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대법원장님, 국회의장님께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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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5-03 23:49 조회17,9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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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대법원장님, 국회의장님께 호소합니다.
1. 대통령님께 호소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단 한사람의 자유가 부당하게 침해당해도 그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국제사회에 선포하셨습니다. ‘국가는 제복 입은 유공자를 특별히 예우할 것’이라는 말씀도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5.18을 헌법전문에 넣겠다’는 말씀도 많이 하셨습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 되겠지만, 이 세 가지 말씀에 상당한 모순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과 이 모순으로 인해 제복 입은 유공자인 저를 포함해 수많은 국민들이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5.18특권계급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육사를 졸업하면서 바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4년 동안 공산게릴라와 정글전을 수행하였습니다.상이유공자가 되었고, 전공유공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유학하여 경영학 석사와 응용수학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논문에는 제가 새로 발명한 수학공식 2개와 수학정리 6개 등이 실려 있고, 이 공식과 정리들은 저의 이니셜인 JEE라는 이름으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국정원, 국방연구원 근무를 거쳐 대령으로 예편한 후 미 해군대학원 교수를 끝으로 조직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 이후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한 후 현대사의 핵심인 5.18을 2002년부터 현재까지 22년 동안 연구하여 5.18역사서 18권을 저작하였습니다.
저는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전이라는 학문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광주의 희생이 공수부대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북괴군 공작조에 의해 발생한 것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동 중인 현역사단을 300명의 어깨부대가 기습공격하고, 44개 무기고를 4시간 만에 털고, 무기고에서 꺼낸 총으로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교도소를 공격하고, TNT폭탄을 2,100발씩이나 조립해 광주시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게 한 모든 불명예스러운 행위를 광주시민이 한 것이 아니라 북괴공작대가 수행한 것이라는 제 결론이 어째서 광주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인지 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반면, 5.18세력은 극구 광주의 피해를 공수부대가 입혔다고 주장합니다.공수부대가 광주시민을 마구 쏘았고, 희롱했고, 성폭행을 일삼았다고 주장합니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 국민이 자기들을 목숨 바쳐 지켜주는 국군을 살인집단이다, 강간집단이다, 손가락질하며 경멸하겠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저의 연구는 광주시민의 명예와 공수부대의 명예를 모두 다 회복시켜주는 반가운 존재가 돼야 할 것입니다.그런데 광주는 시청, 법원, 5월단체들이 총연대하여 방어능력이 없는 84세의 제복 입은 유공자에게 2년형을 선고케했고, 4차례에 걸쳐 3억8천만 원을 5.18단체에 명예훼손 배상금으로 물어주게 했습니다.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할 84세의 제복 입은 유공자를 광주의 모든 기관과 단체가 연합하여 이렇게 집단린치를 가해도 되는 것인지 간절히 여쭙고자 합니다. 안보를 위해 그리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국가에 충성한 이 결과가 5.18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2년의 징역형과 4억에 가까운 배상금을 물리는 처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무소불위의 세도는 대통령님의 ‘헌법명기’약속에 의해 더욱 기고만장 안하무인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모든 국가유공자는 대통령 명을 받은 보훈부가 선정하고 집행합니다.그런데 유독 5.18유공자에 대해서는 광주시가 선정하여 대통령께 집행하라며 토스를 합니다. 5.18에 관한 한 광주시장이 대통령 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특수계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평등과 자유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5.18특수성골계급이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언제까지 허용될 것인지 국민 앞에 공개적으로 대통령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2. 대법원장님께 호소합니다!
5.18표현을 한, 타 지역 국민 관련 사건을 어째서 꼭 광주법원이 독점적으로 관할하도록 허용하고 방치하는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같은 표현을 했는데도 타 지역 법원이 재판하면 무죄가 되는데 광주법원이 재판하면 중죄가 선고됩니다. 판결은 승복력을 생명으로 합니다. 광주는 5.18을 자산으로 정치적, 사회적, 금전적 특혜를 누려온 지역입니다. 그래서 5.18에 관한 한 광주법원은 이해당사자인 것으로 인식돼 있습니다. 또한 2012.12.27.자 대법원은 ‘북한군 주도’표현이 학문적 의견이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아니하고, 5.18단체들은 이 표현에 의한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판결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5.18단체들은 제가 책을 낼 때마다 민형사소를 제기했습니다.
어쩌다 서울에서 진행된 형사사건에서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했는데도 광주법원은 같은 무혐의 사건들에 대해 억대의 손해배상을 선고합니다. 사건을 거주지관할법원으로 이송해 달라 해도 대법원이 부결 기각해 왔습니다. 그 결과, 저는 광주단체, 광주법원에 포로가 되어 린치를 계속해서 당해왔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구해줄 법관이 없습니다. 민사재판도 보통재판적 규정에 따라 거주지나 행위지 관할법원에서 재판을 받도록 교통정리를 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5.18세도가 법질서에까지 침투하는 것은 매우 공포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3. 국회의장님께 호소합니다!
2019년 국회가 5.18진상규명법을 제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5.18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2023.12.26.까지 만4년 동안 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 위원장 송선태는 5.18유공자인데다 5.18발발 일주일 전에 5.18시위내용 그대로의 계획서를 ‘자유노트’에 기재한 기획자 중 한 사람입니다. 조사위원회 거의 모두가 광주시민들이고, 5.18수호기관에 몸담았던 사람들입니다.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긴 격입니다. 이는 승복력은 커녕 동 진상규명법이 정한 제척사유 자체를 정면으로 위반한 점령군과 같은 파행입니다. 5.18역사가 떳떳한 역사라면 이런 부끄러운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원회 구성도 파행에 해당하지만 조사행위는 차라리 희극이었습니다. 중요한 조사대상자 두 명을 밤중에 한 사람씩 모텔에 불러내 한 사람을 4시간동안이나 딸의 직장을 약점 잡아 협박하고 회유하여 위원회가 원하는 진술서를 쓰게 했고, 또 한사람도 밤중에 모텔로 불러내 1시간동안 어르고 회유하다가 녹음을 당하였습니다. 광주시위는 국토의 지축을 흔들었고 세계의 뉴스를 한동안 요란하게 장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지휘자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송선태 위원장은 아무나 불러다가 이 사람이 지휘를 하였다고 방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겨우 20세에 지방에서 광주로 갓 올라온 어리버리 청년이었습니다. 조사가 아니라 협잡행위였습니다. 어차피 시작한 조사입니다. 이들의 조사내용을 광주사람들 아닌 타 지역 국민들로 하여금 조사내용 검증팀을 구성케 하여 객관적 시각으로 마무리 짓게 하는 것이 국회가 할 도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사를 객관적 독립적 팀으로 하여금 마감케 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4. 5.18을 북이 주도했다는 데 대한 저의 연구내용의 대강입니다.
1) 1980.3.28. 일본 통일일보에는 김일성이 10.26 직후 3성 장군 강철만 상장을 시켜 남한에 ‘자발적인 의용군’으로 위장시켜 폭동조를 투입해 남한 폭동과 남침을 연결하는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뉴스가 실렸습니다.
2) 1980.5.10. 일본 내각조사실은 5월 중 북이 남침을 할 것이라는 긴급 첩보를 알려왔습니다.
3) 1980.5.14. 광주 군수지원단 소속 장교단 70명이 광주 증심사 옆길을 행군하던 중 살기가 분출되는 이방인 100명 정도와 마주쳤는데 분위기가 으스스했고, 전라도 말씨가 아니었고, 몸이 늘씬늘씬하게 다듬어져 있어 의문으로 남아있었는데 그 일주일 후에 ‘군분교’ 습격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군분교 사건이 이 수상했던 이방인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합니다.
4) 1980.5.15. 계엄사는 국정원으로부터 전남 신안군 앞바다에 북괴공작조가 출현했다는 첩보를 받고, 즉시 20사단 수색중대(130명)를 파견했습니다. 무장을 하고 10여대의 트럭에 승차하여 접근하던 중 정보가 새어나가 송정리 부근에서 괴한 수백 명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장병 130여명을 습격하여 죽도록 때려 중상을 입혔습니다. 이 정도의 한국인 조직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5) 1980.5.17. 24:00시, 김대중 이하 그가 이끄는 24명의 혁명내각 요원들이 전격 구속되고, 전국에는 공기조차 얼어붙는 살벌한 예비검색이 발동되었습니다. 이 혁명내각은 5.18과 남침이 연결되어 국가가 전복되었을 때 국가를 관리하려는 조직이었을 것입니다. 5월 18일(일요일)은 전국에 젊은이들이 경찰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다 숨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전 9시, 경찰보다 훨씬 더 무서운 공수부대 주둔지를 찾아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돌멩이 공격을 가한 300명 어깨들이 나타났습니다. 공수대원 7명의 얼굴에서 피가 낭자했습니다. 공수대원들이 화가 나서 쫒아갔지만 그들을 발발이들 이었습니다. 이들은 금남로로 달려가 파출소와 차량에 불을 질러, 연기가 높이 올라가게 해서 시민들을 모았습니다. 준비해온 유언비어를 뿌렸습니다.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라는 전두환의 살인명령이 떨어져 닥치는 대로 찌른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여대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내고, 머리껍질을 벗겨 전봇대에 매달았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보냈다…” 이 기상천외한 괴담은 누가 준비했겠습니까? 위대한 발견이 있습니다. 1960년 6월 25일, 6.25. 10주년을 맞아 김일성은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벽에는 온통 상상의 그림이 걸려있었습니다. 미군이 아름다운 여성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그림, 머리에 대못을 박는 그림, 톱으로 머리를 반토막 내는 그림 등 수없는 상상도가 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입문 앞에는 거대한 조형물이 있고, 거기에는 “워커장군의 살인명령”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이든 로인이든 무자비하게 닥치는대로 죽여라, 자비심은 금물이다.” 바로 1960년에 북에서 미군을 모략한 이 내용들이 1980년 광주로 평행이동해 온 것입니다. 미군이 공수대원으로 바뀌었고, 워커장군의 살인명령이 전두환의 살인명령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1985년 황석영 이름으로 발간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약칭 넘어넘어)은 북한 조국통일사가 1982년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과 1985년 노동당출판사가 1985년에 발행한 [광주의 분노]를 짜매기 한 것입니다. 짜매기 사실은 2011년 신동아도 확인한 사실입니다. 100%허위로 공수부대와 전두환을 모략한 책입니다. 사상이 의심스러운 광주 향토사단 사단장 정웅은 2개 공수대대 400명으로 하여금 금남로에 들어차있는 수만 명 중에서 젊은이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체포하라, 목숨 걸고 임무 수행하라”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고, 이에 병사들은 1:100이 넘는 시민을 향해 곤봉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장면을 예측한 공작조는 미리 옥상에 사진기를 대기시켰다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사진을 찍게 했습니다. 이 사진이 또 유포되어 광주시민들의 증오심을 유발시켰습니다. 광주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계획한 것입니다. 이는 게릴라전의 abc입니다.
6) 5월21일은 세계적인 수준의 용병이나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고난도 게릴라전이 연속 이어졌습니다. 그 첫 번째가 ‘군분교’ 기습작전입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광주시내로 가려면 작은 교량 ‘군분교’를 건너야합니다. 그 인접해서는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공장이 있습니다. 북한 공작조 300명은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21일 08:00시경 이 장소를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하고 하루 전날, 온갖 중장비를 동원하여 도로를 파고, 부피가 큰 장애물들을 날라다가 가두리장을 만들어놓고, 장애물 뒤에 숨어서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20사단 지프차 14대가 오자 노인으로 위장한 부대가 손을 흔들며 환영의 뜻을 보내면서 차량을 가두리장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습격을 했습니다. 장병들은 혼비백산 도망쳤고 이들은 지프차 14대를 끌고 이웃 아시아자동차공장으로 갔습니다. 이런 작전을 할 수 있는 300명 부대가 광주시민들이 만든 부대이겠습니까?
7) 5월21일 09시, 군납업체에는 600명이 집합하여 출고된 적이 없는 이태리형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400대 내외를 탈취하여 일부는 시내로 가고 일부는 전남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남한자료와 북한이 노출시킨 자료에 의하면 12시부터 4시간동안 탈취한 총기가 5,400여정이고 실탄이 30만발 정도였습니다. 8톤 트럭분의 TNT를 탈취하여 도청 지하에 2,100발의 폭탄으로 조립해놓았습니다. 광주사람이 자기도 죽고 가족 일가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엄청난 행위를 저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600명 공작부대를 광주에서 천대받던 구두닦이, 껌팔이, 식당배달원들이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할 국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8) 영화들은 도청 앞에 정렬된 공수부대가 21일 오후1시경 도청 앞에 모인 군중을 향해 집단발포를 해서 도청 앞을 피바다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 최고급 법의학 박사와 당시 계엄군이었던 장교 출신들이, 유네스코에 보관된 광주 시민들, 외국인 기자들의 증언과 당시 검시결과를 분석한 결과, 5월21일 24시간 동안 광주에서 사망한 총 사망자 62명 중 도청 앞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전무합니다. 여기에서 수행한 모략작전은 가히 환상적입니다. 집합돼 있는 공수대원들을 향해 장갑차를 고속 돌진시켜 계엄군을 깔아 죽였습니다. 장교급에만 몇 발씩 지급돼 있던 총알이 장갑차를 향해 날아갔습니다. 이러한 돌진은 모두 세 차례 있었습니다. 무장괴한들이 대량 살상용 무기인 총류탄까지 휴대하고 금남로 양쪽에는 늘어선 건물들의 옥상에 미리 올라가 있었습니다. 금남로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시민들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도청 앞 총소리를 이용해 옥상에서 밑을 향해 70도 각도 정도로 내려다보고 대량학살을 단행했습니다. 40여명이 죽고 또 다른 40여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정교한 모략작전을 감히 누가 기획해 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도청 집단발포 괴담의 본질입니다.
9) 5월 21일 오후, 공수부대 5개 대대는 도청에서, 또 다른 5개 대대는 전남대에서 100대1정도의 숫자적 열세에 몰려 몰살당할 위기에 있었고, 이때에야 비로소 계엄사는 철수명령을 내려 포위망을 가까스로 뚫고 시 외곽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이 정도의 군사작전을 광주의 하층계급들이 주도했다고 생각할 사람 아마 없을 것입니다. 도망하다가 11공수여단장(최웅 준장)은 저격을 받고 지프차가 전복되어 운전수와 무전병의 호위를 받으면서 한밤중에 무등산 미군 방공포대에 피신하였습니다.
10) 북에서 광주 공작조에 교도소를 공격하라는 무전들이 날아왔습니다. 간첩수 170명을 포함해 2,700명의 수용인을 해방시켜 폭동의 동력으로 삼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야밤에 2~5차례에 걸쳐 공격을 하였지만 교도소는 당시 가장 강하다는 제3공수여단이 호를 파고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괴공작조는 얼마나 죽었겠습니까? 여기에서부터는 전문가의 직관이 응용돼야 할 장면입니다.
① 2017.8.29. 경향신문은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라며 5월 21일 당일 전투교육사령부는 실탄 127만9,701발을 공수부대에 지급했고, 공수부대는 이 중 484,484발을 실제 사용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많은 실탄이 사용될만한 상황은 교도소 방어 때 말고는 없습니다. 교도소를 방어하는 데 50만발에 가까운 실탄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② 북한에서는 등교 시에 확성기로 들려주는 구슬픈 노래가 있습니다. ‘무등산의 진달래’, 그 가사입니다.
“동강난 조국땅을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 무리죽음 당한 그들. 사랑하는 부모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 죽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
‘통일을 시키려고 광주에 와서 억세게 싸우다 떼죽음을 당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북한에 있다’는 내용입니다.
③ 도대체 몇 명이나 죽었을까요? 북한 자료를 뒤졌습니다. 북한 조선기록영화촬영소가 편집한 ‘군사파쑈도당을 반대하는 광주인민항쟁’ 내레이션에 475명이 떼죽음 당했다며 분노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광주의 분노] 86쪽에도 475명이 있고,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91쪽, [찢어진 깃폭]에서도 475명이 떼죽음(무리죽음) 당했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④ 광주에서 시체를 처리한 사립묘지 관리자는 그의 손을 거친 시체가 모두 594구였다고 증언했습니다. 5월 27일 새벽 시체를 가득 싣고 달리는 트럭을 여러 대 보았다는 증언이 전남대 5.18 연구소에 증언돼 있습니다. 당시 광주의 공식 사망자는 164명, 청주에서 2014.05.13.에 비닐 포장된 무연고 유골 430구가 발견되었습니다. 동일한 규격의 나무 판에 흰 비닐로 감은 후 군번 같은 숫자를 기록해 놓은 유골이 430구였습니다. “430+164=594”, 정확합니다. 한국에서 시체를 비닐로 감은 것은 오직 대량으로 부식하는 시체들을 감당해야 했던 광주에서만 있을 수 있는 포장 방법이었습니다. 메디컬 뉴스 등에는 2014년 충북 소재 화장터 4곳에서 화장판 무연고 유골은 오직 18구인 것으로 보도 되었고, 청주시는 법원의 명령에도 430구에 대한 화장 증명서를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조달청 나라장터에 입찰공고도 하지 않고 무명의 업체에 수의계약을 했습니다. 이 유골은 화장터로 간 것이 아니라 컨테이너 박스에 정돈되었습니다. 한구씩 불투명한 비닐봉지에 넣고 또 다시 일련번호를 쓴 후 컨테이너 박스에 설치된 철제 구조물에 정중히 정렬돼 있었습니다. 저는 이 컨테이너 박스가 2014.10.04. 아시안게임 폐막일에 북한 권력 3인방인 황병서, 최용해, 김양건이 함께 타고 왔던 김정은 전용기에 실려 갔을 것이라는 논리적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⑤ 600명 중 475명이라는 주력을 잃은 북 공작대는 5월 24일 낮에 도청을 버리고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목포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던 11공수는 5월 24일 오전 비행장으로 철수하라는 이상한 명령에 의해 철수했고, 광주-목포간 철수로는 오전 10시경부터 뚫려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125명의 군인조와 민간인부대 600여 명이 철수했을 것입니다. 475명 중 430을 뺀 나머지는 이삭일 것입니다. 그 중 12명은 신원불상자이고 2명은 5월 22일 오전 국제신문 기자 이양우가 창평에서 괴한들이 리어카에 하얀 찔레꽃을 감은 관 2개를 밀고 야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는 그 시체일 것이고, 개중에는 철수도중 죽었거나 북한에 가서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망월동 구묘에는 무연고자 묘가 100개 내외로 크게 조성돼 있습니다. 무연고자이면 화장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무연고자의 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존의 고정 간첩들도 광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11) 김일성이 아끼는 간첩 손성모의 모습이 찍힌 광주 현장 사진이 5개 커트나 됩니다. 그는 간첩으로 잡혀 복역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이 2000년에 사면시켜 북에 보내주었습니다. 2021.04.30. 탈북 1호 박사 안찬일은, “손성모가 5.18 작전을 광주 현장에서 실제로 지휘한 영웅으로 인정되어 북한 최고의 훈장인 ‘공화국 영웅’ 훈장과 ‘1급 국기 훈장’을 받고 광주 무용담을 연설하고 다닌다.”는 취지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사실 한 가지만 보아도 5.18의 주역이 누구인지 충분히 직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2) 북한 조선기록영화 촬영소가 1980년에 편집한 내용을 보면 교도소 공격 말고는 달리 생각해 볼 수 없는 숨 가쁜 작전 출동 장면들이 등장하고, 이는 광주 현장 사진에서도 확인됩니다. 다급하게 사용 가능한 총기의 약실 기능과 격발 기능을 점검한 후 트럭에 타고 있는 공격조에게 릴레이로 서서 총을 패스하는 조직적인 모습이 여러 장의 사진들에 담겨 있습니다. 광주에서는 당시 한국 기자들이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일반 사진을 보나 영화를 보나 당시 광주의 촬영주권은 북한에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남한 국민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훈련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13) 김일성은 황석영과 간첩 윤이상을 1989~1991 사이에 불렀습니다. 공수부대와 전두환을 괴물로 모략하는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했습니다. 이후 2007년 남한이 제작한 영화 [화려한 휴가]등을 위시한 모든 남한영화들 모두는 이를 모태로 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할 일이 없어서 남한의 민주화 시위를 소재 삼아 기록영화도 만들고, 픽션 영화를 만들어 해마다 북한 전역에 시청 시켰습니까? 이 대가로 황석영은 20만 달러를, 윤이상은 5층짜리 음악당과 저택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14) 북한은 매년 28개 도시 전체에서 5.18 기념행사를 거대하게 거행하고 있습니다.
15) 20만 명이 동원 됐다는 시위, 5월 21일까지의 작전을 지휘한 사람이 광주에 없습니다. 도청의 시간표를 보면 사태 파악이 명확해 질 것입니다. 도청은 5월 18일부터 21일 오후 5시까지 공수부대가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사태 첫 4일 동안 북괴 공작팀은 도청을 탈취하기 위해 20사단 수색중대 공격과 군 분교 습격 등 국제 용병급 이상에 해당하는 정교하고 박력 있는 작전을 수행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들을 수행한 사람이 광주에는 전혀 없습니다. 5월 21일 오후 5시부터 24일 정오경까지 4일 동안 전남 도청은 무장 괴한들이 점령하고 광주 사람은 신분을 확인한 후에야 유지급만 소수로 부도지사 방에 보내거나, 시체 운반 부역자들 몇 사람들만 허용하였습니다. 도청을 장악한 무장 괴한들은 무전기를 들고, 북한식으로 총을 거꾸로 메고, 특이한 북한식 제식 동작을 하고, 지휘 체계가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광주 시민들 중에 지휘자가 없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요? 광주의 내로라하는 운동권은 모두 사전에 도망갔거나 구속돼 있었습니다. 도청에 처음 들어간 사람들은 운동권도, 대학 학생들도 아닌 서로 낯선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왜 5월 25일에야 도청에 들어 왔을까요? 24일까지 도청에 들어가려고 했다가 위엄 있는 사람들이 거부해서 들어갈 수 없다고 증언들을 하였습니다. 25일부터 도청에 하나씩 들어온 사람들은 수습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과 간부들이 즉시 임명되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증언집에서 5월 23일까지 각자도생으로 여기저기 숨어 있었고, 무기 탈취는 광주인들이 한 것이 아니라고 증언했습니다. 5월 25일 모여들어 갑론을박 말다툼만 했던 사람들에도 지휘자가 있는데, 그 어마어마한 작전들을 지휘한 사람이 광주에는 없습니다. 5월 21일부터 5월 24일까지 도청을 점령한 무장 괴한들을 지휘한 지휘자가 광주에는 없습니다. 세상에 지휘자 없는 단체 행동이 여기 말고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5월 25일 처음 도청에 들어가 수습위원장이 된 김종배가 5.18 항쟁 총 사령관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미국의 평가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과 미CIA 역시 5.18을 북한 소행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1985년 미 헤리티지 재단 연구소가 광주에 와서 현장조사를 하였습니다. 계엄군은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허가돼 있는 자위권을 행사하지 않고, 극도의 자제력으로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했고, 유언비어가 광주시민을 분노시켰으며, 사망자수도 100여명에 불과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미국은 2020.5.11. 비밀 해제된 CIA문서 122건 520쪽을 한국정부에 이관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미 대사관 홈페이지에 수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정부는 이관된 문서가 43건 140쪽 뿐이라며 국민을 속였습니다. 이 자료의 237쪽, 291, 288, 324, 310, 287, 233, 311, 234쪽에는 5.18은 북한이 주도했고, 핵심세력이 550명, 황당한 유언비어가 집단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게 했으며, 극단주의자들이 시민을 데려다 인민재판을 했고, 즉결처분을 했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실제로 현장사진에는 4명의 청년이 도청 안으로 어깨가 꺾여 끌려가는 사진 4컷이 있습니다. 광주 폭도들이 광주시를 파괴할 수 있는 TNT폭탄을 조립해 놓았는데, 계엄군이 생명을 걸어야하는 위험한 장소에 몰래 기술자를 들여보내 조립된 폭탄을 해체함으로써 광주시를 안전하게 보호했고, 광주시를 재탈환 할 때도 굉장히 지혜로운 발상으로 작전을 수행해 피해를 미미한 수준으로 줄였는데, 이는 매우 칭찬받아야 할 작전이었다고 극찬하였습니다. 이런 계엄군을 어째서 학살집단이고 강간집단인 것으로 몰아가는 것인지,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6. 5월단체와 법관들이 결탁하여 벌이는 기상천외한 날치기 탄압수법
1) 5.18의 주역이 북한 특공조라는 결론은 남북한 문헌들만을 가지고 2014년 이전에 도출돼 있었습니다.결과가 이러하다면 광주 현장사진 속 인물들도 북한 인물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5.18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재미교포 필명 ‘노숙자담요(노담)’가 나타났습니다. 이 정보기관에서 안면인식 업무에 종사하던 분들 8명이 중국의 요청으로 중국의 안면인식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중이라며 3년 동안 시신경파괴를 경계해가면서 광주 현장사진 속 얼굴 661개를 안면인식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를 이용해 북한인물DB에서 검색해 냈습니다. 컴퓨터에 문자로 검색어를 입력하면 문자인식 프로그램에 의해 컴퓨터가 원하는 자료를 찾아다 주듯이, 엄지손가락 지문을 검색시키면, 지문인식 프로그램이 수천만개 지문이 입력돼 있는 지문DB에서 같은 지문을 찾아내 주듯이, 얼굴도 사진으로 검색시키면 안면인식 프로그램이 수천만 얼굴이 저장된 얼굴DB에서 같은 얼굴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2세, 두살 때의 아기 사진을 검색시켜 34세 된 얼굴을 찾아냈고, 25년 전 탈옥수를 CCTV가 찾아냈으며, 경희대학 학생도 구내식당 결제를 얼굴로 한다는 뉴스들이 있습니다. 보안업체 에스원은 칠흑 밤에 마스크를 써도 안면인식 프로그램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국과수나 검사나 판사들은 이러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컴퓨터가 찾아낸 DB속 얼굴과 검색용 얼굴은 육안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컴퓨터가 찾아낸 얼굴이 비슷해 보이는 것은 두 얼굴이 동일인이라는 뜻입니다. 검색에 사용되는 Logic은 얼굴의 모든 변곡점과 점, 사마귀, 흉터 등의 변곡점들에 많은 점을 찍는 것이며 이 임무는 안면인식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수행합니다. 따라서 얼굴인식에는 해상도나 조도 같은 건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인터넷에 검색어 ‘안면인식’을 치시면 수많은 특징부위에 점을 찍은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배우고 터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반면 학습을 귀찮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logic을 설명해주어도 미신 정도로 치부하고 고정관념을 가지고 자의적 판결을 마구 내립니다. 미칠 노릇입니다.
2) 이런 어수룩한 공간을 틈타서 5.18기념재단이 광주 및 전남주민 16명에 접근하여 “현장사진 속 이 얼굴이 당신 얼굴이라 주장하라”며 소송에 내보냈습니다.
① 고소인들의 진술조서에 그렇게 기재돼 있고, 80대 및 90대 노파는 눈도 귀도 어둡고 소통자체가 안되는데도 “인터넷에 떠 있는 이 얼굴이 내 얼굴이다”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5.18기념재단이 전략적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② 당시 18세로 고1에 중퇴해 다방 종업원으로 일하던 박철은 흔들려서 인식 자체가 안되는 사진을 내놓고 “장발이 같지 않느냐, 내가 내 얼굴 모르겠느냐”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4명의 단독판사 중 세 번째로 재판을 관장했던 김경진 판사는 2018.8.16.공판정에서 검사에게 두 가지를 촉구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얼굴이 어째서 사진 속 얼굴과 같은 얼굴이라는 근거를 제출할 것>, <피고인은 현장사진 속 얼굴들이 피해자의 얼굴이 아니라 북한 얼굴이라는 근거를 냈고, 피해자들은 아무 근거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검찰은 어째서 공소장에서 피해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주장한 것인지 논리적 근거를 제출할 것> 이 김경진 판사가 재판을 종결했다면 저는 2년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매우 중대한 이벤트가 있습니다. 인권유린의 현장입니다. 검사는 광주 현장 속 얼굴과 25년 후의 얼굴이 동일인인지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국과수 감정관 문기웅은 “∘해상도와 계조가 낮아 촬영시간이 30년 된 사진은 안면인식용도로 사용될 수 없다, ∘몸 전체의 사진이 있어야 동일인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감정서를 보냈습니다. 2016년 6월 감정서, 코미디였습니다. 이에 검사는 “30년 전 사진은 해상도가 낮아 이것으로는 동일인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이 두 사진을 놓고 비교분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2심 재판부는 이렇게 판결하였습니다. ㉠ 피고인은 육안으로 보이는 외관상의 유사성만 제시했을 뿐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지 못했다. ㉡ 국과수는 얼굴동일성 판독에 관하여 권위를 가진 기관이다. 국과수는 1980년 광주 현장사진은 동일인 여부를 판단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고 했다. ㉢ 그래서 피고인의 판독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 얼굴인식은 컴퓨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하는 것이다. 재판부가 육안으로 판단해보니 노담의 분석은 신뢰하기 어렵다.
1980년의 광주 현장사진을 비교분석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는 사용 할 수 없는 30년 전의 현장얼굴이 어째서 광주시민들의 얼굴이라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까? 피고인은 사용하면 안되고, 광주인은 사용해도 된다는 것은 비대칭적 신분차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과수-검사-판사들이 벌인 화려한 코미디 행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3) 목포의 90대 노파 김진순은 아들 용충을 잃었습니다. 1980.5.21.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망했습니다. 김진순이 아들의 사망사실을 통보받은 날은 1980.6.30.입니다. 그런데 5.18기념재단은 그녀가 5월 23일 도청에서 아들의 관을 잡고 있었다고 고소장을 써 주었습니다. 이 노파에도 천만 원을 배상했습니다.
4) 박남선은 현장사진 속 인물이 자기인데 지만원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창작해 합성시켜놓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일보사 사진DB 몇 페이지에 있다는 사실을 누차 어필했지만 재판부는 무시했습니다. 박남선에게도 천만 원을 배상했습니다.
5) 그런데도 판사들은 “피해자들의 위 모든 주장은 구체적이고 자세하며 모순없는 진실한 사실”이라는 판결서를 썼습니다. 이런 식으로 3억8천을 배상한 것입니다.
6) 판결문이 요지경입니다. “5.18은 사법적으로 역사적으로 자손만대에 걸쳐 숭배 받아야 할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이미 평가가 종결되었다. 따라서 광주에는 북한인들이 올 수 없었다. 광주현장 사진 속 모든 인물은 광주시민일 수밖에 없다. 광주시민이 사진 속 얼굴을 자기 얼굴이라고 주장하면 진실한 사실로 보아야 한다. 피고인이 현장사진 속 얼굴을 당시 40세였던 문응조라고 지정한 것은 곧 광주의 18세 다방종업원 박철을 특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박철의 고귀한 명예를 훼손한 것이다. 따라서 피고는 박철에게 금원 1천만 원을 배상해야한다”억울해서 속병 들어 죽으라는 법관들의 살인행위가 아닌지, 모든 국민 앞에서 여쭙고 싶습니다.
<결론>
저는 84세 초고령의 국가유공자입니다. 저항능력이 없는 저에게 이런 집단적 린치를 가하고 있는 5월단체, 광주법원, 좌익판사들의 횡포로부터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저를 재판한 이흥구 대법관은 국보법 위반자로 1심에서 3년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2024. 4. 지만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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