉은 고객이 어느 얼굴에 해당하는지 육안만으로는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컴퓨터는 찾아 낸다. 고객이 창구에 앉으면 은행 카메라가 고객의 얼굴을 찍는다. 이 얼굴이 100만 고객의 얼굴이 저장돼 있는 DB(데이터 베이스)얼굴과 하나씩 대조되어 O✖를 친다. 컴퓨터의 대조 기능이 같은 얼굴을 찾아내는 것이다. 얼굴의 특징, 점, 흉터, 생김새, 부위와 부위 간의 거리와 각도 등 대조 논리가 얼굴 인식 프로그램에 장입되어 본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창구에 고객이 앉으면 은행직원은 앉아있는 고객과 비슷한 DB(데이터 베이스)상의 얼굴이 뜬다. 은행직원의 육안으로는 두 얼굴이 비슷해 보인다. 결국 컴퓨터가 찾아낸 비슷한 얼굴은 두 얼굴이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컴퓨터가 찾아낸 비슷한 얼굴은 동일인이라는 말이다.
얼굴 분석을 부인하면 몽타주는 왜 애써서 그리는가? 경찰에는 ‘민완 형사’라는 전문가들이 있다. 민첩한 수완을 가진 형사의 준말이다. 범죄 발생하엔 민완 형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범인을 목격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상 착의를 세세히 물어 “코가 이렇게 생겼느나, 눈이 이렇게 생겼느냐” 수많은 모델을 보여주면서 참으로 힘들게 그려낸 것이 몽타주다. 이것이 범인을 찾는 단서가 된다. 하물며 얼굴 사진이야 얼마나 많은 정보를 잉태하고 있겠는가? 1호 광수, 노숙자 담요가 일베 시민과 함께 찾아낸 북한 농업상을 지낸 김창식, 그의 몸은 단단한 대추 방망이 같고, 눈에서는 레이저 광선이 발산된다. 661명의 광수 중 제 1호이자 광수의 아이콘이다.
광주의 5.18 기념 재단은 제1광수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어제는 떡판 얼굴을, 오늘은 조선무같이 아래가 퍼진 얼굴을 내세우며 바로 이 사람이 제 1광수라고 주장하며 광주지역 신문을 도배했다. 2016년에는 이강갑이라는 떡판 얼굴을 내세워 이 사람이 제 1광수라 했다. 그런데 제1광수 얼굴은 대추형이다.
2019년 5월 영화[김군]이 개봉됐다. 강상우 감독이 4년동안 제1호광수를 찾으러 다녔다. 이강갑이 자기가 1호광수라고 주장하면서 나타났다. 강상우 감독은 단번에 당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1호광수를 보았다는 여성이 나타났다. 당시 22세로, 아버지가 운영하는 막걸리 집에서 심부름을 했는데 제1호광수가 자주 찾아와 막걸리를 마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이름이 뭐냐 하니까 ‘김군’으로만 알고 계시라 했다 한다. 이 김군이 바로 이웃 광주천 다리밑에 텐트를 치고 7~8명 단위로 양아치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높은 차량에 올라 앉아 시위를 지휘하고 있는 것을 보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올려주었는데 시위가 끝나자 종적을 감추었다고 했다. 이 여인의 이름이 ’주옥‘이며 영화 ’김군‘의 주역이기도 하다. 당시 많은 전남 사람들이 말했다. ”웬 양아치들이 갑자기 다리에마다 불어났느냐“ 양아치 신분이면 경찰도 접근하기를 꺼렸다. 북괴공작원들이 위장하기에는 최적의 신분이었다.
5.18의 진상을 규명한다며 문재인이 100여 명으로 구성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꾸려 2019년 12월 27일부터 4년동안 국가 예산 500억 이상을 쓰면서 조사 활동을 벌였다. 90% 이상이 광주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이 기구 역시 제 1광수를 조작해내려고 애를 썼다. 2022년 5월 4일에는 계엄군에 의해 19세에 즉결 처분 당해 사라졌다는 김종철이 죽지 않고 살아났는데 그가 제1광수라고 주장해가면서 곧 얼굴을 드러낼 것이라며 KBS 등 모든 언론을 동원해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러더니 5월 12일 다시 KBS 등 모든 언론을 동원해 당시 20세로, 시골에서 갓 광주로 올라와 상패제작소에 고용됐다는 차복환이 제 1광수라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런데 코믹한 것은 1호 광수가 찍힌 장면은 모두 7개인데 차복환은 그중 1개만 자기이고, 나머지 6개는 자기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일간지 스카이데일리가 한 의료 전문인에게 의뢰하여 진위를 가려냈다. 광대뼈와 광대뼈 간의 거리와 목의 직경과의 비율이 1호 광수와 차복환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자 위원장인 송선태가 무릎을 꿇었다.
1999년 5월 18일, 방송 3사가 하루종일 광주 현장의 얼굴 4개를 스퍼트 뉴스로 띄우며, 영웅은 나서달라 호소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4개 얼굴을 노숙자 담요가 찾아냈다. 제1광수 김창식, 제67광수 인민군대장 전병호, 제295광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김정실(여), 제 334 광수 인민군 장성, 성명불상(장군 대열에 끼어 민간복 입고 함께 행진), 2015년 10월부터 2016년 3월까지 6개월 동안 광주시와 5.18 단체가 광수 사진들을 광주시 번화 장소들에 전시해놓고, 영웅들은 나서달라 호소했지만 단 1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5.18 기념 재단이 만만한 사람 16명을 찾아 다니면서 “고소하라. 무조건 당신 얼굴이라 주장하라. 나머지는 변호사들이 알아서 한다.” 회유하여 소송에 나서게 했다. 이에 주사파 법관들이 사건을 맡아 “광주에 북한군은 절대로 오지 않았다. 광주 시민이 현장 사진 속 얼굴이 자기 얼굴이라고 주장하면 알리바이나 얼굴 분석이 없이도 무조건 진실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황당한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담당 법관은 노정희와 이흥구, 이흥구는 국보법 위반자로 3년 징역형을 받았던 좌익이었다. 노정희는 잘 알려진 좌익이다.
민주화와 민주주의
5.18이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는 점은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가 상임이사 신분으로 2017년 10월 12일에 법정에서 증인했다. 2023년 이 증언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광주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오비이락(烏飛梨落)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5.18이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 폭동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는 2023년 1년 동안 일간지 스카이데일리가 집중 취재한 30개까지 합해 70여 개가 넘는다. 하지만 5.18에 북한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단 한 개도 없다. 5.18이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이 판결했고, 역사적 평가가 다 종결된 것이기 때문에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표현은 허위 사실의 적시로 5.18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 해당함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재갈법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증거, 새로운 시각을 공론의 장에 제시하지 말라는 독재법인 것이다. 이로써 5.18은 전라도 산업이 되었고, 전라도의 이권 증서가 되었고, 세도 증서가 돼 있다.
이른바 ’국민 재갈법(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2021년 1월 5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민주당과 국힘당 모두가 의기투합하여 제정한 반민주법이다. 왜 반민주법인가? 하나는 민주주의의 구동 엔진인 ‘공론의 장’을 독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02년에 생산된 대법원 판례를 유린한 것이다. 민주주의 정의(Definition)가 무엇인가?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여 공공선(Public Good)을 추구하는 정치 시스템으로 정의돼 있다. 모든 국민이 공론의 시장(Opinion market)에 의견을 내놓고, 의견과 의견이 경쟁해서 선택도 되고 도태도 되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구동하는 엔진이다. 그런데 국민재갈법은 특정 의견만 공론의 시장에 올라오게 하고 반대되는 의견은 링 위에 오르지도 못하게 강제하는 법이다. 한마디로 반민주 독재법인 것이다.
대법원 판례는 매우 중요한 법이다. ‘국민재갈법’은 2002년에 생산된 대법원 판례에 정면 배치된다. 대법원 판례[2002.1.22. 선고 다 37524,37531 판결] 제 5의 판시사항을 약술한다. “공적 존재의 이념에 관한 경우에는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기 때문에 철저히 공개되고 검증돼야 한다. 그에 대한 의문이나 의혹은 ‘개연성’이 있는 한 광범위하게 문제 제기가 혀용돼야 하고 공론의 장에서 찬반토론 등 경쟁 과정을 통해 채택되거나 도태되도록 해야 한다.” 5.18이 곧 공적존재이고, 이념적 존재다. 5.18이 바로 위 판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이상의 이론이 자유 민주주의 이론이다.
그러면 ‘민주화’의 정의는 무엇인가? ‘민주화’라는 단어는 김일성 주체사상을 설명하는 핵심 용어다. 김일성이 정의한 주체사상의 정의를 요약해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주체사상에 눈을 떠야한다. 남조선 민중들은 미국식민지 지배 속에서 무비판적으로 살고 있는, 깨어나지 못한 존재들이다. 남조선 정부는 미국의 꼭두각시다. 남조선 자본가들은 미국 자본의 앞잡이들이다. 사람이라는 뜻은 노동자, 농민 그리고 무산계급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미국, 괴뢰정부, 자본가를 쳐부수고, 주체사상을 신봉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이를 방해하는 3대 적을 까부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화운동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에서 가장 중점을 둔 사업은 왕년의 간첩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전환시켜 1인당 수억에서 수십억원의 배상금을 정부 돈으로 지급하는 사업이었다. 민주화란 곧 공산화라는 뜻이었다. 좋은 언어를 선점하여 미개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공산화를 시키는 운동이 바로 민주화 운동이고, 그 세력이 민주화 세력인 것이다. 뻔뻔함의 대명사, 공산주의의 대명사가 곧 민주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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