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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의미(5)일본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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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3-12 19:57 조회18,5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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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발단

 

한일병합의 역사에는 일본의 부끄러움이 있었던 게 아니라 조선의 부끄러움이 있었다약육강식이 상식이었고 대세였던 시대일본은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밖에 있는 나라를 침략하고 점령하고 있었는데 반해 조선은 문을 걸어 잠그고 제닭 잡아먹기에 정신이 없었던 한심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수치를 아는 문명인이라면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우리도 부끄러운 역사를 외부적으로 까발리는 유치한 행동은 자제했어야 했다한일병합에는 전적으로 조선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객관적이다.

 

일본군 위안부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는가여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문제가 없는 것을 반국가 세력이 허위로 모략하여 반국가 활동에 이용했을 뿐이다위안부 문제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90년 노태우 시절 이대교수 윤정옥이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하고 정신대 문제를 선정적으로 보도한 데서부터였다곧바로 1990 11 16일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회의)이 설립되었고이때부터 한일관계는 정대협이 좌지우지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부터 1990년까지 45년동안 위안부 문제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1951 10월부터 1965 6 22일 한일협정이 타결될 때까지 14년동안 1,500여회의 회담이 있었지만 회담 안건에는 위안부의 ‘자도 들어있지 않았다. 1980년대 한국 땅을 주사파 즉 김일성주의자들이 장악하면서부터 ‘찜짜붙기’ 전략으로 등장한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운영한 기간은 1937중일전쟁이 본격화됐을 때부터 45년 해방될 때까지의 8년 동안이었다여러 연구들에 의하면 이 8년 동안 일본군 위안소에 등록됐던 여성 수는 누적 인원 3,600명이었고그중 40%가 일본 여성이었다두 번째로 많은 여성은 중국 여성그리고 조선싱가포르말레이시아미얀마 등 아시아 10개국 여인들이었다고 한다중국은 우리나라처럼 식민지까지는 아니었는데도 일본군 위안소를 우리보다 훨씬 더 많게 채웠다그런데 일본 여성들도 말이 없고중국 여성들도 말이 없고아시아 10개국도 말이 없다한국에서도 해방 후 45년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김일성 신봉자들이 뒤늦게 나서서 한일관계를 훼방놓고한국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북한 정권에 충성하기 위해없는 문제를 창작하여 선전선동 모략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다.

 

삼성현대, LG 등 대한민국 유수의 기업들이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올려놓는 동안 이들 내적들은 대한민국을 창녀의 나라위안부의 나라로 이미지 메이킹하는데 혼신을 다했다대한민국 땅을 소녀상으로 뒤덮고 미국과 유럽 땅에도 소녀상을 설치해 ‘대한민국은 창녀의 나라’ 라는 이미지를 확산시켰다김일성주의자들은 조선 여성 20만 명이 일본군의 성노예였다고 선전해 왔다일본군을 성도착에 빠진 인간 늑대라고 비하했다. “제주도 아낙이 밭일을 하고 있는데 일본 순사가 위안부로 잡아갔다우물가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처녀를 일본 순사가 낚아채 갔다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5학년 만에 헌병이 담임 선생을 대동하고 나타나 덩치 큰 12살 여학생을 잡아갔다.” 위안부 관련 괴담들은 1980년 광주의 유언비어만큼 많고 황당했다이 황당한 괴담들은 김대중이 여성가족부(여가부)를 신설함으로써 더욱 증폭됐다여가부와 정대협의 콤비플레이로 위안부 문제는 5.18과 동급의 수준으로 성역화됐다동기와 목적은 이념이었다한일 관계를 대립관계로 악화시켜 대한민국의 번영을 방해하고 김일성의 항일 신화를 더욱 빛나게 만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해방 직전에 일본군 위안부가 20만 명이나 되었는데 어째서 1948 2월에 서울시에 등록돼있는 위안부 수가 겨우 568명 뿐이었는가?

정대협과 여가부가 이룩한 공적은 무엇인가국제사회에 한국 여성을 위안부와 동일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한국 여성이 외국에 나가면 세계인들은 한국 여성을 보고 위안부를 상상할 것이며 한국에 관광을 오는 외국인들 역시 한국 여성들을 볼 때마다 위안부와 결부시켜 상상을 할 것이다소녀상은 한국 여성 가슴 가슴에 더러운 주홍글씨를 달아주는 악이 아닐 수 없다생각없는 한국 여성들어린 딸을 데리고 소녀상을 쓰다듬고 목소리를 둘러주고 꽃다발을 바친다어린 딸, ”엄마나도 이 다음에 위안부 될래“, 위안부가 포부로 등장했다.

 

2019년 한 인터넷 기사에는 참으로 모골이 송연한 내용이 떴다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하는 여성 엘리스, 2019 8월 어느 주말호주에 왔다가 운전 중 9시에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주말이라 수리를 하지못해 견인차를 이용해 한 호텔로 갔다가기 전에 호텔에 전화를 걸어 방까지 예약했다막상 체크인을 하려는데, ”당신 혹시 위안부 아니냐?“는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화가 머리 끝까지 난 여의사는 경찰을 불러 항의했지만호주 경찰 역시 호텔 종업원 편을 들었다며칠 전그 호텔에 한국인 여성이 체크인해서 매춘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당신도 한국여성이니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한다결국 소녀상은 ‘한국 여성은 매춘녀라는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이다한국 여성을 천하게 비하시키는 이 소녀상대한민국에서도 세계 모든 곳에서도 시급히 제거돼야 할 대한민국의 주홍글씨인 것이다.

 

대한민국을 추락시키는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 주사파들은 언론을 동원하여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를 성역화시켰다. 5.18 성역화 방법과 똑같은 수법이었다그냥 ‘위안부라고 부르면 안 된다. ‘위안부 할머니라고 정중하게 호칭해야 한다. ‘위안부 할머님들은 모두 다 가정에서 곱게 자란 규수였는데 짐승만도 못한 일본 헌병일본 경찰이 강제로 잡아갔다고 말해야 애국자가 되고 지식인이 되었다위안소에서는 매일 야수와 같은 일본 군인들이 달려들어 녹초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적셔야 지식인이고 양심가가 되었다자발적으로 성매매 목적으로 브로커를 통해 위안소에 갔다고 하면 여러 해 징역을 살아야 했다.

 

매춘의 성격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욕구가 정의돼 있다1의 욕구는 식욕음식의 재료와 음식의 완제품이 자연스럽게 시장화돼 있다 2의 욕구가 성욕(sex)이고 제 3의 욕구가 남으로부터 인정받는 욕구다그래서 사람들은 출세를 하려 하고 재능을 뽐내려 하고악행까지도 하여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한다세기의 악한 알 카포네도 스스로를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했다그런데 제2의 욕구인 성(sex)에 대해서는 왜 시장이 없어야 하는가조선 역사와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매춘 시장 즉 섹스 시장을 불법 대상으로 막아놓은 존재는 오로지 노무현 한사람이었다매춘의 시장을 여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인가아니면 지금처럼 폐쇄시켜 놓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인가?

 

정신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돼있는 사람들의 섹스는 아름답고 숭고한 로맨스의 무대일 것이고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섹스는 욕구 배설의 수단이다세상에는 후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일편단심의 숭고한 섹스도 있지만 충동과 거래에 휩쓸리는 섹스도 분명히 존재한다우선 매춘 시장을 폐쇄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돌려차기 범죄가 기승을 부릴 것이고연쇄살인 행위가 줄을 이을 수밖에 없다하수구를 막아놓으면 하수가 지상을 오염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이 세상 그 누구도 심리학이 공식인정한 인간 제 2의 욕구를 아무런 부작용 없이 강제로 틀어막을 수 있는 능력자는 없다그런데 노무현이 이를 막은 것이다돌려차기해서 가정의 여성을 실신시켜놓고 일회성 만족을 취한 다음 끔찍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얼마나 많겠는가당해놓고도 창피해서 고통과 트라우마를 홀로 삼키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겠는가연쇄살인자가 있는가 하면 일회성 살인자들도 많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지금 ‘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범죄는 다 ‘노무현 효과로 불려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노무현 효과가 있다. 2016미국의 공식 통계에는 미국에 진출한 매춘녀들 중 제1위로 많은 여성이 한국 여성이었다. 23.5%! 태국 여성이 그 절반도 안 되는 11.7%, 페루 여성 60.0%, 멕시코 여성이 9.6%였다만일 한국에 매춘 시장이 살아 있었다면 한국 여성이 그렇게 많이 미국에 진출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이것도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허물고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부끄럽게 추락시키는 악의 효과인 것이다이어서 2017 3매춘관광에 나섰던 국영기업체 간부 2명이 포함된 한국인 남자 9필리핀에서 성매매를 하다가 붙잡혀 6~12년의 감옥살이를 했다그 집안들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고 그 9명의 인생은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이 무슨 국제망신이고 비극인 것인가전두환은 일본으로부터 40억 달러를 얻어다가 88국제 올림픽을 개최해서 세계를 감동시킨 반면민주팔이로만 먹고 살던 노무현은 대한민국을 섹스의 나라로 추락시킨 것이다.

 

매춘 시장막아야 하는 존재인가열어야 하는 존재인가가정에 화장실이 있고사회에는 하수구와 정화시설이 있어야만 하듯이인간 제2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배수구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섹스 시장을 부활시켜야 한다면 어떤 시스템으로 부활시켜야 할 것인가이것이 우리가 외면하지 말고 지금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매춘의 역사

 

조선의 양반들은 여성들이 가축과 노예였기에 성을 굶주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매춘의 역사는 조선 노예들이 양반으로부터 독립한 시점사유 재산이 보호되는 일본 통치 시대에 비로소 발아되었다일본은 조선왕 대신 총독을 통해 조선을 다스렸다합병을 시킨 후 일본이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은 교육이었다유치원과 초등학교부터 전국적으로 세웠고학교에서 가장 먼저가르친 것이 청결과 도덕이었다이를 닦고몸을 자주 씻고옷을 자주 빨아입고거짓말시키지 말고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들이었다일본이 시작한 이 도덕교육은 1997년까지 지속해오다가 김대중에 의해 폐기되었다도덕교육이 사라지고그대신 일본과 미국과 이승만과 박정희와 맥아더를 증오하는 살쾡이 교육을 시켜온 것이다도덕 교육이 있었을 때 아이들은 훈육이 시작되었지만증오심을 키우면서부터 아이들은 맹수처럼공격적으로 사육돼 왔다일본과 김대중누가 더 도덕적인가우리가 착안해야 할 점은 일본을 공격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는 자들이 다 김대중 추종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은 매춘시장을 열었다그 매춘시장에도 도덕율이 있었다매춘 시장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됐다공장과 사창공장 시스템은 국가가 매춘 시장의 터를 정해주고그 지역에서만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고사창은 시장을 지정해주지 않고 자연발생 현상에 내맡기는 것이었다공창 시스템에서는 매춘 시장에서 인권 유린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가 최소한의 관리를 함과 동시에 성병을 예방하기 위한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지만사창 시스템 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역할이 배제된다공장 시스템에서도 매춘녀의 모집은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다이것이 일본 공창 시스템의 도덕율이었다.

 

일본군 위안소는 중일전쟁이 본격화됐던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동안만 존재했지만 종전 후 일본인 위안부가 조선에 유입됐다는 증거나 연구는 없다그렇다면 20만 조선 위안부는 다 어디로 갔는가일본군 위안소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다가 독립적으로 사라진 것이다해방이 되면서 일본통치시대가 미군통치시대로 전환됐다미군정은 1947 11 14일부로 일본식 공창 시스템을 폐지시켰다과연 적절한 조치였는가?

 

식민통치 마지막 10(1935~45)은 조선의 산업혁명기였다땅 없이 노예 생활만 했던 농촌 노예들이 자유의 신분이 되자 도시로 몰려와 노동계급을 형성했다일본의 선정적인 잡지를 접한 도시 청춘 남녀들로부터 싹튼 신여성과 신남성에 대한 동경심이 입소문을 타고 농촌으로까지 파고들었다구박받던 처녀들에 도시는 기회의 땅으로 떠올랐다이광수의 소설[무정]이 신문에 연재되면서 청춘남녀들에게 도시 로맨스의 환상을 심어주었다심훈의 [상록수]에는 농촌 문화의 따분한 자화상이 거울처럼 묘사돼 있었다도시를 선망하던 농촌 처녀들의 골드러시가 인신매매단의 그물에 걸려들었다식모가 되고공순이가 되고식당과 기생집의 접대부가 되었다위안부 광고를 보고 뛰어든 여성들도 많았다화장품도 사고 싶었고예쁜 신여성 옷도 입고 싶었고장신구들도 갖고 싶었다미래가 꽉 막힌 가정폭력의 희생물이 되느니 위안부를 해서라도 자유를 누리고 신여성이 되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충분히 생길 수 있었다여기까지가 일본이 불어넣어준 자유의 바람이었다.

 

해방이 되자 미군이 조선을 통치했다고급 유흥업소카바레 등 위락시설이 들어섰다파마머리에 립스틱 짙게 바르고하이힐 신고 다리 꼬고 앉아 양담배 꼬나물고 양주잔 기울이는 미국식 신여성뭇 여성들의 새로운 로망으로 부상했다유명대학 여학생들과 가정주부들까지도 성에 개방적이 되었다눌려왔던 것만큼 용수철은 높이 튀어 올랐다성은 개방이 되었는데 미군정이 공창을 폐쇄시키고이승만 정부가 12년 동안이나 더 폐쇄시켰으니 그 폐해가 얼마나 극심했겠는가매춘 행위가 몰래몰래 주택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사회질서가 난잡해지고임질과 매독이 유행되었다체면상 병원에 가기를 꺼리는 바람에 성병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일본식 공창 시스템이 도입돼야만 하는 이 절실한 시기에 박정희 시대가 열렸다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집권하자마자 도지사가 되고 시장이 되고 군수가 된 군 장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본식 공창 시스템을 부활시켰다주택가와 동떨어진 곳들에 ‘적선지대’ 즉 홍등가를 설정하여 매춘업자(포주)들을 하여금 영업을 하게 허가했다용산역서울역영등포역청량리역미아리신당동초동충무로 4동두천의정부춘천원주속초강릉부산의 완월동 및 범전동대구의 오원동대전의 중앙동...  104개 지역이었다이 홍등가들에는 필리핀 여성을 비롯해 러시아볼리비아조디루몽골중국방글라데시키르키스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여러 나라의 여성들도 들어왔다.

 

유사이래 세계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그때마다 군병들이 사회와 격리된 채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군병들에게 의료진이 필수이듯이 위안소 역시 필수였다한국군 역시 6. 25전쟁때 위안소를 운영했다일본군 역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아시아 국가들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미군은 한국에서 위안소를 어떻게 운영했는가자유방임이었다미군 기지촌에는 자연히 위안부들이 몰려들었다치안도 없고성병에 대한 진료도 없었다치안 공백의 지대가 바로 기지촌 창녀촌들이었다벼라별 해괴한 폭력사건들이 줄을 이었다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2 10노태우때 발생한 윤금이 사건이었다윤금이는 미군전용 클럽 종업원이자 양공주였다치정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살해 방법이 엽기적이었다질에는 유리 콜라병을 박고 항문에는 우산을 꿰어넣는 방법으로 고통스럽게 살해했다이것이 반미감정에 불을 질렀다매춘에 대한 자유방임주의는 한국 여성에도 미국 국익에도 결코 도움이 안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내막

 

일본군 위안소는 아시아 국가들에만 있었고 1937년부터 45년까지 8년 동안만 존속했다일본군 위안소의 뿌리는 상해 위안소였다. ‘모리사키 가즈에의 저서[가라유래상]에 의하면 상해에는 1882년 당시 800명 정도의 일본 여성이 매춘부로 있었다. ‘가라유키상이라는 말은 매춘을 위해 해외를 떠도는 일본 여성을 뜻한다상해 주재 일본 영사관은 이를 수치로 여겨 600명 정도를 본국으로 강제 송환했지만 200여 명은 송환하지 못했다고 한다결국 이 200여명의 일본 여성이 1932년부터 설치한 일본군 위안부의 모태가 되었다일본 정부와 상해 소재의 일본군 위안소 운영을 공식화한 것이다일본군 위안소의 설치 목적은 네 가지였다.

지역주민에 대한 강간을 방지하고

군의 사기를 앙양하고

성병을 예방하고

군사 기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1932 3 14일자 상해 파견군 고급 참모 ‘오카베나 오자브로의 일지에 기재된 글이 있다. ”요즘 병사들이 여자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이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다.“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의 회고록도 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게도 위안부 방안의 창설자다쇼와 7 (1932) 상하이 사변 때 두세 건의 강간죄가 발생했다파견군 참모장이었던 나는 나가사키현 지사에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러들였다그후 강간죄가 완전히 그쳤기 때문에 나는 기뻤다.

상해에서 일본군이 개설했던 위안소는  군 직영 위안소  군이 감독 통제하는 군용 위안소 민간 매춘소를 병사용으로 지정한 위안소였다. 1936년 당시 상해에 진출한 한국 여성은 일본군 위안소에 들어갈 처지가 아니었다한 조사에 의하면 상해의 조선 여성은 댄서 37일본 카페 및 음식점 종업원이 48명이었다 한다이들은 음성적으로 밀매음을 하고 화대는 주인과 반반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중일전쟁이 한참인 1940년부터 비로소 중국 여성이 일본군 위안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조선 여성은 1941년 브로커가 20명 단위로 데려온 것이 첫 케이스였다일본군 위안소에는 6개의 준수사항이 있었고이용시간별 요금표도 있었고월경 있는 여인과 성병이 있는 여인을 제외시키는 엄격한 기율도 있었다.

 

<일본군 위안소 준수사항>

1) 이용 시 연대본부가 발행한 허가증을 영업자에게 제출해야 한다.

2) 위안소 내에 음식물을 들일 수 없다.

3) 위안부 및 영업자에 대한 난폭한 행동을 금한다.

4) 이용 시간을 엄수하고 타인에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5) 영업자와 기타 위안부 여급 둥에 대한 일체의 대차관계를 엄금한다.

6) 위안부들은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 한다.

 

<위안소 이용시간 및 요금표>

1) 병사는 10시부터 17시까지, 30분에 1, 1시간에 2

2) 하사관은 17시부터 22시까지, 30분에 1 20, 1시간에 2 40

3) 준사관 이상은 22시부터 1시간에 3, 24시 이후는 10

4) 사쿠(콘돔)은 영업자가 부담한다.

5) 황군 이외의 자는 접객을 금한다.

6) 영업자는 매월 초 5일까지 위안부별 영업상황을 보고한다.

 

위안부로 입신양명한 문옥주

 

일본군 위안부의 전형 문옥주(1924~1996)은 대구에서 태어나 버마 수도 랑군 소재 일본군 위안소에서 2년동안 위안부를 했다. 2년 동안의 위안부 생활 결과 1944 81,000원의 현찰과 우체국 예금 통장을 들고 다이아반지를 끼고하이힐을 신고화장을 하고악어백 들고아름다운 초록색 레인코트를 입고아시아의 흑진주라는 사이공 거리를 누비면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고했다비싼 장신구와 비싼 화장품과 옷으로 장식하고도 현찰 31,000원과 우체국 예금액 50,108원의 저금된 통장을 갖는데 불과 2년만 걸린 것이다당시의 화대는 병사의 경우 30분에 1원이었는데 81,000원이면 천문학적인 화대다팁을 많이 받은 것이다일본군 병사나 장교들이 위안부에게 두둑한 팁을 주었다는 이 이야기는 위안부를 성노예로 마구 학대했다는 기존의 이야기와 정반대다그만큼 위안부 문제가 사실과 동떨어지게 왜곡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녀는 그 거금을 가지고 대구에 와서 부자로 날렸다그녀는 자서전까지 일본어와 한국어로 냈다제목은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일본어판은 그녀가 사망한 1996년에 냈고한국어판은 2005년에 냈다아마도 정대협이 냈을 것이다.

 

자서전에 의하면 그녀는 1924년 대구 대명동에서 태어나 12살 때 일본으로 팔려가 17세까지 요정에서 심부름을 했다당시 일본은 17세 이전의 여성을 절대로 성접대 현장에 내보내지 못하게 엄격하게 통제했다이는 자서전에 있는 내용이다그녀 역시 성접대 현장에 나가기 전에 ’권번에서 기생수업을 받았다. 1942년 매춘업자가 문옥주 등 대구 여성 20명을 모아 부산을 출발사이공과 싱가포르를 거쳐 버마(미얀마)수도로 데려갔다수도 랑군에 소재한 일본군 ’방패사단에서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고거기에서 마감했다그녀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상냥하고노래도 잘하고남을 배려하는 착한 심성을 가졌기 때문에 인기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그녀는 일본군 병사를 한낱 섹스 대상으로만 삼은 것이 아니라 병사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주었다. ’언제 죽을지 몰라 슬퍼하는 일본군 병사들을 가엽게 여겨‘ 모성애를 발휘했다노래도 불러주고 대화도 해주었다많은 팁을 받았다일본군 병사 ’야마다 이치로와는 사랑에 빠져 헤어진지 51년이나 지난 1993년에도 그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그녀의 친구는 일본군 병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귀국할 때 그 일본군 병사로부터 아이를 잉태해 대구에 와서 귀하게길렀다고 한다일본군 병사는 악마도 아니고 성에 미친 괴물이 전혀 아니었다대구에 와서 수많은 남자들과 동거를 했다는 문옥주도 사망하기 3년 전인 70세에 일본군 애인 ’야마다 이치로가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이 두 여인들에게 일본 병사들은 상남자였던 것이다이 문옥주 자서전이 이제까지 정대협이 악마화한 일본군 병사들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20세의 나이로 일약 부자가 되어 대구 고향에 금의환향한 문옥주화류계의 영업을 하면서 프리마돈나가 되었다그리고 돈을 보고 달려드는 여러 남자들과 차례로 동거도 하면서 재산을 다 탕진한 쓸쓸한 처지가 되었다그래도 그녀의 위안부 생활을 알 리 없는 일가친척들과 주위 사람들은 그녀에게 따뜻했었다그런데 뒤늦게 정대협의 집요했을 설득에 의해 그녀는 그만 그녀의 부끄러운 과거를 정대협에 등록하고 말았다주위는 물론 일가친척까지도 창피하다며 기피하게 된 것이다. ’위안부는 그녀의 친척들에 주홍글씨가 되었다.

 

부모가 딸을 위안부로 내몬 사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권에는 센프란시스코대학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소정희 교수의 논문이 실렸고여기에는 가정폭력을 이기지 못해 출가하여 위안부가 된 6명의 사례가 소개돼 있다당시 신문에는 아버지가 딸을 1,300원을 받고 브로커에 팔아넘긴 사실이 보도돼 있다. ’돈에 눈이 어두운 부모‘ 이조시대의 아버지는 딸을 노예로 생각했기 때문에 딸을 죽이는 일도 다반사인신매매단을 통해 중국이나 일본에 팔아넘기는 일도 다반사였다프랑스 선교사 ’샤를 둘레 ’조선의 굶주린 주민들은 중국의 밀수업자들에게 자신의 어린 딸들을 한 사람당 쌀 한 말에 팔았다고 했고선조때 오희문이 쓴 ’쇄미록에는 ’사람이 사람을 사냥해 인육을 먹었다고 했다이것이 조선인 여성의 몸값이었다.

1) 문필기문옥주보다 한 살 늦게 1925 2 9녀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밖에 될 게 없다며 화를 냈다어머니가 쌀 한 말을 몰래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지만 일주일도 채 안되서 아버지가 교실에서 끌어내 책을 불태웠고딸을 무자비하게 패서 내쫓아버렸다큰집에 피신했다가 다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9살때부터 살림하고 밭일하고 목화밭 매고물레질도 했다구멍가게에서 파는 고구마도 찌고밭에 밥을 지어 나르면서 신세를 한탄했다그러던 1943년 가을 어느날마을에 사는 50대의 남자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게 해준다 해서 따라나섰다. 18세였다부산으로 실려가 긴 머리를 자르고한복을 원피스로 갈아입고다른 4명과 함께 곧장 만주로 갔다. 1943년부터 2년동안 만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이런 여인이 매주 정대협이 주최하는 수요집회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가서 위안부로 삼았다 ”사죄하라배상하라“ 외쳐왔다이 여성이 정대협 위안부 명단에 이름을 올린 시기는 1992 6월이었다.

 

2) 이상옥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면장 딸이었다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는 부농집이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의 집요한 방해로 학업을 포기했다.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책을 아궁이 불 속에 넣고 태워버렸다옆집 언니가 학교에 다니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고모가 다시 학교에 보내주었지만 오빠가 집요하게 방해해 서울로 도망쳤다소리개라는 곳에 갔더니 9명의 처녀들이 있었다모두 아버지가 팔아서 왔다고 했다이때 이상옥 나이 15세였다이들 9명과 함께 실려온 곳이 시모노세키였다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일본말을 한다는 이유로 군 병원에서 일하면서 봉급을 받았다일본군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 보내주려 했는데그 군의관이 폭격을 맞아 사망했다이후 어디서 위안부 생활을 했는지는 파악이 안돼 있다.

 

3) 이득남: 1918년생아버지는 술주정꾼이자 노름꾼이유없이 딸을 팼다집이 곧 지옥이었다. 17세에 이웃친구와 함께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지만 그것이 위안부의 길이었다. 1939년부터 1942년에는 중국에서이후 해방될 때까지 3년을 수마트라(인도네시아)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4) 김옥실: 1926년 평양시 인근에서 태어났다공부를 하려 하자 아버지가 심하게 때렸다. ”에미나이 새끼가 글 배워서 어디다 쓰갔네연애편지질이나 하려구 그러나.“ 아버지가 무지 싫었다평양기생이 고운 옷 입고고운 가마타고 다닌다는 동네 아주머니들 말을 듣고 기생집에 가서 양녀가 되었다일주일 만에 아버지가 찾아왔다 ”이 에미나이가 조상 망신동네 망신을 다 시키고 돌아다닌다며 매를 많이 맞고 집으로 끌려갔다다시 가출하여 양말공장에서 3담배공장에서 4년 일하다가 인신매매단에 걸려들었다어디에서 얼마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는지는 자세치가 않다.

 

5) 배옥길: 1922년생어머니로부터 모진 매를 맞고 학대를 받아 자살까지 기도했다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거짓말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중국 위안소였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냉담했다.

 

6) 송신도: 1922년 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부터 가출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에 가서 1938년부터 1945년까지 7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일본군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일본에 도착한 병사는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와의 영원한 결말

 

매춘시장을 법으로 폐쇄한 것은 순리가 아니라 억지요 횡포다여성들에 대한 살인행위를 유도하는 국가의 범죄행위인 것이다매춘시장은 반드시 부활시켜야 하고공창 시스템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생각한다위안부를 신격화하고 일본군을 악마화한 것은 사실을 정반대로 뒤집은 모략 행위다이 모략 작전은 김일성을 추종하는 반국가 세력의 추악한 공작이었다매우 부끄럽게도 대한민국은 위안부를 이념적 장사 수단으로 악용한 반국가 세력에 철저히 농락당했다소녀상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독이고대한민국 모든 여성들에 붙여진 주홍글씨다즉시 땅에 묻어야할 추물들인 것이다.

 

위안부의 꽃 문옥주일본어판과 한국어판으로 자서전까지 낸 위안부의 전형 문옥주천덕꾸러기로 태어나 12세에서 17세까지 일본에 가서 세련된 처녀로 성장했고대구 여성 20명과 함께 사이공-싱가포르를 거쳐 버마 수도 랑군에 가서 불과 2년 동안만 매춘을 해서 고급화장품에 파마를 하고 다이아반지를 끼고 하이힐 신고고급 유행 레인코트 차려입고악어백 들고, 81,000원을 움켜쥐고일본군 병사 ’아마다이치로와 사랑을 나누고, 20세의 나이로 대구에 금의환향하여 화류계의 프리마돈나가 되었다이것이 어째서 성노예이고 돈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짐승 같은 일본군의 학대를 받았다는 것인가문옥주의 동향 친구는 일본군 병사를 너무 사랑해서 헤어질 때 애인의 아이를 임태해 대구에서 귀하게 길렀다 하지 않은가이 두 여인들에게 일본군 병사들은 상남자가 아니었던가?

 

지난 34년 동안 대한민국 역사를 장악했던 소수의 여성들일본에 조금이라도 스치기만 해도 오물이 금덩이가 되는 이야기를 지어냈다대한민국을 파괴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했다정대협의 검은 전설 윤미향, 2017 9 14일 위안부 김복동김원옥을 간판으로 데리고 베트남 대사관 앞에 나섰다대형 현수막을 들고나와 한국군이 베트남에 가서 일본군처럼 베트남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으니 용서해달라는 시위를 한 것이다주월 한국군은 모두 36 5천 명, 5천 명이 사망했고, 16만 이상이 고엽제로 신음해 오고 있다. 1952,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구하는 것과 같다“ 고 혹평했던 바로 그 런던타임즈 기자가 그로부터 14년만인 1966 5 29일자 특집에서 ”한국군이 월남전을 맡았거나미군이 한국군 전술을 택했더라면 벌써 승리로 끝냈을 것이라고 극찬을 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단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유명한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명령이었다게릴라는 물고기주민은 물주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군대는 소멸한다는 것이 게릴라전의 핵심 교리였다그런데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여자 사냥이나 일삼았다면 한국군이 세계적인 존재로 우뚝 서있을 수 있었겠는가필자는 이런 발칙한 윤미향을 필자가 뚫고 다녔던 정글 가시나무 밭을 한 시간만이라도 끌고 다니고 싶다이런 발칙한 윤미향이 대한민국을 손아귀에 쥐고 1990년부터 무려 33년 동안이나 쥐락펴락했다는 이 사실대한민국의 치욕사일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국보법 폐지통진당 해산 반대평화를 위한 북측전쟁 환영정대협 핵심 관련자들은 반국가 성향의 식구들을 두었다간첩이거나 간첩과 연루한 사람들맥아더 동상 철거자들북한을 40여 차례나 드나들던 사람들김정일 조문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충현과 같이 있는 사람들로 채색돼 있다이런 사람들이런 사람들이 만든 단체가 국가를 제쳐놓고 한일 관계에 도끼질을 한 것이다.

 

김일성을 맹종하고 김일성 자금으로 고시공부를 한 판사와 검사들김일성을 추종하거나 간첩의 마수에 걸려 약점이 잡힌 무수한 사회 저명인들언론인들정부 요직자들이들이 모두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대한민국을 파괴했고그 파괴 수단 중 가장 큰 하나가 일본군 위안부라는 모략물이었던 것이다일본군 위안부열사였는가 매춘부였는가이 땅의 과학자들은 냉정하게 분석해야 할 것이다조선 후기 개화파의 선구자 윤치호, 1865년에 태어난 윤치호 선생이 20대에 진단한 조선인들이다. ’조선인들의 특징은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함께 달려들어 몰매를 때리는 것이다조선인과 대화하느니 차라리 벽을 보고 대화하는게 낫다‘ ’한국인은 머리가 비어있는데도 잘난 척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다‘ 100년 후인 1980년 한미연합사령관 위컴 대장은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한 사람이 말을 하면 모두 다 같은 말을 하면서 뒤따른다.“ 정대협을 따라 양심가인 척지식인인 척눈물까지 흘리면서 정대협 장단에 춤추던 사회인사들과 언론인들그 얼굴을 다시 좀 자세히 보았으면 좋겠다얼굴이 과학이고 얼굴이 스펙이기 때문이다자세히만 볼 수 있다면 들쥐의 실루엣이 서려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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