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소설]전두환(10). 운명(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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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2-23 12:19 조회15,4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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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운명
하나회의 발원
1951년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은 UN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에 특별히 부탁해서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와 똑같은 사관학교를 진해에 세웠다. 4년제 교과서는 미 육사 교과서 그대로였다. 전두환은 다른 생도들이 자는 시간에 몰래 일어나 냄새가 진동하는 재래식 화장실로 갔다. 냄새를 막기 위해 신문지와 판초 우의로 배설구를 덮었다. 그리고 독서를 했다. 20세 전후의 나이는 감수성이 예민하여 무엇을 읽느냐에 따라 인격이 형성된다. 그는 동기생들보다 나이가 많고 읽은 것이 많아 언제나 좌장이 되었다. 노태우와 김복동과는 절친이었다. 여기에 최성택과 박영하가 합세해 토의팀이 형성됐다. 국가가 무엇이고, 충성이 무엇인가, 세계의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등 청운의 주제에 대해 의견들을 나누었다. 주말이면 최성택 집에 가서 밤늦게까지 토론을 했다. 구성원이 5명이라 자기들 사이에서 '5성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후에 백운택과 손영길이 합류했지만 이름은 그대로 5성회였다. 이 모임이 후배기로 이어졌다. 각 기에서 5~7명이 구성되어 '하나회'의 전통이 되었다. ‘국가도 하나’, ‘민족도 하나’, ‘충성도 하나’ 라는 뜻이었다. 각 동기회의 분위기는 이들이 이끌어갔고 이들 대부분은 활동적이며 활달한 편이었다. 대부분의 동기생들은 이들이 하나회라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이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를 하고 하나회에 대한 적개심을 쌓기도 했다.
서로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이 각자가 습득한 지식과 지혜를, 토론 과정을 통해 나누고 업그레이드 시키는 활동은 창의성을 기르고, 공동체 의식을 배양하고, 민주주의적 리더십을 함양하는데 적극 권장해야 할 미덕이었다. 하나회가 아닌 사람들은 자기들도 5성회 같은 것을 만들어 그런 토의 모임, 토의클럽을 형성해 나가야 했지만 그들은 시기하고 질투를 했다. 하나회 출신들이 선배들로부터 보직과 진급에 도움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관계의 특성이기는 했지만, 육군사회는 워낙 넓어서 좋은 자리는 널려 있었고, 훌륭한 선배들은 하나회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나회 숫자는 잔디밭의 구슬 정도였다. 군의 요직을 하나회가 다 차지했다는 세간의 소문은 과장을 넘어 모략이었다. 일반적으로 보면 의식이 깨어 있고 활달한 사람들이 각 동기 중 5~7명 그 틈에 끼어 있었다.
이러한 토의생활을 해왔기에 전두환은 국무회의에서도 토의를 했고, 수석들, 비서관들, 장관들과의 토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했다. 그래서 전두환과 토의를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전두환에 의해 채용됐고, 채용된 사람들은 다 미국 등에서 학위를 받은 엘리트들이었다.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하는 정치꾼들이나 판검사들이 세상을 자기들의 성악설 시각으로 해석하니 옥덩이가 토기똥으로 보인 것이다.
전두환의 독서 습관은 장교 때에도 이어진다. 1970년대 고급장교들과 장군들 사이에는 독서 열풍이 한창이었다. 해외에 나가 있는 무관들은 장군들이 찾는 도서를 구하느라 애들을 썼다. 미국과 영국의 시사잡지들을 구독하는 장군들이 꽤 많았다. 당시만 해도 선진국 문물을 배우고 소화하여 사회에 전파하는 문화 향도 역할은 군엘리트들이 도맡아 했다. 미국의 원조로 미국 유학을 가장 많이 다녀온 사회집단이 군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장교, 장군들은 서양식 신사도를 발산하는 모델들이었다. 독서가 사람을 조형하고 인격을 조형하는 시대였다. 1971년, 전두환은 공수특전사 여단장이었다. 여단의 인사참모 육사19기 정동수 소령은 동양판 마론 브란도(Marlon Brando)처럼 잘생겼다. 그는 전두환이 주문하는 책들을 사러 다니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대하소설 [덕천가강], [지휘관 참모], [불모지대], [베리아]를 위시해 시사잡지들을 구하러 다녔다. 서양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독서도 열심히, 그것이 1970년대의 군사문화였다. 그런데 어쩌다 지금은 골프 문화, 폭탄주 문화로 추락하게 되었는가!
전두환의 문화는 독서와 학습의 문화였지 주먹 문화가 아니었다. 전두환을 '주먹'으로 그린 사람들은 인생 공부, 신사도 공부를 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사람 때려잡는 법 공부만 하면서, 온 세상이 다 악마의 세상이라고 생각해온 판검사들이었다. 하지만 캄보디아 훈센 총리는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전두환을 7박 8일씩이나 대접하면서 경제 공부를 했고,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와 나카소네와 레이건 대통령도 전두환을 초청해 극진한 대접을 했다. 이것이 하나회의 전통을 만든 전두환의 문화였다. 체력단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뇌개발이다. 장교들에게도 토의문화, 병사들에게도 진중 토의문화를 정착시켜야한다. 체력보다 천만배 더 중요한 것이 두뇌개발이기 때문이다. 토의조직을 '사조직'이라 몰아붙인 김영삼은 '토의'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문화권 밖의 거친 타잔이었다.
대통령들의 정치자금
대통령들의 정치자금, 액수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모금의 방법이었다. 전두환이 받은 정치자금은 순전히 재벌들이 소유한 개인재산을 기부받은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김영삼의 정치자금은 국가경제를 파괴하거나 국민건강을 병들게 하거나, 수많은 가정을 파괴하는 과정들을 통해 모은 것이다. 김대중의 정치자금은 정치자금이 아니라 개인 축재였다. 강원랜드라는 카지노 산업을 만들어 국민정신을 병들게 했고, 수많은 가정을 파괴시켰다. 김영삼이 저질러놓은 IMF를 극복한다며 금 모으기를 했지만, 이는 국민의 시선을 흐리게 하는 쑈였다. 공적자금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기업들이 진 빚을 발권하여 메워주고, 그 대신 은행에 저당 잡힌 기업들의 금싸라기 땅과 건물을 자산관리 공사로 하여금 압수케하여 해외에 마구 매각했고, 그 과정에서 2중 계약서를 만들어 뒷돈을 착복했다. 2020년 월간조선 5월호에 의하면 김대중의 비자금은 1조 6,500억이었다. 이것도 모자라 김대중의 아들 김홍일 아파트에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이 현찰로 쌓여 돈 냄새가 진동했고, 이로 인해 김홍일은 아버지가 대통령을 하고 있었는 데도 옥살이를 했다.
노무현은 ‘바다이야기’로 수많은 국민의 정신을 병들게 했고, 수많은 가정을 파괴했다. 이에 관련된 이권은 누가 챙겼는지 오리무중이다. 조사하는 검사도 없었다. 하지만 박연차라는 태양그룹 회장으로부터 받은 뇌물이 문제가 되자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자살인지 타살인지 애매한 의문사를 당했다.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은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로부터 천문학적인 뇌물을 받고 5조 7천억원의 은행 대출을 함께 해준 다음 부도를 냈다. 그리고 정태수로부터 받은 검은돈은 안기부 간부와 기업 회장을 통해 자금세탁을 했다.
1997년 10월, 김대중이 출마하는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한참 치열해졌을 때 김대중의 비자금 문제가 대두됐다. 김영삼이 검찰에 조사를 지시했다. 이때 김대중이 일갈했다. 여야의 모든 정치인들 중에서 정치자금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는 우리나라 정치 관행상 죄가 되지 않는다. 수사를 하려면 나만 하지 말고 모든 정치인들을 다 함께 수사하자. 특히 김영삼 대통령의 비자금을 조사하면 나도 조사받겠다. 이 말 한마디에 김영삼이 꼬리를 땅바닥에까지 내렸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IMF가 터졌고 12월말에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태우는 참으로 바보 멍충이었다.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3,000억원을 주었다. 이는 노태우 회고록에 명시돼있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이 노태우 비자금 4,000억원을 폭로했고, 김대중이 "나는 노태우로부터 20억 받았는데 김영삼은 얼마 받았느냐? "고 김영삼을 코너로 몰았을 때, 김영삼이 노태우를 감옥에 잡아넣었다. 감옥에 갈 것이 아니라 노태우는 "김영삼, 너도 나한테 3,000억 받지 않았느냐?" 이렇게 나왔다면, 노태우도 전두환도 감옥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고, 5․18 역사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노태우는 비자금을 7천억원을 만들어서 그중 3,000억을 김영삼에 주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바보도 다 있을까 싶다. 노무현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시기는 1988년 4월이었다. 김영삼은 실력이 한참 모자라는 노무현을 부산에서 꼭 당선시켜야만 했다. 노무현에게 정치자금을 물 붓듯 쏟아부었다. 얼마나 털어 부었는지 노무현은 "선거자금을 원도 한도 없이 실컷 썼다. 쓰고도 남았다"고 했다.
전두환 정치자금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폭파 테러 현장에서 살아오는 재벌들이 기체 내에서 모금 이야기들을 내놓았다. 전두환에게 물려온 이 자금은 정치자금이라기보다는 정책개발을 위한 재단 즉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정책개발연구소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 자금으로 '일해연구소'를 설립했다. 이것이 세종연구소가 되어 주사파들에 장악돼 있다. 그리고 남은 돈이 2,205억 원이었다. 김영삼 부자가 받은 돈과 노태우가 챙겼던 비자금 4,000억에 비하면 많이 적은 규모였다. 이중 600억원은 민정당 운영비와 금일봉 등의 통치자금으로 사용했고, 청와대를 떠날 때에는 1,600억원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1988년의 총선을 2월 24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하는 2월 24일 이전에 치루기로 되어있어서 총선 때 자기 인맥을 이용하여 선거전에 투입하려고 했는데 노태우가 총선을 4월로 변경했기 때문에, 그중 550억은 노태우에게 직접 건넸고, 400억원은 자기 인맥을 통해 선거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돈이 600억원이었다. 이 600억원은 무엇에 쓰려 했는가? 그가 임기를 마칠 때 그의 나이는 겨우 57세, 그가 개척한 국가경영의 노하우를 이용하여 남은 인생동안 국가를 위해 활동할 자금이었다고 한다.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노태우의 비자금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영의 노하우, 캄보디아 총리가 부러워했던 경제성장의 노하우가 없었다. 그들은 노하우를 펼치기 위해 돈을 모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 축재만을 목적으로 돈을 모았다.
전두환 추징금 회수
전두환 추징금은 2,205억원이고, 노태우 추징금은 2,628억 9,600만원이다. 노태우는 추징금 모두를 즉각 갚았다. 개인적 착복 목적이었기 때문에 돈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의 2,205억원은 재벌들이 주었다는 돈을 합계한 것이다. 그중 600억원은 민정당 운영비로 썼고, 550억원은 노태우에게 넘겨주었고, 400억원은 88년 총선자금으로 썼다. 1,600억을 공적으로 썼고, 600억원만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2,205억을 다 물어내라 하니 그 돈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김대중 부자의 1조가 넘는 비자금, 김영삼이 받은 3천억원과 그 아들의 비자금은 조사조차 하지 않고, 노태우와 전두환 자금만 조사해 추징하는 이 기괴한 현상을 국민들은 따져야 할 것이다. 학폭! 여러 아이들이 순박한 아이 하나를 정해놓고 집단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자기들이 받아놓은 더 많은 돈에 대해서는 감추고, 오로지 전두환의 자금만 문제 삼은 것도 모자라 공식적으로 사용한 자금까지 물어내라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1995년 12월 3일, 전두환이 안양교도소로 구속 수감되는 순간으로부터 24일만인 12월 27일, 검찰은 장남 전재용을 불러 윽박질렀다. "얼마를 갖고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 순순히 내놔라." 법원판결도 나기 전에 검찰이 협박질부터 가한 것이다. 추징금을 판결이 나기 전에 추징하는 법도 있는가? 1997년 4월17일 대법원 판결이 나는 바로 그날 검찰은 312억원을 빼앗아 갔다. 김대중은 그래도 독서를 많이 해서인지 김영삼처럼 막돼먹지는 않았다. 상식적으로 승용차 한 대만 압수했다. 1988년 5공 청문회 때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져 유명해진 노무현, 참으로 악랄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재산 명시 명령 신청’이라는 희대의 방법을 고안했다. 본채와 별채로부터 숟가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체의 물건들을 리스트로 작성해 제출하라고 한 것이다. 사채, 별채로부터 냉장고, 그림, 액자, 숟가락, 진돗개까지 모두 목록에 기재해 제출했다. 29만 1,680원의 잔고가 들어있는 통장도 목록에 기재돼 있었다. 야비한 인간들로만 채워졌을 노무현 검찰은 전두환을 놀림감으로 만들기 위해 29만원 통장을 기자들에게 보여주면서 "돈이 29만원밖에 없다고 한다."는 공작용어를 퍼트렸다. 이 29만원이 놀림감이 된 것이다. 노무현 검찰은 2003년 10월, 이 모든 목록을 경매에 붙였다. 18억 168만원이 추징됐다. 행주를 짜서 행주물을 추징해 간 것이다. 진돗개 두 마리는 이웃이 사서 전두환에게 되돌려주었다. 이어서 현재 살고 있는 본채만 제외하고 별채와 부동산을 경매해 696억원을 알겨갔다. 이순자 여사가 상속받고, 저축한 120억 상당의 채권도 알겨갔다.
박근혜! 노무현보다 100배는 더 악랄했다. 2013년 2월 대통령 자리에 오른지 4개월만인 6월 27일 전격적으로 '전두환 추징법'을 제정했다.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 사돈의 팔촌의 재산까지 몰수하는 위헌법이었다. 연좌제 법이고, 위인설법이었다. 위헌법이라해도 전두환을 죽이는 법이면 그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박근혜 검찰, 2013년 7월16일 동이 트자마자 전두환 사저를 급습했다. 같은 시각에 14군데를 급습했다. 전기환(전두환의 형), 전경환(동생), 이창석(처남)의 집과 사무실, 딸의 아파트, 둘째 아들의 집과 사무실, 막내아들의 장인 집과 사무실, 이혼한 둘째 아들의 전처의 집, 전두환의 비서관이었던 손삼수 사장의 사저와 사무실, 큰누나 아들의 사저와 회사까지 급습했다. 여자의 한이 오뉴월의 서릿발이라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지붕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 드론까지 띄우고,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했다. 벽과 마루와 천정, 부엌, 외벽, 땅, 계단 등 모든 공간에 금속탐지기의 탐색 대상이었다. 은행의 대여금고, 모든 급습대상자들이 거래하는 은행들을 다 찾아내 수십 개의 대여금고를 뒤졌다. 약혼반지, 결혼 패물까지 훑어갔다. 위 급습대상자들이 소장한 미술품과 조각품, 장인 장모의 초상화, 아들이 그린 그림, 김대중이 써서 선물로 준 휘호까지 훑어다 경매에 붙었다. 조상을 모신 선산, 전두환의 장인이 가꾼 야산과 농장, 장남의 출판사, 장인이 물려준 시골땅 등 비자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재산을 탈탈 털고 쥐어짜 경매에 붙었다. 주위에서는 법적 대응을 하자 난리들을 쳤지만, 체신을 중히 여기는 전두환은 이미 해탈의 경지에 있었다. 이상의 행패에 나타난 박근혜의 심성은 세기적, 세계적 냉혈인간 알 카포네의 심성과 조금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박근헤와 최태민과 전두환
10․26으로 박근혜가 부친을 잃은 고아가 되자 전두환은 박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에서 박근혜 3남매를 자상하게 돌보았다. 삼남매를 자주 청와대로 불러 식사대접을 했고, 명절이나 의미 있는 날이 오면 두둑한 금일봉과 선물을 마련해 보냈다. 10․26이 터지자 영남대학교 분쟁이 있었다. 대학 관계자들이 박근혜를 상대로 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전두환은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교육부 장관 김옥길을 만나 의논했지만, 김옥길은 "장관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 잘라 말했다. 백방으로 방법을 찾던 중 이후락이 영남대학교 설립과정에 직접 관여한 사실을 발견했다. 소재를 알아보니 이후락은 미국에 장기체류 중이었다. 전두환의 부탁을 받은 이후락이 급거 귀국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전두환이 대통령 권력을 마구 휘두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이 사례에 웅변돼 있는 것이 아닌가? 이외에도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MBC 지분, 육영재단에 대한 관리를 박근혜가 맡도록 힘써 주었다.
이렿게 따뜻한 마음을 베풀어준 전두환에 대해 박근혜는 왜 시퍼런 칼날을 휘둘렀는가? 하나는 최태민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무리한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를 지휘하면서 최태민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가 파악한 정보로는 최태민이 박근혜를 이용해 여러가지 욕심을 채우려는 파렴치한 교주요, 요승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을 더 이상 욕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최태민을 동해안 경치 좋은 군부대에 격리시킨 적이 있었다. 10․26 이후까지도 박근혜는 전두환을 여러 차례 찾아와 최태민과 함께 '구국 봉사단'과 '한마음 봉사단'을 계속 운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이는 전두환이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최태민과 함께 하고 싶었던 마음이 깊은 만큼, 박근혜는 전두환에 대한 오기와 증오심을 길렀을 것이다.
2002년 박근혜는 한나라당 이회창과 결별하고 ‘미래연합’이라는 당을 만들었다. 비전도 모양도 없어 보이는 초라한 행색이었다. 이때 박근혜가 만만한 전두환에 사람을 보냈다. "2002년 대선에 출마하고 싶으니 도와달라."이 어려운 부탁을 예의도 없고 싹수도 없이 사람을 시켜 한 것이다. 그래도 전두환은 겸허하게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심부름꾼에 전했다. 성공하기 매우 어려운 시도다. 설사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대통령 자리를 끝까지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생각을 접는 것이 좋겠다. 전두환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녀는 5․18 신봉자가 되었다.
2002년 5월11일 그녀는 어머니를 쏘아죽인 김정일,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김신조 일당을 보낸 김일성 아들이 보내준 ‘김정일 전용기’에 몸을 싣고, 평양으로 가서 3박 4일 동안의 비공개 일정으로 김일성-김정일 역사상 최상의 호강을 하고 와, 미국 정가에 다니면서 김정일 홍보녀가 되었다. 2004년에는 김대중에게 커다란 선물을 들고 찾아가 아버지가 대통령님께 가한 탄압에 대해 사과했다. 2014년에는 미망인 이휘호를 찾아가 또다시 아버지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결국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녀로 인해, 자신은 물론 그녀의 가문이 망가졌고 국가의 정체성이 파괴된 것이다.
네다바이 당한 업적과 비정한 운명
오늘의 풍요를 누리게 해준 대통령이 누구인가? 시궁창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강으로 가꾼 대통령이 누구인가? 국제사회를 자랑스러운 신분으로 누비고 다닐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대통령이 누구인가? 전두환인가, 김영삼인가, 김대중인가? 평화의 댐을 전두환의 사기댐이라 마녀사냥했던 인간들이 누구들이었는가? 그런 사기의 댐에 어째서 거룩한 민주화운동 사기꾼이신 김대중 슨상님의 이름과 얼굴만 도배돼 나부끼고 있는가? 국제올림픽을 기적적으로 유치하고, 똥밭에 올림픽촌을 건설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고, 공산국가들에 자유의 바람을 송풍시켜 냉전의 벽을 허무는데 결정적 일조를 했던 전두환은 온데간데없고 어째서 잠실에서는 노태우의 이름이 나부꼈는가? 국토를 가득 채운 전두환의 모든 업적에 ‘민주화’라는 도장을 쾅~찍어놓고, 민주화의 업적이라 도둑질해 간 인간들은 국립묘지를 점령하고, 대한민국을 위대하게 조형한 전두환은 어찌하여 모든 업적을 네다바이 당한 채 한줌 뼈가루마저 묻힐 데가 없어 부인의 품 속에 안겨 있는 것인가?
가여운 전두환의 운명, 하늘이 짠 운명인가, 지옥이 짠 운명인가? 워즈워드 롱펠로우가 강조했던 ‘하늘의 연자매’, 도대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어디에서 돌고 있는 걸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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