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의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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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3-06 01:39 조회18,41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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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의미
목차
1. 그때 일본이 없었다면
2. 한일병합은 일본의 어부지리
3. 근대화의 뿌리와 뼈대
4. 반일감정 조장의 원흉
5.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
6. 강제징용의 진실
7. 배울 것 많은 일본의 교훈들
8. 일본은 가장 밀접한 미래 동반자
1. 그때 일본이 없었다면
2004년 11월, 노무현이 갑자기 반외세 여론몰이를 했다. 하루에 40억 원씩을 쓰면서 유럽과 남미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미국을 비방했다. 이에 미국의 조야 인물들이 나서서 “한국 대통령이 막대기로 미국의 눈을 찌르고 다닌다.”라며 분노의 감정을 표했고, 미국의 신보수주의 인물들은 노무현을 ‘시간증 환자’(네크로필리아)라고 비판했다. 동맹을 내치고 시체에 불과한 북한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좌파와 언론들이 나서서 일본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외세는 악이고, 악이 곧 미국과 일본이었다.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의 희생양으로 고려대학의 저명한 석학 한승조 교수를 선택했다. 한승조 교수는 그 해(2004) 일본 잡지 [정론] 4월호에 ‘조선이 청나라나 러시아에 먹히지 않고 일본에 먹힌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1년이 지난 이 논문을 문제 삼아 한 교수를 멍석말이 한 것이다. 과연 한승조 교수의 논문 요지가 멍석말이 마녀사냥의 대상이었는가? ‘불행 중 다행’이라는 표현은 무슨 뜻이었는가? 만일 당시의 조선이 청나라에 먹혔더라면, 조선은 지금의 위구르나 티베트처럼 중국의 변방 지역이 되었을 것이고, 조선족처럼 소수민족으로 천대받고 있을 것이 아닌가? 만일 러시아에 먹혔더라면, 러시아의 공산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당시 조선은 어차피 먹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그나마 일본에 먹혔기 때문에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조선인의 후예인 우리는 일본국 시민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먹고,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걸었기 때문에 원자탄 세례를 맞고 조선을 토해낸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한승조 교수의 논문은 바로 여기까지였다.
여기까지에 무슨 허위사실이 있는 것이고 무슨 논리의 비약이 있는가? 그런데! 이 나라에 태어나 아무런 업적도 쌓지 않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모두가 다 애국자가 되고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욕을 많이 하고 분노의 표현을 심하게 할수록 지식인이 되었고 양심가가 되었다. 고려대학교에서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고 정부의 외교정책에 많은 기여를 했던 한 교수는 어느 한 순간에 날벼락을 맞았다. 한국판 인디언 원주민들에 의해 교수목에 매달려, 뭇 사람들로부터 돌멩이 공격을 당한 것이다. 그의 가족들, 아버지와 남편의 보호를 받다가 갑자기 가장을 원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99년 갑자기 한겨레21 고경태 기자가 구수정이라는 무명의 여성을 통신원으로 앞세우고, 한홍구와 강정구를 간판으로 내세워 주월 한국군을 베트남 학살자로 몰아갔을 때, 참전 용사들은 고엽제에 신음하면서도 부인과 자식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한승조 교수도 동류의 괴로움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와 그 가족은 아파트에서 살지 못하고 산간벽지에 여러 해 동안 귀양 가 있었다. 이것이 조선인 후예들이 물려받은 멍석말이 전통이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코스모폴리탄, 세계인의 위치에서 객관적으로 내려야 한다. 아이들 싸움에 끼어들어 무조건 내 자식 편을 드는 비 문명인의 자세를 가진 사람은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잃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한승조 교수의 역사관에 돌을 던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코스모폴리탄 시각으로 개화된 사람들이 아니라 패거리 의식에 찌든 비 문명인들이었다.
1894~95년에 치른 청일 전쟁에서 만일 일본이 패했다면, 1904~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만일 일본이 패했다면, 우리는 지금 조선족으로 또는 고려족으로 푸대접 받으면서 가난한 생활, 비 문화권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조선족이 좋은가? 고려족이 좋은가? 아니면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이 더 좋은가?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된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 없을 것이다. 한승조 교수의 논문은 여기까지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적인 역사평가 내용에 대해 2005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왜 그렇게 비 문화권 인종처럼 거칠게 행동했는가?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은 어떤 국민인가? 경제 10대강국의 부유한 국민이고, 1980년대에 올림픽 역사상 가장 성대한 국제올림픽을 치렀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한강 문화권을 즐기고, ‘나는 한국인이다’ 자랑스럽게 휘젓고 다니는, 지구촌의 유지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던가? 저절로 이렇게 되었는가? 일본에서 해방된 지 15년이 지난 1960년의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나?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거지 국가였다. 그 거지 국가에는 어떤 자산들이 있었는가? 논과 밭이 있었다. 그 외에 무엇이 있었는가? 학교, 도로, 철로, 항구 그리고 기업들이 있었다. 논과 밭은 하늘이 준 것이고 나머지 사회간접자본과 기업들은 누가 준 것인가? 일본이 36년 동안에 걸쳐 만들어 놓고 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했던 1948년, 대한민국 총자산은 겨우 27억 달러, 4억 달러는 논과 밭이었고 23억 달러는 일본이 놓고 간 자산이었다. 일본이 남기고 간 자산 23억 달러, 그것이 대한민국 전체 자산의 80%를 넘었다. 이 23억 달러어치의 사회간접자산마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인도보다 더 거지 나라가 돼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한강의 기적은 이 23억 달러의 자산 위에 쌓아올린 것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됐을 당시 일본은 한국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주었고 5억 달러는 차관으로 꿔 주었다. 1965년 한일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일본은 이 23억 달러가 일본에 귀속돼야 할 ‘귀속자산’(Vested Property)이라며 돌려달라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러다가 1965년 체결된 협정에서 이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 1965년에 추가로 받은 돈으로 무엇을 했는가? 한강 기적의 초석을 마련했다. 일본의 돈이 있었기에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됐다. 일본의 돈이 있었기에 포항제철, 호남정유, 나주비료 등 중화학 공업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포항제철, 등소평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면서 일본에 “중국에도 똑같은 제철소 하나 지어달라” 사정했지만 거부당한 세계적인 제철소, 일본 돈과 일본 기술, 일본의 기술지도와 소재와 부품과 설계와 스펙 자료를 가지고 모래밭 위에 세워진 기적이었다. 일본이 없었다면, 일본이 저 멀리 아프리카 희망봉에서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사는 나라였다면, 일본돈도 없었고, 일본기술도, 일본스승도, 자재도, 부품도, 설계도면도 없었다. 일본돈과 일본기술로 세계 제3위의 소양강댐과 충주댐을 건설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천재성과 용기는 바로 일본의 힘을 이용하는 데 빛을 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위해 미국의 힘을 최대한 이용했듯이,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위해 일본의 힘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일본을 빼고는 설명이 안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소원은 국산화! 독자적인 생산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창원, 구미, 울산, 인천, 안산 등에 대규모 공단을 설치하고, 세계적인 기능공을 양성한 후 외국 선진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했다. 공단의 대부분을 일본기업들이 채워주었다. 기술지도도 일본으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다. 선진국에서는 한물 간 사양제품(sunset item)을 모방 생산시켰다. 기술자료 TDP(Technical Data Package)를 배로 실어와 기업들에 배당했다.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제품들이 가장 많았다. 일본의 소재, 일본의 부품, 일본의 생산기계가 아니면 공장이 쉬었다. 한강기적의 원동력인 대규모 공단, 일본이 빠져나갔다면 텅텅 비어있을 공간이었다. 산업인들이라면 이 일본의 중요성을 모두 인정할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이 없었으면 한강의 기적도 조국근대화도 없었다. 그런데! 왜 국민들은 일본을 증오하는가? 오염되고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아래한글에서 ‘일제’까지만 타자하면 자동적으로 ‘일제 강점기’로 표시된다. 일본이 아름다운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여 물자와 육체를 강탈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선은 아름답지가 않았다. 아름답기는커녕 지옥이었다. 학대받는 백성을 살리려면 조선왕조는 빨리 망해야만 했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것이 아니라 주워 가진 것이었다.
2. 한일 병합은 일본의 어부지리
군대 없는 조선
어부지리, 날이 개자 조개가 입을 벌리고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이때 주둥이가 긴 도요새가 조갯살을 찝었다. 조개가 입을 갑자기 닫았다. 도요새는 놓아달라 하고 조개는 오기로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둘이 정신없이 싸우고 있을 때 망태기 울러 맨 어부가 지나갔다. 이게 웬 떡이냐, 조개도 잡고 새도 잡고. 동인과 서인이 서로 모략하여 싸웠고, 동인은 또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 싸웠고 대원군과 민비가 뒤엉켜 싸웠다. 이조 518년 동안 1,000건 이상의 역모 사건이 있었다. 1년에 두 번,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피비린내가 났다. 역모에 얽히면 모두가 양반의 노예가 됐다. 노예 지옥이 바로 조선이었다. 1392년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의 충신들과 실세들을 노예로 삼았다. 1432년부터는 세종대왕이 ‘노비종모법’을 강행했다. 출생자들 모두가 어머니의 신분을 따랐다. 양반이 열 명의 노비 여성으로부터 아이를 생산하면 열 명의 노비 여인이 낳은 수십명의 자식들이 다 노예가 되었다. 양반 한 사람이 수천의 노비를 거느렸다. 반반한 여인을 취하면 그 여인이 바로 자기가 낳은 딸이었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가축의 일종이었다. 소나 당나귀 값의 30%, 50%에 거래됐다. 인구의 90%가 노예였다. 위키자료를 보면 1910년 일본에 의한 호구조사가 있었고, 총가구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4,217호, 전체의 1.9%였다. 나라가 침략당했을 때 낫이라도 들고 나가 싸우는 사람은 모두 노예, 관청이 거느리는 관노예, 양반 개인들이 기르는 사노예들이었다. 이들은 양반에 대한 두려움만 있을 뿐, 주인에게나 국가에 충성할 마음이 없었다. 적군이 빵을 주면 적군의 병사가 되었다. 1653년으로부터 1666년까지 13년 동안 전라도 땅에서 살고 갔던 네덜란드인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청나라가 침범했을 때 적과 싸운 사람들보다 산으로 도망가 목매달아 죽은 병사가 더 많았고, 옆에서 한 사람만 쓰러지면 모두가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노비들에게 무슨 애국심이 있고, 무슨 훈련이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양반이 나가 싸웠겠는가? 아무도 싸우려 하지 않는 나라, 줍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세계와 동떨어진 가두리 나라
1,600년 전후, 이태리 과학자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조선 왕 선조는 임진왜란을 맞아 중국으로 도망을 가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영국의 뉴턴이 만류인력의 법칙을 내놓았을 때, 16대 인조는 병자호란을 당해 적장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영국을 위시한 구미에서는 산업혁명(1750~1830)이 지각을 변동시키고 있을 때,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넣어 굶겨 죽였다. 22대 왕 정조 때(1776-1800)에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발생했다. 23대 순조 때(1800-1834)에는 영국에서 증기기관차가 레일 위를 달렸고,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시대가 열렸다. 25대 철종(1849-1863), 대원군이 세도정치를 할 때,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발생했고, 에디슨의 발명 시대가 열렸으며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체제가 들어서 일본을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26대 고종 때인 1885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제국의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 각 승리했고,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고, 27대 순종이 한일병합조약으로 조선시대를 마감했다. 조선 왕들에는 왕실만 중요했지, 백성도 땅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실을 지켜줄 군대도 없고 국민도 없었다. 국가는커녕 왕실 자체마저 보존할 능력이 없었고, 끝내는 왕 자신을 지켜줄 신하가 없어, 아관파천, 러시아 공관으로 혼자 피신하기도 하고, 영국 공관, 미국 공관 등으로 피신하는 추태를 부리다가 일본에 왕실의 안전만을 부탁하고 조선을 내 준 것이다. 이 나라 공관, 저 나라 공관으로 피신해 다니는 왕에게는 그 가족조차 안중에 없었다.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순종칙서, 왕실을 보존하기 위해 조선을 일본에 스스로 바친 문서였다.
”짐이 결연히 내성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는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와 시의를 깊게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
조선 왕 27명이 518년 동안 통치한 직후의 조선은 어떻게 생겼는가? 지금의 서울 4대문 안에는 종로도 을지로도 없었다.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집을 피해 동네길이 꼬불꼬불 나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의 똥과 오줌, 가축의 배설물들이 벌창해 있어서 이리저리 땅을 골라 발을 옮기면서 다녔다. 여성들은 맨발에 가슴을 드러내 놓고 치마끈을 명치 밑으로 맸다. 우물에는 똥과 오줌이 스며든 악취나는 물이 고여 있었고, 그것들을 마셨다. 전염병이 창궐해 있었다. 수돗물이라는 것은 일본 통치하에서 생겨났다. 왕은 양반에게 노예를 상으로 내렸고, 궐 안에도 성병이 나돌았다.
상투 속에 이가 많아야 건강하고 잘 산다는 미신을 믿었고, 아프면 미신으로 벗어나려 했다. 말라리아에 걸리면 발바닥에 아버지 이름을 썼고, 사람의 형상을 그려놓고 복부에 칼을 꽂아 두었다. 눈병이 나면 그림을 그려놓고, 눈에 못을 박아 놓았다. 홍역에 걸리면 옷가지를 나무에 걸어 놓았다. 배가 아프면 개구리 세 마리를 산 채로 먹었고, 원숭이에게 말을 하게 하려고 수은을 먹였다. 12세 이하의 아이의 변을 약재로 사용했다. 상투에 이가 끓고, 냄새가 진동하여 1897년, 고종과 황태자 순종이 먼저 모범을 보여 머리를 깎고, 내무대신 유길준이 고시를 내려(단발령) 머리를 깎으라 했지만, ‘신체 발부는 수지부모’라는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1900년 전국적으로 시행되기까지 3년이나 걸렸다. 역대 학교 교사들은 이 ‘단발령’마저 일본의 만행 사례로 가르쳤다. 민족 고유의 전통을 파괴하는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위키백과 등에는 ‘창씨개명’을 일본이 강요하여 80%정도가 강제로 창씨개명을 했다며, 민족 말살 정책을 폈다고 기재돼 있다. 하지만 1940년 3월 6일 자 동아일보(석간)에는 제7대 조선 총독인 ‘남 총독’은 ‘1939년의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조선민사령개정령’(개정령 19호)에 대해 “창씨개명의 기회만 제공하고, 강제 실시하지 말라. 일반의 오해를 일소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절대로 강제 실시하지 말고, 그런 오해를 받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사항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이 일본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믿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
1912년 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공포했다. 일본의 민법, 민사소송법, 상법을 조선에 실시함으로써 사또가 재산 뺏는 짓을 금지 시킨 것이다. 총독부는 조선이 자치를 할 수 있도록 면장의 100%, 시장과 군수는 70%를 조선인들로 임명하고, 조선인 범법자를 함부로 주리틀지 못하게 했다. 1922년 조선호적법(조선총독부령 제154호 시행 1923.1.1.)을 제정 공포하여 떡쇠, 마당쇠, 이쁜이, 떡분이 등 노예에게 독립적인 호적을 만들어 주었다. 조선인 노예들을 모두 해방 시켜 준 것이다. 미국에서는 노예를 해방 시키기 위해 1861년에서 1865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남북전쟁을 치렀지만, 매우 고맙게도 조선 노예들은 1922년 일본의 개화정책에 의해 일제히 해방된 것이다.
사람들은 일본이 조선어를 말살하려고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글의 전신은 ’언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언문을 사용하면 곤장을 치고 주리를 틀었던 존재는 일본이 아니라 조선 왕들이었다. 연산군 이후의 모든 왕들이 언문 사용을 금지 시켰다. 조선왕조실록 연산 15책 54권(1504.7.20.)에는 “앞으로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며, 모든 언문을 아는 자를 한성의 5부로 하여금 적발하여 고발케 하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람을 아울러 죄 주라.” 투서가 너무 많아 왕이 귀찮으니 언문을 배우지도 쓰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반면 1921년 3월 12일 자 동아일보에는 조선어를 장려하기 위해 조선어 시험을 보게 하고, 합격한 사람들에게 수당을 지급한다는 광고가 나와 있다. 1922년 7월 12일 동아일보에는 조선어 장려 규정이 공포돼 있다. 일본 총독은 1928년에 10월 9일을 한글날로 선포하여 한글을 높이 대우해 주었다. 일본 최고 은행권 1만 엔에는 1983년부터 2023년까지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이 인쇄돼 있었다. 그는 1870년경, 옥스퍼드 영영사전을 영-한문 사전으로 전환했다. 서양 문물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수단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 유학생 제1호인 유길준에게 이 영-한문 사전을 영-한 사전으로 만들어 사용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병합 이전의 조선에는 잘해야 마을에서 천자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전국 방방곡곡 유치원을 짓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지었다. 교과서라는 것이 처음 생겼다. 1911년에는 취학률이 제로였지만, 1945년에는 64%, 1948년에는 74.8%로 급증했다. 양반들과 부모들은 자식 교육을 방해했지만 일본은 교육을 장려했다. 교육의 보급이 근대화의 첫걸음이라는 말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유길준에게 강조해준 말이었다.
위키인용집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대조선 어록이 실려있다. 조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배어난다. “1884년, 인간 사바세계의 지옥이 조선의 경성에 출현했다. 나는 이 나라를 보고 야만이라 평하기보다 요마악귀의 지옥국이라 평하고자 한다. 조선은 아시아의 일소 야만국으로서 그 문명의 상태는 우리 일본에 미치기에는 너무 멀리 뒤떨어져 있다. 이 나라와 무역을 해서 이로울 게 없다. 이 나라와 교류해서 우리가 얻을 것은 하나도 없다.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조선은 가령 그들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속국이 된다 해도 반갑지 않은 나라다. 조선은 상하 모두가 문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나라의 질을 평가한다면 한문 글자만 아는 야만국이라 하겠다. 조선인은 완고하고 편협하며 사리에 어두우며 거만하다. 조선은 하루라도 빨리 멸망하는 쪽이 하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이다. 조선 백성을 위해서라도 멸망은 축하할 일이다. 그래도 조선 백성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 백성들은 완고하기 짝이 없으므로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진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조선인들은 포악하고 무기력하다. 러시아나 영국의 백성이 되는 것이 행복할 것이다. 조선은 썩은 유학자들의 소굴로 국민은 노예처럼 살고 있다.”
선진 내국인이 본 조선
박제가(1750~1805, 영조시대 실학파) : 한양에는 수레가 없어서 오물을 쉽게 퍼가지 못하므로 백성은 냇가나 거리에 똥오줌을 버린다. 도성의 물맛이 짠 것은 바로 내다 버린 똥오줌 때문이다. 다리 밑을 보면 사람의 똥이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웬만한 비에도 씻기지 않는다. 백성들은 고된 노동에 열 손가락 모두 뭉툭하게 못이 박혀있지만, 입고 있는 옷이라고는 십 년 묵은 헤진 솜 옷이 전부이며, 먹는 것이라고는 깨진 그릇에 담긴 밥과 간도 하지 못한 나물뿐이고 부엌에는 나무젓가락과 빈 항아리만이 놓여 있을 뿐인데, 이유는 간단했다. 무쇠솥과 놋수저는 조선공무원이 빼앗아 갔고, 군포 대신에 동전 2.5냥씩을 해마다 양반 관리들에게 납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김옥균(1851~1894) : 조선을 방문한 외국 사람들은 “조선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길에 가득한 사람과 똥오줌이다.”라고 말한다. 관청에서 민가의 마당에까지 오물 천지로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어찌 외국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지 않겠는가.
윤치호(1863~1945) : 수치스러운 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현 정부하에서는 개혁의 희망이 없음을 확실하게 된다. 정부는 500여 년 동안 국가의 향상을 위하여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한국에 있어서 가장 깊게 자리 잡고, 가장 널리 퍼진 악은 거짓말이다. 한국인은 머리가 비었는데도 잘난 척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다. 대중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현대 국가를 다스리겠다고! 나와 다른 것,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한국인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고집부리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야만 자신의 체면, 자존심이 선다고 착각까지 한다. 무능하고 가렴주구를 행하는 조선인 정부와 유능하고 착취하지 않는 일본인 정부 중에서 택하라면 나는 일본 정부를 택할 것이다. 한국인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아간다. 조선인의 특징은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 함께 달려들어 무조건 몰매를 때리고 보는 것이다. 조선인과 대화하느니 차라리 벽을 보고 대화하는 게 낫다. 벽은 뒤에서 험담하지는 않는다.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 내 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 견디겠도다.
박종양(1872~1939,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관료) : 두뇌가 공허하여도 아는 체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병이다.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는 자가 사람들을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놈치고 사기꾼, 협잡배가 아닌 놈 없으며, 정의로운 척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숨기지 않는 놈이 없다. 말보다 그 사람의 행동을 먼저 살펴봐라. 타인의 말을 듣기보다 그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고 판단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 애국자를 박해하다 못해 처참하게 죽이는 그런 국가, 그런 정부에는 애국할 필요가 없다.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명나라와 청나라에 공녀와 인삼, 금은 등의 조공을 바친 것은 왜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가? 국민을 배려하지 않는 국가, 정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이런 국가에는 충성할 필요도 없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등 개혁파들은 무죄다. 이완용은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이다.
민원식(1886~1921, 언론인, 사상가) : 만세 운동만 부른다 해서 조선이 독립되는 것은 아니다. 3.1운동은 민족자결의 새 용어를 오해한 데에서 일어난 망동이고, 현 상태에서는 독립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조선민족은 일본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헌과 국법을 존중하며 개인독립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조선에서는 지배층이 부패했지만, 민중도 우매하고 미신에 빠졌다. 조선이 독립을 한다 해도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이나 일본의 문물과 가치관을 학습하지 않는 한 조선은 다시 미개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우드로우 윌슨은 미국인이지 조선인이 아니다. 그가 왜 조선의 독립에 관심을 갖겠는가? 그의 민족자결주의는 조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이 점령했던 나라들에 한한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은 패전국의 식민지가 아니라 승전국 일본의 내국 문제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별 대우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양자 사이에는 경제력과 학력 수준에서 차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차별 대우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다. 조선인 스스로가 지적 능력과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것도 문제다. 유언비어에 쉽게 현혹되고, 사리 판단 보다는 낭설과 미신에 의존하는 인간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현재의 조선인 후예들
해외 단체관광을 나가면 공항에서부터 시끄럽게 언성들을 높인다. 남의 나라 관광자원에 낙서를 한다. 거짓말이 생리화 돼 있다. 사드 배치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민주당 의원 8명이 중국에 가서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으라 호소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미국에 박정희 정권을 없애달라고 호소하고 다녔다. 백악관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박근혜 탄핵에 대한 댓글을 올려 미국인들을 짜증나게 했다. 유엔본부에 편지를 써서 천안함 폭침은 남한 정부의 소행일 뿐 절대로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미국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숭숭 뚫려 탁 치면 산산조각이 난다며 광화문을 100일 이상 더럽혔다. 미국이 전두환을 사주하여 5.18학살을 배후 조종했다며 미 문화원들에 불을 질렀다. 대통령들이 적장과 내통하여 이적행위를 버젓이 저질렀는데도 그런 대통령들을 존경한다는 민중이 너무 많고, 그 민중에는 우익이라는 대통령도 끼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개발 덕분으로 옷과 먹는 것들은 화려해도 영락없는 조선인들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졸부 공화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본의 서민주택가 도로변 배수로에는 붕어들이 노닐고 있다. 협궤를 다니는 일본 전철 칸은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협소해도 사람들은 책장 넘기는 소리까지 이웃에 폐가 될까 조용히 넘기며 독서를 한다. 커피숍 의자는 안락하지도 않고 탁자가 비좁은데도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앉아 공부를 한다. 길을 물으면 헌신적으로 안내해 준다. 거리에 침을 뱉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은 이웃에 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과 깍듯한 예의다. 일본이 조선에 가장 먼저 가르친 것도 청결, 배려, 질서였다.
외국 인물들에 비쳐진 조선
핸드릭 하멜(1630~1692) : 17세기, 조선의 전남지역을 13년 동안 관찰한 하멜의 표류기. 당시 유럽 국가들에 베스트 셀러가 됐었다. 네덜란드인 하멜이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향해 항해하다가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다음 13년 동안(1653~1666) 강진 여수 등 전남지역을 떠돌아다니면서 겪었던 일, 보았던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그의 나이 23세에서 36세까지 조선 땅에 억류돼 있으면서 겪고 관찰한 것들이기에 그의 관찰기는 신뢰를 받았다.
“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남을 속이면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은 국가가 뭔지도 모른다. 청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싸우려는 하지 않고, 산으로 도망쳐 목을 매서 먼저 죽었다. 누군가 옆에서 화살을 맞고 쓰러지면 모두 달아났다. 남자는 아이를 여러 명 낳은 아내를 내버리고 다른 여자들을 취해 첩을 많이 거느리고 여자를 종처럼 부린다. 조선은 청나라에 예속돼 있지만 안에서는 초법적인 절대자 노릇을 한다. 양반의 수입은 농사이고, 농사는 노예가 짓는다. 노예가 인구의 절반을 훨씬 넘는다. 2천, 3천 명의 노예를 거느린 양반도 있다. 조선인들은 의례 중국 천황의 지배를 받는 것을 숙명으로 알고 있다. 세계에는 1, 2개 나라만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청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세계에는 아주 많다고 말해주면 누구도 믿지 않는다. 죄를 지은 여인을 한 길가에 어깨까지 파묻고 그 옆에 나무톱을 놓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한 번씩 톱을 들고 그녀의 목을 베고 갔다. 여자가 죽자 시체를 담은 식초와 구역질 나는 폐수를 섞어 범죄자의 입에 물려 깔대기로 들여 부은 후 배가 뻥그래지면 부어 오른 배가 터질 때까지 매질을 한다. 다른 남자의 아내를 데리고 자면 사형에 처한다. 남자들은 질투심이 많아 여자를 친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범인이 된 남자는 뒤에서 찔려죽기를 원하고 여자는 목을 찔러 죽기를 원한다. 국왕에게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한 사람은 다 낼 때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매월 2-3회 씩 정강이뼈를 얻어맞는다. 맞다가 죽으면 일가친척이 다 갚아야 한다. 사찰(절)은 양반들이 기생들을 데리고 노는 장소다. 매음과 술판이 벌어지는 곳이다. 전염병이 걸린 사람은 마을 밖 외딴집에 가두어 놓는다. 외딴집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꼭 침을 뱉고 간다. 그렇게 죽는 것이다. 담배는 남자도 여자도 어린이도 다 피운다.”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 미국 선교사) :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다니고, 4,000년 역사를 훑어 보았지만, 한국 황제 고종과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 조선 사람은 음모의 명수다. 어머니 젖꼭지를 물고 있을 아기 때부터 음모를 배우는 것 같다. 서울의 부자가 사는 기와집 앞에는 하수로가 있는데, 채소와 쓰레기들로 채워져 악취가 진동했다. 거리에는 사람의 배설물과 동물의 배설물로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 길을 대감들이 가마를 타고 다닌다. 이런 위생 상태이기 때문에 콜레라와 페스트 등 전염병이 끊기지 않았다. 거리는 비좁은 흙탕길, 거기에 사람과 짐승의 배설물이 범벅이 되어 숨조차 쉬기 어렵다. 이런 길을 오가는 남녀들은 헝크러진 머리에 윗통들을 벗고, 맨발이며 바지에서는 냄새가 진동했다. 여자는 앞이 짧은 저고리만 걸쳐서 젖을 다 노출하고 다녔다. 옷 한 벌이 잠옷이고, 작업복이고, 외출복이었다. 그나마 아끼느라고 여름이면 바지만 입고 다 벗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부부(1859~1910, 연세대 창립자) : “집집마다 버려진 똥오줌과 하수 때문에 도랑에는 초록색 점액질의 걸쭉한 오물이 고여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 그 더러운 썩은 시궁창에 헐벗은 아이들이 놀고 있다. 부녀자들은 그 물에 야채를 씻었다. 똥더미 마당의 우물에서 여인들은 태연하게 물을 퍼 식수로 사용했다. 평양에는 우물이 하나도 없다. 우물을 파면 땅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해서다. 청일전쟁으로 시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대동강물을 떠다 마셨다. 25세를 넘긴 여자들에서는 도저히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비스카운트 노스클리프(1865-1922, 영국신문 경영인) : “조선 공무원은 모두가 도둑이다. 백성들은 양반 지배층이 도둑놈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다. 도둑질은 곧 강탈 짓이다. 조선인들은 일본군 병사들이 돈을 내지 않고 식량을 약탈한다며 잘못 알고 있다. 일본 정부는 조선 공무원을 통해 쌀값을 지불했다. 그런데 조선 공무원들이 중간에서 돈을 빼돌리고 있다. 조선 공무원들의 돈 빼돌리는 수완은 전 세계에서 최고 수준이다. 아프리카 토인들도 조선 백성보다는 잘 살 것이다. 만고천하에 조선만큼 더러운 곳은 없다. 중국의 도로에서 냄새가 난다하지만 조선인들은 똥구덩이에서 산다.”
량치차오(1873~1929, 조선망국보고서) : “조선 멸망의 원인은 궁중과 양반과 공무원이다. 일본과 중국을 번갈아 불러들이면서 서로 죽이고 싸웠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공무원을 국사를 다스리기 위해 두는데, 조선에서는 공무원을 양반 봉양 목적으로 두었다. 중, 러, 일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망한 것이다.”
스텐 베리만(1895~1975, 스웨덴 동물학자) : 한국사람들은 일본인들이 가진 정신력, 투쟁심, 집단행동과 같은 능력이 부족하다. 일본인들은 공공의 이익이 우선인데 한국인들은 이기적이다. 한국인들은 유구한 역사만 자랑하면서 하루종일 기다란 담뱃대만 빨고 있다. 만약 일본이 병합하지 않았다면 러시아나 중국에 합병됐을 것이다.
쇄미록 : 조선 사대부 오희문(1539-1613)의 임진왜란 피난기인 ’쇄미록‘은 징비록과 쌍벽을 이루는 역사문서로 평가돼 있다. 그가 1594년 4월 3일 작성한 일기가 있다. “그윽히 들으니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심지어 육촌의 친척도 죽여가지고 씹어 먹는다 하기에 항상 상서롭지 못하다고 했더니, 이제 다시 들으니 서울 근처에서 전일에는 비록 한두 되의 쌀을 가진 자라도 죽이고 빼앗는데, 근일에는 사람이 혼자 가면 좇아가서라도 죽여놓고 먹었다.”
선조실록 25년 5월 4일 기록 : “왜군이 쳐들어왔는데, 아랫것들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히려 일본군을 환영해 주어서 걱정이다. 아예 대놓고 일본군에 가담한 백성들도 적지 않았으니, 당시 선조는 윤두수(원균 편)에게 물었다. 지금 왜군의 절반이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내 부하는 내부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여기에서 ’내부하는 것‘은 중국 요동에 붙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원균과 한패인 윤두수가 선조에게 만주로 도망가라고 종용한 것이다. 이에 다급한 유성룡이 노예들을 향해 호소했다. “왜구를 물리치면 노예로부터 해방 시켜 주겠다.” 하지만 왜란이 이순신의 승리로 종결되자 유성룡은 ‘노예해방’은 없던 일로 했다. 선조가 이를 허용할 리도 없었다.
의병장 ‘강항’이 쓴 ‘간양록’ 내용이 있다. “적선 6~7척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각 배에는 조선인 반, 왜인 반이었다.” 조선인이 왜인과 함께 조선을 상대로 싸웠다는 뜻이다. 1607년, 1617년, 1624년에 조선통신사(외교관)들은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려오겠다는 취지로 ‘쇄환사’를 파견했다. 6,000명 가량을 데려왔지만 이는 전체 포로의 10%도 안 되는 숫자였다. 90% 이상의 조선인들은 일본이 더 좋다며 거기에서 정착해 살고 싶어 했다.”
이경직의 ‘부상록’ : 광해군 7년(1617)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경직이 ‘부상록’을 썼다. “조선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좋아하며 따라나설 줄 알았는데, 포로들이 당최 나서려 하지 않았다. 포로들 중 양반은 10%도 채 안 되었다.나머지는 조선보다 일본이 더 좋다며 따라나서지 않았다. 일본에 끌려온 조선 노예들은 맨손으로 끌려왔지만, 10년 가까이 지나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생활이 자유롭게 편해졌다. 따라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으로 잡혀간 도자기공들, 일본의 ‘아리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기 산업을 육성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의 왕들과 조선의 사대부들은 무엇을 했는가? 이태리,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가우디’라는 명 건축가가 짓다 만 파밀리아 성당 등 찬란한 건물들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을 욕하기 시작했다. 경복궁? 중국 자금성의 헛간 정도의 규모다. 내국인이건 외국인이건 똥오줌의 시궁창 바닥이 바로 조선의 수도 서울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런 서울에 중앙청을 짓고 종로광장을 만들고, 을지로, 종로 등 도로 구획을 만들고, 당시 서울을 일본 수도 동경에 버금가는 도시로 만들어 주고, 똥물이 스며든 우물을 메워, 수돗물을 먹이고, 현대적 교과서를 통해 개화시켜 준 일본이 더 유익했는가, 아니면 조선 왕들이 더 유익했는가? 이런 것들을 짚어보면 무려 518년 동안 27명의 이씨 성을 가진 왕들에 대해 돌멩이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 들 것이다.
쪽팔리는 조선의 위인들
조선을 지켰다는 최고의 영웅들은 누구들인가? 김구,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유관순이다. 김구(1876~1949)는 누구인가? 인조반정으로 공을 세워 왕을 함부로 움직이고 독재를 일삼다가 효종의 북벌계획을 명나라에 고자질한 죄로 능지처참을 당했던 김자점의 손자다. 삼족이 멸문당하자 강보에 싸인 채 황해도로 도망가 곰보로 성장하면서 열등의식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바로 김창수(김구)였다. 승려 노릇도 해보고, 동학란의 선봉 대열에 끼었다가 안중근의 아버지가 거느린 사병에 진압되어 안중근 집에서 한동안 식객 노릇도 했다. 1896년 21세 때 그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의 젊은 상인 ‘쓰치다 조스케’를 돌멩이와 몽둥이로 패 죽이고 돈을 절취하여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했다. 상해로 가서는 독립군 행세를 하면서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운영했다. 이승만에 질투를 느껴 사사건건 방해를 놓았다. 윤봉길과 이봉창에게 폭탄을 주어 젊은 나이로 목숨을 잃게 했다. 그것들이 실질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그런 도시락 폭탄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먹히지를 않았을 것이다.
김창수, 김구의 본명이다. 그는 세기의 간첩 성시백의 꼬임에 빠져 포섭됨으로써 이승만의 건국을 훼방했고, 1948년 4월 19일 휴전선을 넘어 평양에 들어가 4월 22일, 김일성의 북한 정권 창출 행사에서 북한을 부유한 나라로, 남한을 거지의 지역으로 폄훼하는 연설을 했다. 건국이 이미 이루어진 시점에서도 건국을 인정하지 않는 반대 행위들을 강행하다가 젊은 장교 안두희의 권총을 맞고 죽었다. 김일성에게는 과수원 하나만 하사해 달라며 무릎을 꿇었다. 그는 북한에서 영화 등을 통해 유치한 조롱감이 돼 있다. 남편이 돈 벌어가지고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목을 빼고 기다렸던 쓰치다 조스케의 부인이 살인마 김구가 한국 최상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 이 사실을 놓고, 무슨 생각을 할까? 금전이 탐나서 죽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젊은 상인을 끝까지 좇아가 돌멩이와 몽둥이로 때려죽인 후 돈을 갈취한 인물이 대한민국 최고의 영웅이다? 적장이 보낸 간첩, 성시백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충성하겠으니 과수원 하나만 하사해 달라 간첩에게 부탁한 후 김일성 정권 수립에 들러리를 서준 인물이 대한민국 최상의 영웅이다? 이런 조폭이 영웅이니까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폭력을 쓰고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봉창(1900~1932)은 누구인가? 용산의 문창보통학교 졸업, 가게 점원, 용산역 역무원으로 있다가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일본인 양자가 되어 일본식 이름도 얻었다. 일본을 좋아했고,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승진이 안 되어 일본에 반감을 가졌다. 그래서 김구를 찾아가 수류탄 두 개를 얻어다 그중 한 개를 히로히토 천황 행렬에 던졌다.
윤봉길(1908~1932) : 상하이 채소 장사를 하다가 23세의 나이인 1931년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겠다고 하여 도시락 폭탄 한 개를 얻었다. 그것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행사에 던졌다.
유관순(1902~1920) : 1918년 3월,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다. 아버지 유중권은 돈 있는 지방 유지였다. 2월 28일, 전교생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3.1만세 행진에도 참여했다. 1919년 4월 1일, 고향인 천안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행사의 주역이 아닌 그냥의 참여자였다. 시위대 전면에 서 있던 사람들이 체포됐다. 유관순도 그 일원이었다. 공주지방법원 판결에 의해 5년 형을, 고등법원에서는 3년을 받았지만, 특사령으로 1년 6개월로 단축됐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1920년 9월 28일 사망했다. 시위를 주도한 적도 없고, 천안 시위에서 단지 선두에 섰다는 이유 하나로 영웅이 된 것이다.
안중근(1879~1910) :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서 사병을 거느렸던 정도의 토호였고 일본에 기부금도 많이 내는 개혁파였다. 안태훈은 동학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전봉준의 동학란은 대원군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안중근도 17세에 동학란 평정 대열에 끼었고, 김구는 체격이 우람해서 동학란 선봉 대열에 끼었다. 김구는 안중근보다 3년 연상이었다. 안중근은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포수 노릇도 했다. 그가 살해한 이등박문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맞서 조선병합을 반대해왔던 인물이었다. 안중근은 겨우 조선 병합에 반대한 인물을 죽인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시쳇말로 똥볼을 찬 것이다. 이것이 한일 병합의 촉매제가 되었다. 이로부터 10개월만인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됐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안중근은 한일 병합을 반대해 온 일본의 수상을 저격했고 이로 인해 스폰서 잃은 조선은 곧장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다. 조선은 이완용이 일본에 바친 것이 아니라 안중근이 바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라를 일본에 바치는 일은 왕의 결심이지 총리대신 한 사람의 결심일 수는 없다. 이완용은 억울한 사람이다. 우리가 저주해야 하는 인물은 이완용이 아니라 518년 동안 조선 백성을 짐승처럼 학대해 오면서 나라 지키는 군대 하나 조직해놓지 않은 27명의 이씨 성을 가진 왕들이었다.
이완용은 순종을 가르친 선생님이었고, 헐버트에서 영어를 배워 당시 윤치호 등과 함께 영어실력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887년에는 미국 주재 공사로 나가 2년 5개월 동안 주미 외교업무를 수행했고, 호러스 뉴턴 알렌과 윤치호와 가까이 지냈다. 독립문 현판도 이완용이 썼고, 조선이 독립하려면 단결하여 개화에 힘써야한다고 역설했다. 이와는 반대로 고종은 입헌군주제에 반대해 전제군주제만 고집했다. 여기에서도 윤치호와 이완용 등은 ‘독립협회’를, 고종을 감싸는 수구파들은 ‘황국협회’를 만들어 대립했다.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고종을 폐위하고 박중양을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완용과 윤치호 등 개화파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모략은 고종을 계속 옹위만 하는 수구파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완용과 윤치호와의 차이점은 이완용이 총리 대신이 되어 순종의 명령에 의해 ‘한일병합조약’ 문서에 서명을 했다는 점이다. 윤치호는 일본이 너무 부럽다고 했고, 박중양은 이완용이 옳은 일을 했다고 강변했다. 일본과 미국사회를 견학한 당시의 눈 뜬 젊은이들은 모두 조선 왕을 답답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승만도 이 중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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